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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간]유진선, "내가 형택이와 붙었다면"
(포츠 2.0 기사중에서)
유진선, "내가 형택이와 붙었다면"
“네, 괜찮습니다.” 유진선(46)의 목소리를 듣고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첫 번째는 음색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젊었다. 40대 중반 남성의 통화음 같지 않았다.
이형택(32,삼성증권) 이전에 유진선이 있었다. 1980년대 유진선은 한국남자테니스의 간판이었다. 1986년 제10회 서울아시아경기대회 4관왕(단체전,단식,복식,혼합복식)에 오르며 테니스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라켓을 놓은 뒤 흐르는 시간 속으로 갑자기 사라졌다. 진실과 오해는 네트를 사이에 두고 끊임없이 영웅을 괴롭혔다. 그래서 20년이 다 되도록 그는 언론과의 접촉을 꺼렸다.
그랬던 유진선이 흔쾌히 인터뷰에 응한 것이 두 번째로 놀란 이유였다. 그에게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11월 12일 현대고등학교 테니스 코트에서 만난 유진선은 그동안 기억에 묻혔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갔다.
<얼마나 뛰어난 선수였나>
“백핸드 발리는 라켓을 더 돌리시고 스윙할 때 칼날같이 끊어야 합니다.” 유진선이 한 남자에게 테니스 레슨을 하며 발리 동작을 잡아주고 있다. 유진선은 몇몇 지인과 일반인에게 테니스를 가르치는 한편 동원대 레저스포츠학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시간은 오후 7시. 어둠이 깔리면서 코트에 조명이 켜졌다. 테니스를 배우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라켓이 공과 만나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코트 옆에 서있던 40대 여성이 레슨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유진선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기억할까. “자세히는 모르지만 예전에 금메달을 많이 딴 분으로 알고 있어요.” 여성이 알고 있는 유진선에 관한 유일한 정보였다.
그때 유진선의 울산대 1년 후배인 유지곤(44,휠체어테니스대표팀 감독) 씨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유)진선 선배, 대단했죠. 코트에서 그렇게 뛰어다니면서 공을 치는 선수는 본 적이 없어요.”
유진선은 185cm로 키가 크다. 테니스는 힘도 필요하지만 잔 근육도 많이 써야 하는 세밀한 운동이다. 파워도 뛰어나고 기술도 좋은 선수는 드물다. 그러나 유진선은 그랬다.
1985년 대우중공업 감독 시절 유진선을 지도했던 김성배 KBS 해설위원은 “유진선은 키가 큰데도 몸이 매우 유연했다. 특히 무릎의 움직임이 뛰어났다”고 회고했다.
삼성증권 주원홍 감독도 “장신이면서도 몸이 부드러운 것이 유진선의 강점이었다”고 설명했다.
테니스인들의 유진선에 대한 기억은 일치했다. “유진선은 테니스를 하기 위해 태어났다.”
유진선은 유연성을 타고났다. 증거는 유진선의 춤 실력이다. 유진선은 춤을 잘 춘다. 잘 추는 정도가 아니라 일급 댄서 수준이다.
“대학 때 춤이 좋아 동료들과 어울려 클럽에서 춤을 즐겼다. 각종 꺾기 동작을 비롯해 브레이크 댄스 등 못하는 게 없었다.” 그러나 숙소로 돌아가는 오후 11시는 철저히 지켰다.
그 무렵 KBS TV의 프로그램에 출연해 춤으로 상까지 받았다. 춤을 편향된 시각으로 보기도 하지만 유진선은 춤을 테니스와 연결했다. “춤을 추며 부드럽게 움직이는 근육들이 테니스에 큰 도움을 줬다. 음악의 리듬감도 테니스 플레이의 리듬감과 조화를 이뤘다.”
충남 서천중 1학년 때 라켓을 잡았으니 테니스를 늦게 시작한 편이다. 테니스 일급선수로 크려면 대체로 10년이 필요하다.
