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한국 문화의 원류 원문보기 글쓴이: 솔롱고
▲ [그림 ①] 텐무천황 |
여기서 한 가지 점을 지적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진신의 쿠데타에 관하여 이상하게도 『일본서기』에서는 오와리씨의 활약에 대해 철저히 침묵합니다.
다만 『속일본기』에 이들이 포상을 받은 기록이 있습니다.
텐무 천황이 서거했을 당시 어린 시절의 텐무천황의 모습을 말하면서 기리는 대목이 있는데 이때 이 부분의 만장
(輓狀)을 읽은 사람이 바로 오와리씨의 동족인 오샤마노수쿠네아라카마(大海宿禰□蒲)라고 합니다.4)
이것은 오와리씨가 어린 시절 텐무 천황을 비밀리에 양육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린 시절의 텐무가 수도의 황궁에서 정상적으로 자라기 힘든 어떤 환경이 있을 수가 있었겠죠.
만약 텐무가 기록대로 조메이 천황의 아들이었는데도 비밀리에 양육되었다면 그 어머니가 미천하거나 아니면
부여계의 황실에 반하는 어떤 요소(신라계라든가 하는)가 있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일본서기』에서 오와리씨의 지원 사실을 더욱 숨겼을 수도 있겠습니다(이 부분은 다시 상세히
분석합니다).
텐무 천황은 자신을 도와준 소가씨(蘇我氏)도 소외시키고 철저히 황족(皇族)만으로 정치를 하는 이른바 황친정치
(皇親政治)의 시대를 엽니다.
아마도 강력한 중앙집권을 위한 텐무 천황의 선택이었겠지요.
이미 많이 알려진대로 한고조 유방(劉邦)의 흉내를 내기를 즐겨했던 텐무 천황이 철저히 토사구팽(兎死狗烹)한
것이겠지요. 텐무 천황이 편찬을 지시한 『일본서기』에서는 진신의 쿠데타를 매우 이례적으로 상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자기의 무용담을 가득 실어다 놓은 형국입니다.
도대체 텐무 천황은 어떤 사람이고 그가 숨기려고 했던 비밀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1) 텐지천황 : 백강 전투를 위해 태어난 사람
7세기 중반 당나라의 고구려 정벌로 인하여 동북아시아의 긴장이 크게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645년경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할 당시 일본에서는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이 있었습니다.
다이카 개신은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나카노에(中大兄) 황자를 중심으로 당대 최고의 권력 가문인 소가(蘇我)씨를
멸문한 후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한 사건입니다.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가 암살되고, 그의 아버지 소가에미시(蘇我蝦夷)가 자살함으로써 소가씨 가문은 멸문당
합니다. 이로써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반도부여계의 대표적인 가문은 사라집니다.
이와 같이 을사정변 즉 잇시노헨(乙巳の變)은 야마토의 최고 실력자로 군림해오던 소가씨의 본가를 멸문시킨 사건
입니다. 잇시노헨의 주역은 나카노에(中大兄) 황자 즉 후일 텐지천황(天智天皇 : 661∼672)입니다.
나카노에 황자는 앞서 본대로 어머님인 사이메이 천황을 도와 반도부여(백제)의 구원에 신명을 다합니다.
전체 부여계의 역사를 모르는 현재 열도쥬신(일본인)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정도의 정열과 신념을 가지고
전국력을 총동원하다시피하여 반도부여를 지원합니다.
그래서 열도에서는 텐지 천황을 가리켜 '백제마니아'니 '백강 전투를 위해 태어난 사람' 등으로 비아냥거리기도
합니다.
반도부여(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규슈로 간 사이메이 천황이 급서(急逝)하는데 이 때에도 나카노에는 등극하지
않고 반도부여의 구원에만 전력을 다하고 반도부여의 멸망 후 뒷수습을 하고 있습니다.
또 당나라나 신라의 연합군이 일본 열도로 침공해올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하자 각종 방어용 토목공사를
시행합니다(아마도 나라의 경제가 말이 아니었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나카노에 황자(텐지 천황)에 대하여 "소가이루카의 암살과 백강 전투(663)를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는 말입니다.5)
여기서 말하는 백강 전투는 일본이 백제를 부흥하기 위해 동원하여 파견한 군대가 백제의 백강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전투를 말합니다.
『삼국사기』에는 "왜(Wa)의 4백 척의 군함이 전쟁에서 패해 백강(白江) 하구에서 불태워졌는데 그 연기와 불꽃
으로 하늘과 바다가 모두 붉게 물들었다"고 전합니다.6)
여기서 말하는 백강은 금강 하구 부근의 기벌포(伎伐浦)라고 합니다.
사실 나카노에 황자(텐지천황)은 반도부여(백제)의 구원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반도부여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은 물론 반도부여의 망국민들을 모두 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앞서 본대로 텐지 천황(天智天皇) 10년조에 다음과 같은 노래가 나오는 것이죠.
"귤은 저마다 가지가지에 달려있지만
(多致播那播 於能我曳多曳多 那例例騰母)
구슬을 꿴다면 하나의 끈으로 묶을 수 있지
(陀痲爾農矩騰岐 於野兒弘儞農俱)
이 동요는 반도부여(백제)와 열도부여(일본)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노래이기도 합니다.7)
반도부여의 구원의 실패로 이내 당나라·신라 연합군이 열도로 침공해올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하게 됩니다.
실제로 당나라라는 초강대국이 등장하자 텐지천황은 반도부여 문제로 상당히 고심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이카 개신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나타났던 친당 정책도 이와 관련이 있겠죠).
