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암 이곤순 선생
李坤淳(Lee kon soon) 略歷
○ 忠南 保寧 大川生(1948. 8. 26)
○ 貫 : 洪州
○ 字 : 黃斯(Hwang sa)
○ 號 : 長巖, 한내(Han nae)
○ 堂號 : 古經室, 寶文閣, 以直軒, 尤一齋, 觀海樓
○ 一中 金忠顯先生 師事(書藝)
○ 忠南大學校 卒(1971)
○ 住所 : (우 : 305-762)
(自) 대전광역시 유성구 전민동 엑스포Ⓐ 503-201호
(우 : 301-840)
(事) 대전광역시 중구 중촌동 12-1 중도상가 409호(보문연서회)
Tel : (자)042)863-3036, (사) 042)256-7720, FAX : 042-256-7721
(HP) 010-3116-7726
<書歷>
○ 1968 제7회 한국신인예술상 입선
○ 1968 제1회 개인전
○ 1970 제1회 전국 대학미전 동상수상
○ 1971 제2회 개인전
○ 1971 한글학회 창립50돌 기념 전국휘호대회 문교부장관상 수상
○ 1973~ 제3회 충청남도 미술대전 초대작가(현)
○ 1973~1983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입,특선 9회
○ 1976. 3~ 숭전대 미교과 출강(서예)
○ 1980 제10회 충남도미전 서예심사위원장
○ 1981. 1. 일중선생서집 편찬위원
○ 1982. 7~ 동학사 승가대학 서예출강
○ 1983. 7 열상서단 이사
○ 1983. 12. 5~10 제7회 장암묵연전 출품
○ 1984~ `84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
○ 1985 한․일 서예교류전 출품(한국문화예술진흥원주최)
○ 1986 한․중 예술전 출품(대만 역사박물관)
○ 1986 충남대학교 문과대학 강사(서예)
○ 1988 국제현대서예전 초대출품(예술의 전당)
○ 1989 대전직할시 문화예술진흥위원
○ 1990 제2회 대한민국서예대전 심사위원(한국미협)
○ 1990 사단법인 국제서법 예술연합 한국본부 호서지회 창립회장
○ 1991. 5 한국40대 서예가전 출품(예술의 전당)
○ 1991. 7 한․마 국제전 출품(조선일보미술관)
○ 1992. 5 국서련. KBS공동주최 전국휘호대회심사
○ 1992. 9 한․중 현대미술전 출품(서울 예술의 전당)
○ 1992 한국서예 100인 초대전 출품(예술의 전당)
○ 1993 아름다운 한글서예 큰잔치전 출품(세종문화회관)
○ 1994 충청서단 이사장
○ 1994 제6회 대한민국서예대전 심사위원(미협)
○ 1994. 9 제21회 경북도미전 서예심사위원장
○ 1995 제7회 대한민국 서예대전 운영위원(한국미협)
○ 1995 대전광역시 서예대전 심사위원장
○ 1995. 8 국제서법 도쿄대전 초대출품
○ 1995. 11 한․중 서법교류전 출품(중국 베이징)
○ 1996. 9 제18회 경상남도 미술대전 서예심사위원장
○ 1997 초서와 전각 초대전(예술의 전당)출품
○ 1997 `97세계서예전북 Biennale 초대출품
○ 1998 대전광역시 문화상 수상(예술부문)
○ 1998 제9회 추사선생추모전국서예백일장 심사위원장(충남예산추사기념사업회)
○ 1999 `99 中國西安國際書法 篆刻交流展 出品
○ 2000 國際書法大展 招待出品(中國江蘇省國畵院)
○ 2001 제20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장(한글서예) 미협
○ 2001 전임대통령 및 현대서예가 100인 초대전 출품(세종문화회관)
○ 2001 보령예술상 수상
