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만에 답사를 떠난다. 큰애가 고등학생이 되고나서는 답사를 가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방학에나 시간을 내어 갈 수 있을 뿐이다. 이번의 답사는 지리산 자락으로 정하였다. 이번이 5번째가 된다. 욕심을 내고 찾아가지만 워낙 볼 곳이 많아 얼마나 볼지는 의문이다. 첫 번째 답사지는 거창이다. 동호회사이트에 거창을 간다고 하니 동호회 주인장께서 마침 거창을 간다고하여 얼굴이나 보자고 하여 12시에 동계고택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아침일찍 서울을 떠났지만 거창에 도착한 시간은 거의 12시가 되었다. 동계고택에 앞에 차한대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니 주인장은 진작에 도착하여 둘러보고 있는 것 같다. 동계고택은 오래 전부터 보고 싶었던 곳이다. 사랑채의 지붕의 특이하여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궁금하였던 차이다. 또한 동계고택의 종부는 음식솜씨로 유명하여 여러 번 방송과 잡지에 소개되었던 분이라서 꼭 뵙고 싶었던 차이다.
정온 (鄭蘊 1569∼1641/선조 2∼인조 19) 선생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서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정구(鄭逑)를 사숙하고 정인홍(鄭仁弘)을 사사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진사로서 별시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4년 부사직(副司直)으로 재직시, 영창대군을 살해한 강화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유배생활 10년 동안 《덕변록(德辨錄)》 등을 지어 반관자성(反觀自省)하였다. 인조반정 뒤 석방되어 헌납·대사간·부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36년 병자호란 때는 이조참판으로서 조선과 명(明)나라의 의리를 내세워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항복이 결정되자 자결을 기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후 관직을 단념, 덕유산(德裕山)에 들어갔다. 조식(曺植)의 학풍을 이어받아 강개(慷慨)한 처신으로 사림의 추앙을 받았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광주(廣州)의 현절사, 제주의 귤림서원, 함양(咸陽)의 남계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문간(文簡)이다. (출전:야후동아백과사전)
들어가는 소슬대문에는 인조(仁祖)임금이 내린『文簡公桐溪鄭蘊之門』의 정려(旌閭) 현판이 걸려 있다. 집안에 들어서니 집이 깨끗하게 보인다. 집을 잘 가꾸려는 종부의 노력이 한눈에 보인다. 안채로 들어가 주인장과 인사를 나누고 집안을 둘러보았다. 주인장은 이미 집안을 둘러보신 듯하였다. 종부를 위하여 집사람이 선물로 두텁편을 만들어왔지만 종부가 안계셔서 마침 집을 찾아온 옆집 사람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우선 사랑채가 궁금하여 사랑채를 둘러보았다. 예전부터 확인하고 싶었던 사랑채의 2중 지붕을 확인하여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이해가 된다. 처음에 지은 지붕은 집의 높이에 비하여 처마의 깊이가 깊지 않았다. 거기에다 계자난간이 있는 퇴까지 설치하다보니 들이치는 비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눈썹지붕을 추가로 설치한 것이다. 즉 눈썹지붕은 원래의 것이 아니고 건물을 완공한 후 보첨한 것이다.
건물을 보고 있노라니 주인장님이 지붕이 특이하지 않느냐고 한다. 용마루를 보니 다른 곳과는 달리 용마루 하부인 부고착고 밑에 암막새와 수막새를 다시 설치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안채와 사랑채에만 설치되었다. 이러한 만든 용마루는 일반지붕보다 용마루가 훨씬 더 높아 보인다. 이렇게 한 것은 아마도 용마루에서 생길지 모르는 누수를 방지하고 용마루를 높게 보이게 함으로서 건물에 위용을 더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사랑채는 ㄱ자형으로 우측전면에 누마루를 두었는데 이것은 함안에 있는 정여창고택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아마도 정여창고택을 참고로하여 지은 것은 아닌가 한다. 사랑채 상량대에는 "崇禎紀元後四庚辰三月"이라 적혀 있다는데 이는 1820년(순조(純祖) 20년)이다. 사랑채는 마루를 높여 지었는데 이것은 평지에서 기단만을 설치할 경우 집이 낮아보이는 것을 우려한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집을 높이다 보니 섬돌을 2단으로 설치하였는데 이조차도 높게 될 수 밖에 없어 전반적으로 불안해 보이는 것이 흠이다.