경제적으로 피폐한 가운데서도 텐지천황은 당나라·신라 연합군을 막기 위해 도처에 산성을 축조합니다.
그리고 텐지천황은 왕도를 아스카에서 오미(近江 : 현재의 시가현[滋賀縣])로 옮깁니다.
아스카가 소가씨의 본거지인 점도 큰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참고로 당시의 산성들을 살펴보고 넘어갑시다. 백강 전쟁의 패배 후, 쓰시마·이키·쓰쿠시 등의 변방 지구에는 병력
들과 봉화대가 배치되었고 각지에 많은 성들이 축조됩니다.
667년 나카노에 황자는 오미(近江) 오쓰쿄(大津京)로 도읍을 옮겼고, 다음해인 668년 정식으로 즉위해 제 38대
덴지 천황(天智 天皇 : 668~672)이 됩니다. 이 산성들은 이른 바 백제식 산성들이고 이 흔적들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 [그림 ②] 일본에 있는 한국식 성[吉野誠(2004)106쪽] |
이와 같이 텐지 천황은 마치 부여의 중흥을 위해 삶을 살아온 듯이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일부에서는 텐지천황을 의자왕의 아드님인 부여풍(夫餘豊)이라고 보기도 합니다(『일본서기』에서는
부여풍을 여풍장(余豊璋)이라고 합니다).8)
사실 부여계의 전체 역사를 모르면 텐지 천황의 이 같은 행적이 이해가 안되죠.
참고로 의자왕이 당나라에서 서거한 후 백제왕족 가운데 한 사람인 복신(『일본서기』에서는 귀실복신)을 중심으로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나는데, 이 때 복신은 왜국에 있던 여풍장에게 귀국할 것을 요구하여 백제왕으로 옹립하였습
니다.
필자 주
(1) 『日本書紀』「天智」10年, 「天武」元年.
(2) 『日本書紀』「天武」元年.
(3) 이 책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630년대~760년대) 가집(歌集)이다. 신라시대의 향가집과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약 130여년간에 걸친 노래들을 수록한 것으로 이 시대를 만요슈 시대로 보기도 한다.
(4) 關裕二, 앞의 책, 206쪽.
(5) 關裕二『古代史』(관정교육재단 : 2008) 197쪽.
(6) 『三國史記』「百濟本紀」
(7) 이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 2』(해냄 : 2006) 116~118쪽 참고.
(8) 예를 들면 林青梧는 텐무를 신라인 김다수로 하고 텐지를 百済王인 여풍장(余豊璋)으로 보았다. 林青梧
「天智・天武天皇の正体」『別冊歴史読本』1990年6月号(新人物往来社 : 1990)
(2) 텐지와 텐무, 난형난제(難兄難弟)
열도 쥬신(일본)의 고대 역사상 가장 유명한 형제 천황은 텐지(天智) 천황과 텐무(天武) 천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텐지 천황은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의 중심인물로서 텐무 천황은 중앙집권체제(中央集権体制)를 확립에 주력하여
고대국가와 천황제(天皇制)의 기초를 견고하게한 천황으로서 유명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텐지 천황은 각종 호족세력들을 제압하여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전국력을 동원
하여 백제를 구원했던 분이고 텐무 천황은 텐지 천황이 구축했던 왕권을 제도적으로 더욱 견고하게 구축하여 천황
권을 체계화 시킨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 천황에 대한 출생과 죽음 등의 수수께기가 너무 많아서 오늘날까지도 온갖 의문이
끊이지 않고 각종 학설과 이론, 억측들이 난무합니다.
먼저 텐지와 텐무의 출생에 관한 의혹은 '형제설(『일본서기』)', '이복형제설(어머니는 같고 아버지가 다름)',
'형제교체설(형과 아우의 순서가 바뀜 : 『일본서기』의 일부 기록)', '비형제설(이 둘은 형제가 아님)' 등의 문제로
요약할 수가 있고, 출자문제에 있어서 조메이 천황의 부여계의 적통이 누구인가 하는 점, 외교 정책면에서 친백제
계인 텐지와 친신라계인 텐무의 대립 과정 등의 문제가 있습니다.
일본의 학교 교과서에서는 물론 텐지천황과 텐무천황은 친형제라고 명기되어 있습니다.
『일본서기』에서는 텐무 천황이 텐지 천황의 친동생이며 그 어머니는 사이메이 천황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카마쿠라시대(鎌倉時代) 이후 쓰여진 『황년대약기(皇年代略記)』등의 여러 책들에 하필이면 남동생인
텐무천황이 형인 텐지천황보다 3~4세 나이가 많은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텐무 천황이 서거했을 당시 나이가 73세, 65세, 56세 등의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만약 이 가운데서 평균을 잡아
65세라고 해도 텐무 천황의 태어난 해가 621년이 되어 텐지천황(626~672)보다도 나이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텐무 천황은 텐지 천황이 그 무수한 활약을 하던 시기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텐무 천황 즉 오샤마(大海人) 황자는 텐지 천황이 중병이 들어 서거하기 직전에 텐지 천황이 그의 손을 잡고 후사를
부탁하는 장면에 나오고 있습니다.9)
그 시기의 텐무는 못잡아도 40대는 되었을 나이지요. 만약 텐무 천황이 텐지 천황의 친동생이라고 한다면 형이 하는
일에 너무 무관심했던 셈이고, 텐무천황이 텐지천황과 아버지가 다른 형이라고 한다면 텐무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이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지요.
