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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1호 : 안동태사묘삼공신유물(安東太師廟三功臣遺物) 1967.06.23 지정
고려 태조 왕건이 안동에서 후백제의 견훤을 토벌할 때, 활약한 공로로 대광태사란 벼슬을 받은 권행, 김선평, 장정필 3인의 위패가 있는 사당인 태사묘의 유물들이다. 이 사당은 조선 중종 37년(1542)에 세워진 것으로 한국전쟁 때 불에 타 1958년 다시 복원하였다. 현재 총 12종 22점에 달하는 유물들을 보물각에 보관하고 있다.
유물에는 붉은 칠을 한 1개의 잔과, 꽃무늬를 수 놓은 비단 1점, 수는 없으나 꽃무늬 장식이 있는 비단 6점, 검은색 관모 1개, 목이 긴 가죽신발 1켤레, 비단 천으로 만든 부채 1개, 구리로 만든 육면체 도장 2개, 놋쇠로 만든 뚜껑이 달린 합 1개, 옥으로 만든 관자 1개, 손상이 심한 허리띠 4개, 공민왕의 친필로 보이는 교지 1개, 동으로 만든 숟가락 1개와 젓가락 3개 등이 있다.
이 유물들은 3공신의 것이라고는 하지만 누구의 것인지 분별하기 힘들며, 또한 공민왕의 친필로 쓰여진 교지와 숟가락 등은 고려 후기의 것으로 고려 초기의 것과 상당수 섞여 있다. 이 사당의 유물들은 고려시대 관제와 복식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유물은 제451-1호,--12호 까지 구분지정 되어 있다.)
제452호 : 청자귀형수주(靑磁龜形水注)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시대 만들어진 청자 주전자로 연꽃 위에 앉아 있는 거북 모양이며, 높이 17.2㎝, 길이 20.2㎝의 크기이다.
얼굴은 매우 정교하고 실감나게 표현하였으며, 부분적으로 금을 칠하였다. 등 위에 붙어 있는 입는 오므린 연잎모양이고, 손잡이는 두 가닥의 연줄기가 꼬인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등 위에 음각된 거북등 무늬 안에는 ‘王’자를 하나씩 넣었다. 손잡이에는 흰색 점과 검은색 점을 드문드문 찍어서 장식하고, 연꽃 받침의 꽃잎 사이에는 흰색 점을 간간이 찍었다. 유약은 비취색으로 두꺼운 편이다. 대체로 전체적인 비례가 적당히 균형잡혀 있어, 동·식물이나 인물 형태를 본뜬 상형청자가 유행하던 12세기 전반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제453호 : 녹유탁잔(綠釉托盞) 국립중앙박물관
수비(水飛)가 잘된 회색 태토 위에 녹유(綠釉)를 씌운 것으로서 삼국시대의 탁잔(托盞)양식, 특히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은제탁잔(銀製托盞)과 그 기제(器制) 및 양식이 같다.
잔대(盞臺)의 변죽은 온화한 곡선을 이루었으며 그 안쪽 중앙에 잔의 굽다리를 고정시키기 위한 원통형 잔좌(盞座)가 마련되어 있다.
잔은 잔대의 잔좌(盞座)에 안정되도록 오똑한 굽다리가 붙어 있으며, 잔뚜껑에는 꼭대기에 보주형(寶珠形)이 장식되어 있다.
잔이 반구형(半球形)으로 된 데 반해서 잔뚜껑은 경사면에서 지붕처럼 가라앉은 곡선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곡선은 백제 무령왕릉(武寧王陵)에서 출토된 탁잔(托盞) 등 삼국시대 탁잔(托盞)뚜껑이 지니는 의장의 한 특색이다.
삼국시대 녹유(綠釉)로서는 녹색이 고르나, 연질(軟質)이어서 많은 부분이 벗겨져 암회색의 태지(胎地)를 노출하고 있으며, 잔대 및 잔신(盞身)과 잔개(盞蓋)에는 평행선(平行線) 줄무늬가 음각되어 있다.
제454호 : 경주 노서동 금팔찌(慶州 路西洞 金製釧) 국립중앙박물관
경주 노서동에 있는 무덤에서 발견된 지름 8㎝의 신라의 금제 팔찌이다.
