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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이 뉴스를보니 여간 반가운게 최근하나가 올라 왔군요 .
천하절경…살아 있는 산수화 '중국 구이린'(계림)
중국 절경하면 많은 사람들이 장자제(장가계)를 떠올린다. 하지만 중국에선 예로부터 시인이나 화가들로부터 글과 그림의 주요 소재가 되어 왔던 곳은 구이린(계림)이다.
구이린의 산수는 천하제일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수만년 동안 석회암이 비바람에 씻겨 만들어진 기암괴석과 그 사이로 양삭까지 흐르는 길이 84km의 리강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병풍이 실사화 되어있는 듯하다.
연중 내내 기온도 영상을 유지하기 때문에 겨울에 떠나도 따뜻해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효도여행으로도 추천되는 곳이다.
구이린의 풍경을 가장 만끽하기 좋은 방법이자 필수 코스로 꼽히는 것이 바로 리강유람이다. 산속 깊숙하게 돌아 흐르며 진귀한 유형을 하고 있는 봉우리들이 많이 있어 '현세 속의 선경(仙景)'이라고 불리는 구이린을 나룻배를 타고 유유히 둘러보며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이외에도 구이린에서 놓쳐선 안 되는 중요 포인트들로는 화려한 비단을 겹겹이 쌓아 놓은 것과 같다하여 붙여진 첩채산, 각양각색 기이한 종유석의 세계 관암동굴, 구이린 시내 전경을 볼 수 복파산을 들 수 있다.
중국 각 지역 민족의 생활 풍습과 아름다운 수공예를 볼 수 있는 세외도원, 약 1000년의 세월을 살아온 용호공원 대용수, 국가 1급 종합 공원으로 산과 동굴, 동물원 및 테마공원으로 구성된 구이린에서 가장 큰 칠성공원도 꼭 둘러봐야할 곳들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
청나라 태종(太宗 :: 홍타이지皇太極)이 1636년 12월 2일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출병하여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임진왜란 같이 시간을 끄는 전투가 아니라, 북방민족 특유의 기동성을 발휘해 빠른 속도로 백마산성을 피해 한성으로 접근해온 청나라 군대에 의해 불과 두 달만에 전쟁은 끝나고 조선은 통한의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고 청나라의 신하국이 되어야했다.
남한산성으로 도주했던 인조는 1637년 1월 28일 용골대와 마부대의 아홉 가지 항복 조건을 받아들여 1월 30일 세자 등 500여명의 호행(扈行)과 함께 남한산성을 나가 삼전도에 만들어진 수항단(受降壇)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하였다.
선조 때에는 '자식' 을 칭하고, 광해군 때는 초피(貂皮)를 바치곤 했던 여진족에게 이젠 무릎을 꿇어야 했던 것이다.
⑪ 조선은 청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폐를 보낸다.
황금 100냥, 백은 1000냥, 수우각(물소뿔)200쌍, 표피 100장, 녹피 100장, 차 1000포, 수달피 400장,
청서피 300장, 후추 10두, 요도 26구, 소목 200근, 대지 1000권, 소지 1500권, 오조용석 4영, 각약 화석 40영,
백저포 200필, 각색 면주 2000필, 각색 세마포 400필, 각색세포 1만 필, 포 400필, 쌀 1만 포, 순도 20구
청나라 조공중에 물소뿔이 나옵니다. 한반도에 물소가 자랄수있는곳이 현재는 전무 합니다.
예전에 살았다가 멸종한것이 아니라 . 예초부터 살지않았다는것입니다.
한반도의 역사 자료에는 후백제 견휜의 활동무대가 현 전주지역을 말합니다.
이 한반도에서 물소가 자라지않는데 어디가서 물소뿔을 구했서 조공을 받쳤나요 ?
조공이란 자기나라내의 특산품 을 받치는것이지 . 남극에 팽퀸을 받치는거랑 같은 이치지요..
[이용남의 세계여행] 이강에서 노닐고 있는 물소들
기사입력 2010-09-19 08:4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3&aid=0003443876
【관암(중국)=뉴시스】이용남 작가기자 =중국 계림을 관통하는 이강은 그 아름다움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한폭의 동양화,묵화를 연상시키는 풍경구이다.
특히 양삭과 관암풍경구는 그 경치가 뛰어나다.
