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승은 투수들의 꿈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20승에 도전하는 투수들은 80년대 90년대초하고
다른 점이 있습니다.
방어율이 3점대인데도 20승에 근접해 갑니다.
이상훈을 진정한 마지막 20승 투수라고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박철순,최동원,선동열,김시진 등이 20승 투수지만
그들의 당시 방어율은 2점대 초반이였습니다.
80년대 최동원 선동열의 막대결에서 두 투수가 15회까지 완투해서
1:0으로 최동원이 이긴적이 있었습니다.
이상훈도 당시 해태 싸움닭 조계현과 다승 1위을 다툴때 잠실에서
막대결에서 둘다 9회 완투해서 이상훈이 1:0으로 이긴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9회까지 공 하나하나에 3만 관중이 긴장 했던 기억을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상훈이 20승 달성했을 당시 방어율이 2점대 초반으로 기억합니다.
18승 때까지는 방어율 1.85 였습니다. 그래서 그때 선동열이후
20승 투수가 방어율 1점대가 달성할지 모른다고 했던적이 있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실패 했지만 그을 실패자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일본에서 주니치에 있을때 osb로 중계 방송보신 분들은 아실겁니다.
주니치가 이종범,선동열은 포기 했지만 이상훈은 잡으려 했습니다.
선동열을 보내고 주니치 담당 세이브 로 남아달라고 했지만 내 꿈은
일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 잘안돼자 몇몇 일본구단에서
스카우트 하려고 했지만 이상훈은 거부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일본리그에서 8회 이상훈 9회 선동열로 진행하다 나중에는 8회선동열
9회 이상훈으로 바꾸어 나갔고 당시 선동열의 인터뷰에서 괜찮다고
했던 기억도 납니다.
선동열이 세이브는 추가했지만 8회던진 이상훈이 그날의 선수로 뽑힌
경기들도 있었습니다. 기억에 남는것은 요미우리와 시즌 후반 선두다툼에서 8회 2:1에서 무사 만루에서 구원 등판한 이상훈이 3번 삼진 4번 괴물
마쓰이을 삼진으로 잡고 무사만루에서 무실점으로 내려왔고 9회 선동열이
던졌지만 그날의 선수는 이상훈이 뽑혀서 인터뷰 하는 모습을 봤죠..
주니치가 이상훈을 좋아 했던 이유도 1사3루 무사 3루에서 구원으로
나와서 점수을 실점하지 않은 7-8회 경기가 많았습니다. 기록에는 세이브
추가가 아니지만 주니치에서 자체적으로 높는 점수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때 일본에 눌러있었으면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자신의 꿈을
의해 간다는 야구을 그만두고 내자신을 돌아볼때 내가 메이저리그에
도전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 할거라는 이상훈의 인터뷰가 아직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이젠 이상훈도 나이가 들어가지만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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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 프로 데뷔 후 97년까지 5년간 60승 31패 47세이브 방어율 2.56을 기록했습니다.
데뷔 첫 해 9승 9패의 다소 미흡한 성적을 거두었으나, 이듬해에 18승으로 다승 1위에 등극했었지요.
95년에는 꿈의 20승 반열에 올랐고, 그 후 마무리로 변신, 96년 10세이브 적응기를 거쳐, 97년에 37세이브 10구원승을 거두었습니다.
고려대 4학년 시절에 성균관 대학을 상대로 대학춘계연맹전에서 14타자(16인감? - 그 경기 봤는데...) 연속 탈삼진을 뽑으면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 후 연봉포함 2억원이라는 그 당시 신기록을 세우면서 LG에 화려하게 입단했습니다.
이상훈의 학창시절은 가난의 연속이라 전해집니다.
고대 야구숙소에 주말에도 남아 있는 선수가 이상훈이었고, 그 이유가 용돈이 없어 나가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는군요.
그런 헝그리정신이 오늘날까지 불굴의 투지로 살아있는 야구를 하는 원동력이 아닐가 싶네요.
국내무대에서 뛴 것은 불과 5년이지만, 송진우나 구대성보다 컨트롤이나 게임 운영, 볼스피드가 무조건 낫다고 할 순 없지만,
모든 것을 종합했을 때 최고의 좌완이라는 데 이의가 없습니다.
그를 잠실에서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은 선동렬선수가 국내복귀해서 뛰는 것만큼 가슴설레이는 일입니다.
그의 카리스마와 전투적인 피칭을 즐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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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선수가 LG에서 선수로 뛰셨을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