납작한 단면 바깥쪽에 각각 59개씩의 돌기를 내어 하나하나에 옥을 상감하였다. 이 돌기 좌우에는 4마리 용이 입을 벌려, 서로 다른 용의 꼬리를 물려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새겼다. 몸에는 비늘을 세밀하게 조각하였고 눈은 음각하였다.
경주 시내에 있는 신라 무덤에서는 각종 금제나 금동제 팔찌가 발견되는데, 장식이 없거나 간단한 문양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같이 용이 조각된 예는 매우 드물며, 그 중에서도 이 팔찌는 뛰어난 걸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제455호 :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慶州 皇吾洞 金製耳飾) 국립중앙박물관
경주 노서동 제215호 무덤에서 발견된 신라시대의 금으로 만든 귀고리이다.
총 길이가 9㎝정도로 커다란 굵은 고리(태환)에는 장식이 전혀 없고, 그 밑에 타원형의 중간 고리를 달아 아래 장식들과 연결시켰다. 중간부분은 작은 고리를 중심으로 아래 위에 고리를 여러 개씩 연결하여, 전체적으로 주판알같이 만들고 상·하를 연결시켰다. 주판알같은 고리에는 작은 나뭇잎 모양의 금판을 금줄로 꼬아서 2단으로 달았다. 귀고리 중심부 밑에는 펜촉 모양의 커다란 장식을 달았다.
이 귀걸이 1쌍 중 하나가 일본에 반출되었다가 1966년에 반환되어 국내에 있던 다른 한쪽과 어울려 1쌍을 이루게 되었다.
경주 시내에 있는 신라 무덤에서는 이것처럼 굵은 고리를 지닌 태환식 귀고리가 간혹 발견되는데, 이것은 장식 문양이 없는 귀한 것으로 간결하고 듬직해 오히려 품위가 있어 보이는 작품이다.
제456호 : 경주 노서동 금목걸이(慶州 路西洞 金製頸飾) 국립중앙박물관
금소환(金小環) 여러 개를 연결하여 속이 빈 구형(球形)을 만들고 심엽형(心葉形) 금판을 금줄로 연결하여 장식한 것을 44개 연결하고 끝에 비취 곡옥(曲玉) 1개를 달았다.
가운데가 빈 구형(球形)의 구슬은 같은 시대 귀걸이의 중간 장식에서 볼 수 있는 수법이고 목걸이 끝에 곡옥(曲玉)을 다는 형식은 당대 목걸이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목걸이가 대부분 유리제 청옥(靑玉)을 연결하고 끝에 곡옥(曲玉)을 다는 형식이었으나 이 목걸이는 청옥(靑玉)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구슬 하나하나에 기교를 다하는 등 당대 목걸이로서는 최대의 걸작이다.
끝에 달린 비취 곡옥(曲玉)의 맑은 색은 금색과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목걸이는 경주 노서동 215호 고분(古墳)에서 발견된 것으로 일찍이 이 고분(古墳)에서 출토된 일련의 유물과 함께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65년에 체결된 한·일협정에 의하여 1966년에 반환된 문화재 중의 하나이다.
제457호 : 예천권씨종가별당(醴泉權氏宗家別堂) 예천
조선 중기의 문신인 초간 권문해(1534∼1591) 선생의 할아버지 권오상 선생이 지었다고 전하는 건물이다.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앞쪽에서 보면 오른쪽 3칸은 대청마루고 왼쪽 1칸은 온돌방인데 온돌방은 다시 2개로 나뉘어 있다. 대청 앞면은 문짝 없이 열려 있지만 옆면과 뒷면은 2짝 널문을 달았으며 집 주위로 난간을 돌려 누(樓)집과 같은 모양으로 꾸몄다.
겉모습은 대체로 소박한 구조를 보이고 있으나 안쪽은 천장 부분에 설치한 여러 재료들을 정교하고 화려하게 장식하여 호화롭게 꾸미고 있다. 별당 뒤 서고에는 권문해 선생이 쓴『대동운부군옥(大東韻部群玉)』의 판목 677매와 14대째 전하는 옥피리,『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전질 120권을 보존하고 있다.