그 가운데 관암동굴은 그 규모와 아름다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ynlee40@newsis.com
한반도 내의 전주와 중국내의 전주 와의 교류를 한모양입니다.
물론 이 둘은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들입니다. 식민사학을 배운 한국학자 들 그리고 역사를 모조리 옴기는 작업에 일조한
현중국관리들 은 전혀모르고 알앗다고 한들 문화혁명시기에 아마 그런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숙청을 당했다고 봐야 할것입니다.
http://www.jj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55884
전주일보
한국·중국 '전주' 역사 연원 베일벗다전주시, '한국 전주와 중국 전주' 발간… '한국 먼저 사용' 사실 확인
2011.06.21 김주형 | jhki88@hanmail.net
전주시는 동일한 지명인 중국 전주와의 역사적 연관성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현지조사를 통해 '한국 전주와 중국 전주'를 발간했다.
이를 위해 시는 연구팀을 구성하고 전주역사박물관에 의뢰해 지난 2010년 12월부터 2010년 2월까지 3개월간의 문헌 및 현지조사를 통해 이번에 책자를 발간했다고 20일 밝혔다.
특히 이번 조사연구는 전주시와 중국 전주현은 지명이 같고, 완산?금산사?기린봉 등 동일한 명칭의 산과 사찰 등이 자리하고 있음으로 해서 역사적 관련성에 대한 조사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향후 양국 공동학술조사의 기초자료로 활용할 뿐만 아니라 상호 우호 협력의 학술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시작됐다
이번 조사에는 조법종(우석대학교 교수), 권덕영(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 박현규(순천향대학교 교수), 이동희(전주역사박물관 관장)이 참여해 한국 전주와 중국 전주의 동일 지명 연원, 고대 한·중간의 인적왕래와 관련 유적, 한국 전주와 중국 전주의 연관성 등의 연구 성과물을 담아냈다.
중국 전주현은 광서성에 속한 장족 자치구로 계림시 위에 자리하고 있다. 현지 조사결과 한국 전주는 통일신라 757년 한자식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개명된 것에 반해 중국 전주는 937년 또는 939년에 무량수불로 받들어지던 전진화상의 이름에서 ‘전’자를 따와 붙여진 지명으로 나타났다.
완산이라는 지명도 우리보다 훨씬 뒤인 15세기 이후에 붙여진 것이며 김제 금산사는 559년에 창건되었는데 중국 금산사는 16, 17세기에 창건된 사찰로 조사되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한국 전주와 중국 전주의 동일한 지명은 이름만 같을 뿐 역사적 연관성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연구자들은 한국 전주와 중국 전주가 지명만 같을 뿐 역사적으로 무관하다고 단정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고 밝혔다.
우선 중국 전주의 지명 탄생이 후백제가 몰락(936년)한 직후인 937년 또는 939년이라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다. 또한 연원은 다르게 나타났지만 완산, 금산사, 기린봉의 지명이 같다는 것도 그렇다. 이번 조사에서 새롭게 밝혀진 것이지만 중국 완산의 옛 지명이 발우산(鉢盂山)으로, 한국 전주 승암산 자락의 발산(鉢山)과 같은 의미이다. 전주현이 위치한 남중국은 나말여초 한중간의 교류가 활발했던 지역이다.
이런 사실들을 놓고 볼 때, 기록으로 전하지 않는 아직 찾지 못한 숨겨진 역사가 있을 수 있다는 개연성이 있다. 따라서 두 지역의 역사적 연관성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전주와 중국 전주의 생활민속, 교통지리 등을 비교 검토하는 한중 공동 학술심포지움을 개최하여 두 지역의 연관성을 찾아보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한편 이번 조사에서 한국의 전주 지명이 중국의 전주 지명보다 먼저 등장하였다는 것은 매우 주목되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지명들이 중국에서 가져다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전주의 경우는 중국의 것을 가져다 쓴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확인하였기 때문에 한국 전주사람들에게 큰 자부심일 뿐만 아니라, 한국과 중국의 지명을 비교 연구하는데 있어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임민영 문화경제국장은 "이번 조사에서 한국과 중국 전주의 역사적 연관성은 찾아지지 않았지만, 동일한 지명을 가지고 있고 또 일찍이 고려 충선왕(1275~1325)이 중국 전주에 사절을 보내 6종의 보물을 하사하는 등의 교류가 있었다는 점에서 상호 우호 교류를 검토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면서 "중국 전주의 상위시인 계림시는 중국을 대표하는 관광지이기 때문에 한국의 대표적 관광지인 전주시와의 관광교류를 계획중이다"고 밝혔다.