○ 2001. 10 대전광역시 문화상 심사위원
○ 2002. 5 월드컵 맞이 전국서예한마당 심사위원
○ 2002 국제서법예술연합전 출품(세종문화회관)
○ 2003 대전광역시 문화예술 진흥위원
○ 2003 제6회 국제서법교류 Seoul 대전출품(세종문화회관)
○ 2003 애국지사 어록 휘호전 초대출품(독립기념관)
○ 2004 한․중 교류전 출품(한국비림원)
○ 2004 초서정신전(서울물파아트센타)
○ 2004 한남대학교 사회문화대학원 겸임교수
○ 2004 만해한용운선생기념 서예대전 심사위원장(강원도민일보사)
○ 2005 서울 서예 Biennale 조직위원
○ 2006 고뇌하는 한국서예가 100인의 모습전 출품(경향신문사)
○ 2006 제7회 국제서법교류싱가폴大展 참가전시
○ 2007 한․중서화 100인전 초대전출품(中國雲南省민족박물관)
○ 2007 경상남도 미술대전 심사위원장(서예)
○ 2007 국제서법예술연합한국본부주최 전국휘호대회 심사위원장(88체육관)
○ 현 사단법인 국제서법예술연합한국본부 부이사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사단법인 일중선생기념사업회 이사
보문연서회 이사장
<編著>
○ 書法槪論(1971. 海東書藝硏究會刊)
○ 顔眞卿顔勤禮碑(1976. 寶文書藝院刊)
○ 한글궁체공부의 길잡이 구운몽(2007. 보문연서회 刊)
<論文>
○ 대전서예의 회고와 전망(1996. 대전문화)
○ 尤菴先生의 書體가 後代에 미친 影響(1999. 제5회 우암문화제 학술발표)
○ 서예란 무엇인가?(2000. 경남서단 초청발표)
○ 一中 金忠顯先生의 삶과 藝術(2006. 12 월간 서예문인화)
<金石文 및 題額>
○ 1980 松齋河先生遺蹟碑 遺蹟碑(전북 무주 무풍면)
○ 1980 靈奎大師碑(금산군 보석사)
○ 1982 미내다리 사적비(논산군 채운면)
○ 1984 殉國警察官諸公之墓碑(논산군 강경읍)
○ 1985 三․一抗日志士義擧追慕碑(보령군 주산면)
○ 1987 慕忠齋(논산군 연산면)額
○ 1988 沃坡李鍾一先生(3․1운동 33인 민족대표) 事蹟碑(태안군 원북면)
○ 1988 順興安氏忠義孝行紀績碑(청양군 화성면)
○ 1989 木尺橋由來碑(대전 은행동)
○ 1990 天一臺紀績碑(보령군 천북면)
○ 1990 義兵將規堂安炳瓚憂國血詩碑(청양군 화성면)
○ 1991 靑陽郡鄕約碑(칠갑산)
○ 1991 통일기원시비(계룡산 동학사)정한모시
○ 1992 將臺樓 額, 寶文山城復元碑(대전 보문산)
○ 1992 丙午洪州義兵戰蹟碑(청양군 화성면)
○ 1994 忠淸南道市政司, 東軒(공주시 웅진동)額
○ 1994 藏菴池憲英先生學德追慕碑前面字及記文(보문산 사정공원)
○ 1995 愛國志士求禮張公諱寅得紀蹟碑(영동군 매천리)
○ 1996 愛國志士塚碑(보문산 사정공원)
○ 1996 貞節祠(보령군 오천면)額
○ 1996 武愍祠額及建立記(대전 평촌동)
○ 1997 대한불교조계종 寧禪寺(대전시 도마동)
○ 1997 청풍당, 般若堂(경북울진불영사)額
○ 1998 尤菴史蹟公園額及造成記(대전 가양동)
○ 1998 密陽孫氏由來碑(대전 안영동 뿌리공원)
○ 1998 雙淸堂先生詩碑(대전 판암동 쌍청당)
○ 1999 대전사랑시비(대전시청내)
○ 1999 安平祠(홍성군 장곡면)額
○ 1999 文獻公屛溪尹先生神道碑(예산군 봉산면)
○ 2000 큰법당, 寂黙堂(경기도 부천)額
○ 2000 櫓村公頌詩碑(대전시 오정동)
○ 2000 崇祖敦宗表石(대전시 오정동)
○ 2000 벤처산업의 요람 대덕밸리 선포비(대전 엑스포과학공원)
○ 2001 和龍門, 靑山門(홍성군 김좌진장군사우)
○ 2001 洪州李氏始祖政堂文學贊成事公諱維城之墓碑(예산군 광시면 선경)
