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통신 문학과 사이버 문학
지금껏 우리의 논의는 사실 통신 문학에 대한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사이버
문학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그러나 사이버 문학에만 적용되는 일부의 특성이
그대로 통신 문학 전체의 특성은 될 수 없다.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면서, 전언의
글쓰기가 전자 언어라 해도 궁극적으론 문자의 형식으로 재현된다면, 그 전언은
커뮤니케이션 과정이 어떻든 간에 당연히 문학적 연구의 대상이 된다. 물론 새로
운 매체가 전달하는 전언이 다 문학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에는 과거에 인쇄된
글자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던 때 전언이라 부르던 것을 "텍스트(texte)"라는 용어
로 대체해 부르고 있는데, "문학적 텍스트"라 한다면, 역시 거기에는 문학적 특
성이 포함돼 있어야 한다. 컴퓨터에 의한 통신이 가능해지면서, 바로 "컴퓨터 통
신 문학"의 지반은 마련된 것이고, 컴퓨터에 의해 "사이버 스페이스"가 구성되면
서 바로 "사이버 문학"의 지반이 마련된 것이다. 통신 문학이 문학의 일부이고
사이버 문학이 통신 문학의 일부인 까닭은 통신의 공간이 우리 삶의 공간에 속하
고, "사이버 스페이스"가 통신의 공간에 속하기 때문이다. "사이버 스페이스"는
컴퓨터가 가지는 "사이버네틱스적" 메카니즘에 의해 모조(simuler)된 공간이다.
컴퓨터의 그런 능력을 가리키는 용어는 "시뮬라시옹(simulation)" 즉 우리말로 "
모상력" 정도로나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우리는 "시뮬라씨옹"을 인간의 창조적
능력인 "상상력(imagination)"과는 구분해야 한다. 왜냐하면 컴퓨터는 단순히 인
간의 지능을 확장한 도구일 뿐이므로, 이미지(image 心象으로 번역함)를 만들어
내는 상상력이라는 인간의 정신적 능력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지
만, "통신 문학"의 개념은 "컴퓨터 통신 문학"에서 처음 제기된 것이 아니고, 매
체에 따라 이미 "엽서 문학", "신문 문학" 같이 다양하게 나타났다. 우리는 새로
운 매체가 등장할 때마다 커뮤니케이션의 구조에서 발신자와 수신자의 입장이 변
화돼 왔음을 알고 있다. 가장 급작스런 변화는 퍼스널 컴퓨터라는 전자 매체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에서 드러나는데, 그것은 발신자와 수신자 간 커뮤니케이션의
피드백이 그만큼 시.공간적으로 수월해졌다는 것이며, 발신자의 전언 역시 전자
언어로 쓰여졌고, 과거에 인쇄로 고정돼 버린 텍스트와는 달리 "책"의 시뮬라크
르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발신자의 관여에 의해 수시로 수정, 삭제될 수 있는
가변적 텍스트라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컴퓨터 통신 문학"이 지닌 중요한 특
성을 하나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발신자와 수신자 간의 쌍방향 커뮤니케
이션으로 텍스트가 수정될 경우의 상상력에 대한 문제이다. 인간의 지능을 확장
하고 인식 기능을 보완할 컴퓨터라는 사이버네틱스적 매체는 그 동안 예술에 영
감을 주는 상상력의 정의를 인식의 기능인 이해와 창조라는 2가지 현상에다 맞춰