이 연령 모순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사람은 사자코쿠메이(佐佐克明)로 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신라
의 왕족인 김다수(金多遂)야말로 텐무(天武)라고 주장합니다.10)
이에 봇물처럼 많은 학자나 논자들이 여기에 참여합니다.
문제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보황녀(宝皇女)는 다카무카왕(高向王)이라는 사람과 결혼하여 아야(漢) 황자를 낳았다."
는 『일본서기』의 기록입니다.
만일 이 아야 황자가 텐무라면 텐무는 텐지의 이부형(異父兄)이 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분명히 조메이 천황의
직계가 아니니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이 당연하지요. 아야 황자가 텐무라는 견해에 대한 역사적 증거는 물론
없습니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논자로는 오와이와오(大和岩雄), 토요타아리츠네(豊田有恒) 등이 있습니다.11)
오와이와오는 다른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이 연령의 순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12)
▲ [표 ①] 텐지와 텐무의 연령관계 |
『일본서기』에는 텐지 천황이 조메이 천황 13년(642)에 16세로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출생 연도가 626년이 되는 것이죠(서거한 해는 672년입니다). 다만 『일본서기』에는 천황의 구체적인
나이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경우가 많다는 점은 알아둡시다. 킨메이 천황 이후에는 나이가 거의 표시되어있지 않
습니다. 이상한 점은 오히려 센카(宣化) 천황 이전에는 나이가 분명히 기록된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즉 센카·킨메이 천황을 기점으로 무엇인가 숨길 것이 많았다는 말이 되겠지요.
다음으로 미즈노유(水野祐) 교수는 텐지와 텐무가 오히려 아버지가 같고 어머니가 다른 형제라고 추정합니다.13)
다만 미즈노유 교수는 이 논쟁에 직접적으로 뛰어들지는 않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텐무의 어머니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침묵했습니다.
나아가 텐지와 텐무가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 흐름은 크게 두 부류가 있는데 한 흐름은
신라계 도래인으로 보는 경우이고14) 다른 흐름은 다소 엉뚱하지만 연개소문을 텐무 천황으로 보는 경우도 있습
니다.15) 또 다른 견해로는 텐무를 사이메이 천황이 조메이 천황과 결혼하기 전에 소가씨(蘇我氏) 계열(?)의 황족
과 관계를 맺어 얻은 자식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16)
참고로 『일본서기』에도 보면 텐지 천황에게 불려가서 황위를 받으라는 일종의 협박에서부터 텐무 천황을 구했던
사람도 소가노오미야스마로(蘇賀臣安麻侶)로 소가씨였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텐무천황이 조메이 천황·사이메이 천황의 자손이 아니라면 부여계 황통은 크게 흔들리는 셈입니다.
먼 후일 텐지 천황의 손자로 제49대 천황인 고닌 천황(光仁天皇 : 770~781)이 등극하면서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는
셈이 됩니다.
고닌 천황의 황후가 바로 야마토노니카사[화신립(和新笠)]이고 이들 사이에 난 분이 바로 저 유명한 칸무천황
(桓武天皇 : 781~806)입니다.
야마토노니카사는 무령왕의 왕자인 순타태자(純陀太子)의 직계후손인 야마토노오토쓰구[화을계(和乙繼)]의
따님입니다. 야마토노니카사 황후에 대해 『속일본기』에서는 일본 조정은 '천고지일지자희존(天高知日之子姬尊)'
이라는 극존(極尊)의 시호(諡號)를 바치면서 "백제의 옛 조상인 도모왕(都慕王 : 동명왕)은 하백(河伯 : 물의 신)의
따님이 태양의 정(精)을 받아서 태어났다.
황태후는 그 후손이다."라고 이례적으로 상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2001년 아키히토(明仁) 천황은 "나 자신으로 말하면 칸무(桓武)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으로 『속일본기
(續日本記)』에 씌어있기 때문에 한국과의 혈연을 느끼고 있습니다."17)라고 말하여 한국과 일본과의 황실에 있
어서 혈연적 고리를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언급하여 큰 파문을 낳았습니다.
칸무 천황은 현재의 교토 땅을 고대 일본의 새로운 도읍지인 헤이안경(平安京)으로 개창(794)하고 헤이안 문화시대
(794~1192)를 꽃피게 한 제왕이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렇게 복잡한 출생 문제에 관한 논쟁이 지금도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제가 종합적으로 판단해 볼 때, 텐지 천황과 텐무 천황은 아버지는 동일하더라도 어머니가 다르다는 미즈노유
교수의 견해가 가장 타당할 것이라고 봅니다(이 부분을 앞으로 충분히 해설해 드릴 것입니다).
이제 위에서 제기한 문제들을 한번 검증해보도록 합시다.
"보황녀(宝皇女)는 다카무카왕(高向王)이라는 사람과 결혼하여 아야(漢) 황자를 낳았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상
으로만 본다면 아야 황자의 아버지인 다카무카왕이 누군인가라는 점이 문제의 핵심일 수가 있는데 고바야시야스코
교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다카무카왕을 나라 박사인 다카무카노구로마로(高向玄理)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록상으로 나타난 그의 이력을 보면 보황녀가 그를 만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왜냐하면 다카무카노구로마로(高向玄理)는 견수사(遣隋使)에 유학생으로 수행(608)했다가 640년 귀국했고, 나라
박사[国博士]에 취임(645)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다카무카노구로마로가 수나라로 떠날 당시에 보황녀(594~661)는 겨우 14살이고 설령 이 당시 결혼
하여 아기를 낳았다해도 텐지나 텐무보다는 거의 스무살 정도 연령이 높아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다카무카노구로마로(高向玄理)는 텐지나 텐무의 아버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다카무카왕(高向王)은 다카무카 지역의 족장이나 호족으로 판단이 됩니다.18)
다카무카왕이 어떤 사람인지 추적하기란 『일본서기』의 기록만으로는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제 시각을 달리
해서 다시 추적해 봅시다.