○ 2002 晩遯庵尹先生神道碑(유성구 반석동)
○ 2002 垂虹樓(태안군 안흥성)額
○ 2003 서해교전전적비(경기안중 제2함대 사령부)
○ 2003 朝鮮通訓大夫行司憲府執義兼書筵官雲坪宋先生諱能相之墓碑(대전 용운동)
○ 2004 羅州羅氏參判公派漢崗宗中靈慕苑碑(서천군 월포리)
○ 2005 愁離亭(부산시 기장군 철마면)
○ 2005 정한모시 「나비」시비(홍성군 한용운선생 생가 민족시비공원)
○ 2005 萬始門 必觀門(서울 경복궁)額
○ 2006 韓國儒林獨立運動巴里長書碑(충남홍성)
○ 2006 祖師殿(공주 마곡사)額
○ 2007 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全州李公諱旼之墓碑(공주시)
○ 2008 國立한밭대학교 初代總長 孝子松岩姜容植博士頌德碑(대전시 직동)
長巖 李坤淳 先生의 生涯와 藝術
朴洪晙(書藝家)
長巖 先生님과의 처음因緣은 1973년 여름쯤이다. 대흥동 성당 옆 2층 서실에서 처음 뵈었으니 10년이면 변한다는 강산을 벌써 세 번하고도 半을 넘기면서 선생님 주변을 맴돌았다. 지금도 年齒에 비해 젊어 보이시지만 당시 한동안 선생님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올백머리에 가운데 5代 5 가리마의 준엄하신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서언하다.
先生의 本貫은 洪州이신데 高麗文學贊成事公維城이 始祖이시고 朝鮮朝初議政府領議政을 지낸 文簡公 舒의18代孫으로 少時부터 家學으로 漢學과 書藝를 익히게 되었으니 大學時節 스승 一中 金忠顯 先生과의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흔히“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는데 先生의 藝術世界를 기술한다는 의미에서 이보다 더 적합하게 핑계를 댈 수 있는 말이 더 있을까. 담장너머의 돌아가는 모든 내용을 담장을 넘어야만 알 수 있듯이 先生의 藝術世界를 선생님만큼의 眼目도 없이 말할 수는 없기에 苦悶을 하다가 어려운 美辭나 稱辭를 늘어놓는 것은 오히려 선생님께 누가 될 듯싶어 주변에서 보고 느낀 것을 그대로 풀어 놓는 것이 가장 나은듯하여 그렇게 들어가기로 한다.
1970年代 初 大田의 書藝界에서 선생님의 역할은 하나하나가 새로운 개척의 길이였다 舊學과 新學의 연결에 전통과 현대와의 접목, 또한 새로운 사조와 구태의연과의 어려운 조화를 선생님은 그의 외모처럼 묵묵히 당신의 작업과 더불어 그 모든 것을 병행하셨다.
당시 國展의 입선은 지역 美術界에서는 지역 일간지에 특별한 뉴스요 충청미술계의 慶事이기도 했는데 선생님의 국전의 登壇은 지역서단의 존재를 중앙에 알리는 始發點 이기도 했다. 처음 선생님의 한글 作品이 중앙서단에 알려지긴 했지만 초기작품은 隸書 行書와 草書의 작품이 主宗 이었음을 당시 가졌던 展示會에서 볼 수 있다.
一中金忠顯先生과의 師事관계는 선생님의 作品世界를 더욱 격조 있게 만들게 된다. 또 한편으로 鶴山趙鍾業敎授門下에서 四書等漢學을 익혔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 들어 선생의 作品世界는 漢隸를 中心으로 펼쳐지는데 重厚하고 단아한 隸書작품을 국전과 중앙서단에 연이어 발표하신다.
80년대 중반 廣開土大王碑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그 평가위에 古碑들의 상호 장점을 융합한 선생의 글씨는 경향각지에서 독보적인 경지로 끌어 올리게 된다.