구별짓고자 하는 이론가들이 겪게 만든 숱한 유위전변을 통감하게 한다. 우리의
인식과 연결되는 상상력을 폄하하는 그런 논의들은 주로 상상력을 지각(percep-
tion)에 연루시켜, 그것을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이미지의 재현으로 단정하거나,
아니면 재생적 기억이나 희미한 지각의 잔유물이라고 깎아내리는 2가지 방식으로
행해졌다. 물론 그 중에는사르트르같이 상상하는 의식을 지각하는 의식과 나누
고, 상상력을 기억이나 지각적 반응과는 다른 의식의 자발성으로 기술하려는 노
력이 있기는 했지만, 그에게서도 상상력은 결국 무(un neant)를 대상으로 한 이
미지만 산출하는 텅 빈 의식에 그치고 만다. 근자에는 소쉬르적 기호학이 정의한
기호와 상상력이 낳는 심적 이미지의 역할을 혼동하여, 기표와 기의의 자의적 연
결처럼 이미지의 현상과 그 실체를 단절시키는 어중간한 현상학적 일반 심리학도
있었다. 언어학적 기호는 자의적이라 기표와 기의의 의미 작용(signification)
밖에서는 무의미하지만, 상상력의 영역에서 이미지는 기호처럼 어원이 포용한 숱
한 의미들 중 한 두 가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의미를 담보한 상징
이 된다. 상징은 기호학의 영역에 속하지 않고 특수한 의미론의 관할에 든다. 바
슐라르는 상징과 그것의 동기를 연결시켜 볼 때, 거기서는 주관적 동일화의 욕구
가 중요한 역할을 함을 깨닫는다. 즉 그는 우리의 감수성이 이미지의 세계인 꿈
과 대상 세계를 매개한다고 보고, 아리스토텔레스류의 기질-물리학을 원용해서
자기 나름으로 4원소론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인식론을 구축한다. 여기서 4원소
는 제각기 양가성(兩價性)을 지니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이런
분류가 지나친 합리화라고 보고 4원소론에 대해 5권의 책을 써냄으로서 그 분류
를 스스로 포기한다. 왜냐하면 그런 합리화라면 상징주의의 발생이나 구조를 이
해시키려는 사회학적이고 정신분석학적인 모든 동기 설명들이 상징을 흔히 개성
적 충동이 없는 외부 체계에다 환원시키는 객관적 실증주의의 죄악을 저지르거
나, 오로지 충동과 검열이란 단순한 메카니즘에 환원시켜 그것의 소산인 억압으
로만 파악하는 것과 진배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바슐라르는 4원소론에서 그것
들의 상징적 행로의 움직임만을 보려고 노력했고, 기분 좋게 상징적 이미지들을
받아들이고 "시적 비약의 현상 자체인 이런 지극함을 결코 환원시키지 않고, 이
미지들을 끝까지 추적하는" 상상적인 것의 현상학을 추구했다. 이러한 현상학에
그의 제자인 뒤랑은 인류학적 길을 통해 다시 접근한다. 뒤랑은 상상력의 기본
의도 축들을 "공작인(homo faber)의 사회적이고 기술적인 원시적 습관들에 의해
연장된, 인간이란 동물이 자연 환경을 마주하고 취하는주된 몸짓들의 노정(路
程)으로 간주한다. 자연적인 그런 몸짓들은 재료나 도구를 찾았으며, 우주적 환
경에다 구해 놓은 추상적 재료는 사라진 몸짓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사회적이고
물리적인 환경 내부를 왕래하면서 충동이 그 환경과 상호 발생적인 관계로 상상
적인 것을 낳는 과정을 뒤랑은 "인류학적 노정"이라 하는데, 우리는 거기서 리비
도의 사회적 투사, 즉 바슐라르가 "문화 콤플렉스"라 부른 것과 다시 조우하게
된다. 뒤랑은 여기에다 생존 경험만으로 동기를 설명할 수 있도록, 베체레프가
작성한 반사학에서 3 가지의 "지배적인 몸짓들"이란 운동학적 개념을 다시 첨가
한다.