이 집의 특징은 겹집의 구조를 하고 있다. 겹집은 원래 북쪽 지방의 집구조이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 남쪽 지방에서도 겹집의 구조가 나타난다고 한다. 이것은 살림의 규모가 커지면서 방을 다양하게 쓸 수 있는 장점 때문에 기후의 문제보다는 실용성의 문제로 겹집의 평면을 채택한 것이라고 한다. 대청도 전후 두칸인데 뒤편을 한자 정도 높여놓았다. 이렇게 한 것은 대청이 제사 기능을 위한 것으로서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구조이다.
돌아보다 보니 점심 때가 되어 주인장님과 근처의 수승대로 향하였다. 수승대는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어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식사겸 안주로 몇 가지를 시키고 소주 한병을 시켰다. 간단히 요기를 한 아이들은 물가에 놀겠다고하여 나중에 찾으마하고 물가로 보네놓고는 주인장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자의 여정이 있어 마음놓고 이야기를 할 처지가 못되어 아쉬움을 남았던 시간이었다. 주인님이 수승대 위쪽에 있는 서원으로 안내하겠다고 하여 뒤를 쫓아 갔다.
이곳은 지금 유명한 거창국제연극제 기간이었다. 국제연극제가 수승대에서 열린다는 것은 이곳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피서하기 위하여 수승대를 찾는 사람과 연극제에 관련된 사람으로 수승대는 복잡하기 이를 때 없었다.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구연서당(龜淵書堂)의 누마루가 나타났다. 관수루(觀水樓)라는 이름에 걸맞게 누문 앞으로는 수승대 계곡이다.
거창군청의 자료에 의하면 구연서당은 조선 중종 때 요수 신권(樂水 愼權)선생이 은거하면서 건립하여 제자들을 양성하였던 곳으로 대의 모양이 거북과 같다하여 암구대(岩龜臺)라 하고 경내를 구연동(龜淵洞)이라 하였다. 수승대라는 이름은 1543년에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이 안의현 삼동을 유람차 왔다가 마리면 영승리에 머물던 중 그 내력을 듣고 지어준 이름으로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며 음이 같은 수승대(搜勝臺)라 고칠 것을 권하는 사율시(四律詩)를 보내니 요수 신권선생이 대의 면에다 새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구연서원 경내에는 구연서원(龜淵書院), 사우(祠宇) 내삼문(內三門) 관수루(觀水樓), 전사청(典祠廳) 요수정(樂水亭) 함양제(涵養齊) 정려(旌閭) 산고수장비(山高水長碑)와 유적비(遺蹟碑) 암구대(岩龜臺) 등이 있다.
경내로 들어가 보니 이곳 마당에서도 연극이 공연되고 있었다. 경내에는 앞서 말한 정려비와 최근에 세운 자화자찬격의 비석들이 즐비하였다. 주인장님은 연극공연이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못마땅하다고 하였다. 이에 나는 그래도 쓸데 없는 비석을 세우는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더니 그건 그렇다고 답하였다. 관수루는 암구대라는 바위를 한쪽 담으로 하고 다른 쪽은 돌로 쌓은 담을 설치하여 경계를 삼았다. 구연서원은 서원으로서의 구성은 갖추지 못하였다. 아마도 초기 서당으로 출발한 것이 그 한계를 넘지 못하고 현재의 상황으로 정착된 듯하다.
암구대에 올라보니 주변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 앉아 바둑을 두면서 술한잔걸치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만 있다면 이곳에 앉아 경관을 감상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관수루에는 별도의 올라가는 계단이 없고 이 암구대에서 관수루에 걸쳐진 돌판이 들어가는 입구가 된다. 자연을 이용한 천연스러운 감각이 돋보인다.
안쪽에 있는 구연서원을 돌아보았다. 구연서원의 상량문에는 公子産二四九七年 庚戌年 三月이라는 명문이 있었다. 공자의 탄생년이 기원전 552년 이니까. 건물은 1945년에 세워진 것이다. 편액에는 구연서원이라고 쓰여있고 별도의 당호가 없었다. 군청에 당호를 문의하니 별도의 당호가 없고 건물이름을 구연서원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또한 건립의 과정은 대원군의 사원혁파 때 훼철된 것을 다시 지었다가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지었다고한다. 전면 4칸인데 가운데 2칸은 대청으로 되어있고 측면에는 방으로 구성되어있다. 전면의 기둥은 원기둥으로 설치하였다.