/김주형 기자
[ 완산, 금산사, 기린봉의 지명이 같다는 것도 그렇다. 이번 조사에서 새롭게 밝혀진 것이지만 중국 완산의 옛 지명이 발우산(鉢盂山)으로, 한국 전주 승암산 자락의 발산(鉢山)과 같은 의미이다]
한지역지명이 같았도 의아하게 생각하고 연구를 해야 하는게 학자죠 ?
중국의 한지역의 3개의 지명이 한반도의 전주일대의 지명이 3개 나 같다는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전 이걸보면 바로 생각나는게 쌍둥이다 라고 뭔저 머리에서 뇌리를 칠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중국의 옛지명인 완산도 발우산 에서 한국의 전주 승암산 의 옛지명 이름이 발산 과
같다는데 유전자 DNA 가 일치할정도 아닌가요 ?
위에 나오는 사진에 물소가 노니는 사진을 보면 청나라에 조공물품중에 조선이 청에받칠
물소뿔(각궁의재료) 이 퍼즐이 맞아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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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대륙에서 왜 한반도로 옮겼으며 언제옮겼을까 ?
왜 : 현재 합리적인 추론은 우리가 아는 한반도역사에서 18세기는 서강열강들이
이 한반도에 뻔질나게 싸움을 했다는 역사적 기록 그리고 그 어려운 시기에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 짰다는거 , 그런 어수선한 난리에
민중들이 들고일어났다는 (신해혁명 [중국역사]) (동학혁명[ 한국역사]) 이 두 큰난이
동시에 일어나며 일어난 이유와 배경이 너무도 같다는거 ....
영국이 중국대륙을 먹기위한 계략에 일본을 끌어들이자 여기에 질세라
각서강열강들이 전부 숟가락 ,포크를 들고 설치는데
때 : 1860년대
Title: Winners - Sino-Japanese War.
Date: 1894.
Artist: Mizuno Toshikata 일본인 작가 그당시 에 일본에서는 중국을 시노 라고 사용을 하였습니다.
이 SINO 어원연구 할필요성이 충분할것입니다. 서구에서는 지나 ,일본에서는 시노 아마도 신라 의 발음이 그렇게 변천되지
않았나 생각함 . 저기 제목을 청나라즉 영어로 Qing 혹은 Choung 이라 하던지 해야 하는데 왜 청나라라는 표시를 전서구들이
하지 않을까 왜 유독우리만 청나라로 사용하는지 이상하지 않을까여 .. 물론 근데에 와서 중국은 China 로 서구들이 그렇게 부르고있지요 ...
대륙조선의국기
머리에 터번을 한중국인 ?
대륙조선의 제후국가병사
1894 년 만평 서강 열강들이 대륙조선을 나눠먹기
대륙조선에서 한반도로이동하여 대륙조선 축소작업
대한제국을 세로 만드는작업
1901년 삽화
중국대륙을 재단을 하는데 엄청난 살육이 진행되었습니다.
대륙에서 한반도로 이주한 조선인 들은 일제가
중국대륙에 비해 탄압이 약한듯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사람들이 평균2~3년
그러나 중국형무소에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은 10년이상 아니면 사형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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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이동 통계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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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도에 570만명에서 1908년 약 2년만에 갑자기 인구증가 1300여만명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
첫댓글 전라북도 전주에 대한 고찰은 여기까지 합니다. 더이상 해봤자 중국전주와 한국전주는 복사본 이라는 정황만 도출되니까요 ?
잘 봣슴니다..구글 검색해보니 중국의 계림은 화산지대군요..
경주의 토함산(화산활동) 과 매치가 잘 되는 군요..
지금경주의 토함산은 화산산이 아니죠..
나중에 시간나면 우리의 아름다운 금강산 에 대해 조사해볼까합니다... 전부 엉터리더군요 ....
금강산찾아가자 일만이천봉이 과연 한반도에 그렇게 많은 봉이 있는지 없는지를요 .... 금강산주위에 1만2천봉 이 있을려면 아마도 한반도 전체가 금강산과 연결된 산봉우리가 있으야 합니다.