몸가누기(position), 먹이찾기(nutrition), 짝짓기(copulation)란 3 가지 지배
적 몸짓들은 감각을 일으키는 모태로서 현대 심리학은 그것들이신경 중추들이나
그 상징적 재현들과 엄밀한 병존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런 모태 안에
서 지각적 재현들이 자연스레 종합된다고 봄으로써 이중적 동기의 위대한 상징들
의 형성을 설명할 수 있다. 이런 지배적 반사들과 그것의 문화적 확장이나 연장
간의 일치는 인간의 기술적 환경에서 찾아진다. 인간의 환경이 감각을 일으키는
반사의 첫 조건이자, 모방적 재현의 투사처이므로 그것들은 합치하지 않을 수 없
기 때문이다. 즉 이미지의 동기를 설명해주고, 상징에 그 효과를 부여하는 것은
억압이나 검열 덕분이라기 보다는, 위대한 이미지들을 애써 뿌리내리게 하고, 그
이미지들을 영속시키기에 충분한 행복을 채워 줄 배경과 주체의 반사적 충동들이
합치한 결과인 것이다. 거기서 몸짓은 힘+물질=도구라는 등식에 따라 물질과 기
술을 요청하며, 동시에 상상적 재료와 도구를,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하나의 수
단을 불러낸다. 이렇게3가지 지배적 반사들이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환경에 접촉
해서 드러내는 "표상(scheme)"들이 융이 정의한것과 근사한 위대한 원형들을 결
정한다. 융의 원형은 사상의 발생지 역할만 하므로, 사상이 이미지를능가하지
못하고 주어진 역사적이고 인식론적인 상황 속에 상상적 원형의 실체적 참여에
불과해서, 합리주의와 과학의 실제적 방법들이 상상적 후광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합리주의나 모든 이성의 체계가 그 자체에 고유한 환각을 지니는 까
닭이 되지만, 뒤랑이 말하는 "표상"은 단순히 개념과 이미지를 연결하는것이 아
니라 감각적인 원동성의 무의식적 몸짓까지 이어주므로 상상력의 기능적 화포(畵
布)와 그 역동적 뼈대를 형성한다. 원형이 상징과 다른 점은 표상과 일치하는 항
구적 보편성을 지니고 양면성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바퀴는 어떤 상징적
의미도 가감할 필요가 없는 주기적 표상의 원형인데, 뱀은 다가적 상징인 주기적
상징일 뿐이다. 이렇게 원형들은 문화권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표상들이 뒤얽히는
이미지들과 연관되는 것이고, 여러 의미를 가질수록 더 중요해지는 것은 엄밀히
말해 상징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상징을 관할할 특수한 의미론의 가능성을 제시한 연구를 살펴
보았는데, 이것으로 우리는 통신 문학과 상상력, 그리고 컴퓨터같은 사이버네틱
스적 매체 간의 연관성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중추 신경을
연장시킨 컴퓨터야말로 상상력의 힘이 불러낸 도구라는 사실이다. 커뮤니케이션
의 시.공간을 극히 동시적이고 가변적으로 만드는 이 도구에 인간이 자율적 주체
로서 연결된다면, 기존의 글쓰기 제도의 유형은 분명 촉진될 수 있다. 사실 이것
이 컴퓨터를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하는 "통신 문학"의 가장 넓은 지평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의 이론가들이 분석한 대로 컴퓨터라는 이 기계는 "시
뮬라씨옹"으로 인간의 상상력까지 흉내내는 그 비물질성으로 인해 인간과 거울같
은 관계를 맺고, 거울 효과(mirror effect)는 글쓰기의 주체를 이중적으로 만들
어 버린다. 또한 컴퓨터 통신 문학에서의 글쓰기는 삭제와 수정이 용이하므로,
발신자는 공간적 가변성과 시간적 동시성의 차원에서 정신의 내용이나 구어에 아
주 가까운 재현물을 마주한다. 발신자와 글이라는 주체와 객체 사이는 이런 정체
성의 시뮬레이션로 근사한 동일화가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세계가 정신과는 다른
물질로 구성된다는 데카르트적인 주체의 기대를 뒤집는 것이다. 즉 갈수록 편리
해지는 글쓰기는 말하는 것과 같아지고, 주체의 글쓰기와 객체인 화면은 단일한
가변적 시뮬라크르로 합체가 된다. 이렇게 커뮤니케이션의 주체가 구성되는 방식
에 변화가 초래되면, 글쓰기의 주체는 교란되고, 공동 글쓰기의 가능성도 생긴
