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 길동무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고전 15:19)
바울은 만약 부활이 없다면 자신의 삶은 가장 어리석고 불쌍한 삶이 될 정도로 심한 고난을 선택했을 때, 그는 그런 중에도 깊은 그리고 지속적인 기쁨을 추구하고 있었는가? 이 질문은 사실 그 자체로 대답을 포함하고 있다. 만약 바울의 고통스런 삶의 선택을 불쌍한 것이 되게 하지 않고 도리어 칭찬할만하게 하는 길이 부활뿐이라면, 그의 고난을 견디게 하고 또 견딜 능력을 주는 것은 부활에 대한 그의 소망과 추구다. 이것은 바울이 말한 바와 정확히 일치한다. 실제로 그는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기 위하여(빌 3:10-11) 일상적인 모든 인간적인 특권들을 배설물로 여겼다. 그의 목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할 것을 보장받기 위해 사는 것, 즉 고난을 받는 것이었다.
왜 부활을 위해 고난의 삶을 사는가? 이는 부활은 몸을 입고 영원히 그리고 온전히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울이 가진 소망의 중심이었다. "내가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함이다"(빌 3:8).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바울의 가장 큰 열정이었고 그가 한 모든 일의 목적이었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유익! 유익! 이것이 그의 삶과 고난의 목표다. 바울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바랐다. 그것이 훨씬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빌1:23). "훨씬 좋은 일"은 이타적 동기가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 희락주의의 동기다. 바울이 원하는 것은 그의 삶에 가장 깊은 그리고 가장 오래도록 지속되는 만족을 주는 것, 즉 영광 가운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이었다.
하지만 영광 가운데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그에게 가는 것으로만 만족할 수 없다. 그분의 영광이 가진 정점은 이것이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 5:9). 만약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자비의 절정이라면 그것을 자신의 무한한 유익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사적인 쾌락을 위해 살 수 없다. 그리스도의 오른편에 있는 즐거움은 공적인 즐거움이고, 공유하는 즐거움이고, 공동체적 즐거움이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 말할 때, 그의 해는 모두 다른 이들을 자신과 함께 그리스도에게로 이끌기 위한 해였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 2:17). 고난으로 그의 삶을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함이었지만,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자비를 칭송하는 열방의 믿음을 얻기 위해서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