유진선은 여러 모로 불리했다. 출발도 늦었고 플레이 스타일상 코트도 맞지 않았다. 1970년대 후반 한국테니스는 클레이 코트 시대였다. 전영대, 전창대, 이우룡, 김춘호 등이 각축을 벌이며 테니스 붐을 일으켰고 송동욱이 그 뒤를 이었다.
유진선은 강력한 서브와 스트로크를 앞세워 선두그룹을 추격했으나 번번이 쓴잔을 들이켰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하드코트 바람이 불면서 유진선이 구사하는 힘의 테니스가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반 국비로 미국에 잠시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때 배운 기술과 이론이 테니스에 눈을 뜨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유진선은 1985년 전국체육대회와 국가대표 선발전, 실업그랑프리 대회를 휩쓸며 마침내 남자테니스 최강자로 올라섰다. 그의 별명은 ‘백보드’와 ‘폭풍 발리’였다.
“발리는 나의 주무기였다. 네트 앞에 서면 좀처럼 패싱샷을 내주지 않았다.” 유진선을 촬영하던 사진기자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여러 스포츠 선수 사진을 찍었는데 이렇게 눈빛이 강렬하게 빛나는 분은 처음 봐요.”
<1986년, 그리고 4관왕>
1986년 9월 열린 제10회 서울아시아경기대회는 유진선을 위한 무대였다. 금메달을 따느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몇 개냐가 관심사였다.
유진선은 처음에 단식만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 거는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한국대표팀은 최부길 감독을 사령탑으로 유진선 외에 송동욱, 김봉수, 노갑택 등이 팀을 이뤘다.
유진선은 먼저 단체전에 출전했다. 8강전에서 네팔을 연습경기 하듯 3-0으로 가볍게 따돌린 한국은 준결승전에서 1982년 제9회 뉴델리아시아경기대회 단식 금메달리스트 타릭이 버틴 인도네시아를 2-1로 힘겹게 꺾었다.
9월 25일 결승전에서 중국과 만난 한국은 복식에서 김봉수-송동욱 조가 유웨이-세자오 조에 졌지만 송동욱과 유진선이 단식에서 각각 마커친과 류수화를 잡아 2-1로 승리했다. 유진선의 첫 번째 금메달이었다.
하이라이트는 10월 1일 김봉수와 짝을 이뤄 출전한 복식 결승전이었다. “솔직히 불안했다. 나도 피곤했고 봉수도 좋은 컨디션이 아니었다. 류수화가 강해 자신이 없었다.”
류수화는 중국의 에이스였다. 195cm의 큰 키를 이용한 서브와 포핸드 스트로크가 위협적이었다. 시작은 불안했다. 유-김 조는 1세트에서 첫 번째 서비스 게임을 브레이크 당하며 3-6으로 졌다.
가까스로 2세트를 6-4로 이겨 승부는 3세트로 넘어갔다. 마지막 세트는 타이브레이크가 없다. 무조건 2게임 차가 나야 경기가 끝난다. 승부는 쉽게 가려지지 않았다.
오후 2시에 시작한 경기는 오후 5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올림픽공원 테니스 코트에 불이 켜졌다. 30번째 게임 때 위기가 왔다. 14-15로 뒤진 채 맞은 유진선의 서브게임인데 스코어는 0-40. 트리플 매치포인트로 몰렸다.
라켓이 한 번만 삐끗하면 패배였다. 유진선은 그때를 이렇게 떠올렸다. “지금의 태극기와 당시의 태극기는 뭔가 달랐다. 그때 태극기에는 어떤 정신 같은 게 있었다. 나라를 위한다는 사명감이랄까. 온 정신을 서브에 집중했다.”
같은 시각 유진선의 어머니 유순례 씨는 점쟁이와 TV로 아들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점쟁이는 유진선이 벼랑 끝에 몰렸는데도 여유만만했다. “난 테니스는 모른다. 그런데 점괘에 금메달 4개가 보인다. 걱정하지 마라.”