다. 우리가 앞에서 제기한 발신자와 수신자 간의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글
이 수정, 삭제를 통해 다듬어지고 변화하는 경우의 상상력 문제는 바로 이 공동
글쓰기의 문제와 동일한 맥락을 갖는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공동 글쓰기로 텍스
트를 만들 경우, 언어는 합의를 지향하기 보다는 정의들의 증가와 텍스트의 용이
한 수정 때문에, 리오타르가 말한 "차의(差議 differend)" 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리하여 말들 간에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상호 작용을 통해 언어는 불안정해지고
재형성되며, 주체들은 산파(散播)되고, 그들은 세계에서 차지할 수 있었던 지위
로부터 그만큼 자유로워진다. 우리는 언어의 구성이 기호 체계의 역사적 변화에
관련이 있고, 따라서 사실성(reality)의 개념도 커뮤니케이션 행위를 통해 기호
가 어떤 의미 작용을 하는가에 따라 달리 형성된다는 것을 안다. 비교적 재현 원
칙에 충실했던 과거와는 달리 기표와 지시물 간의 연결 고리가 불확실해진 현대
적 상황에서, 예를 들어 작금에는 정치의 모상력(simulation)이 된 신문같은 데
서만 정치를 발견하는 것처럼, 우리는 객관성을 현실(reality) 의 시뮬레이션 내
에서 밖에는 찾을 길이 없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말처럼 인간은 이제 안정된 현
실 속의 "농경인"이 아닌, 하이퍼 현실(hyper reality) 속을 떠도는 "유목인"의
신세가 되었다. 우리가 여기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통신 문학이 문학적 상상력
의 본래 기능을 잊고, 컴퓨터가 그것(문학적 상상력)의 모상력(simulation)이 된
다면, 통신 문학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은 기호학적범주에서 파악한 언어의 변화
와 함께 결국에는 "사이버 문학"으로 변질돼 가고 만다는 것이다.
6) 모상력(simulation)과 문학적 상상력(imagination)
우리가 문학에 대한 정의들 중에서 여태껏 가장 나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정의
는 아마 르네 웰렉이 말한 그대로 문학을 "상상력의 산물"로 보는 정의일 것이
다. 문학이인간의 삶을 반영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앞서 뒤랑의 이론을 빌어 문
학적 상상력은 현실(reality)에 그실체를 요구하는 이미지를 산출한다고 규정한
바 있다. 문학적 이미지는 단순한 기호처럼 형태가 아니고 힘의 관점에서 판단해
야 할 상징으로 정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컴퓨터를 통해서도 발신자가 주체적인
글쓰기를 하게 된다면, 우리가 통신 문학의 상상력을 기존의 문학에서 논의하던
상상력과 다르게 규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철저히 문학적 커뮤니케이션의 모
상(simulacre)이 된 "사이버 문학", 다시 말해 "사이버 스페이스"만을 배경으로
하고, 그 안에서만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는 문학에선 모상력(simulation)이 인
간의 상상력을 대신한다. 우리는 앞에 설명한 문학적 상상력과 모상력(simulati-
on)의 변별을 위해모상력의 개념을 우선 좀 더 자세히 알아보아야겠다. 보드리
야르가 논의한 바 있는 텔레비젼 광고의 예를 들면, 오늘날의 광고는 현실(real-
ity)을 모상(simuler)해서 그 안에 상품을 진열해 보이는데, 그것은 상품이 현실
에서 소비되는 방식과는 판이하다. 얼마 전 텔레비젼에서 자동차 성능을 과장했
다고 비난을 받았던 광고들이 좋은 예이다. 광고는 이렇게 현실에서는 보이지 않
는 커뮤니케이션을 행한다. "사이버 스페이스"안에서는 실재가 아닌 것이 실재
가 되고, 아무 의미도 없는 의미가 전달된다. 보드리야르의 표현을 빌리면, "커
뮤니케이션의 모상력이 실재보다 더 실재로 전달한다." 말하자면 광고에서는 언
어적으로 하이퍼 현실(hyper reality)이 만들어지는데, 소비자가 현실에서 주체
의 역할을 회복할 때, 즉 소비자가 대상-상품을 사서 쓰는 순간 그 하이퍼 현실
은 사라진다. 그렇지 않으면 광고의 모상력(simulation) 효과는 여전히 지속된
