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3한국 중 한반도.열도을 영역으로 삼고 있던 마한(마고한국=마조선)은 단군한국의 서쪽영토인 요서지역의 번한이 위장침략한 위만집단에게 망하여 번한 유민들이 진한과 마한으로 대거 이주함으로 북마한은 최씨 낙랑국.맥.예.옥저 등 번한유민들의 나라들이 들어 섰고, 남마한은 위만집단에게 망한 번한 기준집단이 남3한 체제를 만들어 다스리고 있었다.
기준은 한왕이라 칭했으나, 남마한 출신인 기탁은 기준가문이 대가 단절되자, 남한왕에 올라 진왕이라 칭했다. 이렇게 남한은 서남해 마한의 진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남마한(한국)을 기록한 사료가 [후한서-한전]이다.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集解】王會汾曰 案晋梁二書 皆作弁韓 當從改 下云 弁辰在辰韓之南 弁辰亦弁韓之訛 惠棟曰 魏志作弁韓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南與倭接 辰韓在東 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 弁辰在辰韓之南 亦十有二國 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 大者萬餘戶 小者數千家 各在山海閒 地合方四千餘里 東西以海爲限 皆古之辰國也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韓은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馬韓, 둘째는 辰韓, 셋째는 弁辰이다. 馬韓은 서쪽에 있는데, 54國이 있으며, 그 북쪽은 樂浪, 남쪽은 倭와 接하여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國이 있으며, 그 북쪽은 濊貊과 接하여 있다. 弁辰은 辰韓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國이 있으며, 그 남쪽은 倭와 接해 있다. 모두 78개 나라이고 伯濟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큰 나라는 萬餘戶, 작은 나라는 數千家인데, 각기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서 전체 국토의 넓이가 사방 4천여리나 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辰國이다. 마한이 [韓族 중에서]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王을 세워 辰王으로 삼아 目支國에 도읍하여 전체 三韓 지역의 王으로 군림하는데, [三韓의] 諸國王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馬韓人知田蠶 作緜布 出大栗如梨 有長尾雞 尾長五尺 邑落雜居 亦無城郭 作土室 形如冢 開戶在上 不知跪拜 無長幼男女之別 不貴金寶錦罽 不知騎乘牛馬 唯重瓔珠 以綴衣爲飾 及縣頸垂耳 大率皆魁頭露紒 魁頭猶科頭也 謂以髮縈繞成科結也 紒音計 布袍草履 【集解】惠棟曰 魏志云 足履草蹻蹋 其人壯勇 少年有築室作力者 輒以繩貫脊皮 縋以大木 嚾呼爲健 常以五月田竟祭天神 晝夜酒會 羣聚歌舞 舞輒數十人相隨蹋地爲節 【集解】惠棟曰 魏志云 踏地 低昂手足 相應節奏 有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諸國邑各以一人主祭天神 號爲天君 又立蘇塗 魏志曰 諸國各有別邑 爲蘇塗 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 蘇塗之義 有似浮屠 建大木以縣鈴鼓 事鬼神 其南界近倭 亦有文身者
마한 사람들은 농사와 양잠을 할 줄을 알며, 길쌈하여 베를 짠다. 큰 밤이 산출되는데 그 크기가 배만큼 크며, 꼬리가 긴 닭이 있는데 꼬리의 길이는 5尺이나 된다. 邑落에 雜居하며 역시 城郭이 없다. 땅을 파서 움집을 만드니 그 모양이 마치 무덤같으며, 출입하는 문은 윗부분에 있다. 跪拜할 줄을 알지 못하며, 長幼의 차례와 男女의 분별 따위의 예가 없다. 金·보화·비단·모직물 등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牛·馬를 탈 줄을 모르고, 오직 구슬을 귀중히 여겨서 옷에 꿰메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한다. 그들은 대체로 머리를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내 놓으며,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짚신을 신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씩씩하고 勇敢하여 젊은이들 중 築室하는 데서 일하는 사람은 매번 밧줄로 등의 가죽을 꿰어 큰 나무를 매어 달고 소리를 지르는데 [이것을] 건장하다고 한다.
