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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를 위한 소멸의 역사
히잡을 쓰고 눈물 흘리던 여성의 사진 한 장을 잊지 못한다. 2015년, 난생 처음 투표를 한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의 감격스런 희열이 사진을 보는 이에게까지 전해졌다. 1893년 뉴질랜드를 시작으로 세계적으로 여성 참정권이 확산되기까지, 여성들은 달리는 말발굽 아래 몸을 던지고 단두대에 오르며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존재를 소멸시켜야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성들은 오직 ‘여성’이라는 이유로 목숨을 잃고 있다.
한국사회에 충격을 안긴 강남역 살인 사건이 그렇다. 30센티가 넘는 칼을 준비해 남녀공용 화장실에서 한 시간 반을 기다렸다가 먼저 들어온 남자 여럿을 그냥 보내고 처음 들어오는(모르는) 20대 여성을 수차례 찔러 잔혹하게 죽인 이유는 ‘여성’이라는 것이 전부였다. 경찰과 언론, 다수의 남성은 조현병 환자의 우발적인 범죄 사건으로 치부하기도 했지만, 생존의 위협을 느낀 많은 여성은 슬퍼하고 분노하며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을 촉발했다.
억압된 자들의 터져 나오는 목소리와 스스로 억압된 줄 모르고 살던 이들의 뒤늦은 분노,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자들의 불편함까지 뒤엉켜 한국사회는 요란하게 들썩인다. “이미 패권을 쥔 거 아냐?” 이미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은 빠른 속도로 번지고 있는 한국사회의 젠더 이슈를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다. 페미니스트들의 까칠함을 예로 들며 운동의 과격함과 담론 과잉을 지적하며 필요성을 부정한다.
그러나 이슈가 되었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이제 막 문제에 대한 ‘인식’이 시작되었을 뿐이다. 인식이 해결로 이어지려면, ‘여자’라는 이유로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적 차별이나 성 역할 고착화에 대해 좀더 면밀히 살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불평등한 노동시장, 임신과 출산, 육아에 뒤따르는 사회구조적 부당함은 새삼 말할 것도 없고, 일상 속에서 여성을 남자의 부속물이나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인식의 수준도 갈 길이 멀다.
몇 년 전 여자 승무원들의 바지 착용을 허용하지 않던 한 항공사에게 국가인권위원회가 바지 착용 허용을 권고한 적이 있었다. 달라붙는 치마를 입고 몸을 굽히거나 한쪽 무릎을 꿇거나 선반에 짐을 올리고 내리며 서비스를 제공하는 승무원들을 볼 때마다 불편했던 터라 잘 됐다 싶었는데, 이 기사에는 “망했다” “이젠 안 탄다” “바지가 더 섹시한데 잘 됐다” 등등의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현실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단순히 성평등이나 남녀 간의 권력 싸움으로 볼 수도 있지만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은 생존의 문제이며 한 인간으로 존립하기 위한 실존의 문제다. 비당사자가 ‘이 정도면 됐지’라는 건 근거 없는 판단이다. 그 도달 수준을 판단하는 것은 당사자일 수밖에 없다.
약자에서 약자로 세습되는 차별
어린 시절, 동네 슈퍼 막내딸이던 내게 맡겨진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생리대 배달’이었다. 직접 사러 가기가 “좀 그렇다”며 대문 앞에 서서 뒷집 언니가 손으로 네모를 그리면 신문지로 포장한 생리대 ‘후리덤’을 까만 봉지에 담아 언니 방으로 배달했다. 언니는 스파이처럼 양쪽을 살핀 뒤 물건을 건네받고는 옷장 맨 아래 서랍에 재빨리 집어넣었다. 아무도 그렇게 하라 가르친 적 없지만 초경을 시작한 후 나도 가방에서 생리대를 꺼낼 때면 양쪽을 두리번거린 후 재빠르게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이유는 몰랐다. 다만 내 언니와 동네 언니들 모두가 그랬으니까.
세상이 많이 변한 듯하지만 요즘에도 아픈 배를 움켜쥔 채 생리통이라 말 못하는 십대들을 보면서 생리, 임신, 출산, 모유 수유와 같이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일들을 터부시하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왜곡된 성 관념을 갖고 있는 일부 남성의 농락적 시선도 있지만, 여성 스스로 습득해온 성 고착화 영향도 클 것이다. 엄마가 딸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여자가 여자에게. ‘여자니까 (남자니까) 이래야 한다’는 성 통념은 좀 달라졌을 것 같은 젊은 세대 사이에도 꽤 깊숙하게 답습되고 있는 듯하다.
서울시교육청 학생인권교육센터에 접수된 사례를 보면 여학생은 생리통으로 조퇴를 하려면 보건교사에게 (혈흔이 묻은) 생리대를 보여주어야 하고, 검정 구두에 흰 양말을 신어야 하는 학칙 때문에 미끄러운 눈길에도 구두를 신고 다녀야 하며, 치마를 입기 싫지만 입학한 학교에 바지 교복이 없어 학교와 갈등을 겪기도 한다. 일상에서 ‘여자라서’ 받아들여야 하는 (이해되지 않는) 사회적 통념이 얼마나 많은가. 어려서부터 반복되는 이런 경험은 저항보다 순응을 기르기 쉽다.