다. 보드리야르는 20세기 말의 우리는 "모든 영역의 현실들을 하이퍼-사실주의라
는 모상력 차원으로 구현하고 있다."고 단언하면서, 다른 탈구조주의자들처럼 주
체적인 인간들의 상상력같은 "상호주관적 계기"는 제쳐두고 탈중심화한 주관성의
경험에 몰두한다. 탈구조주의자들은 위에서 말한 텔레비젼 광고처럼 실체없는 비
현실성을 글쓰기의 "메타 서사(meta narrative)"로 간주한다. "사회적"이니 "역
사"라는 말도, 보드리야르는 주체가 집단화되고, 공적인 사건들이 "메타 서사"로
해석되고, 대중이 자신들의 일상과 인류 운명의 상관성을 의식하는 그런 문화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한다. 그의 말처럼 이제 대중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모
상력의 모델"인 것이다. 탈구조주의자들의 관점으로는 해체 후에 총체 외의 대안
이 없다. 대개 그들은 하이퍼 현실이란 과장된 개념에 매몰된 채, 구상조차 안
된 비극적인 스토리의 결말을 장담만 하고 비판적 담론을 포기한다. 그러나 여기
에 대안은 충분히 있다. 예를 들면 텔레비젼 광고가 주체를 수동적인 구경꾼으로
포섭해 결국은 소비자로 만들지만, 그것이 또한 수신자까지 해체한다는 바로 그
점이다. 수신자는 담론을 수용하는 수동적 객체임과 동시에 담론을 수용하고 심
판한 증거를 간직한 능동적인 주체의 역할을 함께 수행한다. 수신자는 광고-대상
을 구매하고, 그 기의-대상에다 부유하던 기표를 연결해서 광고의 의미를 창출
해야 한다. 수신자에게 맡겨진 역할로 인해 발신자의 과거 헤게모니적 자기 구
성 형태는 문제시 된다. 또한 과거처럼 지배를 강화하던 언어에 대한 비판이 길
도 열린다. 미디어 분야의 담론은 이렇게 탈중심적 주체의 상황 변화에 따라 새
로운 방식의 자유를 담론에 개방한다.
우리는 문학적 상상력과 모상력의 상호 관계 역시 위와 같은 변화를 겪는다고
볼 수 있다. 통신 문학에서의 상상력은 기존의 문학처럼 발신자가 자신의 글쓰기
에 대해 주체적 위치를 유지하고 있을 때만 성립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컴퓨터를 이용한 통신 문학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발신자의 주체적 위치
는 상실되고 있음을 알았다. 발신자-전언-수신자로 이어지는 커뮤니케이션 과정
에서 수신자도 주체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우리가 앞에서 말한
공동 글쓰기처럼 상상력의 주체들 간의 문제가 발생한다.상상력의 주체들은 결
국 "차의(差議)"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는데, "차의"란 리오타르의 설명에 의하
면, "두 논증 모두에 적용 가능한 그런 판단의 규칙을 결여하기 때문에 해결 불
가능한... 갈등"이다. 이런 경우 철학자는 그 "차의"를 탐색해서, 표현하기 불가
능한 그것을 표현할 고유 언어를 찾는 과업을 떠맡지만, 지식인은 그 "차의"를
망각하도록 도운다. 컴퓨터 통신 문학은 그 "차의"를 모상력(simulation)에 위임
한다. 모상력(simulation)은 그 자체가 상상력의 모상(simulacre)이다. 보드리야
르 식으로 표현하면 "모상력은 상상적 재현물 송두리째 모상으로 감싼다." 그러
나 상상력은 욕망의 주체인 인간의 능력이므로, 현실(reality)에서 실체를 요구
하는 힘인 반면에, 모상력은 욕망이 없는 기계의 것이므로, 상상력의 주체와 연
결되지 못하면, 현실 속에 지시물을 갖지 않는 자기 지시적인 모상(simulacre)
밖에 그리지 못한다. 모상이란 상상적 재현 공간과는 달리, 모상력이 구성한 하
이퍼 현실의 공간에서만 상상적 이미지의 역할을 대신한다. 우리가 사이버 문학
을 정의하는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즉 문학이란 인간 삶의 반영이므로 현실
(reality)공간을 갖는다. 통신 문학과 사이버 문학에도 공간이 있다. 그 2가지
문학에서 텍스트라 불리는 것 역시 지시물이 있다. 텍스트가 스스로를 지시물로
갖는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통신 문학에는 발신자가 글쓰기의 주체 위
치를 회복할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면 발신자가 텍스트를 현실로 가져와, 텍스
트를 인쇄된 책의 형태로 바꾸어 과거처럼 작가와 글이라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