일반 주택건축으로는 보기 드물게 건물 안쪽을 장식하여 꾸민 수법이 뛰어난 조선시대 별당 건축이다.
제459호 : 제천장락리칠층모전석탑(堤川長樂里七層模塼石塔)
이 탑은 회흑색(灰黑色)의 점판암(粘板岩)으로 조성된 모전탑(模塼塔)으로 현재 높이가 9.1m이며 건립연대는 조탑형식(造塔形式)이나 전재가공(塼材加工)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로 추정된다.
기단은 단층기단으로서 자연석(自然石)으로 결구(結構)하였으며 1층탑신 네 귀에 화강암으로 된 석주(石柱)를 세웠고 탐신 남북으로는 감실(龕室)을 마련하였다. 2층 이상의 탑신석이나 옥개석은 전부 점판암을 절단하여 쌓아 올렸으며 특히 옥개석은 전탑(塼塔)에서 보이는 형식과 같이 상하에서 층단(層段)을 이루었다.
전체가 7층에 이르는 높은 탑인데 각층의 체감률(遞減率)이 적당하여 장중한 기풍을 보여주고 있다. 6·25동란 때의 심한 피해로 도괴(倒壞) 직전에 있었는데, 1967년 해체 복원 되었다. 이때 7층 옥개 상면에서 꽃모양이 투각조식(透刻彫飾)된 청동편(靑銅片)이 발견되어 상륜부(相輪部)의 구성은 청동제로 조성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460호 : 유성룡종손가유물(柳成龍宗孫家遺物) 하회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애 유성룡(1542∼1607) 선생의 종손가에 전해오는 유물들로 첫째, 유성룡 선생이 직접 쓰던 것, 둘째, 선생의 어머니에 관한 곤문기, 그리고 선생에게 조정에서 내린 여러 문서들 등 세 가지로 구분된다.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김성일과 동문수학하였다. 명종 21년(1566)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예문관검열, 공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벼슬을 거쳐 삼정승을 모두 지냈다.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알고 장군인 권율과 이순신을 중용하도록 추천하였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을 세울 것을 건의하고 군비확충에 노력하였다. 또한 도학·문장·글씨 등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가 죽은 후 문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안동의 병산서원 등에 모셔졌다.
유물 가운데 선생이 쓰던 것으로는 갑주와 가죽으로 만든 신발인 혁화, 상아로 만든 홀(笏:신하가 임금을 뵐 때나 종묘사직에 제사지낼 때 예를 갖추기 위해 두 손에 모아쥐던 패), 갓끈, 관자, 그가 늘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보던 「동국지도」 등 총 7종이며, 「서애선생모부인곤문기」는 자식들에게 재산과 노비를 분배한 기록인 분재기로 매우 희귀한 예이다. 조정에서 내린 고문서는 녹권과 교지 및 교서, 제문 등 총 14종이다.
이 유물들은 유성룡 선생의 개인사 연구 및 당시의 사회상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제460-1호 : 서애유물(西厓遺物)
제460-2호 : 서애선생모부인곤문기(西厓先生母夫人昆文記)
제460-3호 : 고문서
제461호 : 나주철천리칠불석상(羅州鐵川里七佛石像)
이 불상(佛像)은 원추형(圓錐形)의 바위 표면에 부조(浮彫)한 7구(軀)의 석상으로 동면(東面)과 북면(北面)에는 합장(合掌)한 좌상(坐像)이 1구씩 남면(南面)에는 4구의 입상(立像)이 새겨져 있는데, 서면(西面)은 원래 2구가 새겨졌으나 현재 1구만 남아 있다. 이들은 모두 세부표현이 거의 같은데, 길쭉한 얼굴, 소발(素髮)의 머리에 높은 육계(肉계)를 지녔으며,신체는 길고 굴곡 없이 밋밋하고 경직된 자세이나 소략하게 선각한 의문(衣紋)처리 등 도식적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불상의 발 아래에는 일단(一段)의 돌출부를 마련하여 대좌(臺座)에 대신하였고 광배(光背)의 표현은 없다. 비롯 불상의 표현수법은 고려석불상(高麗石佛像)에 흔히 나타나고 있는 도식적인 면이 보이지만 원추형의 바위 표현에 불상을 새긴 이러한 형식은 다른 예가 없을 뿐더러 사방불적(四方佛的)인 특징도 표현되고 있어서 퍽 귀중한 자료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제462호 : 나주철천리석불입상(羅州鐵川里石佛立像)
전체 높이가 5.38m나 되는 커다란 불상으로 하나의 돌에 불신과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가 조각되어 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표현되었고, 얼굴은 사각형으로 살이 많이 올라 있다. 목에는 3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에는 발목까지 늘어진 U자형의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두 팔은 두꺼운 옷자락 때문에 양 손만이 드러나 있는데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내리고, 왼손은 위로 향하고 있는 모습이다. 광배는 배(舟) 모양이며,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구분되는데, 머리광배 안에는 연꽃무늬를 새기고 몸광배에는 구름무늬를 새겨 넣었다.