이제는 성교육도 달라져야 한다. 남녀를 구분해 의례적으로 치러내던 예전의 성교육은 생물학적 성(sex)을 설명하는 것이 초점이었다면, 지금의 성교육은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사회적 성(gender)에서 출발해야 한다. 젠더에 관한 통념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다. 배 속에서부터 성별을 구분해 파란색 혹은 분홍색 출산용품을 준비하는 순간부터 사회적 성은 만들어진다. 옷부터 신발, 가방까지 핑크로 깔맞춤하길 좋아하는 다섯 살 딸아이를 보며 “한 번도 저렇게 가르친 적이 없는데” 하며 한숨 쉬는 친구를 보고 그만 웃고 말았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연두색 옷을 선물한 내게 “우리 애 딸인 건 알지?” 하며 웃던 5년 전 친구 모습이 생각나서다.
우리는 생각보다 깊숙이 사회화된 성을 의심의 여지없이 내 것인 줄 알고 살아간다. 어려서부터 “멋지다” “늠름하다” “씩씩하다”는 칭찬을 들으며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고 강한 행동을 하며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거나 (누군가를 지켜주거나 보호해야 하는 사람으로 훈련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경쟁하는 것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경험과 “예쁘다” “사랑스럽다” “참하다”는 칭찬을 들으며 얌전하고 조신한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경험을 통한 사회화는 개인으로서의 인간 존엄성을 해친다.
“10분만 더 공부하면 아내의 얼굴이 바뀐다.(남학생용)” “10분만 더 공부하면 남편의 직업이 바뀐다.(여학생용)” 작년 7월, 국가인권위에서 경고를 받은 학용품업체의 문구류에 적힌 문구다.1 해당 업체는 사과문을 내놓으면서 인터넷에 떠도는 학교의 급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해명했다. 역할에 대한 청소년들의 사회적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차별인 줄도 모르고 일어나는 무의식적인 차별이 더 큰 문제다. 다수의 남성, 혹은 여성은 자신이 성차별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 성차별적 문구로 논란이 된 학용품
두 개의 성에 갇힌 세상
젠더 문제를 ‘여성 인권’, 혹은 ‘양성 평등’으로만 도식화할 수 없는 것은 그 안에 더 다양한 형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미 성별이 정해진 채 태어난다고 생각하지만, 염색체나 생식기 구조상 남성으로도, 여성으로도 구분되지 않는 인터섹스(intersex)도 있다. 성별을 구별하는 것이 어려울 때 염색체 혹은 호르몬 검사가 등장하기도 한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서 선수의 성별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염색체 검사를 채택하는 것도 그런 사례 중 하나이다. 명확하게 양성으로 구분하고자 할수록 생물학적인 성별 표식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일상적으로 인간의 성별을 구별하는 근거는 성기 모양이나 염색체, 호르몬이 아니라, ‘남자답게’ 혹은 ‘여자답게’ 인식되는 행동 양식과 옷차림 등 문화적인 산물이다. 과연 나는 여성인지 남성인지 확신할 수 있을까. 사회적 성이라 불리는 젠더 정체성은 얼마나 다양하겠는가.
성평등 교육으로 유명한 스웨덴의 스톡홀름에는 ‘니콜라이 유치원’이 있다. 매년 300여 명이 입소를 기다릴 정도로 인기가 높은 공립 유치원이다. 이곳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 ‘한’(han, 그) 또는 ‘혼’(hon, 그녀)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성별을 구분하지 않는 ‘헨’(hen)이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한다. 아이들은 성별과 상관없이 원하는 대로 인형이나 블록을 갖고 논다. 치마를 입거나 바지를 입는 것 또한 성별이 아니라 아이의 선택에 달렸다. 처음부터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를 구별하지 않으니 스스로도 성별에 따라 어떤 옷을 입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없다는 걸 볼 수 있다고. 유치원 원장 로잘린2은 칠판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린 후 이렇게 말한다. “이 동그라미를 인생이라고 한다면, 이 안에는 희로애락과 의식주, 다양한 색깔 등 세상의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동그라미에 선을 긋고 여성의 것과 남성의 것으로 나눕니다. 당신은 자녀에게 인생의 절반만 주고 싶나요? 아이들이 전통적인 성 역할을 넘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사의 역할입니다.”3
블록 장난감을 만드는 레고사가 최근 여성 과학자 시리즈를 출시하게 된 것은 일곱 살 여자아이의 편지 한 통 때문이었다. “여자 인형은 집에만 있거나, 해변에 가거나, 쇼핑을 하고, 직업이 없다. 하지만 남자 인형은 모험을 하고, 일을 하고, 사람을 구하고, 심지어 상어랑 수영도 한다”면서 “더 많은 여자 레고 인형이 만들어지고, 그들이 모험과 더 많은 재미있는 일을 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실제로 과학계에 종사하는 여성의 비율이 이미 60퍼센트를 넘는데, 여전히 남성 중심의 장난감이 출시되고 있는 세태는 성 역할에 대한 통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근래 유럽에서는 요리 도구와 아기 인형을 가지고 노는 남아, 물총을 가지고 노는 여아 등의 모습을 담은 상품 카탈로그를 통해 장난감의 성별 구분을 없애고 어려서부터 고착화된 성 개념을 갖지 않도록 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4 어릴 적부터 ‘가부장적 직업관’과 ‘전통적 성역할’이 반영된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상상력과 미래마저 구금당하고 있진 않은지, 내 의지가 아니라 관습과 통념에 의해 만들어진 나로 살아온 것은 아닌지 살펴보는 일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질문과도 닿아 있을 것이다.
