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전상우옹이 시즈오까 순사부장을 해치우지 못하고 만주로 간 뒤로 600년을 살아온
합천으로 가지 못하고 1943년 자녀교육을 위해 대구에 내려와 정착을 했다.
각하는 대구시내 중심부의 희도(喜道)초등학교(현 대구 종로초등학교)4학년에 편입학하였다.
합천이 각하를 낳아준 고향이라면 대구는 그를 인격적으로 키워 후일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될
자질을 가꾸어준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대구에 정착한 각하는 1947년 3월25일 희도 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희도 초등학교는 당시
전국에 몇안되는 (미션)계통의 사립학교였다. 이 학교에서는 해방직전까지 우리말을 썼을
정도로 선생님과 학생들 사이에 남이 모르는 강렬한 민족의식이 전류처럼 흐르고 있었다.
全소년의 학구열은 초등학교 때부터 남다른 바가 있었다. 합천에서 한학을 배우던 어린
시절에도 그는 매사에 사려가 깊고 총명했다. 당시 한문을 가르쳤던 숙부종운(從云)옹은
“마주앉아 애기 해보면 어린애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어른과 담론 하는 것 같았고
예의범절이 빼어났다“고 회고하고 있다.
全소년은 학교에 다니면서 깨끗한 종이가 보이기만하면 깨알같이 쓰면서 예습복습을 철저히
했다. 밤중에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호롱불 밑에서 책을 읽었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보면
코밑이 시커멓게 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이때 각하가 살던 집은 비산동 288의16번지로
지금도 그때모습으로 보존되어있다.
각하의 양친이 모두 범절 있고 다정한 분이어서 아들친구들의 방문을 반겼으며, 많찮은
반찬에 밥을 정성껏 대접했다. 희도 초등학교의 졸업생모임인(喜友會)회장인, 김주태씨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 댁에는 형제가 여럿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큰소리 내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을 만큼 현제간의 우애가 두터웠습니다. 자당께서는 밤, 사과 등
과일을 심심치 않게 주셔서 잘 놀곤 했습니다. 나는 커서 목사나 문학가가 되겠다고 했더니
全소년은 나는 장군이 되겠다고 하더군요. 성적은 한 학급58명 중에서 全소년과 나, 그리고
또 한 학생 셋이서 1.2.3.등을 놓고 겨뤘지요.
대구시 도심지(중구 수동 101번지)에 있던 희도 초등학교는 6.25이후 대구 종로 초등학교에
학적부를 넘겨주고 문을 닫았다. 대구 희도 초등학교2회 졸업생인 각하의 학적부는
종로초등학교에 그대로 보전되어 있다. (판단력. 통솔력. 사고력이 뛰어나고 학구적인
생활태도 로 보아 지도만 잘하면 장래에 대성할 인물)이라고 아직도 또렷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각하의 6학년 담임이었던 최재명(崔載明)씨 부산 남구 광안2동 187번지)가 학적부
담임 소견란에 적은 全소년에 대한 평가였다.
그는 어떤 과목에서나 질문이 많았다. 무슨 문제건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이해가 될 때까지
손을 들어 질문을 하는 바람에 선생님도 그 끈질긴 학구열에 감탄했다고 한다.
각하는 이때 학교의 육상선수였다. 경북도내 초등학교대항 체육대회에 축구, 씨름, 육상 등
3개 종목에 학교 대표로 출전하였다. 그는 희도 초등학교를 우승으로 이끄는데 수훈을 세운
선수였다. 초등학교시절 全소년은 과묵한편이었다. 그러나 성격이 원만하고 책임감이
강하였다. 무슨 일을 시켜도 빈틈없이 처리하는 성격이었다. 당시 全소년은 반장이었으며
청소 때면 반장이 앞장서 바지를 걷고 걸레질을 하였다. 이때부터 솔선수범으로 급우들을
따라오게 하는 지도력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