살찐 얼굴이라든지 비정상적으로 표현된 신체의 모습, 그리고 형식화된 옷주름 등에서 고려 초기 유행하던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특히 남원 용담사지 석불입상(보물 제42호)과 크기와 양식이 비슷한 작품이다.
제463호 : 진공대사탑비귀부및이수(眞空大師塔碑龜趺및螭首) 원주
흥법사터에 남아 있으며,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승려인 진공대사(869∼940)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문이 새겨진 몸돌은 깨어진 채 경복궁으로 옮겨놓아 이 곳에는 비의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진공대사는 장순선사(長純禪師)밑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당나라에서 수도하고 공양왕 때 귀국한 후 왕의 스승이 되었다. 고려 건국 후에도 태조가 그의 설법에 감화하여 스승으로 머물기를 원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소백산으로 들어가 수도하였다. 태조 23년에 입적하니 태조가 손수 비문을 짓고, 최광윤이 당나라 태종의 글씨를 모아 비를 세웠다.
비를 이고 있었던 돌거북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에 가까운 머리를 하고 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네 발로 바닥을 힘차게 딛고 있다. 목은 짧고 등껍질 무늬는 정육각형에 가까운데 그 안에는 만(卍)자 무늬와 연꽃이 새겨져 있다.
머릿돌은 앞면 중앙에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고, 그 주위에는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을 조각하였다. 용 두 마리가 서로 무섭게 노려보고 다른 두 마리는 양 귀퉁이에서 옆을 쳐다보고 있다. 뒷면에도 네 마리의 용이 사방을 주시하고 있는데, 웅장한 기운이 넘치면서도 섬세하게 조각되어 당시의 높은 예술수준이 엿보인다.
경복궁에 있는 비의 몸돌은 여러 개의 조각으로 깨져있어 부분적으로 비문을 알아보기가 힘든 상태이나, 대체로 대사의 생애와 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제464호 : 흥법사지삼층석탑(興法寺址三層石塔) 원주
흥법사터라고 전하는 밭 가운데에 서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흥법사는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지던 거대한 사찰로, 원래 탑 외에도 전흥법사염거화상탑(국보 제104호)·흥법사진공대사탑부석관(보물 제365호) 등이 있었는데, 일제에 의해 강제로 반출되었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두고, 그 위로 기와집 모습을 본뜬 듯한 탑신(塔身)을 3층으로 쌓아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3개씩 새겨져 있는데, 꽃모양처럼 솟아올라 있어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위층 기단의 윗면은 경사져 있고, 보기 드물게 중앙에는 1층 몸돌을 괴기 위한 받침을 3단으로 조각하였다. 부처의 사리나 불경 등을 모시고 있는 탑신은 기단에 비해 너무 작은 모습이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놓았으며, 1층 몸돌에는 네모난 문비가 새겨져 있고 문비 안에는 마멸이 심한 문고리 장식이 남아있다.
지붕돌은 두꺼워 보이고 경사가 가파르며, 아래받침은 얇게 4단으로 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파손된 부분이 많다. 지붕돌의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쪽 가에서 살짝 위로 들려있어 고려시대 석탑임을 잘 드러낸다. 탑의 머리부분에는 머리장식을 받치기 위한 노반(露盤)만 남아 있으나 그 마저도 많이 손상되어 있는 상태이다.