텐무 천황의 행적을 보면 친신라 정책을 시행한 점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러다 보니 텐지 천황의 아들인 오토모
(大友) 황자의 정권을 찬탈한 텐무의 쿠데타(진신노난)를 두고 친신라계와 친백제계의 전쟁으로 규정하기도 합
니다. 물론 기록상으로 신라계 도래인들이 텐무를 직접적으로 지원한 흔적은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텐무 천황의 친신라정책은 외교적인 행태를 통해서 찾아봐야 합니다.
『일본서기』를 분석해 보면, 텐지 천황 시기(662~671)에 당(唐)에서 일본을 방문한 사신단은 5회, 신라로부터
온 사신단은 4회입니다.
그런데 텐무 천황의 시대(672~686)에는 당나라에서 온 사신단은 없고 신라로부터 온 사신단은 무려 15회에
걸쳐있습니다.19)
그러니까 텐무 천황의 시기에 반당(反唐)·친신라 정책이 눈에 띠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당시 신라는 당나라와 일전을 치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텐무 천황의 정책과 신라의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일치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공교롭게도 당나라의 대군을 몰아
내려는 신라와 텐지 세력을 물리치려는 텐무 천황의 입장이 같은 처지였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먼저 텐지 천황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많은 호족들을 살해하였기 때문에 많은 세력들이 한편으로는 그를
두려워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증오했습니다.
텐지 천황은 대표적인 반신라·친백제계입니다. 그래서 전국력을 동원하여 반도부여(백제)를 지원합니다.
이 지원이 참패로 끝나자 국내에서는 많은 불만들이 나타납니다(상세한 내용들은 『일본서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천황의 등극도 미룬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텐무가 텐지 천황의 분명한 라이벌로 부각되었다면, 텐무는 고토쿠 천황의 남은 자식인 아리마(有間) 황자의
운명처럼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적어도 텐지 천황이 서거할 때까지 텐무는 철저히 복지부동(伏地不動)의 자세를 유지하다가 텐지 천황의 사후에
바로 행동을 개시한 것이죠.
텐무 천황의 입장에서는 부여계 가운데서도 반텐지(反天智) 계열과 신라계 도래인들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돈독히 했을 것입니다. 그것만이 자신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텐지 천황에게는 친반도부여(친백제)나 친신라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죠. 단지 자신의 절대권력의 형성에 방해되는
그 누구도 살려두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텐지 천황 = 친백제계, 텐무 천황 = 친신라계'라고 보는 것은 텐지 천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죠. 텐무를 지원한 세력들은 그저 반텐지계(反天智系)였다고 보면 타당할 것입니다.
따라서 텐무는 단지 신라와 신라계 도래인, 나아가 각종 부여계 들을 이용했을 뿐입니다
(주요 부여계 호족들은 이미 텐지 천황에 의해 궤멸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텐무계의 움직임에 대해 신라는 적극 호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시점에 신라는 대당전쟁(對唐戰爭)을 이겨야 하는데 일본은 신라에게는 주요한 배후세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나라의 입장에서는 일본이 배후에 있을 경우 전쟁이 장기화될 수 있는데 이 점이 큰 골칫
거리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나라의 대군이 한반도에 장기적으로 묶여있으면 위구르나 티벳 방면의 방어가 곤란하기 때문입니다.20)
결국 매소성 대전(676)과 기벌포 해전(676)에서 신라는 당나라를 격파하고 당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는데 성공
합니다. 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텐지 천황은 매우 성가신 존재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때마침 텐지가 서거(672)한 것이죠(그래서 일부에서는 텐지천황 암살설이 나오고 있죠).
▲ [그림 ③] 매소성 전투(한국 민족기록화 : 전쟁기념관) |
이와 같이 텐무 천황측과 신라의 입장이 맞아 떨어지게 된 것은 당연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텐무를 신라계 인사의
아들이라고 보거나 아야 황자를 텐무로 보면서 다카무카왕(高向王)을 신라계 왕족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 텐무가 조메이 천황과 완전히 무관하다면 천황이 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고,
단기간에 그 많은 지원세력들을 확보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텐지천황과 텐무 천황은 도대체 어떤 관계였을까요? 이제부터 그 비밀을 풀어봅시다.
필자 주
(9) 『日本書紀』「天智」10年. 참고로 『일본서기』의 기록을 인정하는 川崎傭之는 "정확히 그 무렵부터 오샤마
(大海人) 황자는 그림자의 형태에 따르듯이 나카노에(中大兄) 측에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
고토쿠 천황을 나니와경에 두고, 나카노에와 함께 그가 大和로 끌어올렸을 때는 그도 벌써 약관(23)의 청년이 되어
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川崎傭之『天武天皇』(岩波新書98 : 昭和49).
(10) 佐佐克明에 따르면, 『日本書紀』에 근거하면 天智의 생년은 626년으로 알 수 있는데 반해 天武는 불명확
하지만, 『一代要記』에는 天武의 생년은 622년으로 되어있어 거의 4세의 나이 차이가 난다.