유진선은 15-40에서 듀스를 만든 포인트를 지금도 기억한다. 첫 번째는 중국 조의 리턴 실수였고 두 번째는 네트를 맞고 들어온 공을 엉겁결에 발리로 넘겼는데 그게 중국 코트에 꽂혔다.
그때 유진선은 “아, 우리에게 행운이 따르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긴장한 쪽은 중국이었고 자멸한 것도 중국이었다.
게임스코어 15-15를 만든 유-김 조는 32번째 게임에서 김봉수가 통렬한 서브 에이스로 매치포인트를 따며 17-15로 3세트를 잡았다.
금메달이 확정되자 김봉수는 유진선에게 달려와 뜨거운 포옹을 했다. 같은 시각 유순례 씨도 점쟁이와 함께 덩실덩실 어깨춤을 췄다. 절망적인 상황을 딛고 극적인 승리를 따낸 3시간 14분의 혈투는 한국테니스의 명승부로 남아 있다.
브레이크 없는 유진선의 금메달 행진은 계속됐다. 유진선은 다음날 단식 결승에서 김봉수와 우정의 대결을 벌여 2-1로 승리했다. 혼합복식 결승에서도 이정순과 짝을 이뤄 중국의 유웨이-중니 조를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시아경기대회 4관왕의 탄생이었다. 유진선은 4관왕이 되면서 국민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했다. “식당을 가도 유진선, 클럽을 가도 유진선이었다. 팬레터와 선물이 너무 많아 차로 여러 차례 실어 날랐다.”
여고 3학년생이던 유진선의 한 팬은 유진선의 얼굴을 보겠다며 무작정 집으로 찾아왔다. 만나주지 않으면 학력고사까지 포기한다고 했다. 결국 여고생의 어머니가 유진선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제발 우리 딸 좀 만나주세요. 공부할 수 있게 마음을 잡아주세요.”
<아웃사이더>
유진선의 상승세는 아시아경기대회가 끝나고도 꺾이지 않았다. 유진선이 이끄는 한국은 1986년 10월 일본을 27년 만에 꺾고 세계 16강이 겨루는 데이비스컵 본선 출전권을 처음으로 얻었다.
유진선의 폭발적인 서브는 여전했고 네트 앞에서 펼치는 빠른 움직임도 살아 있었다. “그땐 테니스를 치면 흥이 났다. ‘이런 게 날아다니는 거구나’라는 실감이 났다.”
그러나 아시아경기대회에서 15일 동안 44세트, 데이비스컵 예선에서 3일 동안 10세트를 치르며 유진선의 무릎은 서서히 나빠졌다.
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둔 6월과 7월 사이 40일 동안 이어진 아시아 순회 5개 대회에서 발가락이 부르트고 염증이 생겨 도저히 경기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시아경기대회에 나섰다.
무릎 상태가 악화된 유진선은 1988년 서울올림픽부터 하강곡선을 그리다 1990년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를 마치고 1년 뒤 은퇴를 선언했다.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 때 벌어진 말하지 못할 사건이 은퇴에 영향을 미쳤다.
“평생 입을 다물어야 할 문제다. 어쨌든 나는 신의를 지키고 싶었다.” 유진선은 유니폼을 벗은 뒤 테니스계의 아웃사이더가 됐다.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유진선은 한국테니스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무엇이든 모범이 돼야 한다는 게 짐이 되기도 했다. “조금만 다른 길로 가려고 하면 ‘네가 누군데, 유진선인데’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1989년에는 골프를 하려다 주위의 시선 때문에 그만뒀다.” 훌쩍 배낭여행도 떠났다. 1994년에는 TV에 출연해 방송을 진행했다. 말주변이 뛰어난 유진선이다. 그런데 그게 또 문제였다.
“TV에 출연하니 ‘유진선이 이제 딴따라로 가냐’는 말을 들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공부를 하자고 마음 먹었다.” 유진선은 1999년 미국으로 가 테니스 공부를 하면서 홍다정, 임경식의 개인코치를 했다.
그러나 유망주를 어렵게 키우면 그들은 다른 곳과 계약했다. 2002년부터는 2년 동안 중국대표팀을 맡았다. 문화적인 차이가 커 지도하는 게 쉽지 않았다.