해마다 5월에는 농사일을 마치고 天神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낮이나 밤이나 술자리를 베풀고 떼 지어 노래 부르며 춤춘다. 춤출 때에는 수십 명이 서로 줄을 서서 땅을 밟으며 장단을 맞춘다. 10월에 농사의 추수를 끝내고는 또 다시 이와 같이 한다. 여러 國邑에는 각각 한 사람이 天神의 제사를 주재하는데 [그 사람을] 天君이라 부른다. 또 蘇塗를 만들어 거기다가 큰 나무를 세우고서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韓의] 남쪽 경계는 倭에 가까우므로 文身한 사람도 있다. [끝]
* 각주/"전체 국토의 넓이가 사방 4천여리나 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辰國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남한지역은 동과 서는 바다로 둘러 싸여 있고 사방이 4천리가 정확히 맞다. 그리고 辰國이라는말이 나오는데, 진시황이 다스린 辰國의 영토였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고 22대 색불루 단군임금때부터 단군한국을 辰國이라고 했다. 辰國시기에 은나라 침략을 물리치고 황하 상류지역인 기.빈에서 양자강까지 기.남.여.엄국 등 수 많은 단군한국의 제후국을 세워지면서 중국대륙을 통치했으니 진한의 중심지였던 만주족 출신이라는 진시황이 국호를 辰으로 정할만 하며, 고구려가 망한 후에 대조용이 색불루 단군임금 시대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대辰으로 국호를 정할만 하지 않는가? 그러니 남3한도 고대 단군한국이였던 辰國의 영토였다는 사실을 기록한 말이다.(윤복현)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어 신선들이 영원히 산다는 한국 어느 섬(코리아 대칸이 태어난 전남 완도 약산아니였을까? 약산은 약초천지다)에 존재한다는 불로초를 구하러 서복을 보낸 진시황은 만주족이였다.
[참고도서]'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이었다'는 진시황은 여진족이었고 헝가리 민족의 원류인 마자르족은 말갈족이었다는 등의 가설을 통해 새로운 역사 해석을 시도한 책이다. 물리학 박사로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이용, 인문학 연구에 매진한 중국 출신 주쉐위안(68·朱學淵)이 수년간 발표한 논문 24편을 묶었다.
지은이는 진나라는 서주(西周) 시대까지만 해도 한족이 아닌 서융(西戎)에 속한 일개 부락에 지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들에게 특이한 점이 있다면, 동족인 주변의 서융 부락들이 주나라를 상대로 빈번하게 약탈을 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과 달리 항상 변함없이 주나라 왕실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뒷날, 충성심에 감격한 주나라 왕실은 진나라를 정식 제후국으로 책봉하고 이 제후국은 그때부터 두각을 나타낸다. 중원의 선진문화를 수용하는 한편 인재들을 초빙해 풍속을 바꾸고 부국강병에 전력하더니 결국 일거에 천하통일의 대업까지 이룩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진나라 왕실은 한족의 언어와 몽골어를 번갈아 구사했으며 진시황 역시 몽골어를 구사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헝가리의 조상 마자르족이 말갈(靺鞨)족이라는 가설도 제시한다. 마자르족의 족명·인명·지명 과 기본어휘를 분석, 헝가리인의 조상이 퉁구스계에 속한 말갈족이라고 분석한다. 이어 7세기 중반의 요동 전쟁과 고구려 멸망으로 촉발된 수백년에 걸친 연쇄작용으로 헝가리에 정착하게 된 것이라고 짚는다.