『本朝皇胤紹運録』에는 天武의 生年이 623년으로 没年齢이 65세로 되어 (天武의 没年이 686년으로부터 계산해보면)
1년의 차이가 있다. 佐佐克明은 이외에도 『上宮聖徳法王帝説』의 기록["乙巳年六月十一日、近江天皇〈生廿一年〉
殺於林太郎□□以明日其父豊浦大臣子孫等皆滅之."(□는欠字)]도 제시하고 있다. 佐佐克明「天智・天武は兄弟だっ
たか」『諸君』(昭和 49年8月号(文藝春秋社 : 1974). 佐佐克明은 이 같은 연령모순 문제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텐무를 신라인 김다수로 파악하고 있다. 佐佐克明「天武天皇と金多遂」『東アジアの古代文化』18号(
大和書房 : 1979)
(11) 大和와 豊田도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지만 漢皇子의 아버지인 高向王에 대한 견해는 나눠진다。高向王에
있어서 小林는 遣隋使로 隋나라에 갔다가 隋의 滅亡후에도 中国에 머물러 있었던 高向漢人玄理로 보고 있고、
大和는 『日本書紀』통해 用明天皇의 孫이 되는 것으로 보고[大和岩雄『天武天皇出生の謎』(六興出版 : 1987)],
豊田은 『常陸国風土記』에 등장하는 東国惣領의 高向臣(이름은 不明)으로 하고 있다. [豊田有恒『英雄・天武天皇』
(祥伝社 : 1990)]
(12) 大和岩雄「天智・天武非兄弟説と異父兄弟説」『東アジアの古代文化』67号 (大和書房 : 1991)재구성
(13) 水野祐「天智・天武『年齢矛盾説』について」『東アジアの古代文化』6号(大和書房 : 1975)
(14) 井沢元彦도 처음에는 텐무를 신라도래인과 가까운 유력씨족의 長으로 보았지만[井沢元彦『隠された帝』
(祥伝社 : 1990)追記(2000.9.10)], 후에 오히려 텐무를 텐지의 異母兄으로 하고 텐무의 아버지는 新羅人이
아닐까 추정하였다. 井沢元彦『逆説の日本史2 古代怨霊編』(小学館 : 1994).
(15) 小林惠子는 처음에는 天武를 漢皇子와 동일인물로 보았다가[小林惠子「天武の年齢と出自について」
『東アジアの古代文化』16号(大和書房 : 1978)], 후에 天武를 高句麗의 高官인 泉蓋蘇文으로 보았다[小林惠子
『白村江の戦いと壬申の乱』(現代思潮社 : 1986) 및 小林惠子「天武は高句麗から来た」『別冊文藝春秋』1990年 夏号
(文藝春秋社 : 1990)]. 李寧煕도 같이 天武를 泉蓋蘇文으로 보았다[李寧煕『天武と持統』(文藝春秋社 : 1990)].
(16) 關裕二『古代史』(관정교육재단 : 2008) 217쪽.
(17) 『朝日新聞』(2001.12.23)
(18) '高向'이라는 곳은 『지명사전(地名辞書)』에 따르면, 河内国錦部郡長野村(高向村)에 있고 이 곳에는 '高向王'
의 묘도 있다고 한다。가와치(河内)의 이시가와(石川) 상류의 좌측이라고 한다. 그런데 일부 기록들이 이와 유사한
것이 나타나기도 한다. 즉 『일본서기』에 "高向臣宇摩"(「欽明即位前紀」), "高向臣国押"(「皇極 2年 11月」),
"高向朝臣麻呂"(「天武」10年12月), "難波朝廷刑部尚書大花上国忍"(『続紀』和銅元年閏8月)등을 들 수 있다.
(19) 『일본서기』에 따르면, 唐에서부터 온 사신단은 664・665・667・669・671년의 5회, 신라에서 온 사신단은
668, 669, 671(2회) 등이다.
(20) 堀敏一『中国と古代東アジア世界』(岩波書店 : 1993)
(3) 텐무천황의 비밀
저는 지금까지 텐무 천황의 실제 모습에 대해 여러 가지 분석들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시원하게 분석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좀더 본격적으로 텐무 천황의 비밀을 추적하기 위해 좀더 은밀한
부분까지 접근해야 합니다.
텐무 천황의 정체를 찾아가는데는 중요한 고리들이 있습니다. 즉
① 텐지 천황의 네 따님이 텐무 천황과 결혼한 점,
② 텐무가 유난히 '한고조 유방(劉邦) 따라하기'에 몰두했다는 점,
③ 천황가(天皇家)의 보리사에서는 텐무 계열의 천황을 모시지 않는 점,
④ 텐무 천황이 『일본서기』를 편찬하게 한 점,
⑤ 텐무를 지원한 오와리(尾張) 씨족에 대한 문제,
⑥ 칸무 천황이 헤이안으로 천도한 문제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하나씩 살펴보죠.
첫째는 텐지 천황의 네 명의 실제 딸이 텐무에게로 시집을 갔다는 것입니다.
만약 텐무와 텐지가 친형제간이라면 네 명의 친조카를 황후로 맞을 이유가 없겠죠.
이 같은 텐무의 행태를 보면 텐지와 텐무의 어머니가 다를 가능성이 큰 것이죠. 만약 텐지와 텐무가 친형제라고
하면 사실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텐무의 이 같은 행동에는 자신의 혈통이 천황가의 혈통으로는 미약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까 황통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텐무는 텐지의 딸들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고대의 천황가에서는 삼촌과 조카가 결혼하는 경우를 비정상이라고 말할 수 는 없습니다.