를 회복할 때이다. 반대로 사이버 문학은 현실 공간을 모상한(simuler)한 사이버
공간 안에만 있다. 문학이 삶의 반영이라는 의미에서 사이버 문학이란 사이버 스
페이스에만 존재하는 모상된 인간의 삶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사이버 스페이스란
현실 공간의 모상으로서만 존재한다. 그것은 모니터를 끄는 순간 사라지는 하이
퍼 현실인 것이다. 사이버 스페이스를 떠나서도 사라지지 않는 문학은 얼밀히 말
해 통신 문학이다. 단순히 사이버 스페이스에 관계되는 삶을 언급하는 문학이라
면, 그것은 사이버 문학이 아니다. 사이버 문학은 문학의 모상일 뿐만 아니라,
현실 공간의 모상인 사이버 스페이스를 스스로의 현실 공간으로 갖는 하이퍼 사
실주의에 기반해야 한다. 사이버 공간 안에서 전개되는, 거기에 매몰되지 않은
현실 공간 인물의 삶이 있다고 강변할 수는 없다. 그것은 처음부터 하이퍼 사실
주의 개념에 배치된다. 우리는 종종 사이버 스페이스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현실 인물의 삶을 소재로 한 통신 문학과 사이버 문학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소설 속의 소설"같이 "통신 문학 속의 사이버 문학"인 셈이다. 사이버
문학은 현실 공간이 아닌 완전히 모상된 공간 속에다 인간 자신의 모상이 영위하
는 삶을 그리는 문학이다. 거기서는 현실의 인간적 욕망까지 송두리째 모상력의
모델이 되고, 그 결과인 모상은 상상적 문학이 좌초시킨 환상을 유지시킨다.
7)모상력과 사이버스페이스
사이버 스페이스란 용어는 윌리암 깁슨이 그의 소설 "Newromancer"에서 처음 사
용한 것인데, 그것은 깁슨의 설명에 의하면 매일 수억의 사람들을 합의된 환각에
빠지게 하는 세계적인 컴퓨터 통신 네트 워크를 가리킨다. 그런데 용어는 달라도
근본적으로는 발상이 동일선상에 있는 그런 공간에 대해 이미 1960년대부터 조금
씩의 논의들이 있었다. 서들랜드(Ivan Sutherland)의 대화형 컴퓨터그래픽 시스
템에서의 스케치패드에 대한 연구는 그 시발점이 된다. 서들랜드는 또 1968년에
머리부착형 3차원 영상장치에 대해 언급을 했다. 그 뒤를 이어 잉글버트(D. Eng-
lebart)가 인간 지성의 증대를 논의한 것이나, 한참 뒤 페퍼트(S. Papert)가 논
의한 "미지 세계", 크뢰거(M. Kreuger)의 "인공 현실", 브룩스(F. Brooks)의 "가
상(virtual) 세계", 넬슨(T. Nelson)이 논의한 "가상"의 개념, 워커(J. Walker)
의 "가능성의 세계" 등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에는 "가상 공간"과 '사이버 스
페이스"란 개념이 분리되었는데, 영화를 예로 들면 영화를 통해 전달되는 것은
가상 현실이지만, 영화 그 자체는 사이버 스페이스다. 여기서 사이버 스페이스는
랜들 월셔(Randal Walser)의 정의처럼 그 속에서 "신체의 전부를 사용하는 특별
한 의미의 가상 공간(virtual space)"을 말한다. 사이버 스페이스는 관람자가 단
지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영화를 통해 전달되는 그 "가상 현실과 일체감
을 강하게 느끼도록 해주는, 새로운 매체에 의해 구성되는 공간"이다. 즉 거기에
서 우리는 "지성을 가진 객체"로 참가하거나, 아니면 Droid나 Bot이라 불리는 지
성을 가진 인형을 조종하여 역할을 지시하게 된다. 컴퓨터 게임을 생각하면, 이
것은 더욱 잘 이해가된다. 게임의 참가자 입장에서 보면 처음엔 텅 빈 것같은
공간으로 들어가지만, 곧 게임 설계자가제공하는 행동으로 가득찬 사이버 스페
이스를 만나게 되고, 설계자의 입장에서 보면 사이버 스페이스는 게임 제작 도구
(하드 웨어, 프로그래밍 언어, 유틸리티 프로그램)로 가득 채워야 할 공간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컴퓨터 게임은 사용한 이런 도구의 제약을 받게 된다. 그것은
상상력이 아닌 모상력(simulation)의 "설계"에따른 제약이다. 사이버 스페이스
의 설계자는 참가자를 위한 경험 세계의 모상들을 만들지만, 그것은단지 기술적
축면에 불과하다. 만약 거기서 예술성을 찾자면, 그의 의도로는 만들 수 없었던
어떤 통찰력(보다 깊은 진실이나 현실)이 전달된다는 데 있다. 가상 공간과 사이
버 스페이스의 변별을 좀 더 자세히 살피기 위해, 보드리야르가 "모든 종류의 얽
히고 설킨 시뮬라크르들의 완벽한 모델"이라고 한 디즈니랜드를 예로 들어 보자.