문성재 옮김, 431쪽, 2만5000원, 우리역사연구재단
문명의 빛은 동방 마고성에서!코리아 대칸의 서남해 마고성 주장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하는 충북 청원 소로리 볍씨
- [보도자료]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 충북 청원에서 발견, 인류농경의 시작은 한국
약 1만 5천년 전에 농사지은 재배 볍씨,세계에서 가장 먼저 농사를 지은 한국
국제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받아왔던 중국 후난(湖南)성 출토 볍씨보다도 약 3000년이나 더 오래된 세계 최고(最古)의 볍씨가 한국에서 발견됐다고 영국 BBC 인터넷판이 22일 보도했다.
충북 청원서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재배 볍씨(약 1만 5천년전 것)
BBC 인터넷판은 기사에서 충북대 이융조(선사고고학) 교수 연구팀이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고대 탄화(炭化) 볍씨를 발굴했으며 59개의 볍씨를 대상으로 탄소연대측정법을 실시, 이같은 결론에 도달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이 교수는 문화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지난 6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제5회 세계고고학대회에서 발표한 ‘세계최고의 소로리볍씨의 발굴과 의미’라는 논문을 통해 1만5000년 된 것 등 4개종의 볍씨 59톨을 발견했으며, 이는 지난 97년 중국 황허(黃河)강변 장시(江西)성에서 발견된 선인동 볍씨(1만500년)보다 약 4500년 정도 오래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 교수는 이 결과는 미국의 권위있는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기관인 지오크론(Geochron)과 서울대의 AMS연구팀으로부터 동일하게 얻은 것이어서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교수는 “농촌진흥청 작물시험장의 박태식 박사가 이 볍씨에 대해 야생벼가 아니라 재배벼라고 밝혀 1만 5000년전에 한반도 중부에서 농사가 이뤄졌다."고 말했다.[끝]
소로리 볍씨는 세계에서 발굴된 농경 기록 중 인류 최초이며, 앞으로도 소로리 기록을 능가하는, 더 앞선 농경을 발굴하기에는 불가능에 가깝다. 1만 5000년전은 빙하기로 구분되는 시기로,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는 약 1만 800년 전에 최고도에 도달하고 점차 따뜻해지다 약1만 3000년전에 끝난 것으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현재는 이 빙하기에 이은 간빙기이다.
인류의 농경기록은, 과거 약7000~8000년 전 중동지역에서 최초로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설이 정설이었으나, 1990년대에 중국에서 약1만 500년 전의 볍씨가 발견됨으로써 벼의 인도 기원설과 최초의 농경기록을 갈아 치운 바가 있다. 그러나, 이번 소로리 볍씨의 발견은 인류의 농경사를 다시 써야 하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농경의 시작은 이제 신석기에서 구석기로 끌어 올려진다.
더구나, 농경은 문명의 발생과 직결되며, 벼는 밀의 약 2배의 생산성으로 그 만큼 면적당 부양인구를 끌어 올림과 동시에 문명화를 촉진하게 된다.
2002년에 연대를 공인 받고, 2003년에야 재배벼임이 밝혀졌으며 후속 연구와 발굴이 없는 상태에서 섣불리 얘기하기 곤란한 면이 없지 않으나, 이 발굴은 기존에 학습된 시각을 바꿔야함을 분명하게 말해 준다.
예를 들어, 고대 인도 드라비다어에 영향받은 한국어라는 시각이다. 이는 농경이 고대 인도 갠지스 하구 지역으로부터 여러 과정을 거쳐 한반도에 전래되었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미 고대인도보다 수 천년에서 거의 1만년가까이 거슬러 올라간 한반도 농경은 오히려 거꾸로 드라비다어가 한반도어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높인다.
이번 소로리 볍씨는 남방계 인디카와 북방계 자포니카가 함께 발굴됨으로써, 현대 벼의 주력 종 모두 한반도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상고시대 한반도의 주민이 여러종의 야생벼 중 2종을 선택하고 실험 개선하며, 여기에서 현대벼가 비롯되었다는 추측이다.http://korea9000.net/zboard/view.php?id=bbs_door&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