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집을 나선다. 집을 나서면 길이 있다. 길을 따라 걷다보면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 앞에 내린다. 그래도 글은 끝나지 않는다. 지하철을 타고 철길을 따라 사당까지 간다. 원주로 떠난단다. 남한강을 따라서 꽁꽁 언 채로 빨래줄에 널려있는 빨래감처럼 뻣뻣하게 옛날 자리를 지키고 있는 폐사지로 떠난다. 길은 폐사지까지 이어져 있다. 물론 폐사지에서 길은 끊기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 또 다른 새로운 길은 시작된다.
폐사지 답사는 걷는 것이 제격이다. 그것도 철저히 혼자서 걸으면서 풍경의 침묵을 누리는 것이 제격이다. 일상 속에서 존재하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거대한 벽과 그 벽을 은폐하기 위한 또 다른 표현인 장광설(長廣說)이 실재하지 않는 '풍경의 침묵'이야말로 진정 자연과 인간이 서로의 마음을 열고 허심(虛心)하게 나누는 대화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흐르는 강물처럼 유구한 역사와 자연을 배경으로 묵언(默言)의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폐사지로 떠나는 것을 즐긴다.
처음 답사를 다닐 때가 생각난다. 그 시절, 나에게서 답사의 의미는 '떠남'이었다. 그 떠남이란 일종의 '게구멍'같은 것일게다. 바닷가의 뻘밭에서 게가 옆걸음(그게 바로 게걸음이다)을 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살살살살... 슬금슬금... 게걸음을 치다가 사람이라도 나타난다면 게는 얼른 뻘밭에다 구멍을 내고는 숨어 버린다. 그러다가 사람이 지나가고 나면 게는 다시 예의 그 게걸음을 치면서 뻘밭을 걸어갈 것이다. 말하자면 게구멍은 게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집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숨는 도피처란 얘기다. 미답지로의 떠남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면서 패배한 역사의 반란을 꿈꿀 수 있었다. 그래서 훌쩍 집을 떠나 무턱대고 길을 나섰다. 남들이 좋은 곳이라는 얘기를 하면 무조건 찾아 가보고, 어디가서 누가 뭐라고 설명을 하면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눈동냥과 귀동냥을 하고, 그러다가 궁금증이 생기면 이책 저책을 뒤져 보기도 하였다. 그렇게 답사를 다닌지 4~5년이 되니 '답사는 아는 만큼 느끼고 느낀만큼 배운다'는 의미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답사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역사, 미술사, 문학,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등의 배경을 공부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셈이다. 바둑으로 말하자면 집 내는 법을 배운 정도라고나 할까.
욕망과 광기
나의 이러한 '길과 떠남의 미학'이어쩌면 욕망과 광기일지도 모른다. 사람에게 욕구와 욕망이 없다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을까?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욕망, 좋은 집을 갖고 싶은 욕망, 멋있는 옷을 입고 싶은 욕망, 예쁜 여자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 멋있는 남자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 높은 지위와 명예에 대한 욕망... 셀 수 없는 무수한 욕망이 우리 안에 꿈틀거리고 있다.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은 미친듯이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광기! 정말로 무서운 말이다. 이 광기라는 놈은 굶주린 하이에나와 같다. 광기는 내리막길을 곤두박질 치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와 같다. 절벽으로 굴러 떨어질 때까지 요놈은 멈출 줄을 모른다. 하지만 어쩌랴? 인간의 대지 위에 씌여진 모든 역사는 이성과 합리의 역사이자 욕망과 광기의 역사인 것을...
고개돌린 거북
폐사지라는 답사지의 특성 때문일까? 버스를 타고 가면서 이런저런 잡념들이 머릿 속을 빙빙 돌며 떠나지 않는다. 버스는 어느새 가남 휴게소를 지나 문막에 다다랐다. 문막에서 안창리로 접어든 다음에 버슬에서 내렸다.