2004년 12월 한국으로 돌아오자 여기저기서 감독직 제의가 들어왔다. 그러나 유진선은 이런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가운데 무리하게 선수를 키울 수는 없다. 그러다 선수가 성장하지 못하면 ‘유진선이 별거 아니다’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테니스계에 발을 들여 놓지 않는 이유다.”
유진선은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를 마치고 프로로 진출하지 못한 것을 가장 아쉽게 생각한다. 당시 유진선은 일본 소니의 에이전트 폴 라루세에게서 “10억 원을 줄 테니 일본 프로테니스로 오라”는 제의를 받았다.
1980년대 중반 10억 원이면 엄청난 돈이었다. 그러나 일본 진출은 무산됐다. 당시에는 국제대회에서 거둔 우수한 성적으로 병역 면제 혜택을 받은 선수는 5년 동안 해당 분야에서 뛰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사실상 (해외진출을)하지 말라는 거였다. 나는 큰 무대로 가고 싶었다.”
<오해와 진실>
테니스계를 떠난 뒤 유진선에게는 괴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테니스계의 한 인사는 “유진선은 모함과 시기, 질투의 희생양”이라고 말했다. 여러 소문에 대해 유진선이 해명했다.
유진선은 노름에 빠져 살았다?
대표팀 시절 선수들은 훈련이 끝난 뒤 숙소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고스톱과 카드놀이를 했다. 돈이 없는 선수들에게 최부길 감독이 팀 워크를 위해 조금씩 돈을 주면서 벌인 작은 판이었다.
이따금 오후 11시가 넘기도 했지만 시간이 늦어지면 술을 먹지 않았다. 외국 테니스대표팀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단순한 놀이였지 노름은 아니었다.
술 때문에 선수 생활을 망쳤다?
클럽문화를 좋아했고 춤을 잘 췄다. 그래서 “저 XX, 춤을 저 정도로 잘 추니 얼마나 놀았겠냐”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러나 나는 술을 못 마신다. 집안 내력이다. 술을 조금만 마셔도 몸에 두드러기가 난다.
여자가 많았다?
1987년 결혼해 1990년 이혼했다. 혼자 살고 있다. 결혼생활 당시 말도 안 되는 소문에 시달렸다. 전화기를 뽑고 살아야 할 정도였으니 같이 살면서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결혼한 게 문제가 된 것 같다. 어느 곳을 가든 (여자가)꼬였다. 다정다감한 성격이어서 여자를 잘 내치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오해를 받았다.
몇몇 기자는 “유진선이 여자가 몇 명이니, 술집에 가서 어땠다느니”하는 등 부풀려진 내 사생활만 파헤쳤다. 그래서 나를 모르는 세계로 가서 살고 싶었다. 평범하게 사는 게 정말 힘들었다.
선배에 대든다?
선배의 행동이 정도가 아니라면 “아니다”라고 이야기했다. 한 번은 실업팀에서 팀을 재건해야 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선배들이 나 때문에 물을 먹을 것 같으니까 단합해서 “유진선이 모든 자리를 차지하고 감독을 하려고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래서 장충코트에서 대놓고 선배들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나간다. 잘 먹고 잘 살아라.” 그 뒤로 “유진선이 저 XX만 나타나면 진실만 말하는데 저런 놈이 감독하면 큰일 난다”는 말이 퍼졌다.
테니스계 외곽만 돌 것이다?
현재는 어쩔 수 없다. 주위 분들이 “네가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테니스계로)들어가라”고 하는데 나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내가 테니스계에 들어가면 혁신의 바람을 일으킬 것이고 물러날 사람이 많다.
변화의 시기를 찾으면서 내실을 다져야 할 때다. 나는 비굴하게 살고 싶지 않다. 4천 원짜리 설렁탕을 먹으면 먹었지 400만 원짜리 술상을 받고 싶지는 않다.