뒷 쪽으로 돌아가보니 사당이 있다. 사당 중 눈에 띄는 것은 창호이다. 창호가 불발기 형식으로 되어있었다. 이러한 창호는 사당에서는 쓰지 않는다. 근처에 있는 산청 율곡사 대웅전도 이와 같은 양식으로 되었었는데 최근 보수하면서 불발기창을 고친 것이라고 하여 어칸의 빗살무늬 형식으로 고쳐 달았다. 군청에 사당의 건립시기를 물어보니 최근의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율곡사의 것을 보고 참고한 것같다는 생각이 든다.
돌아나오면서 보아도 서원마당에 있는 각종 비석이 눈에 거슬린다. 크기도 매우 크고 화려한 것 몇몇이 눈에 보인다. 최근 일부 졸부들이 자신의 권위나 위세를 보이기 위하여 이렇게 고향에 비석을 세우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도 다른 곳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서원을 나와 주인장님과 헤어지고 각자의 답사길로 떠났다. 다음의 답사는 만월당(居昌 滿月堂/유형문화재 제 370호)이다. 수승대에서 북쪽으로 5분 정도가면 농산리가 나온다. 만월당은 일종의 누정이다. 집은 정면 4칸 맞배지붕으로 가운데 두칸이 마루이고 좌우에 한칸씩 방을 설치하였다. 가운데 두칸은 방이 있는 칸보다 작아 두칸 크기라고 해도 방의 칸반 크기에 지나지 않는다. 만월당은 특별한 치장이 없는 소박하고 아담한 건물이다. 1786년에 중건하였다고 하는데 주로 지역문인들이 교류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던 곳이라 한다.
만월당은 앞에 넓은 마당에 연못을 두고 있고 나지막한 담너머로 넓은 논이 보인다. 그런대로 시야가 넓게 펼쳐져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보잘것없는 시멘트기와가 얹어진 담장으로 둘러져 있지만 과거에는 고즈넉한 경관을 보였을 것이다. 넓은 정원과 조그마한 연못 잘 가꾸면 그런대로 아취가 있는 정원이 되었을 터 지금은 손을 보는 사람이 없어 퇴락되어 간다. 너무 관리가 되지 않아 여러 곳이 손상되어 한시바삐 손을 보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
만월당의 답사를 마치고 농산리 석조여래입상(農山里石造如來立像/유형문화재 제 36호)으로 향하였다. 만월당에서 농로를 따라 가니 안내판이 보였다. 겨우 차한대가 지날 수 있는 길을 따라 들어가다 석조여래입상입구의 안내판이 보여 차를 세워 두고 산길을 올랐다. 한 5분 정도 산길을 오르니 석조여래입상 뒷부분이 보였다. 처음 올라갈 때는 산 중에 있어 마애불로 상상하고 올라갔는데 올라가보니 전혀 의외의 석불입상이 나타났다. 현재는 뒤쪽으로 들어가게 되어있어 처음간 나는 이상하게 울퉁불퉁하게 생긴 석주형 바위가 우선 눈에 띄었다. 울타리가 쳐져 있어 무엇인가하고 돌아보았더니 너무 의외인 잘생긴 석조여래입상이 있었다.
석조여래입상을 보고 너무 놀랐다. 이러한 곳에 이렇게 아름다운 석조여래입상이 있다는 것 자체가 경이였다. 우선 상호가 온화하여 허리를 잘록하게 표현하였다. 의습의 표현이 매우 부드럽고 자태가 우아하다. 자료에 의하면 불상전체의 높이가 2.7m라고 하는데 만일 광배가 제대로 남았다면 이보다는 조금 더 컷을 것이다. 전체적인 인상과 옷문양을 보았을 때 이 불상의 조성시기는 통일신라시대 성기의 것으로 보여진다. 머리에는 육계가 있는데 나발인지 여부는 워낙 마모가 심해서 알 수 없었다. 석질로 보아서는 나발을 만드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수인은 두손을 모두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자연스럽게 내보이는 모습이다. 이러한 수인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수인의 명칭은 아마도 <대일경>에서 나온다는 부처의 12합장중 부수향하합장(覆手向下合掌:두 손의 손바닥을 밑으로 향하게 하여 가운뎃 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을 붙이고 손가락 끝은 아래쪽을 향하게 한다.)을 한 것 같다.