현실 공간 속에 부재하는 공간을 모상력으로 축조해 놓은 디즈니랜드 그 자체는
가상 공간이지만, 디즈니랜드라는 이 가상 공간 안에 현실 공간의 제 요소들이
시뮬라크르(여기엔 객체화된 참가자도 포함) 형태로 차지하고 있는 공간은 사이
버 스페이스가 되는 것이다. 가상 공간에는 꼭 사람이 들어갈 필요는 없어도, 사
이버 스페이스에는 어떤 형태로든 사람이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이 가상 공간의
축조에서 부터 모상력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가상 공간은 현실 공간의 징후를 모
상(simuler)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는 이렇게 모상하는 능력에 능동적
의미를 부여해서 모상하기라는 용어를 쓰는데, 그것을 "가졌으면서도 갖지 않은
체하는 감추기"와는 달리 "갖지 않은 것을 가진 체하기"라고 정의한다. 또한 그
는 예를 들어 "병든 체하자면, 드러누워 남이 자신을 병든 것으로 믿게 하면 되
지만, 병의 시뮬라크르를 만드는 사람은 정말로 어떤 병의 징후를 만들어내야 하
는 까닭에, 모상하기는 사실 체하기보다 더 복잡하다"고 덧붙인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모상하기는 바로 우리가 말하는 모상력(simulation)이다. 그런데 이런 모
상력에는, 병의 모상을 만드는 사람에게 병이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실재가 알
리바이(현장 부재 증명)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문학에 적용하면 우리는 상
상력을 모상하는 모상력에는 상상력이 실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컴퓨터
통신에 의해 마련된 가상 공간의 글쓰기는 이런 상상력과 모상력의 경계를 중심
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글쓰기의 공간은 달라졌어도 여전히 상
상력에 의한 글쓰기인 경우와, 다른 하나는 아예 상상력없는 모상력에 의한 글쓰
기의 경우이다. 물론 그 두 가지 글쓰기가 복합된 경우도 상정할 수 있는데, 실
제로는 이것이 제일 많은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모상력은 상상력의
알리바이일 뿐이므로, 그 둘 사이에 아예 연결 고리는 없다. 바로 그것이 철저한
모상력에 의한 글쓰기, 즉 사이버 문학이 디스토피아만 보여주는 한 가지 이유가
된다.
마무리
쟝 끌로드 기여보가 "문명의 배반"에서 말하는 것처럼 문명이 인류를 배반하고
있는 20세기 말은 "해체와 자기 회의의 시기"이다. 민주주의 사회의 세분화 현상
은 구성원들의 무책임성을 조장할 뿐이고, 이제는 참여주의 지식인들까지 "지금,
여기" 있는 우리 존재의 가난함보다는 저 멀리 있는 세계적 비극에 초조한 눈길
을 보내고있을 따름이다. 보드리아르 역시 하이데거를 원용하면서 "왜 아무 것
도 없는가?"라고 반문한다. 그것은 지금, 여기의 우리가 텅 빈 시.공간에 살고
있다는 뼈저린 깨달음이다. 우리는 상이성을 동질성으로 대체해 버렸고, 사회에
는 음양의 구별도 인정되지 않고, 환상과 고통의 차이같은 "다름(difference)"마
저 사라졌다. 환상이 없으니 당연히 열정도 없고, 주체와 객체가 혼선에 파묻힌
오늘날의 사회는 비현실적 사회이다. 작금의 그런 혼란은 신이 죽었고, 신뢰하던
과학, 역사, 인간성같은 대체 신들까지 죽은 탓이다. 우리는 사이버 문학의 개념
정립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이미 서두에서 그런 "문명의 배반" 내용을 암시한 바
있다. 보드리아르는 그런 혼란이 인간과 동물이 다름에서 비롯한다고 설명한다.