어느 기업과 연계해 대규모 테니스 아카데미 프로젝트를 계획해 실행단계까지 와 있다. 나중에 후배들에게 그늘이 되고 열매를 줄 수 있는 큰 나무가 되고 싶다.
전두환과 이명박
“뭐야, 미쳤냐. 지금 방송을 끊어?” 유진선이 출전한 한국과 중국의 1986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 테니스 남자복식 결승전 3세트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방송사는 정규방송 관계로 중계를 끊으려 했다.
그런데 청와대에서 급하게 전화가 왔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뒤 중계가 이어졌다. 유진선은 전두환 전 대통령과 아시아경기대회 전부터 안면이 있었다. 청와대에서 같이 테니스를 치기도 했다.
유진선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분을 욕하는 사람이 많지만 나는 멋진 남자라고 생각한다. 리더십이 대단했다. 테니스를 화끈하게 쳤다. 특히 포핸드스트로크를 잘 쳤다.”
유진선은 백담사까지 찾아간 적이 있다. “그때 그분이 말했다. 지금은 테니스를 못 치고 배드민턴만 치고 있다. (테니스는)나중에 치세나.”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의 인연도 있다. “어느 인사를 통해 알게 돼 남산 실내테니스장에서 가끔 테니스를 같이 쳤다. 테니스를 무척 좋아하셨다. 그게 오해의 불씨가 된 것 같다. ‘황제 테니스’는 절대 아니었다. 이상하게 몰고 가려는 사람들 때문에 고소를 하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이형택과 맞대결을 했다면
유진선은 인터뷰 도중 테니스 중계에 잠시 눈길을 돌렸다. TV에서는 세계랭킹 1위 로저 페더러(26,스위스)가 경기를 하고 있었다. 유진선이 좋아한 선수는 존 매켄로(48,미국)다.
“매켄로는 경기를 재미있게 했다. 화를 낼 때는 화를 내더라도 멋진 플레이를 했다. 요즘 선수들은 로봇 같다.”
문득 전성기의 유진선과 이형택이 맞대결을 했다면 어땠을까 궁금했다. ‘과거 최강’과 ‘현역 최강’의 한판 승부다. 유진선은 먼저 이형택을 칭찬하며 말문을 열었다. “(이)형택이가 이룬 성과가 뿌듯하기만 하다. 형택이는 발놀림이 좋다. 스피드도 있고 체중을 제대로 실어 공을 때린다.”
맞대결 결과를 어떻게 보느냐고 다시 묻자 유진선은 미소를 지었다. “3년 전인 42살 때 중국대표선수들과 경기를 해도 5-5로 팽팽했다. 전성기에 형택이와 싸웠다면 서로 자기가 이길 것이라고 하지 않았겠나.”
유진선은 동시대 인물이 아니라 비교가 불가능하지만 “좋은 경기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세계랭킹 170위권까지 올라갔는데 그때는 해외 테니스에 대한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형택이는 뛰어난 선수지만 나도 내 장점을 최대한 활용해 경기를 하면 백중세가 될 것 같다.”
이형택을 지도하고 있는 삼성증권 주원홍 감독은 “유진선은 체격조건도 좋았고 재능도 뛰어났다. 기술적으로 형택이보다 나은 점도 있다. 시대를 잘못 만난 것이 아쉽다. 요즘의 시스템이었다면 충분히 세계랭킹 100위권에 들어갔을 선수다. 가상대결에서는 형택이의 손을 들고 싶다”고 말했다.
유진선은 이형택과 관련해 무거운 말도 했다. “형택이가 나중에 은퇴한 뒤 나처럼 암투에 빠져 좌절을 겪는다면 그땐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형택이가 계속 잘하기를 기도한다.” <현석 기자>
첫댓글 이제는 대학교수님으로 SBS 테니스 해설위원으로 재기에 성공했더군요, 늘 않좋은 소식만 들리더니 ... 앞날의 무궁한 발전을 빌어 봅니다.
형님 친구분 이라면서요...저도 유진선 선배님과 4개월 정도 합숙 훈련 함께 했었지요 다행입니다..잘 풀릴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