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200자 10.9매 13.9.27 게재
소설가 이원규의 인천 지명 考 9
소나무와 달빛 어우러졌던 송월동
도시재생사업으로 다시 윤기 나는 거리가 되기를
중구 송월동은 개항 이전 인천부 다소면 고잔리의 일부였다. 고잔리는 오늘의 신흥동, 송월동, 만석동, 북성동을 포괄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1903년 개항장 지구에 부내면을 신설할 때 거기 속하면서 만석동, 수유동, 화촌동, 신촌리로 나뉘었는데 그 이유는 국내에 같은 지명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고잔(古棧)의 어원은 이렇다. 해변에 돌출한 곳을 ‘고지’ 또는 ‘곶(串)’이라고 부르고, 곶 바로 앞에 우묵하게 패여 있는 곳을 고잔이라 불렀는데 ‘곶+안’으로 합성하여 만든 말이다. 그래서 리아스식 해안이 발달한 우리나라 서해안에는 많은 동명이소(同名異所)가 있었다. 인천에도 이곳 외에 남구 고잔동, 서구의 석남동, 그리고 서구 경서동까지 4곳이나 있었다.
1903년의 고잔리에서 분동된 네 마을 중 송월동은 만석동에 속했는데, 이 만석동은 1912년 일제가 전국 지명을 일본식으로 바꿀 때 송판정(松板町), 화방정(花房町. 현재의 북성동), 해도정(海島町. 현재의 월미도), 만석정(萬石町)으로 나뉘었다. 송판정 지역이 오늘의 송월동이다.
송판정(松板町)의 일본식 발음은 마스자카쵸다. 느낌으로는 일본 위인의 이름이거나 군함일 것 같으나 관련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1914년 일제는 송판정을 다시 1·2·3정목(丁目)으로 나누었다.
일본식 지명 송판정은 광복 후인 1946년 1월 1일 오늘처럼 송월동이라는 지명으로 바뀌게 되었다. 바다가 굽어보이는 이 언덕에 소나무들이 무성했고 그 사이로 보이는 달빛이 유명해서 그렇게 한 듯하다. 그러나 송학동이 그렇듯이 어딘가 일본 그림 냄새가 나고 화투의 1월패가 생각난다. 송판정 시대에 붙였던 1·2·3정목은 1·2·3가로 부르게 되었다.
송월동의 명물은 1가 10번지, 현재의 송월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사이토 마코도(齋藤實,1858-1936) 총독의 별장이었다. 인천 향토사 연구의 선구자인 최성연 선생의 <개항과 양관역정> 등 자료에 의하면 이 건물은 본래 독일 상인 파울 바우만(Paul Baumann)의 집으로 러일전쟁 직후인 1906~7년경에 건축되었다. 한일 강제합병 후 일본이 이 나라의 주인 노릇을 했고 1차대전 승전연합국 중 하나였으므로 패전국인 독일인의 재산을 적산(敵産)으로 몰수한 듯하다. 그러므로 사이토의 개인 재산이라기보다는 총독부 재산이었던 셈이다. 사이토가 3대와 5대 총독을 지내며 긴 세월 조선 땅에 군림한 탓으로 ‘사이토 별장’으로 불렸던 것이다.
사이토 총독은 1919년 부임하던 길에 노년의 독립투사 강우규 선생이 남대문역에서 던진 폭탄에 의해 죽을 뻔한 자인데 일본 자료를 보면 애처가로 소문났었다고 기록돼 있다. 해군제독이던 장인의 후광으로 출세가도를 달려선지 아내를 몹시 사랑했다는 것이다. 그런 에피소드가 인천의 근대사, 송월동의 역사와 연결되어 흥미롭다.
그의 장인은 일본 해군의 거물 이레 카게노리(仁禮景範, 1831~1900) 제독. 임오군란을 트집삼아 개항을 요구하며 군함을 몰고 인천으로 와서 협박한 장군으로 뒷날 해군대학 총장과 해군대신을 지냈다. 장인의 후광으로 출세해 총독이 된 사이토가 장인의 협박으로 개항한 인천의 항구 언덕 송월동에 있던 독일 상인의 저택을 몰수해 별장을 만들고 거기 앉아 인천 바다를 굽어보았던 것이다.
인천의 북쪽 해안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 전망 좋은 언덕에 사이토가 부인을 몇 번이나 데리고 왔는지 모르지만 그와 그의 장인과 인천의 악연을 생각하면 영욕으로 점철된 인천의 근대사를 곰곰이 떠올리게 된다.
사진을 보면 사이토 총독의 별장은 아담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8·15 광복 후 미군이 점유했고 6·25 전쟁 기간에 포화를 맞아 처참한 꼴이 되었다. 그러다가 1955년 송월국민학교가 신축되며 부지 일부로 들어갔다. 본래 신흥국민학교의 분교였는데 교사를 신축하며 독립했다. 송월학교는 주소가 전동으로 되어 있다. 전동과 송월동 경계를 타고 앉은 것이다.
송월동은 급격하게 팽창한 인천의 발전에서 소외된 지역 중 하나이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에는 인천전기회사(1906년 설립), 애경유지(1912년 설립), 조일(朝日)앙조장(1919년 설립) 등 회사들이 즐비하게 들어섰었다. 인천시가 도시재생 사업을 효과적으로 펼쳐서 다시 윤기가 나는 거리로 바뀌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