전 이런것을 취미아닙니다.. 나중에 먹고살려고 책을 내기위해 그런것은 더더욱아닙니다. 국제정세를 연구하고 조사하다보니 이런 변화가 있다는것을 우리민족에게 알려주고 일깨워주고 모르면 같이연구하고자 하는게 목적이었는데...
모두가 먹고사는문제가 젤1우선이라 여기에 뇌가 전부 닫혀있고 이해하기가 힘들고 팩트 위주로 설명할려니 소통이 불가하더군요 .. 나온뉴스를 가지고 할려니 추론이 실제와 오차가 너무크며, 비밀소스찾으면 일반인들은 전혀이해하지않는다는것에 대한 즉 근본뿌리를 모르는 상태에서 아무리 애기해주어도 소통이 안되더군요 .그래서 국제정세를 알기위해서는
국제정세의 뿌리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기초가 안된상황에서 정세를 말해주어도 뜬구름 같은 애기 이거나 음모론에 휘말릴정도로 치부해버리더군요 .
근현대사 를 알면 국제정치,국제경제 가 윤곽이 들어납니다.. 역사란 단절된게 아니고 지금도 과거의 연장선이고 현재진행형이며 , 미래를 볼수있는 시야가 열린다는 취지로 역사를 내부터 새로 공부해보자는 것입니다.
@은하철도99콘 국제정세가 현진행 상황에서 세월호 는 별개의 사건사고 가 아닙니다... 합리적인 추론은 아마도 북미상에서
북에게 불리한여론형성과정에서 아마도 실패한 작업이 아닌가 추론을 해보았습니다... 이것말고 해석이 제머리에서는 도저히 다른 추론이 안나오더군요 . 물론 이추론은 사고후 보름지나 여기에 관련된 뉴스를 종합해본 결과에 의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어느정도 아니 그렇게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
조선의 활은 물소 뿔로 만든 것이 아니오?
"청나라 조공중에 물소뿔이 나옵니다.
한반도에 물소가 자랄수있는곳이 현재는 전무 합니다.
예전에 살았다가 멸종한것이 아니라 . 예초부터 살지않았다는것입니다."
한반도에는 물소가 없다..
그런데 조선이 청나라에 물소뿔을 조공했다.
그러므로 조선은 물소가 살수있는 계림이다?.
참 답답하네요.
물소뿔이 문제가 아니라..
조선이 청나라에 조공한건 사실 맞나요?
조선이 대륙이면 청나라는 한반도 였나요?
한반도가 일제시대에 지명조작이 있었다면..
대륙 지명들도 조작 되었을수 있지 않나요?
역사흐름에 총체적인 맥을 집어야지요.
근본이 불분명한 껀들을 마치..
검증된 사실인냥 대하다보면 결국..
식민사관이 옳소..
됨.
현지도상 고지역이 청의지역입니다. 스스로 공부좀하시고 오세요 학교에서 배운게 지식이 다가 아닙니다.. 생각의 폭을 넓혀보시길 바랍니다..... 명의 위치는 사천성을 근거지로 하고있습니다.
중국25사와 중국고지명대사전을 비교해서보시면 그렇게 강역이 나옵니다.
1906년도에 570만명에서 1908년 약 2년만에 갑자기 인구증가 1300여만명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
<= 요거 해석 좀..
당시 서세가 이미 조선반도를 장악한 상태죠.
서세 열강들에 대사관 공사관들이 난립했고..
천주교 선교사들이 주축이 되어서 성당짖고..
학교. 병원. 등등 세우고 근대화? 시작합니다.
그당시..
김제평야등 대규모 간척지들을 수작업으로..
개발하려니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을 것이고..
당근 동남아에서 대규모로 이주 시켜왔겠고..
당시 인구통계에 오류도 한목 했을거고 요.
@역사나무 1910년경에 동남아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등 한반도 인구보다 배이상왔으면 지금 인종분포도가
어떻게 나와야 함 ? 그럼 다죽였으면 인구가 감소 현상이 와야 하는데 그 한반도 토종보다 많은인구 어디로 감 ?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고 ., 어디까지 거짓말을 하실련지 궁금하군요 ....... 이치에맞게 거짓주장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인구이동 이기에 얼마만큼 이동했는지 근거자료가 매우중요 했을터 일본관료들이 이 땅에 인구를 몇십년 아니 일본인 계획에 평생 식민사업이기에 철저하게 조사를 했다고 봅니다.... 엉터리 주먹구구식으로 조사를 왜 했서 왜 기록하나요 ? 그냥 몇명 이라고 하지.