일행은 버스에서 내려 삼삼오로 무리를 지어서 흥법사지로 걸어간다. 눈쌓인 향촌의 농로를 사각사각 눈 밟는 소리를 내며 걸어간다. 길 왼편으론 바닥이 드러난 섬강이 보인다. 이 섬강은 흥원창지에서 남한강과 합쳐질 게다. 길 오른편으론 농가들이 보인다. 흙담이 이쁜 옛스런 맛이 나는 집이며, 현대식 스라브집, 젖서와 한우를 키우는 우사, 흙벽이 안채보다 높이 솟은 창고, 그리고 마을 곳곳에서 컹컹 짖어대는 잡종견들... 이 마을이 정겨워서일까? 겨울답지 않게 날씨도 포근하다.
길을 한참 걷다보니 커다란 느티나무가 보이고 그 아래 비석을 등에 진 돌거북이 보인다. 비석의 주인공은 선조의 둘째 마누라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연흥부원군 김제남이다. 선조의 첫번째 마누라는 의인왕후 박씨였다. 그녀는 열 다섯의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되었으나, 마흔 여섯의 나이에 숨을 거두도록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래서 두번째 왕비가 된 신데렐라가 바로 인목대비 연안 김씨다. 그녀는 선조의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았다. 그러나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불행은 시작되었다. 아버지 김제남은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옹립 하려 했다는 이유로 1613년 사약을 받고 처형되었다. 아들 영창대군은 1614년 유배지에서 불에 쪄 죽이는 증살을 당한다. 인목대비는 서궁에 유폐된다.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 두어야 할 게 있다. 왕실 주변 이야기 위주의 역사만으로 우리의 역사를 보면, 광해군은 나쁜 불한당일게다. 그리고 인목대비는 불쌍하고 착한 우리편이라는 만화영화의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역사적 배경과 정치권의 권력투쟁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균형 잡힌 역사의식이 아닐까?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광해군은 폭군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최근에 일부 사학자들은 광해군을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된 군주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세상살이는 살아봐야 안다고 했던가?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했던가? 마지못해 살아가는 6년간의 세월이 흐른 뒤 인목대비는 복권된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것이다. 반정군은 광해군에게서 옥새를 빼앗아 인목대비에게 바쳤다. 하여튼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비석을 등에 진 돌거북은 특이하게도 뒤를 돌아보고 있다. 고개돌린 거북의 조각에 어떤 연유나 의막 있는 것일까? 내 생각에는 근처 문막읍 비두리에 남아있는 비신이 없는 귀부와 이수의 조각양식을 계승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왜냐하면 고려시대까지의 부도비 양식이 조선시대 들어와 신도비 양식으로 전승되었기 때문이다. 절집의 법당 앞에 세워진 석등이 사대부 묘 앞의 장명등으로 발전한 것과 같이 불교미술 양식은 조선시대 미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거북이가 왜 고개를 돌렸을까 궁금해 하던 나는 어느새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등에 비석을 진 거북이와 경주를 하던 토끼가 "거북아!"하고 부르니 거북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을까? 고개돌린 거북이에게 토끼가 하는 말 "그냥 한번 불러봤어!" 아니면, 이렇게 얘기했을 지도 모르지. "거부기 니 내 간 몬봤노?" 나의 상상력은 이렇게 가난하다.
흥법사지에서 다시 생각해보는 역사 바로 세우기
흥법사지를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탑비 대신 이수를 등에 지고 있는 돌거북이다. 원래 이 녀석의 등에는 진공대사의 탑비가 얹혀 있었다. 그러나 탑비는 네 동강이 났다. 그 옆에 진공대사 부도가 서 있었다. 이 석물들은 현재 엉뚱하게도 경복궁에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수탈해 가려다 실패하여 경복궁에 주저 앉게 되었다 전한다.
