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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요한복음 공부 제9강
* 말씀 : 요한복음 9:1-12
* 요절 : 요한복음 9:5
세상의 빛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5)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맹인을 도우십니다. 이 사람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습니다. 불가항력적인 일이었고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운명을 바꿔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딛고 일어나고자 하는 소원과 함께, 어떻게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1-3)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맹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시니 제자들 역시 그 맹인을 유심히 쳐다봤습니다. 그러자 그간 예수님을 따르면서부터 생기기 시작했던 의문들이 다시 들고일어났습니다. 왜 세상에 이렇게 불행하고 비참한 일이 생기는가? 어떻게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는 불가항력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누구는 눈뜨고 태어나고 누구는 눈 못 뜨고 태어나고, 왜 세상은 이렇게 불공평한가? 그들은 무거운 마음으로 입을 열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이니까, 그의 부모이니이까?”(2)
사실 “세상에 왜 불행한 일이 생기는가?” 하는 질문은 인류의 가장 오래 된 질문입니다. 부처님도 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가출했고, 니체도 그 때문에 고뇌했습니다. 어떤 이는 그게 다 전생의 업보라 하고, 팔자소관이라고도 하고, 또 “하나님은 죽었다”고 외치기도 합니다. 또 부모를 원망하고 세상을 욕하는가 하면 “모든 게 내 탓”이라며 비를 맞고 쏘다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고방식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 모든 일들이 불행한 일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운명적이다, 불가항력적이다, 평생 동안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3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이 말씀을 볼 때 먼저 예수님은 그가 맹인 된 것을 운명적이거나 슬픈 일로만 보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그를 맹인으로 태어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맹인으로 나게 하신 것은 그를 징벌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나타내고자 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그가 맹인 된 것도 비참한 일이 아니라 의미 있는 일이요, 또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불행이나 비참한 일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맹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불행하고, 눈을 환하게 뜨고, 안경까지 끼고, 거기다 쌍꺼풀까지 있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부모님 잘 만나고, 좋은 학교 나오고, 든든한 직장에서 일하고, 넓은 평수의 집에서 살고, 비싼 차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놀라운 세상’이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한 시각장애인 할아버지를 보았습니다. 그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조금도 시각장애인 같지 않았습니다. 동네를 돌면서 여기는 노인정, 여기는 누구네 가게, 하면서 취재하는 사람들을 안내까지 했습니다. 그는 특히 칼이나 낫 등을 잘 벼르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그가 시장이나 동네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칼이나 농기구 등을 가져 와서 그의 앞에 늘어놓습니다. 그러면 그가 손으로 날을 만져가면서 숫돌로 그것들을 벼르는데, 얼마나 능숙한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시각장애인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고서도 그는 전혀 돈을 받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남을 돕는 것이 그간 사람들에게 도움 받은 은혜를 갚는 길이고(시각장애인 되고서도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게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자신이 사는 보람이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돈은 토종꿀을 팔아서 법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데도 앞산 여기 저기에 꿀통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꿀통 놓은 자리를 정확하게 찾아다니는 것도 신기하고, 토종꿀 한 조각을 먹어보고는 “와, 꿀맛이야…” 하면서 행복하게 웃는 모습에 저도 절로 웃었습니다. 제가 그에게 더욱 감동한 것은 그의 부인과의 깊은 사랑입니다. 그의 부인은 다리를 저는 장애인입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눈입니다. 부인이 밥과 그릇 앞에 고추장, 겉절이, 젓갈 등을 정해진 순서에 따라 늘어놓으면 할아버지는 맛있게 먹습니다. 동네를 산책할 때는 할아버지가 부인의 손을 잡고 따라가지만, 산을 오를 때는 할아버지가 부인의 손을 끌고 올라갑니다. 그는 다리 저는 부인의 재활을 위해 시간을 정해놓고 산에 오릅니다. 그는 자기와 결혼해준 부인이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 같았습니다. 두 사람 장애인에게 얼마나 사랑과 행복이 가득한지, 만날 지지고 볶는 잘난 부부들을 생각하며 잠언17:1 말씀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는 성경구절이 생각났습니다. 사람의 행복과 불행이 물질이나 장애의 유무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습니다.