고대 왕실에서 흔히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왜 네 명이나 되는 조카딸들이 삼촌에게 시집을 가는가 하는 점입
니다. 여기에는 크게 황통을 보호하거나 텐지와 텐무 사이의 관계를 돈독히하여 새로이 형성되고 있는 천황권력
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포석일 수도 있겠지요.
텐지 천황은 호족들을 누르고 자신의 정적들을 대부분 숙청하고 권좌를 스스로 만들어간 사람인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네 명의 딸들이 한 사람에게 결혼을 할만큼 절실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바로 이 점에서 텐지와 텐무는 어머니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본다면 텐지와 텐무는 그 어머니가 동일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고대 왕실에서는 심각한 왕족의 단절이 아닌 경우에 바로 친남매간에 결혼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다를 경우에는 쉽게 혼인하였습니다.
따라서 만약 텐지와 텐무가 친형제라고 했다면 텐지 천황의 네 따님이 텐무에게 혼인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다를 경우이면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지요.
둘째는 텐무가 스스로를 출신이 천하다고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자신을 한고조 유방(劉邦)에 비유하는 일이
많았고 '유방 따라하기'에 몰두한 듯합니다.21)
그리고 주위에서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천했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보황녀 즉 사이메이 천황이 텐무의 어머니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약 어머니도 천하고 아버지가 조메이 천황이 아니라면 천황가에서 버틸 수가 없기 때문에 제가 보기엔 아버지는
조메이 천황이라도 그 어머니는 신라계의 한미한 도래인 집안의 규슈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마도 조메이 천황이 순시를 다니다가 만난 신라계 처녀였을 가능성도 있죠. 그리고 바로 신라계였기 때문에
신라계 인사들과 접촉하기도 쉬웠겠죠. 텐무의 외가가 한미한 가문이었다면, 나카노에 황자가 크게 관심을 기울
이지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그 때문에 텐무는 목숨을 부지하기가 쉬웠을 것입니다(다만 이 경우에는 텐무가 텐지
천황 사후 그렇게 신속하게 정국의 주도권과 무력을 장악한 것을 해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진신의 쿠데타의 전개
과정을 보면, 텐무의 세력도 상당했음을 보여줍니다).
고바야시 야스코 교수는 텐무 천황이 유방과 자신을 동일시했다는 것을 여러 차례 지적합니다.
에도시대 후기의 국학자인 대학자 한노부토모(伴信友 : 1775~1846) 선생은 『장등산풍(長登山風』에서 텐무가
진신노난 당시에 유방을 상징하는 적기(赤旗)를 사용했다고 주장했습니다.22)
나오키 코우지로(直木孝次郞) 교수는 "일본인이 원래부터 붉은색을 좋아하는 듯하지만 붉은 색을 상서로운 색
으로 생각한 것은 텐무 이후"라고 하고 있습니다.23)
이노우에미치야스(井上通泰) 선생은 『만요슈(万葉集)』에 있는 다케치(高市) 황자의 만가(挽歌)로부터 텐무가
'유방 따라하기'를 했다고 보고 있습니다.24)
니시지마 사다오(西嶋定生) 교수는 "진한시대의 작제와 텐무천황 때의 관위제도가 그 내용이 완전히 다른데도
불구하고 한나라 대의 사작(賜爵) 기사를 빌어 관위의 수여가 표현되어있다."는 점과 유방의 참사검(斬蛇劍 :
뱀을 죽인 검)에 관한 『한서(漢書)』의 기록이 『일본서기』에 나타난 스사노오의 구사나기검[초지검(草薙劍)]의
기록과의 유사성을 들어서 텐무와 유방의 관계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25) 이 외에도 유방의 고향이 패(沛)인데
이를 탕목읍(湯沐邑)이라고 했는데 텐무도 자기의 고향인 미노(美濃)를 탕목읍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26)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는 대로 텐무가 '유방 흉내내기'를 한 것은 틀림이 없는 듯합니다.
다만 한고조 유방은 실제에 있어서 한족(漢族)의 개조(開祖)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유방은 개인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한족(漢族)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숭모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당시 '유방 따라하기'는 동아시아 군주
들에게 그리 특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셋째는 황실의 제사에 있어서 텐무계(天武系)의 천황들은 제외되어있습니다.
즉 이미 본대로 쿄토의 천용사(泉涌寺)는 13 세기에 사조 천황(四条天皇)를 모신 후 천황가의 보리사(菩提寺)로서
계속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이 절은 천황가의 사실상 보리사입니다).27)
그런데 이 절에서 모시는 천황은 텐지천황 이후의 텐지계 천황 뿐입니다.
이 곳에는 텐지 천황 이전의 천황도, 텐무천황으로부터 쇼토쿠(稱德) 천황에 이르는 텐무계 천황은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28)
다시 말해서 텐지 천황 다음에 껑충 뛰어서 고닌 천황(光仁天皇)이 모셔져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텐무 천황이 천황가의 혈통이 아니거나 그 혈통이 매우 엷다는 의미이겠지요.
물론 이 부분을 고닌 천황 이전의 천황에 대해서는 모시지 않았고 다만 텐지 천황만이 추가된 형태로 생각한다면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 [그림 ④] 쿄토의 천용사(泉涌寺) 전경 |
산능(山陵)을 조성하여 받들어 모시는 경우도 칸무(桓武)~고닌(光仁)~텐지(天智)를 거쳐 천황으로 즉위하지
못한 고닌의 아버지이자 텐지 천황의 아드님인 시키노(施基) 황자까지 봉폐(奉幣)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텐지
(天智) - 시키노(施基) 황자 - 고닌(光仁) - 칸무(桓武)로 이어지는 것이 천황가의 적통이라는 칸무 천황의 생각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파악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텐무 천황은 분명히 정통 부여계의 혈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조메이라고 추정되므로 어머니는 신라계일 가능성이 큰 것이죠.