@은하철도99콘
그때 이주해온 사람들에 후손들이..
지금에 와서 나 이주민들 후손이요 할까요?
팔 다리 뭉툭하게 아주 짧은 사람들..
왠지 쪽발이를 닯은듯한 외모 이거나..
IQ가 현저하게 떨어지는 주변인들 없나요?
내 주변엔 엄청 많던데.. ㅎㅎ.
당시에 이주 해왔던 족속이라도..
이미 신분세탁은 완료 했을거고..
토종들과 섞어찌게 된지도 오래라..
구분하기 힘들 뿐더러..
토종들은..
그노메 성질머리를 못이겨서..
외세에 항거 하다가 멸문지화 되거나..
치도곤을 맞고 반미치광이로 전락하거나..
이런꼴 피해 두메산골로 숨어들어 갔거나..
현재는 오히려..
토종이 더 귀한 처지인걸..
아직도 모르시니..
ㅉㅉ..
조선이..
청나라 명나라에 조공을 쳐 받혀가며..
속국으로써 만족하고 살아왔다면..
그깟 땅덩어리 좀 큰 대륙이..
조선땅이라 한들 무슨소용..
ㅎㅎ..
한반도 조선..
이땅에 발을딛고 눈은 세계를 보라..
중원대륙을 넘어 세상을 운영하던 한반도..
그렇게 위대하고 찮란했던 선조들에 유산을..
한낫 땅덩어리 큰걸로 엿바꿔먹고싶나?
ㅎㅎ..
비논리적으로 반박이 뭐에요? 정론직필회원분이... 문빠들이 하는행태를 보이시면 ? 논리적인 반박을 하고싶으면 고증된 역사자료 를 제시하시고 그리고 이땅에 사료가 아닌 보편타당한 외국근거 출처 라도 되시고 하심 제가 그 논리에 답하겠습니다.. 여기 기사 그냥 올리면 해우소 아시죠 >> 저도 여기온지 7년이 넘었습니다. 저도 예외없이 출처불분명한것은 해우소 입니다. 물론 올리지도 않읍니다.,
그랬던..
직필님이 안보이시는 관계로..
심사가 뒤틀려서 막나가고 있으니..
이해를 하시던가 말던가 알아서 하시고요.
논리 보다는 통찰력 이라고..
알랑가 몰것네요. ㅎㅎ.
이미 500년전에 세계일주를 했고 신라무덤에서 아랍물건들이 나왔는데 외 수입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지 답답하네요 물소능 뿔크기가 아주커서 조선초에도 이미 수입해서 각종 공예품으로 많이 썻어요. 인구는 조선말 개혁을 하면서 각종 장부를 작성하면서 누락된 호구도 만들었구요
잘 보았습니다
역사는..
발로 뛰면서 현장에 실물을 보고 들으면서..
당시의 맥을 집어나가는게 가장 정확한거죠.
한반도 서.남해안을 돌면서..
각지의 간척사업이 언제 어떻게 진행됬는지..
한번쯤 알아보고나 이주설을 문제 삼으시지..
구한말에 들어서 갑자기..
서.남해안의 오지 해안가 들에서..
소규모 간척사업들이 성행 했다는건..
대규모 이주민들이 오지 곳곳에 정착하면서..
동남아식 농지개발도 따라들어온 것일거고..
당시 대륙이나 동남아가..
서세의 식민지쟁탈전으로 몸살을 알았으니..
전란을 피해서 난민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후 일제의 쌀 착취정책에 일환으로..
조직적인 간척사업이 진행될땐..
조직적인 이민정책도 있었슴.
고증된 역사자료?
그게 뭡니까?
알고시포요.
혹시 개족발 개들에게 배운 병도류는 아니겠죠?
아~
정말 궁금하다.
고증된?
누가 했는지?
지들이 얼마나 안다고..
그런 단어를 쓰는지..
그런데요?
그들이 고증했다고 하면
100% 맞는 겁니까?
그것도 궁금한데요..
4~5년전 정론방 회원분들이 그립군요,,,,, 그때는 의욕이 넘치고 활기찼었는데 ,,,, 다들 어디가셨는지 소식이 궁금하군요 ....
정론주인장 병상에 계시다면 빠른 쾌유를 빕니다.
재밌는 그림 하나.
주제에 맞을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