경복궁에는 진공대사 부도탑 말고도 수많은 문화재가 옮겨져 있다. 이번 답사지에 있었던 것만 해도 팔각원당형 부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전흥법사지 염거화상 부도탑(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부도탑은 도의선사 부도로 추정되는 진전사지 부도일 것 같다), 마치 페르시아 건축을 보는 것 같은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등이 경복궁에 있다. 이게 모두 다 문화적인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일본인들의 짓이다. 일본, 미국, 프랑스, 영국 등 소위 제국주의 열강이라 불리던 국가들은 제 나라의 문화적인 열등의식을 다른 나라의 문화재를 약탈해서 자신들의 박물관에 전시함으로써 그 열등감을 보상받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자신들이 약탈해간 문화재들을 원래의 나라들에 돌려 주고, 자신들의 약탈행위를 사죄함으로써 진정한 문화대국이 될 수 있음을...
요즈음 소위 '역사 바로 세우기'가 한창이다. 일제 식민 통치의 잔재를 일소하고 민족정기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해서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또 해야 할 일이 있다. 일제가 약탈해간 우리 문화재를 다시 찾아 오는 일, 일제에 의해 자리가 옮겨진 문화재를 제자리에 돌려 놓는 일, 그리고 더 중요한 일은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부일-친일 협력자들의 좌상을 온 국민 앞에 낱낱이 밝혀내는 일이다. 그것만이 친일파가 독립유공자로 둔갑해 있는 뒤집힌 역사를 바로 잡는 일이리라.
흥법사지에는 진공대사탑비를 받치고 있었던 귀부와 이수 말고도 다른 석불들이 더 있다. 고려시대의 양식으로 보이는 삼층석탑, 가람배치의 축을 이루고 있었던 축대와 건물지의 주춧돌들 따위가 그것이다. 또 절터 안에 있는 민가를 잘 살펴보면 주춧돌이라든지 장독대의 받침돌 등이 모두 절집의 석물들임을 알 수 있다. 민가 뒤편의 옥수수밭을 지나 산 중턱에서 앞을 보라. 멀리 섬강 너머로 천하를 놓고 견훤과 다루던 왕건이 올랐다는 건등산과 맞은 편의 견훤산성을 바라보는 눈맛 또한 아름답다.
그리고 삼층석탑에서 진공대사탑비를 바라보면, 탑비의 수호신인 양 우뚝 솟은 나무 위의 까치집이 그렇게 이쁠 수가 없다. 그러나 흥법사지의 아름다움은 그것만이 아니다. 잔설이 남아 있는 겨울숲의 아름다움! 이것이야말로 흥법사지를 더욱 빛내주는 아름다움 한줌이라 할 수 있겠다. 폐사지를 감싸 안은 겨울숲은 그곳을 찾는 이들에게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사랑 하나를 되살아 나게 하는 것 같았다.
폐사지에서 꾸는 꿈
-흥법사터에서
누구라고
어디 한 번쯤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사랑 하나쯤 없으랴?
절도 중도 없이 돌덩어리만 덩그라니 남은
빈 폐사지의 그 황량함과 쓸쓸함
나는
또 다시 꿈꾸네
잔설 쌓인 저 숲속 어디에선가
풋풋한 웃음을 머금고
그대가 내곁으로 다가와선
손을 내밀면 우리는
우리 둘이는
쓰러진 집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짐을 잃어 여의주를 뱉어내지 못하는
돌거북에게 비석을 다시 얹혀주고
집도 절도 없이 오갈 데 없는
중들을 여기저기서 불러 모은 다음
새로운 절 이름 하나 지어주고 나서
아직도 잔설이 녹지 않은 겨울 숲으로
바로 그 겨울 숲으로
두 손 꼭 붙들고 사라져 가는
그런 꿈을
자궁의 이미지 : 법천사지
폐사지의 느낌을 말이나 글로 전한다는 일은 벅찬 일이다. 폐사지는 풍경을 그대로 가슴으로 느껴야만 한다. 느낌은 그냥 그렇게 오는 것이다. 꽃이 피듯이, 꽃이 지듯이 그냥 그렇게...