◁ 성 역할을 깨는 스페인의 한 장난감 카탈로그
우리는 좀더 편향적일 필요가 있다
젠더 감수성을 키우고 다양한 성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은 사회의 문란을 빚는 일도 아니고 양성 간에 우위를 점하기 위한 패권 싸움도 아니며, 다만 한 인간으로서 오롯이 존중받고 존중하려는 기본적인 욕구에 응답하는 일이다. 작년,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린 퀴어축제에서 성소수자들의 부모가 나와서 자녀를 따뜻하게 안아주었을 때, 그 모습을 보고 서 있던 사람들도 함께 울었다.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 채 숨죽여왔던 그 시간이 읽혀서다. 남자, 여자, 그 외 어떤 조건을 따지기 전에 모든 사람은 그 자체로 인정받아 마땅한 존재들이다. 남자라서, 여자라서 혹은 그 무엇이라서, 당위로 점철된 규정과 판단 속에 갇혀 정작 ‘나’로 사는 법을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억압된 자신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특정한 방향으로 사회화된 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젠더 교육의 목적일 것이다.
‘무엇’이라는 조건으로 이 사회에 횡행하고 있는 차별과 불평등을 아주 면밀히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통념과 오류를 쉽사리 발견하기 어렵다. “외줄 타는 광대의 부채는 언제나 몸이 기울어지는 반대편에 펼쳐진다. ‘평등하게’ 부채를 가운데에 펼치면 줄에서 떨어지고 만다. 사회가 기울어진 정도만큼 약자, 소수자의 입장으로 기울어져야 한다.”5 억압받는 이들이 어느 한쪽에 존재하는 한, 우리는 좀더 편향적일 필요가 있다.
장희숙 편집장 mindle160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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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벌없는사회를위한광주시민모임 등 5개 단체는 차별과 입시를 조장하는 문구류 50여 점을 적발해 국가인권위원회광주사무소에 조사 결과를 공개하고 진정서를 제출했다.
2 로잘린 원장은 니콜라이 유치원 외에도 이갈리아 유치원과 입양아들을 위한 스피이라 유치원 등 6곳을 18년간 운영해오고 있다. 대학에서 젠더 교육을 받은 교사 위주로 채용한다.
3 <'그'와 '그녀' 대신 '친구'를 가르쳐요>, 여성신문, 2013.10.13.
4 최근 유럽과 미국의 장난감 업계에선 휠체어를 탄 레고, 키가 작고 통통한 바비 인형, 시각장애인용 지팡이를 들고 있거나 얼굴에 커다란 반점이 있는 소녀 등 다양한 캐릭터 인형을 만들어 소비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5 인터넷 정보가 남성중심적, 여성혐오적이며 소수자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인터넷 사전 <페미위키> 인용. femiwiki.com
* 격월간 《민들레》 113호에 실린 글입니다.
첫댓글 가람이는 분홍색을 참 좋아합니다. 옷도 신발도, 마스크도 다 분홍색입니다. 하루는 분홍색 마스크를 쓰고 갔다가 '분홍색은 여자가 하는거야' 라는 소리를 누군가에게 듣고 소심해졌습니다. 부모가 아무리 집에서 '분홍색은 남자나 여자 구별없이 다 좋아할수 있는거야. 여자도 파란색 좋아할수 있는거야' 라는 소리를 해도 놀이터 친구들의 소리에 더 예민해지나봅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그동안 받아왔던 교육에 때문에 우리도 성별에 의해 역할을 나누거나, 고착화된 성개념을 아이들에게 교육시키는건 아닐까 생각들어 도움이 될 만한 글을 올렸습니다.
유익한 글 잘읽었습니다ㆍ
고마워요! 긴 글 발췌해서 옮기는 수고로 덕분에 좋은 글을 나누네요^^
관습과 통념에 의해 만들어진 나를
깨뜨리는 작업이 먼저 필요한것 같아요.
좋은 글 감사해요♡
놀이터친구들의 애기를 듣는다는 건 그만큼 신뢰가는 친구들애기를 듣고 싶은 맘과 자신의 좋아하고싶은 맘이 부딪친건 아닐까요^^
다 큰 우리도 그럴때가 있잖아요^^
가람이가 아주 잘 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써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