기단과 탑신의 불균형이 눈에 띄며, 돌의 구성이나 조각수법이 소박한 점 등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제465호 : 영천신월동삼층석탑(永川新月洞三層石塔)
이 석탑은 9세기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석탑으로 높이가 4.75m이다.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쌓아올린 것으로,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양식을 잘 지니고 있다.
윗 기단부의 면석(面石)에는 8부중상(八部衆像)이 양각돼 있고, 탑신부(塔身部)는 옥신과 옥개석이 한 돌로 조성되었다. 옥개석(屋蓋石) 받침은 4층이고 추녀 밑은 수평을 이루었다. 기단과 탑신부의 여러 곳에 손상을 입었으나, 신라 석탑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탑이다.
제466호 : 만어사삼층석탑(萬魚寺三層石塔) 밀양
지금의 절이 자리한 위치와는 떨어져 있으나 석탑의 뒤편에 건물터로 보이는 널찍한 대지가 있어 이곳이 본래의 법당터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 석탑도 지금의 위치가 원래 세워져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1단의 기단(基壇) 위에 올려진 3층 석탑으로,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한 돌로 구성되어 있다.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3단이다. 탑의 머리장식에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얹혀 있으나 후에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탑의 바닥돌이 드러나 있고 지붕돌이 약간 파손된 상태이지만,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어 정돈된 모습을 보이는 뛰어난 작품이다. 일부에서 퇴화된 자취가 엿보이지만 각 부의 구조와 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제467호 : 표충사삼층석탑(表忠寺三層石塔) 밀양
이 삼층석탑은 통일신라(統一新羅) 시대에 화강암(花崗岩)으로 만든 것으로서 기단(基壇)은 단층이며 면석(面石)은 5매로 구성하고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하나씩 있어 각 면을 둘로 구분하고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탑의 몸체부분인 옥신(屋身)과 지붕돌인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각 층의 옥개석이 만나는 모서리에는 작은 풍탁(風鐸)을 달 수 있는 구멍이 마련되어 있는데, 2층의 네 모퉁이에는 지금도 풍탁이 달려 있다. 이 석탑의 기본(基本)은 신라(新羅) 석탑(石塔)의 양식(樣式)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이 단층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전체의 높이는 7.7m이다.
제468호 : 밀양숭진리삼층석탑(密陽崇眞里三層石塔)
이 탑은 고려시대 숭진리의 옛 절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 일대가 큰 절터로 주목된다. 단층기단(單層基壇) 위에 건립한 3층석탑으로서 기단 면석(面石)은 4매의 판석(板石)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부 양식(樣式)과 수법(手法)에서 시대적(時代的) 변천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각 층의 높이는 55cm, 20cm, 7cm으로 매우 심한 체감률을 보여 안정감을 주고 있다.
화강암(花崗岩)으로 조성하였으며, 높이 3m의 크기이다.
제469호 : 선산낙산동삼층석탑(善山洛山洞三層石塔) 구미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에 3층의 탑신부(塔身部)를 구성하였는데 각 층 옥개석(屋蓋石) 상면(上面)의 층단(層段) 형식 등에서 전탑(塼塔)의 형태를 본뜬 모전석탑(模塼石塔) 계열에 속하는 특이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으며 1층 탑신(塔身)에는 감실(龕室)이 만들어져 있다.
탑신부의 윗 부분에 장식되었던 상륜부는 노반(露盤)만 남아 있고 그 위의 부재는 모두 없어졌다. 석재의 구성이 정연하고 당당하며 장중(莊重)한 느낌을 주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초기에 조성된 탑으로 추정된다. 선산(善山)은 신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지역이며 특이한 구조와 거대한 규모의 석탑이 많이 남아 있다.
제470호 : 도리사석탑(桃李寺石塔) 구미
도리사는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질 당시 전설에 나오는 아도(阿度)화상과 관련이 있는 절이다. 아도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서라벌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한겨울인데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하여 그곳에 절을 짓고 도리사라 하였다 한다. 정확하게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 없으나 신라 최초의 절이라고 전한다.