5장을 공부하면서 얘기했던 닉 부이지치, 그의 다른 얘기를 하겠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하나님이 전능하시니까 자신에게 팔다리가 생기게 해 주실 것을 믿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 믿고 신발까지 사놓았습니다. 그러나 팔다리는 생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회의가 생겼고, 삶에 대한 절망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던 중 스물 일곱 살 된 어느 날 문득 깨닫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가 구십 살까지 살다가 죽은 다음 하나님 나라에 가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는 서늘한 얼굴로 이렇게 말씀하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너에게 팔다리가 없었으면 스물 일곱 살에 큰 일을 할 수 있었을 덴데, 네가 팔다리를 갖게 되었기 때문에 너는 구십 년이나 살았지만 겨우 너의 믿음 하나 지키고 끝났구나.” 이를 깨닫자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장애를 통해 나타내시고자 하는 일을 찾기 시작했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큰일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그에게는 두 남동생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건강하고 또 잘들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닉 부이지치에 비해 그저 그런 삶을 살뿐입니다. 누군가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라”고 말했는데, 닉 부이지치와 그의 동생들 얘기를 생각하면 정말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사람의 행복과 불행이 환경과 조건의 좋고 나쁨에 있지 않습니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불행하고, 정상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크고 사람이 많은 센터가 좋고, 작은 개척센터라고 힘들다는 것도 아닙니다. 모두가 ‘편견’입니다. 우리 각자가 우리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살 때 거기에 의미가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깨달음과 믿음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2.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여야 하리라 (4-1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죄 지은 사람을 찾아 벌이나 주고 다니시는 분이 아니라 일을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깨우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5:17에서도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불쌍한 맹인을 보고 심각한 얼굴로 원인을 분석하고 책임 소재를 밝히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자못 철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개똥 철학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4절을 봅시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사람이 일을 하지 않고 생각만 하면 생각이 어두워지고 무기력해집니다. 일을 해야 생각도 건전해지고 힘도 납니다. 더구나 사람이 항상 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밤이 오면 일하지 못합니다. 또 늙으면 일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사람은 죽게 되고, 죽으면 정말 일할 수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사람에게 일할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팔자타령을 늘어놓을 시간이 어디 있고, 누구를 원망하며 술을 마시거나 슬픔을 씹고 다닐 시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 음란한 영상 쳐다보고 있거나 게임이나 하면서 죽일 시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일할 때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물론 생각은 해야 합니다. 일상을 떠나 조용히 생각할 기회도 필요하겠지만 대부분은 부지런히 일하면서 생각도 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젊습니다. 하루로 말하면 한창 대낮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맹인 거지를 보면서 제자들은 그게 누구의 죄 때문인가, 왜 세상이 이렇게 불행하고 불공평한가, 하는 등의 생각에만 빠져있기 보다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어야 했고 또 그가 쓰임 받는 삶을 살도록 도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일을 하고 싶어도 날 때부터 맹인 된 그를 위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일하셨습니까? 6절을 봅시다. 예수님은 땅에다 침을 뱉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침으로 진흙을 이겨서 맹인의 눈에 철썩 철썩 바르시더니,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때 맹인은 자기한테는 물어보지도 않고 더러운 침과 진흙을 바르다니, “이 양반이 사람을 맹인 취급하나?” 하면서 기분 나빠 할 수 있습니다. 또 “눈꺼풀에 흙 바르고 못에 가서 씻으면 눈이 떠지리라 믿으란 말이야?” 하면서 반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 말 없이 순종했습니다. 더듬거리며 실로암 못에 가서 눈꺼풀의 흙을 씻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처음으로 눈을 떴기 때문인지 그의 눈은 유별나게 초롱초롱 했습니다. 시력도 2.0이었습니다. 그의 인상도 눈이 움푹하던 때와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정말 길에서 빌어먹던 그 맹인인지, 아니면 그와 닮은 사람인지, 헛갈렸습니다(8,9). 예수님이 그를 위해 일을 하심으로써 그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이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또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것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맹인도 말씀 한 마디로 고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이 맹인에 대해서는 왜 침과 진흙을 발라주고 씻고 오라는 이상하고 거북한 방법으로 고치셨을까요?