넷째, 텐무 천황은 『일본서기』를 편찬하게 하는데 이 때 편찬된 『일본서기』는 여러 분야에 걸쳐서 많은 왜곡이
있는 것은 물론이지만 텐무 개인과 관련하여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를 들면 자신의
등극과 관련하여 진신노난(진신의 쿠데타)을 마치 다른 천황의 기(紀)보다도 더 길게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시키려는 목적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유난히 자신은 텐지 천황의 친동생이며 자기의 부모는 조메이 천황·사이메이 천황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듯이 보입니다. 이것은 거꾸로 말하면 자신의 가문이 조메이 천황가의 일원이라 할지라도 그 혈통이 매우 한미
했음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일본서기』의 구체적인 의미는 다음 장에서 상세히 다룰 것입니다).
이 점과 관련해서 좀더 확장된 시각에서 본다면, 조메이 천황과 교혼한 신라계 규슈가 낳은 자식에 대해 항간에서는
조메이의 아들이 아니라는 설이 많이 유포되었을 가능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더구나 텐무는 어린 시절을 오와리 집안에서 보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텐무의 부계 혈통에 대한 많은 의심들이
천황가나 항간에서 많았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텐무는 끊임없이 자기는 조메이 천황의 아들이었음을 강조했을
수가 있습니다.
다섯째, 텐무를 지원한 오와리(尾張)씨에 대한 문제입니다. 오와리씨는 텐무의 가장 강력한 후원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본대로 텐무 천황이 편찬한 『일본서기』는 철저히 그들의 도움을 은폐하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이 오와리씨의 계보가 아무래도 신라계에 가까울 가능성이 있는 듯이 보입니다.
물론 이제와서 그 근거를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오와리(尾張)씨의 시조와 출자(出自)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이 많은 부분입니다. 일단 오와리씨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고 넘어갑시다.
오와리씨(尾張氏 : おわりし)는 고대의 지방호족으로 『일본서기』에 따르면 아메노호아카리노미고토[天火明命
(あめのほあかりのみこと)]를 조신(祖神)으로하여 아메노오시히토노미고토(天忍人命)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
니다.29) 본관지(本貫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어 정하기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초기에는 미노(美濃 : 현재 나고야 인근 북쪽)·히다(飛騨) 등에 살다가 후에 오와리 쿠니조(尾張国造)로 되었다고
합니다. 유라쿠(倭武) 시대에는 아츠타(熱田 : 나고야 남부지역)의 남쪽으로 거점을 옮겼다고 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미노는 바로 텐무 천황의 고향입니다.
1992년 교토의 한 신사에서 공개된 씨족 계보도에 따르면30), 모노노베씨(物部氏)와 오와리씨(尾張氏)는 천손족
으로 아메노호아카리노미고토[(天火明命) 또는 니기하야비노미고토(饒速日命 : にぎはやひ)]를 시조로 하는 한
집안으로 되어있습니다.31)
이 모노노베씨가 바로 소가씨와 불교를 사이에 두고 일전을 벌인 바로 그 씨족입니다. 그런데 톳토리현(鳥取県)의
한 신사에 남아있는 고계도에 따르면 니기하야비노미고토(아메노호아카리노미고토)가 이즈모계(出雲系)의 오나
무치노미고토(大己貴神)의 자손이라고 명기되어 있다고 합니다.32)
바로 이 이즈모계가 바로 신라계를 의미할 수가 있습니다. 이즈모 지역은 앞서 본대로 스사노오(가야계)가 일본
으로 건너온 곳이기도 하고 신라계가 항로를 따라가면 가장 먼저 닿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 [그림 ⑤] 이즈모(이즈모노쿠니)와 기나이 지방 |
더구나 앞서 본대로 6세기경의 고대 역사기록인 『구사기(舊事記)』의 「천손본기(天孫本紀)」에는 '모노노베
(物部)' 가문에 대한 상세한 계보가 밝혀져 있는데 이 가문이 바로 신라 신도 제사를 담당해온 씨족이죠.
이상을 보면 어린 텐무를 키우고 후일 성년이 된 텐무를 도와 정권창출의 가장 큰 도우미였던 오와리씨는 아무
래도 신라계 호족이거나 아니면 신라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죠.
여섯째, 칸무 천황은 나라(奈良)로부터 헤이안(平安)에 천도를 합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텐무 천황에 의해 혼탁
해진 천황가를 일신하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이 부분을 좀더 살펴봅시다.
보귀원년(宝亀 元年 : 770년) 쇼토쿠 천황(称徳天皇)이 붕어 합니다.
이 독신의 여제(女帝)에게는 후사가 없고 거듭되는 정변으로 인한 숙청으로 텐무천황의 자손인 황족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텐지 천황의 손자인 시라카베(白壁)왕이 천황으로 추대되게 됩니다.
당시 시라카베왕의 부인은 이노우에(井上) 내친왕(内親王)이고 이들 사이에 아들인 오사베(他戸)왕이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은 각각 황후와 황태자로 책봉되었다가 772년 천황을 저주한 대역죄로 모두 폐위되었고 775년 모두 변사
합니다. 이로써 텐무 천황의 황통은 완전히 끊어지게 됩니다.
이 사건은 모종의 정치적인 음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즉 시라카베 천황이 추대된 것은 오히려 텐무의 직계인 이노우에 내친왕과 오사베 왕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 두 사람이 전격적으로 제거되어버린 것입니다.