이 석탑은 대웅전 앞뜰에 있으며, 전체적으로 5개층을 이루고 있는데, 맨 아래층은 탑을 받치는 역할을 하는 기단(基壇)으로 여겨진다. 위의 2개 층은 탑의 중심부분인 탑신부(塔身部)이다. 탑신부의 1층과 2층 몸돌은 작은 정사각형의 돌을 2∼3단으로 쌓아 마치 벽돌을 쌓아 올린 것처럼 보인다. 지붕돌 역시 벽돌탑을 모방한 석탑처럼 층단을 이루고 있다. 주목되는 점은 각각 한면에 문틀을 돋을새김한 널돌이 끼워져 있어 문짝모양을 표현한 듯하다. 맨 위의 2개층은 탑의 머리장식받침인 노반(露盤)이 포개진 것인지, 아니면 위층만 노반이고 아래층은 탑신부로 보아야 하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일반적인 탑들과는 다른 특이한 형태로 몸돌과 지붕돌 윗부분의 층단구성이 모전석탑처럼 보인다. 이처럼 희귀한 모습을 한 탑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며,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제471호 : 통도사봉발탑(通度寺奉鉢塔)
이 봉발탑은 통도사의 용화전 앞에 서 있는 것으로 무슨 용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석가세존의 옷과 밥그릇을 미륵보살이 이어받을 것을 상징한 조형물인 것으로 여겨진다. 기본형태는 받침부분 위에 뚜껑있는 큰 밥그릇을 얹은 듯한 희귀한 모습이다. 받침부분의 돌은 아래·가운데·윗부분으로 구성되며 장고를 세워 놓은 듯한 모양이다. 받침돌 위에는 뚜껑과 높은 굽받침이 있는 그릇 모양의 석조물이 있다.
만들어진 연대는 연꽃조각과 받침부분의 기둥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로 추정되지만, 받침부분과 그릇 모양의 조각물과는 품격의 차이가 느껴지므로 동시대의 작품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제472호 : 보천사지부도(寶泉寺址浮屠) 의령
이 부도는 보천사지 삼층석탑(三層石塔)(보물 제373호)의 북쪽 150m 거리의 계곡(溪谷)에 있는 고승(高僧)의 사리탑(舍利塔)으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기본형을 갖추고 있다.
하대석(下臺石)에 운룡문(雲龍紋)과 안상(眼象)을 조각하고 중대석(中臺石)에도 안상을 새겼다. 또 가장 중심을 이루는 탑신의 한 면에는 문비(門扉)와 자물쇠를 조각하였는데 이러한 장식조각은 아주 간결하며 독특한 품위를 자아낸다. 옥개석(屋蓋石)은 두꺼운 편이며 그 위에 얹혀졌던 상륜부(相輪部)는 모두 없어졌다. 고려시대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현재의 높이는 3.35m이다.
제473호 : 법계사삼층석탑(法界寺三層石塔) 지리산 천왕봉
지리산 천왕봉 동쪽 중턱에 자리잡은 법계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연기조사가 세운 절이라 전한다. 해발 1400m로 우리 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이다. 한국전쟁 당시의 화재로 토굴만으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최근에 법당을 지으면서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법당 왼쪽에 위치한 이 탑은 바위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몸돌 각 모서리에는 기둥을 넓게 새겼다. 각 층의 지붕돌은 두터운 편이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3단이다. 탑의 머리장식 부분에는 포탄 모양의 돌이 얹혀있는데, 나중에 보충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바위를 기단(基壇)으로 이용한 탑은 신라 이후로 유행하였는데, 이 탑처럼 아래 기단부를 간략하게 처리한 경우는 드물다. 양식이 간략화되고 투박한 느낌을 주고 있어서 전형적인 신라석탑 양식에서 벗어난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제474호 : 벽송사삼층석탑(碧松寺三層石塔) 함양
조선시대(朝鮮時代) 석탑(石塔)으로는 드물게 신라시대의 석탑양식을 충실하게 이어받은 탑이다.