석조여래입상은 거신광을 하고 있고 광배에는 희미하게 화염문이 보인다. 법의는 통견을 하고 있는데 무릎아래 의습의 모습이 특이하다. 옷의 끝자락이 두발사이에서 모여 V모양으로 표현되었다. 발아래 부분은 별도의 돌로 처리되었다. 아마도 복련이 새겨졌던 것 같은데 너무 마모가 되어 형상을 알아보기 힘들다. 석조여래입상의 아쉬운 점은 석질이 너무 약해 그간 풍화가 너무 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지금도 돌이 너무 풍화되어 건드리면 곧 부서져 버릴 것 같다. 제대로 된 모습이었다면 너무도 아름다운 석불이었으리라.
석조여래입상을 보면서 과연 이곳에 가람은 어떻게 배치되었을까 궁금해졌다. 입상의 정면쪽이 남쪽일 것이다. 내가 올라온 쪽이 불상의 뒷부분이다. 불상은 경사를 등에 지고 배치된 것이 아니고 경사를 옆으로 받으면서 배치되었다. 지금의 개념으로는 배산을 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러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불상의 배치가 이렇다면 집도 지금의 개념과는 달리 높은 곳을 등지고 배치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입상 앞 쪽 어느 곳에 석등 또는 석탑을 놓았을 터 현재는 주변이 나무가 많이 들어 차있어 확인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다음에 시간을 가지고 이곳을 둘러 보아야겠다.
석조입상을 보고 돌아가는 길이 만만치 않았다. 워낙좁은 길이라서 차를 돌리지 못해 한참을 고생하다 겨우 차를 돌려 나갔다. 차를 돌리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가 되어 한 곳만 더보고 돌아가기로 하고 수승대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어 쉽게 찾아갈 수 있는 황산리 신씨고가(黃山里 愼氏古家/민속자료 제 17호)로 향하였다.
황산리 신씨고가는 거창 신씨(居昌愼氏) 집성촌인 황산 마을에 있으며 일명 「猿鶴古家」라 칭한다다고 한다. 황산리는 현재 고택민박촌으로 개발되어 있는데 이 집은 민박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안주인이 계셨다. 안주인에게 인사를 드리고 집을 보겠노라고 하니 보라고 하신다. 이 집은 1927년에 지은 그리 오래지 않은 건물이다. 이 집은 근대 부농이 지은 집으로서 한옥의 변형과정을 보여주는 건축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집이다. 집은 안채, 사랑채, 중문채, 곳간채, 솟을대문, 후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재의 크기나 목수의 솜씨 등을 보면 당시의 집주인의 재력을 알 수 있다. 부재가 넉넉하고 목수의 솜씨가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아 꽤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집의 주인의 내력을 보아도 확인할 수 있다. 안채에 들어가 보니 주인의 사진과 각 종명패가 걸려있는데 박정희 시절에 통일부 장관을 지낸 신도성씨가 이 집의 전주인이었다. 안 주인의 말씀에 의하면 신도성씨와는 와세다 대학 유학시절에 만났다고 하였다. 일제시대 일본으로 유학을 갈 정도라면 그 집의 재산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안채의 마루에는 피아노가 있고 안주인이 피아노를 치는 모습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안주인의 말씀으로는 피아노를 전공하였다고 하신다. 당시에 피아노를 전공할 정도이고 일본으로 유학을 갈 정도이면 안주인의 집도 꽤 잘 살았을 것이다. 안주인의 말씀으로는 만석지기였다고 하신다.
이 집도 겹집으로 지어졌다. 이 집의 특징 중하나는 안채에도 누마루가 설치된 것이다. 안채에 누마루가 설치된 것은 예전에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안채와 사랑채으 구분이 모호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남녀의 구별이 예전과 같지 않으면서 안채에서도 사랑채와 같은 역할이 필요해졌다는 것이다. 이 집의 안채의 대청은 과거의 집에 비하여 매우 축소되었다. 대청의 역할이 그만큼 줄어든 것이다. 안채의 대청도 앞서 본 동계고택과 마찬가지로 한자정도 높게 되어있다. 같은 지역의 특성이 이 곳에서도 보인다.