시라카베왕 즉 고닌 천황은 다른 부인인 야마토노니카사[화신립(和新笠)]와의 관계가 더욱 깊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유능한 맏아들인 야마베(山部) 왕에 대해 옹립하려는 시도가 이미 이전에 있었습니다.
33) 야마베왕은 처음에는 황태자로 책봉될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하고 그저 관료로서 출세하기 위해 시종(侍従)·
대학두(大学頭)·중무경(中務卿) 등을 두루거칩니다. 바로 이 분이 칸무 천황(桓武天皇 : 781~806)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텐지 천황계인 고닌 천황을 정점으로 텐무계(친신라계)인 이노우에황후와 백제계인 야마토노니
카사 비(妃)가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 시점에서 고닌 천황은 야마토노니카사를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텐무계의 조정에서 시라카베 왕을 천황으로 추대한 것은 모계라고 해도 텐무천황의 혈통을 받는 마지막 황족인
오사베(他戸)왕으로 하여금 천황위를 계승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시라카베왕은 그저 중간 다리 역할만 하면
되는 식이었겠죠. 그런데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통 부여계가 천황가를 확실히 장악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고닌천황·칸무천황의 주요한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텐지 천황과 텐무 천황의 수수께끼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다만 이 부분들은 아직까지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쌓여있기 때문에 제가 해드린 분석들이 반드시 타당하다고만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말씀드린대로 저는 부여계의 흐름을 중심으로 고찰하면서 그 의문점들을 살펴본 수준에 불과
합니다. 다만 이 부분들은 일본사의 전문적인 영역이므로 한국의 일반 독자가 헤아려 알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부분
이었습니다.
필자 주
(21) 이 부분에 대해서는 小林惠子『天武天皇의 秘密』(고려원 : 1990) 또는 小林惠子『白虎と青龍』
(文藝春秋社 : 1993) 참고.
(22)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小林惠子『天武天皇의 秘密』(고려원 : 1990) 182 ~187쪽.
(23) 直木孝次郎『日本の歴史ニ・古代国家の成立』(中央公論社 : 1965)
(24) 井上通泰「天武天皇紀闡幽」『歴史地理』53~54(1929)
(25) 西嶋定生「草薙剣と斬蛇剣」『江上波夫古希記念論集・歴史編』(山川出版社 : 1973)
(26) 前川明久「壬申の乱と湯沐邑」『日本歴史』230(吉川弘文館 : 1972)
(27) 천용사(泉涌寺)의 안내 책자에는 "사조천황(四条天皇)은 대사의 전생이라고 칭해져 인치(仁治) 3년(1242)
정월 천황이 붕어하였을 때, 산능(山陵)도 당시에 축조가 되었고, 역대의 많은 산능(山陵)들이 토우야마(当山)
경내에 설치되어 황실의 향화원(香華院)으로서 7백여 년간 특별한 숭경과 대우를 받는다."라고 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헤이안쿄의 초대 천황 칸무 천황, 그 아버지 고닌 천황, 그 직계의 조상님 텐지천황, 이 세 분의 천황이
영명전(霊明殿)에 특별히 오래전부터 모시고 있으며 역대 천황들도 모셔져 있다. 메이지 4년(1871) 9월, 궁중에
종묘가 축조 되고, 대궐의 불상이나, 제절의 존패가 모두 천용사 영명전에 이안(移安) 되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28) 고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는 『続日本紀』에 의거하여 桓武天皇 이후 山陵의 奉幣는 天智 天皇에서 시작
하여 나머지는 건너 뛰어 바로 光仁天皇이 되어있어 天武系의 諸天皇의 奉幣는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이후에는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29) 『日本書紀』巻第2의 一書(第6 第8)
(30) 1992년 교토부(京都府) 미야즈(宮津) 市에 있던 고모(籠)신사에서 전해오는 「籠名神神社祝部氏系図」와
「籠名神宮祝部丹波国造海部直等之氏系図」등이 국보로 지정되었고 이 전문이 공개되었다.
(31) 다만 『고사기』나 『일본서기』의 기록에는 아메노호아카리노미고토(天火明命)와 니기하야비노미고토
(饒速日命)를 같은 인물로 보고 있지 않다. 다만 『일본서기』에는 "天照国照彦天火明櫛玉饒速火尊"이라고 하여
이름은 보인다. 즉 아메노호아카리노미고토(天火明命)는 "天照国照彦火明命"이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헤이안 시대 초기에 『신찬성씨록』에서 모노노베를 천손족(天孫族)이 아니고 보통의 천신족(天神族 :
토착화된 호족)으로 기술되자 모노노베께는 이에 크게 반발하여 『先代旧事本紀』를 편찬하여 아메노호아카리노
미고토(天火明命)와 니기하야비노미고토(饒速日命)는 동일인이고 이로 부터의 후손들인 오와리씨와 모노노베씨는
동족이라고 주장했다. 현재는 대체로 이 견해들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安本美典
『古代物部氏と先代旧事本紀の謎』(勉誠出版 : 2000) 참고.
(32) 톳토리현(鳥取県) 이나바이치노미야우배(因幡一宮宇倍)신사에 「因幡伊福部臣吉志」라고 하는 고계도가
남아있다.
(33) 이전에 이미 시라카베(白壁) 왕의 옹립의 동지인 후지와라노요시쓰구(藤原良継)·모모가와(百川) 형제는 고닌
덴노의 서장자로 자질이 영매한 야마베(山部) 왕을 황태자로 세울 것을 요구하였다.
(김운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