1984년 大韓民國現代美術館 招待作家로 초대된 이후 선생님의 글씨는 한글 판본고체와 한글 선비 書簡의 진흘림과 國漢混書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면서 한글궁체로 일관되던 한글서예에 새로운 방향 제시로 오늘의 한글 글씨의 다양성에 노력 하신다. 이후 선생님의 글씨는 변화를 가져오면서 90年代 들어와서 草書의 완성도에 힘을 加하셔서 以前에 한국 서단에서 볼 수없던 기교와 態위주의 초서에서 탈피하여 獨創的 이면서 强健하고 雄大流麗한 直筆書法으로 法自然한 草書 글씨를 선보이고 계신다.
1990년대 이후부터 國書聯 活動을 통한 韓國書藝의 국제화 작업에 진력 하시면서 일본 동경, 북경, 상해 등 수차례의 해외전에 출품하셨으며 현재도 국서련 한국본부 부이사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계신다.
예술가에 있어서 서예뿐만 아니라 수많은 각 장르의 예술가들이 모두 고전의 解釋을 나름대로의 바탕을 가지고 自己流의 것을 創案하지만 선생님의 일관된 흐름은 한번도 바탕에 古典을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이며 현대적인 기법, 새로운 풍이 주변을 휘몰아쳐도 한번도 本流 이외에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는 것이 모든 분들의 평인데 그것은 선생님의 타고난 품성인 듯도 하다.
實存哲學의 대가 마르틴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根源的 意味를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事物”과“道具”를 거론하는데 돌과 나무 같은 사물은 自足性과 自生性안에서 스스로 존재하는 반면 도끼나 신발 같은 도구는 용도성과 제작성을 본질적 특징으로 삼는다. 作品은 누군가 제작했다 점에서는 도구와 유사하지만 스스로 充滿하다는 점에서는 事物과 類似하지만 作品속의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통해 도구의 진리를 알게 해준다고 말하며 “예술작품 속에서 存在者(존재하는 것)의 진리가 作品속으로 스스로를 정리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예술작품이란 진리를 밝히고 세우는 것인데 예술작품을 통해 진리가 존재 하게 되며 “예술이란 진리가 생성되며 일어나는 하나의 행위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논지는 선생님의 늘상 말하는 “작가란 작품으로만 眞實을 말할 수 있고 평가받아야하며 作品에 서예 본질의 의미와 과정이 들어나야 하며 후대까지 생명력 있는 서예인의 정신이 함유되어 녹아 나야 되는 것인바 괴이한 표현이나 방식은 배움의 한계에 의한 선택으로 결정되는 것으로 평소에 쓰이지 않는 표현이나 독특하게 일부분에서만 통하는 방식의 작업은 서예 본연의 진실 표현을 회피하는 것이며 타 장르와의 질 낮은 영합은 배가 암초를 피해 나가는 것과 같이 삼가야 된다”라는 표현과 맥이 통하며 일면 더 나아간 동양의 실존적 의미의 “도구적 작품” 관을 보여준다.
선생의 훈도아래 開門의 연수가 거의 40여년을 육박하니 경향 각지에서 인정받는 작가만도 수십인데 하나같이 독특한 개성의 作品性을 가지는 것이 特長이다 그것은 왕허주의 論書勝語에서 말하는“닮되(擬似)字形의 似가 아니고 用筆의 似”를 강조한 선생의 敎育方法이 아닌가 느껴지며 문중의 서풍이나 분위기를 이탈하면 斯文亂賊같이 인식되는 한국서단의 풍토에서 보면 쉽지 않은 일이다
초기부터 지금껏 일관되게 깔려있는 선생의 작품의 내면과 외양의 멋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백제의 정신이요 백제의 마음이요 백제의 아름다운 미학인 “儉而不陋 華而不侈”(즉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여덟 자로 요약된다.