이 집의 중요한 특징은 안채 안에 화장실이 설치되었다는 점이다. 20세기에 들어 서양과 일본의 건축의 영향으로 화장실이 집안에 설치되기 시작하는데 서울에서 한참 떨어진 이곳에서도 집안에 화장실이 설치되었다는 것은 문화의 전파속도가 과거와는 달리 매우 빨라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집의 안채에 추녀의 마구리에는 바다 海자를 써 놓았다. 이것은 화재에 대한 벽사의 의미로 써 놓은 것이다.
안채의 마당에는 잡초가 많이 자랐다. 왜 정리를 하지 않는가 물으니 사람이 없어 정리를 할 수 없다고 한다. 풀이 자라고나니 먼지가 생기지 않아서 좋다고 하신다. 안주인의 말씀에 의하면 예전에는 아랫것들을 부려 집을 관리하였는데 이제는 그것이 힘들다고 한다. 예전에는 하인이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하대를 하였다고 하면서 이 동네에도 하인을 하던 사람들과 같이 살았는데 세월이 변하면서 과거와 같이 취급받는 것이 싫어 과거 하인을 하던 사람들이 마을을 모두 떠났다고 한다.
신도성씨가옥의 답사를 마치고 동계고택의 종부가 돌아오셨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인사나 하고 갈 요량으로 동계고택에 잠시 들러 보기로 하였다. 안채로 들어가보니 종부께서 돌아오셨다. 인사를 드리고 아침에 가져온 떡을 보셨는가 하였더니 대청으로 가서 가져오셨다. 떡을 풀러 보시고는 너무 예쁘다면서 젊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떡을 만들었는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시면서 읍내에 있는 동서와 같이 먹겠다고 하신다. 자신은 떡은 잘 못만든다고 하신다면서 만들어온 두텁편에 대한 칭찬을 하셨다. 그러면서 자기가 얼마 전 동계선생 불천위제사 때 만든 송편을 쪄내올테니 먹고 가라고 하신다. 쪄 내온 송편은 내가 이전에 전혀 먹어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소나무 속껍질로 만든 송편은 예쁘기도 하지만 나무 속줄기를 씹는 맛이 일품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너무 맛있다고 하면서 내온 송편을 맛볼 사이도 없이 비워버렸다. 애들이 너무 잘먹는 것을 보시고 냉동실에 얼려놓은 것을 더 줄테니 가져가라 한신다.
집사람도 음식에 관심이 많아 대화는 자연스럽게 음식으로 넘어갔다. 종부께서 자랑하는 육포,고추소박이(고추전과 비슷하지만 기름으로 부치지 않고 쪄낸다.), 돔장(도미조림), 고추장볶음, 집장(메주가루를 부추 등과 함께 박에 넣어 만든 장) 등 몇 가지음식을 만드는 방법에 대하여 집사람에게 알려 주었다. 집사람이 이런 좋은 솜씨를 며느리에게 전수하지 않는가 하였더니 며느리가 배우면 고생한다고 전혀 배우려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제사 때 내려와서는 음식을 하면 모두 싸가기 바쁘다고 하였다. 이제는 며느리에게 강제로라도 전수시켜 받아 드시라고 하시니 쉽지가 않다고 하신다. 자식이기는 부모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아쉬운 것은 이렇게 좋은 문화가 사라져 버릴 위기에 있다는 점이다.
집사람 덕분에 맛있는 음식을 먹고 미식가라고 자처하는 나는 음식에 대한 관심이 많다. 그래서 잠시 우리 음식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하다. 우리 문화에 대한 인식이 낮지만 특히 음식에 대한 인식은 상대적으로 너무 낮다. 우리음식은 매우 수준이 높다. 음식에 대한 수준은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보면 얼마간은 알 수 있다. 서양음식과 한국음식 중국음식을 비교해보면 한국음식을 만드는 과정이 가장 복잡하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종가댁 며느리가 음식을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은 제사 등의 집안일에 대한 부담감때문이긴 하지만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는 손님을 자주 치른다. 음식은 집사람 혼자서 준비한다. 손님의 숫자가 8명을 넘을 경우 준비하는 음식은 중국식으로 8-10가지 정도를 준비한다.