먼저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운명을 극복하셨으며,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까? 침과 진흙으로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수술 도구가 없고 안구를 기증할 사람이 없다고 해서 아무 것도 못하겠다, 어쩔 수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입에는 침이 있었고, 땅에는 흙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침과 흙을 이겨서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물론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그랬던 것처럼, 침과 흙에 약효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벌레 물린 데라면 몰라도, 어떻게 침이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맹인이 눈을 뜨게 된 것은 침과 진흙의 약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믿음과 심정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으셨고, 믿음으로 일하면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을 믿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남들이 보면 비웃을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불가항력적인 운명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현재 나에게 있는 것으로,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정열적으로 하면 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일을 하시는 분이시므로, 우리를 반드시 도우십니다.
우리가 강영우 박사를 잘 압니다. 그는 시각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라는 중요하고 영광스런 직책을 역임했습니다. 그는 중학교 때 축구를 하다가 눈을 다쳐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가 시력을 잃기 2년 전에 아버지가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어머니는 그의 장애에 충격 받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불행이 엎치고 덮쳤습니다. 물론 그런 가운데서도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은 있었습니다. 안마를 배우면 시각장애인에게 주는 특혜로 편히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운명에 주저앉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안마를 배우지 않고 연세대학교에서 교육학을 공부했고, 미국으로 건너 가 피츠버그대학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루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활발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이 성한 사람도 힘들 터인데 장애인인 그가 겪은 어려움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때마다 침과 진흙을 이김으로써 운명에 도전했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시대에서 복음 역사를 이룬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만큼 어렵고, ‘쇠귀에 경 읽기’ 보다 힘듭니다. 캠퍼스 복음 역사가 나의 체질과 능력으로서는 불가항력적인 일로 여겨집니다. 나는 운명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기도의 침과 성경공부의 진흙을 이겨 정열적으로 일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실 것을 믿습니다. 지난주 MT에서 2학년들이 독서 발표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처음 독서모임을 시작 할 때는 공대생들에게 책 읽히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곤 했습니다. 어디 책 읽는 일 뿐이겠습니까? 학생들을 데리고 2박 3일의 모임을 이룬다는 것, 그들이 성경을 공부하고 소감을 쓰도록 하는 일이 가능할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과 심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때,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크고 작은 헌신을 통해서 은혜롭게 모임을 이루게 도와주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침과 진흙을 이기면, 대학생들이 눈을 떠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고, 그들의 귀가 열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침과 진흙으로 일하신 것은 또 맹인에게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도록 돕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 그의 눈을 뜨게 되었다면 맹인은 아마도 그 일을 우연으로 생각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침과 진흙을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오라는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몸으로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눈을 떴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가 눈을 뜨고 다니면 맹인일 때보다도 더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맹인일 때는 구걸해도 사람들이 동정해주어서 먹고살 수 있었지만, 눈을 뜨고 다니면 이제 더 이상 구걸할 수 없고 돈벌이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실제로 그의 눈을 뜨게 해 준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하라는 바리새인들의 압력을 거부함으로써 유대교에서 파문 당합니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가 믿음을 지키며 꿋꿋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수님의 능력을 생생하게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이기고 믿음을 지키려면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체험이 쌓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믿음의 능력을 체험하고, 어려움을 이기고 큰일을 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게는 1년 방향으로 잡은 말씀과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또 때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학사 목자님들은 매주 한 편의 소감을 쓰고, 양식을 몇 번 감당하려는 방향이 있습니다. 