인간이 동물로 부터 다름을 추구한 순간부터, 즉 인간이 한정된 공간을 영역으로
갖는 동물과 달리 공간을 확대한 순간부터 인간의 비극적 혼란은 예견된 것이라
는 말이다. 영역이 정해져 있는 동물은 무의식이 없고, 동물과 달라진 순간 인간
에게만 생겨난 공간 확대를 꿈꾸는 무의식이 그 증거이다. 태고 이래로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들의 영역까지 빼앗긴 동물들은 결코 사라진 게 아니었다. 인간
은 그들의 영역을 차지하는 대신 스스로를 분리시켜 무의식의 영역을 그들에게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의식의 어둠 속에서 암세포처럼 번식
하여 끊임없이 환생되어 왔다. 하늘에는 다양한 맹금들이 날아 다니며 호시탐탐
지상의 인간을 쪼아댈 것만 노리고 있고, 땅에서는 네발 달린 짐승들이 인간에게
엄청난 두통을 배달하고 있다. 이제 그들은 무의식의 영역까지 송두리째 들고
나와 시위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인간의 신체에 연결된 관을통해 인간을 송두
리째 빨아들이고 있는 사이버 스페이스가 그것이다. 바야흐로 그들은 인간의 존
재까지 완전히 챙기려 하고 있는 것이다. 동물들의 영역을 빼앗은 도구였던 문명
이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그들의 무기 역시 상상력과 흡사한 "모상
력"에서 나온다. 인간이 그들의 손아귀에 잡혀, 그들이 만든 울타리 내에서 사육
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서구 열강의 백인들은 언제나 그들의 지배와 약탈의
대상이던 유색 인종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부강해지는 것에서 이런 "모상력"의 위
협을 이미 실감하고 그것을 "황색 공포"라 부르지 않았던가? 아마 최후의 위협은
"혹성 탈출"이란 영화에서 감지된 적이 있듯, 사이버 스페이스에 매몰되어 감전
된 인간의 피부색과 닮은 "흑색 공포"일지도 모른다. 최근에 가짜 국보로 드러난
"귀함별황자총통"이란 역사적 시뮬라크르를 만든, 전 이충무공 해저유물발굴단장
인 황모 대령이 우리에게 실감토록 한 "황색 공포"는 오늘날 그렇게 두려운 위협
은 아니다. 모상력은 이미 공권력조차 시뮬라크르로 만들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
다. 우리에게도 이제 피지배의 상징이던 총독부 건물 정도야 이제 역사의시뮬라
크르로 만들어 버려도 상관없는 시기가 되었다. 그 자리에 새로 들어설 건축물
또한 역사의시뮬라크르일 뿐인데도 말이다. 보드리아르가 제기한 뽀쪽한 수 없
는 대안도 역시 그렇게 시뮬라크르 만들기를 끊임없이 반복할 수 밖에 없다는 것
이다. 우리의 논의 주제인 문학과 통신 문학과 사이버 문학으로 돌아가 보면, 여
기도 색다른 대안은 없다. 그 3가지는 제각기 통신 문학은 문학의 시뮬라크르를
만들고, 사이버 문학은 통신 문학의 시뮬라크르를 만드는 노력을 할 수 밖에는
없다. 왜냐하면 통신 문학에서는 문학이, 사이버 문학에서는 통신 문학이 알리바
이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문학적 상상력이 그리던 유토피아의 실재를 사이버 문
학의 모상력이 극단적인 디스토피아로 밖에 그릴 수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