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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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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소리>는 주님의 일꾼들이 주시는 좋은 말씀을 묵상하는 공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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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을 보라!’ | |
전북실업자 종합지원센타 이사장 /본회 83-85년 총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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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오늘 이 땅의 청년예수를 만나고, 하늘 씨앗이 되어, 이 땅에 하늘 씨앗을 뿌리겠다는 큰 미션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청년들의 의지가 대견하고 자랑스럽습니다.
제가 총무로 있을 때 소식지의 제목을 지금의 ‘오늘 이 땅의 사도행전’으로 정한 배경도 기청 여러분이 지금 희년50년을 준비하는 배경과 비슷합니다. 1983년 어두운 오욕의 역사, 침울하고 함부로 말할 수도 쉽게 행동할 수도 없던 그 시절, 우리 청년들은 십자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전파와 함께 광주민중항쟁 계승과 학살원흉 처단이라는 투쟁의 과제로 이 역사의 한 복판에서 외치고자 했던 열망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던 기청 동지들이 뜻을 함께 하고, 그 옛날 사도들의 순교자적 열정과 헌신을 본받아 오늘 이 땅 곳곳을 복음과 민주투쟁의 열기로 가득 채우고자 했던 간절함도 있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가시는 하나님의 선교사역에 동참하는 것이야 말로 기독청년의 비전이며, 그 비전을 실현해 가기 위한 복음적 민주적 민족적 민중적 과제를 우리의 미션으로 설정해 나갔던 그 때 그 사람들의 표현이며 결단이며 실천이었습니다. 그 때로부터 24년이 흐른 지금, 과연 우리는 하나님 나라 건설의 비전을 얼마나 힘차게 붙들고 있으며, 복음 전파와 민주화와 통일의 미션을 얼마나 실천했는지? 그 과정에 뜨거운 가슴을 가진 우리 기장 청년들이 얼마나 헌신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오늘의 현실이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한 양극화 심화와 실종된 민주주의와 요원한 통일의 사회임을 볼 때, 우리들 기청 선배들의 마음엔 자부심과 긍지와 의욕과 용기보다 자책과 회환의 그늘이 더 많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과 미션을 이 땅에 실현하고자 했던 지난 날 기청 동지들의 몸부림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75년 재건 총회 이전의 선배들은 암울했던 민족의 여명을 열기 위해 헌신했으며, 75년 이후 주어진 역사적 사명과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온 몸을 던져 투쟁하다 다치고 끌려가고 갇히고 죽임당하는 고통을 감내했으며,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하여 민중과 함께 더불어 힘차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마치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지의 사명인 풍성한 포도송이를 결실 맺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이었다고 감히 말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고 교회도 변하며 사람도 변합니다. 폭압의 시절 동지적 연대와 헌신의 기운은 민주적 자유의 신장(?)과 더불어 점차 약화되어 가는 듯합니다. 여전히 민주와 통일의 시대적 과제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급격한 보수화 바람은 교회에도 강하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청년의 뜨거운 가슴을 담을 만한 그릇인 교회들 또한 쇠락해 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안타깝게도 이 시대 젊은이들의 사고와 생활 또한 이전의 그것과 많은 다름이 드러날 만큼 급변하여 어떤 방식과 체계로 묶어 세워 하나님이 주신 비전과 미션을 감당할 수 있을지 참으로 어려운 일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아름다운 존재들임을 인식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처지와 형편 속에서도 길을 보여주시고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믿는 기독청년들이 바로 여러분 들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는 새로운 각오와 다짐이 필요하며, 과제를 앞세우기보다 중심과 지향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청년예수를 만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들, 하늘 씨앗이 되고자 하는 거듭남에 필요한 결단들, 그리고 척박한 시대의 밭에 그 씨앗을 뿌리고 키워 가야할 인내와 헌신들이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가.’입니다. 사명을 감당하고 성과를 내고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과 틀과 내용들 이전에, 우리 ‘기장 청년들의 눈이 어디로 모아져야 하는가.’ 입니다. 그 초점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초점을 분명히 할 때 그 분을 만날 수 있고, 그 분의 사랑과 헌신을 배울 수 있고, 이 땅에 한 알의 밀알이 될 수 있으며, 우리 기장 청년들이 하늘 씨앗의 공동체로서 정체성을 가질 수 있으며, 이 땅에 공중의 새가 깃들 수 있는 나무를 키워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Hieronymus Bosch. Ecce Homo. 1485-1490. Oil on panel. Philadelphia Museum of Art, Philadelphia, PA, USA>
여기 좋은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선물로 드립니다. 독일의 화가 슈테른 베르그가 그린 ‘이 사람을 보라’(Ecci Home)라는 그림입니다. 아마 많이 보셨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그림인데 화가가 이 그림을 그린 배경을 보면 참으로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슈테른 베르그는 교회의 요청에 의해 예수님의 여러 모습을 담은 성화를 그리곤 했습니다.
Paris>
그러던 그가 돈을 벌겠다고 나체 모델을 그리고 있었는데 마침 그 화방에 그가 그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림이 놓여있었습니다. 모델 아가씨는 저 그림이 무슨 그림이냐고 물었고, 슈테른 베르그는 별 생각 없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지금 죽으시는 장면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때 모델 아가씨가 얼른 말을 받아, "우리의 죄라고요? 선생님의 죄도, 나의 죄도 대신해서 죽으셨단 말입니까?" "그렇구말구요" 그 순간 슈테른 베르그의 가슴은 건물이 무너져 내릴 듯 철렁하는 충격을 받았고, 그날 밤, 낮에 자신이 대답했던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놓고 묵상했습니다. 두 손 들고 기도했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서 두 주목으로 눈물을 닦아내야 했습니다. 그분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었고 그분의 고통이 나를 위한 고통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립니다. 눈물로 먹을 삼아 그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그림이 바로 '에케이 호모 - 이 사람을 보라' 라는 그림입니다.
<Cigoli. Ecce Homo. 1607 Oil on canvas. 175 x 135 cm. Galleria Palatina (Palazzo Pitti), Florence>
자랑스런 기장 청년들의 새 해 목표대로 ‘희년을 맞이한 희년의 결단’도 그 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치 있고 의미 있으며 결실 맺을 주 있음을 말씀드리며, ‘이 사람을 보라!’는 그림을 기억하는 여러분 모두의 가정과 삶 그리고 지역과 전국의 기청연합회와 수고하시는 임원들에게 십자가와 부활로 승리하신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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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는 새로운 각오와 다짐이 필요하며, 과제를 앞세우기보다 중심과 지향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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