법천사는 섬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양수리 혹은 합수머리)에 있다. 여기에 그 옛날 흥원창이 있었고, 거기서 조금 더 들어가면 법천사가 있었던 것이다. 남한강변의 폐사지와 남한강 물길을 따라 위치한 조창은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아직까지 이건 그저 의문일 뿐이다. 이것은 어쩌면 장구한 세월 동안 역사를 지켜본 풍경만이 아는 대답일지도 모른다.
진리(法)가 샘물(泉)처럼 솟는다는 법천사.
지금 법천사지에 남아있는 유물이나 유구는 지광국사 현묘탑비, 불두와 비로자나불신, 석등의 부재 등 그 주변의 석물들과 부도전의 주춧돌들, 부도전에서 언덕 너머에 있는 종각으로 추측되는 주춧돌들, 그리고 멀리 민가 사이로 굴뚝처럼 아스라이 보이는 당간지주가 전부다. 진리는 사라진지 오래 되었고, 생 또한 마른지 너무나 오래 되었다.
지광국사 현묘탑비를 바라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비를 받치고 있는 거북의 돌조각은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은 느낌이다. 임금 왕(王)자가 새겨진 등껍질이며, 주둥아리가 길쭉한 용머리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비스듬하게 돌로 받친 턱받침까지도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남포오석에다 글을 새기고 옆면에 정교하게 꿈틀거리는 용을 조각한 탑비는 더욱 빼어난 솜씨다. 이수 부분도 고달사지나 흥법사지, 거돈사지 부도탑비와는 다르게 한대의 석비 양식을 본뜬 복고풍이다. 안성 칠장사의 혜소국사비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법상종은 교종 계열의 종파로 화엄종과 더불어 고려 중기 불교의 양대 세력이었다.
우리나라 불교는 교종과 선종이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혼재된 형태로 발전하였다. 신라말에 선종이 도입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교종도 그 맥을 이어 나갔다. 천태종이 등장해 선교종을 통합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종이 유행하던 시절에도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미륵신앙이나 정토신앙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그렇기 때문에 선종 사찰에서도 포교는 미륵신앙이나 정토신앙, 관음신앙 등을 중심으로 하는 편법을 쓴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 절집은 선종사찰이었던 교종사찰이었던 상관없이 여러종파의 신앙을 수용하는 만물상이 되었던 것이다.
법천사지에 들어서서 지광국사 현묘탑비로 올라가다 보면 마치 자궁 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느낌을 받는다. 부도전에서 아래 절터를 내려다보면 이러한 느낌은 더욱 확실하다. 절터는 길다란 직사각형의 분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부도전이 있는 곳은 그 절터의 정기가 마치 한 곳으로 모여지는 듯 자궁모양으로 삐져 나왔다. 부도전에서 아스라히 보이는 건너편 산에서 절터를 내려다 보며 사진을 찍는다면 내 느낌을 확실히 보여줄 수 있으리라.
천년동안 거돈사를 지켜온 느티나무 아래에서
거돈사지에서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축대다. 축대 사이의 돌계단을 오르면 늘씬한 통일신라기의 삼층석탑이 눈에 띈다. 이 삼층석탑은 익산의 미륵사지 중앙탑지에서와 같이 높다란 석대를 쌓고 그 위에 탑을 세웠다. 실측 결과에 따르면 정면과 측면이 모두 10m로 정사각형이다. 원래는 목탑을 세웠으나 목탑이 탄 자리에 석탑을 다시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목탑지와 석탑지를 구분하는 방법은 발굴시 기초를 살펴보는 것이라 한다. 석탑지도 상당한 정도의 땅을 파서 돌과 마사토 등을 이용하여 기초를 다지지만, 목탑지의 경우 그 기초가 석탑지 보다 깊으면서도 더욱 튼튼하다고 한다. 지난번 익산지역으로 답사를 갔을 때 알았던 새로운 사실이다.