이 일은 엄청난 일은 아니지만 순종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임을 믿습니다. 저는 매주 월요일 7시30분에서 8시 사이에 김호태 형제를 만납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지만 군대 전역 후에 그를 도울 방법이 없었는데, 영아 목자가 그를 만나 설득하여 월요일 아침 시간 잠깐을 확보했습니다. 그는 1교시 수업 들어가기 전에 항상 쫓기는 마음이었고, 저는 아직 관계도 서먹한데, 그 분주하고 짧은 시간에 뭘 어떻게 도울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하며 답답했습니다. 게다가 그 시간은 제게 일주일중 가장 피곤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스터디 준비모임을 마치고 학교로 올라가려면 집으로 가서 잠깐 눈이라도 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그러나 한 학기 동안은 침과 진흙을 이기는 심정으로 학교에 오르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작은 투쟁이 조금씩 쌓이자 호태 형제의 태도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고, 이제 그 시간은 저나 호태 형제에게 상당히 은혜롭고 풍성한 시간으로 바뀌었습니다. 또 학교에서 새벽기도 끝나고 아침 수업 들어가기 전 아침 식사 시간을 쪼개어 한 사람을 양식훈련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도 은혜와 풍성함을 경험합니다. 이 모든 일을 통해 저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음을 배우고 있습니다.또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양들 돕는 일에도 균형을 잃지 않고자 했던 저의 1년 기도제목의 성취를 여기서 찾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순종하는 법을 다시 마음에 새기고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체험과 믿음을 쌓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순종하는 법을 다시 마음에 새기고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체험과 믿음을 쌓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맺는 말 :
5절 말씀을 오늘 메시지의 맺는 말로 삼고자 합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그 생각이 어둡고, 슬프고, 운명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몸만 예수님을 따랐지, 그 마음에 예수님이 없었고 예수님의 빛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이야말로 눈 뜬 맹인이었습니다. 아무리 환경과 조건이 좋아도 그 마음에 빛 되신 예수님이 없으면 그가 맹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환경과 조건이 힘들어도 세상의 빛 예수님이 그의 마음에 있으면 그는 운명을 개척하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보람되고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까 그 강영우 박사가 ‘sight(시력)’와 ‘vision(비전)’은 다르다, 시력은 있되 비전이 없는 사람이 가장 불행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설명했습니다. “주변 친구들을 보며 열등감과 패배감에 시달렸다. 또 아침에 맹인을 보면 재수 없다는 편견 때문에 버스차장이 밀어냈고 택시 기사가 승차를 거부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나는 시련과 역경을 딛고 타인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겠다는 비전을 가졌다.” 사람들은 그를 힘든 장애를 딛고 백악관의 고위직을 역임했다는 사실에 놀라지만, 우리는 그의 책을 읽은 적이 있기 때문에 그의 마음에 있는 예수님의 빛을 알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에 세상에 빛이신 예수님이 계셨을 때 그는 시력을 잃었지만 ‘하나님이 그에게서 하시는 일’ 즉 비전을 볼 수 있었고, 그것이 그를 밝은 삶을 살게 하고 큰일을 하게 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 그의 시대는 참 어두웠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율법과 형식에 잡혀 있었고, 정치지도자들은 부패했고, 부자들은 탐욕스러웠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지성인들은 나라 사정에는 아랑곳없이 술과 노래에 취했고, 여성들은 갖은 치장을 하고서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아기죽거리며 다녔습니다. 그런가하면 북쪽에서는 동족인 이스라엘이 그들을 노리고 있었고, 또 앗시리아와 바벨론과 이집트가 유다를 놓고 각축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5:30에 이른 대로 땅을 바라보면 흑암과 고난이 있고 빛은 구름에 가려서 어두웠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렇게 답답하고 어두운 마음을 안고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였고, 천사들은 얼굴과 발을 가리고 날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 그는 그 답답하고 어두운 시대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한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면서 함께 일할 사람을 찾고 계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외쳤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그는 어두운 시대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보았고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비전을 가질 수 있었고 앞을 내다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유다와 이스라엘과 제국의 장래를 예언할 수 있었고, 그리스도가 오셔서 온 세상을 구원하실 것을 예언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사야 9:2이 유명한 예언입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그 예언대로 그 빛이 어두움과 죽음으로 덮인 세상에 비치셨으니, 그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의 마음에 세상의 빛 예수님이 있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나라가 올해 유달리 겨울이 길고 뒤숭숭합니다. 우리와 우리 백성들 마음에 예수님의 빛이 비추고,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믿음이 있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캠퍼스에도 음란과 두려움의 기묘한 어두움이 맴돌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 예수님의 빛이 있게 하고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믿음을 주셔서 계속해서 캠퍼스에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