個人的으로 선생님의 결정이 잘못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수개월 또는 수년이 지난이후에 그런 깊은 뜻이 계셨구나 하고 무릎을 친 적이 한 두번 도 아닌바 그 모든 것이 恒時 法書를 强調하시면서 古法을 서예뿐만 아니라 생활속에서도 항시 녹여 “해괴한 創新이란 古法의 경지를 理解하지 못하는,古法의 경계를 저버렸기에 나오는 것이다”라는 선생님의 哲學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先生의 일가를 이룬 글씨의 토대를 이룬 皆景에는 일관되게 主張해온 세 가지 德目이 있는데
첫째가 學文性, 으로 唐孫過庭書譜句의 “博涉多優”라는 단어로 大別되는, 古法帖을 넓게 섭렵 하여야 優秀함이 많아진다는 의미로 讀書와 더불어 古典공부에 충실해야 하며
둘째는 條身性, 으로 大學 八條目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특히 書家 글씨의 正心修身을 재차 강조 하셨다.
셋째는 藝術性인바 法自然하는 藝術性의 바탕위에 溫故知新的創意가 必須 라고 主張하셨다
“博涉多優”와 걸맞게 先生의 古法帖의 涉獵은 거의 모든 古書를 망라한다.
楷書의 경우 顔眞卿勤禮碑, 家廟碑등 數種과 石文銘, 南北朝楷,行書의 王羲之集字聖敎序, 顔眞卿爭座位帖, 三表眞蹟, 蔡明遠帖, 新羅金生白月碑, 神行禪師碑, 尤菴同春筆法等 數種의 眞髓를 體得하며 草書의 唐孫過庭書譜, 于右任標準草書, 急就章, 懷素自敍帖, 張旭芝白帖等 다수의 筆意와 法理를 얻어 先生의 創作的 草書의 根幹을 이루며 隸書는 漢禮器碑, 張遷碑, 石門頌, 好太王碑等 篆書는 周石鼓文, 秦泰山刻石等을 考究習得하여 淸淨無垢한 筆法을 驅使하는 境地를 이루게된다.
이제 先生의 늘상 말씀 하시던 것을 몇 마디 옮기면
筆法은 마음에 뿌리를 두는 것이니 唐 柳公權의 “心正筆正”이 중요하며 글씨는 俗氣를 제일 禁物로 하나니 마음속에 맑고 깨끗한 氣韻이 서려야 高士의 脫俗한 胸中懷抱를 虛心坦懷하게 풀어낼 수 있으며 또한 精神으로 表現되는 것이니 精神이 살아야 生命力 넘치는 글씨를 表現할 수 있다. 나아가 學書者는 池水盡墨의 姿勢로 一日一跡이라도 쉬지 말고 自彊不息, 切問近思하여야 古人의 法度에 到達할 수 있고 또한 日日新으로 努力하면 創新의 快感을 맛 볼수 있다. 또한 先生은 어려서부터 글씨 쓰기를 좋아하여 흙 위에 많은 획을 그어 보았고 모든 生命力 있는 動植物의 形象에서 글씨의 活氣 넘치는 모습을 발견 하였고 天地山河의 변화하는 모습에서도 道法自然한 書法의 妙理를 얻었음을 일찍이 말씀 하신 바 있으시다.
先生의 耳順展을 여신다. 남에게 폐 끼치는 일이라 하시면서 그토록 個人展을 미루시던 선생님의 작품 펼침 말미에서 脫俗한 경지에 이르러 마음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70展을 또 기다려 보며 이제 선생의 교육자로 예술인으로서 고마움은 논어에 나오는 안연의 글로 대신 해 본다. 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 欲罷不能 旣竭吾才 如有所立 卓爾 雖欲從之 末由也已 (선생님의 덕은 우러러 보면 더욱 높게 보이고, 뚫어 파면 더욱 굳으며, 앞에 보인 듯 하다가는 홀연히 뒤에 있는 듯하다. 선생님께서는 차근차근 순차적으로 사람을 잘 유도해 계발시키신다. 학문으로 나를 넓게 해주시고, 예로서 나의 행동을 기틀 잡아주신다. 그만 배우려 해도 그만둘 수 없게 잘 가르쳐 주시므로 나도 모르게 나의 재능을 다해서 좇아가 배우나, 그래도 또한 앞에 우뚝 새로운 지표를 세워 놓으신다. 자꾸 좇아가지만 끝내 좇아 갈 방도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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