지표(地表)에는 넓은 지복석(地覆石)을 깔고 그 중앙에 높직한 지대석(地臺石)을 얹은 위에 좁아진 중석(中石)이 놓였는데, 밑에 1단의 얕은 턱을 만들었으며 우주(隅柱)와 탱주(撑柱) 1주가 있다. 갑석(甲石)은 1매석으로 폭이 좁고 위에 1단의 괴임이 있으며 밑에는 부연(副椽)이 있다. 상층기단 면석은 각면 1석씩이고 우주와 탱주 1주가 있다. 탑신부는 옥신석(屋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1석씩이고 옥신석에는 우주형(隅柱形)이 있으며 옥개석 받침은 1·2층의 4단씩이고, 3층이 3단이다. 상륜부에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만 남아 있다
제475호 : 안동소호헌(安東蘇湖軒)
조선 중종 때 문신 서해(徐해) 선생이 서재로 쓰기 위해 명종(재위 1545∼1567) 때 지은 별당이다.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부속된 방은 지붕 양식이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왼쪽 3칸은 대청, 오른쪽 1칸은 누마루며 앞쪽으로 온돌방 2칸을 붙여 집의 구조가 T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에 간략한 새부리 모양의 구조를 짜았다. 누(樓)마루와 온돌방 뒤쪽으로 난간을 둘렀고 건물 안쪽은 민가 건축에서 볼 수 없는 재료를 사용하여 지붕 맨 윗부분에 있는 재료를 받치고 있다.
기와에 새겨진 용 두 마리가 나는 문양은 민가에서 보기 드문 것이며, 건물에 나타나는 오래된 수법들은 조선시대 민가 건축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제477호 : 율곡선생남매분재기(栗谷先生男妹分財記) 건국대학교
이 문서는 부모가 죽은 뒤 유산을 율곡 이이(李珥)의 형제자매들이 모여 합의하여 나누면서 작성한 것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각종 제사와 수묘를 위한 토지와 노비를 배정하고, 나머지를 4남3녀와 서모(庶母:아버지의 첩)인 권씨에 배당한 토지와 노비 등을 구체적으로 적은 다음, 끝에 문서작성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수결(지금의 서명)을 표시하였다.
이 문서는 이이의 개인사에 관한 사항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 재산상속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제478호 : 갑사 동종(甲寺 銅鐘) 공주
조선 초기의 종으로 국왕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며, 갑사에 매달 목적으로 선조 17년(1584)에 만들어졌다.
높이 131㎝, 입지름 91㎝로 전체적으로 어깨부터 중간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중간 지점부터 입 부분까지 직선으로 되어있다. 종 꼭대기에는 음통이 없고, 2마리 용이 고리를 이루고 있다.
종의 어깨에는 물결모양으로 꽃무늬를 둘렀고, 바로 밑에는 위 아래로 나누어 위에는 연꽃무늬를, 아래에는 범자를 촘촘히 새겼다. 그 아래 4곳에는 사각형모양의 유곽을 만들고, 그 안에는 가운데가 볼록한 연꽃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종의 몸통 4곳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따로 두었고, 그 사이에는 구름위에 지팡이를 들고 있는 지장보살이 서 있다. 종 입구 부분에는 덩굴무늬 띠를 둘렀다.
이 종은 일제시대 때 헌납이라는 명목으로 공출되었다가, 광복 후 갑사로 옮겨온 민족과 수난을 같이 한 종이다.
제480호 : 영암사지삼층석탑(靈岩寺址三層石塔) 합천
삼층석탑은 9세기 통일신라 석탑이다.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에 3층의 탑신부(塔身部)를 세웠는데 탑 꼭대기의 상륜부(相輪部)는 모두 없어졌다. 탑 기단부(基壇部)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새겨졌고, 상층기단 갑석(甲石) 밑에는 부연(副椽)이 조각되었다. 옥신석(屋身石)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으며, 옥개석(屋蓋石)은 추녀선이 직선이고 받침이 4단이다.
이 탑은 통일신라 3층 정형탑(定型塔)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정교한 조각솜씨와 경쾌한 추녀선의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현재의 탑 높이는 3.8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