힘있게 하늘로 솟아오른 통일신라기의 3층석탑은 지붕돌(옥개석)의 반전이 심하지 않아 마치 백제탑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혹시 백제인의 후예가 되는 석공이 만든 탑은 아닐런지 궁금하다. 물론 전체적으로 감은사탑 이후의 간략화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양식으로 봐야 할 것이다.
탑 뒤로는 장대석 기단을 올린 법당지가 보인다. 장육상을 얹었을 것 같은 커다란 불상좌대와 주춧돌이 보인다. 지금 한창 발굴이 진행중인듯 이곳 저곳에 석물들이 흩어져 있다. 조금 더 위쪽의 절터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강원도 땅에 어디서 이렇게 넓은 절자리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전망이 확 틔였다. 멀리 느티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수령이 천년이라고 한다. 천 년 세월 동안 거돈사를 묵묵히 지켜온 느티나무다. 거돈사의 절집 배치는 봉정사나 부석사 같은 산지가람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대석단을 사용했다. 그러나 전반적인 느낌은 부석사나 봉정사보다는 양주 회암사지와 비슷한 느낌을 갖게 한다. 아마도 전형적인 산지가람에서 볼 수 있는 진입로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흥법사지, 법천사지와 마찬가지로 거돈사에도 부도탑비가 남아 있다. 고려 초기에 활약한 원공국사 승묘탑비가 그것이다. 용이라기 보다는 원숭이의 모습을 더 닮은 것 같은 거북이의 머리와 귀 뒷부분의 물고기 비늘 같은 조각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흥법사지나 법천사지, 고달사지 부도탑비와 비교해 봤을 때 조각 솜씨가 많이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비문의 내용에 의하면 원공국사는 천태종 계열의 승려였다고 한다. 원공국사 승묘탑은 아까 말한대로 지금은 경복궁에 있다. 원공국사 승묘탑비를 둘러보고 대열에 합류하니 폐사지에서 눈싸움에 사람들은 신이 났다. 나도 그 싸움에 끼어들어 눈을 한움큼 말아서 던져본다. 옛스님들도 눈이 오면 눈싸움을 했을까? 아니면 "오늘은 눈도 오고 하루 쉬자"하면서 눈 내린 것을 물끄러미 구경만 했을까?
기다림의 미학
한바탕 눈싸움을 하고 나서 마지막 답사지인 고달사로 떠나기 위해 버스를 탔다. 예서 고달사까지는 한시간 남짓 걸리므로 그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차내에서는 노래자랑이 벌어졌다. 그런데 즐거운 답사를 너무 시기했음인가? 눈이 얼어붙은 고갯길을 내려오다가 브레이크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트럭과 접촉사고가 일어났다. 차는 조금 망가졌으나 다행이 다친 사람이 없다. 이 사고로 인하여 아쉽지만 고달사지 답사는 다음을 기약해야만 하게 되었다. 역사 고달사지로 가는 길은 고달프다. 해질 무렵의 저녁놀을 바라보면서 각자 자신의 답사 소감을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사람들의 얼굴이 저녁놀 보다 더 붉게 물드는 것을 보면서 남한강을 떠났다.
원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남한강변의 답사를 마치면서 우리는 고달사지라는 그리움과 새로운 답사지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기다림은 그리움에 희망을 하나 더 보태는 일이다. 우리에겐 많은 기다림이 있다. 겨울을 이기고 돌아오는 새봄을 기다리고, 칠흙의 밤을 견뎌내고 먼동을 틔워내는 새벽을 기다리고,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이 먼길을 쩌난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부를 기다린다.
이 겨울 우리에게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겨울이 가고 곧이어 새봄이 돌아와 파릇파릇 새풀이 돋아나면 우리의 그리움과 희망도 새록새록 자라나리라.(1995년 1월)
첫댓글 이번 답사때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정말 고맙습니다.
살아가는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이해하는 것.....민들레홀씨되어 가 18번지라서 닉이 꽤 친근감 있게 다가옵니다. 올려주신 글 잘 읽었읍니다. 벌써 마음안에서 기다림이 고갤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