손님의 숫자가 6명 정도가 되면 한식으로 하는 경우가 있다. 음식만드는 것이 만만치 않아 한식으로 하는 경우는 특별한 대접을 할 경우이다. 음식을 준비하는 시간이 오래기 때문에 한식을 할 경우 음식 가지수가 6가지를 넘지 않는다. 그러나 한식을 차릴 경우 음식의 가지수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일이 생긴다. 최소한 밤이라도 까야한다. 그만큼 한식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다. 한마디로 양반가에서 즐기던 제대로 된 한식은 아랫것을 데리고 하는 음식이라는 것이다.
이왕 음식에 대하여 이야기가 나왔으니 중국음식과 한식의 차이에 대하여 한가지만 이야기하려한다. 중국음식은 식으면 먹기가 힘들지만 한식은 식어도 먹을 수 있다. 이것은 음식을 만드는 과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의 음식은 기름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음식은 기름을 사용하여 쎈불로 급하게 익혀내는 음식이기 때문에 식으면 먹기가 힘들다. 중국음식에도 찬음식 예를 들면 오향장육이나 냉채류는 다음에도 먹을 수가 있으나 대부분의 음식은 그렇지 못하다.
휴가를 마치고 와서 장모생신상을 차리며 집사람이 배워온 것 중에서 고추소박이를 만들어 내놓았다. 이전의 고추전은 계란옷을 입혀 기름에 부쳐내는 것인데 종부는 절대 기름에 부치지말라고 하였다. 기름에 부치면 싸구려 음식이 된다고 하면서 꼭 쪄내라고 하였다. 그리고 계란옷을 입히지 말고 전분을 입혀 찌라고 하였다. 쪄낸 고추소박이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우선 전분을 발라쪄 냈기 때문에 전분이 투명해져 음식의 형상과 색이 그대로 살아있어 시각적으로 즐거움을 주었다. 그리고 기름지지 않아 음식의 순수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한마디로 이때까지 먹던 고추전과는 전혀다른 맛이었다. 이 음식만을 보더라도 종부의 음식솜씨가 얼마나 대단한지 느낄 수 있었다.
동계고택의 음식은 동계집안의 음식이 아니다. 종부께서는 유명한 경주 최씨 집안의 첫째 따님이다. 둘째 따님은 유성룡집안에 종부이다. 둘째 따님의 음식솜씨는 맛보지 못하였지만 술 담그는 솜씨는 맛보았다. 예전 신영훈 선생과 같이 안동하회 마을 답사를 갔을 때 종부께서 직접 담근 술(진짜 경주법주임)을 내놓았는데 내가 마셔본 술중에서 최고의 맛이었다. 종부께서는 동생은 술을 마시지 못하면서 술을 잘담근다고 하시면서 자기는 술을 담지 못한다고 한다. 술을 좋아하신 종손 때문에 술을 담그면 다마셔 버릴 것이 싫어서 술을 담지 않았다고 한다.
어제가 동계선생의 불천위 제사라고 하였다. 곧 유성룡선생의 불천위 제사가 있다고 하시면서 무슨 팔자인지 두 자매가 더운 여름날 불천위 제사로 고생한다고 하셨다. 장 맛이 좋을 것 같아 조금 주실 수 없는가 했더니 기꺼이 주신다. 장도 많이 담지만 여러 사람이 가져가서 이제 조금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신다. 좋은 선물을 받아 돌아가게 되었다. 시간이 너무 흘러 이제는 가야겠다고 인사를 하고 나오려니 굳이 배웅을 하겠다고 하시면서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오셨다. 정여창고택 사랑채 앞에 있는 화단과 비슷한 화단이 있어 언제한 것인가 궁금하였다. 나오는 길에 사랑채 앞에 있는 조경을 언제하였는가 여쭈었더니 1947년에 하였다고 하신다.
밖에 나와서도 못내 아쉬운 듯 집사람과 손을 잡고 인사를 하시면서 음식을 해먹고 꼭 전화해달라고 하시면서 전화번호까지 알려주셨다. 그러면서 다음올 때는 꼭 전화를 하고 오라신다. 음식에 관심이 많았던 집사람이 무척 반가웠던 것 같다. 나중에 집사람이 음식을 해먹었다고 하며 전화를 드렸더니 수란의 요리법도 가르쳐 주셨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음에 내려올 때 연락을 하면 떡재료를 준비하여 놓고 가르쳐 주겠다고 하셨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 사람이 그리운 법인가 보다. 한 가문의 종손이 조그마한 관심에도 이렇게 즐거워하고 정을 주시는 것을 보면 시간의 흐름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