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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24일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 강림 후 마지막 주일)
새로운 전환-엘베델
창35:1~7; 골3:12~17
오늘은 성령강림 후 마지막 주일입니다. 교회력으로 보면 한 해를 마감하는 예배입니다. 다음 주일부터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대림절을 맞게 됩니다. 새로운 희망의 기다림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이지요.
지난 주일에 우리는 추수감사주일을 지내면서 올 한 해의 감사들을 나누어 보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올 한 해 동안 우리에게 어려움이나 고통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올 한 해 동안에도 우리는 갈등하고 미워하며 집착하고 불안해하는 약한 모습들이 있었습니다. 또 좌절과 낭패감으로 인해 불면의 밤을 지새기도 했고, 몸의 병약함이나 경제적인 문제로 전전긍긍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 삶 속에는 우리를 눈물 짓게 하고 좌절케 하는 순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감사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삶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31편 15절에, “내 앞날은 주님의 손에 달려 있으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모든 일이 다 자신의 뜻대로 잘 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 전체를 읽어보면 오히려 시인은 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울다 지치기도 하고 몸과 마음의 활력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슬픔으로 힘이 소진되기도 합니다. 근력은 고통 속에서 말라버리고 뼈마저 녹아 버렸다고 탄식하기도 합니다.(시31:9~10) 그러나 시인은 그런 중에도 “내 앞날은 주님의 손에 달려 있으니...”, 고백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시간은 주님의 손에 붙잡혀 있으니..., 나의 시간은 주님의 손에 지탱되어 있으니..., 나의 시간은 주님의 손에서 보장되어 있으니...”, 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삶이 주님의 손 안에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나의 삶이 어떤 힘 있는 사람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명예나 인기 얻음에 달여 있는 것이 아니고, 돈이나 재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심지어 내 의지나 내 기분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우리의 주인 되시는 그분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삶이 완전하지 않고 오히려 지워버리고 싶은 실수와 오점들, 상처들이 있음에도, 그런 나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단단히 나를 붙잡고 계십니다. 이 믿음은, 우리의 삶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합니다.
사실, 우리가 이 믿음 안에서 우리 삶을 긍정하고 감사하는 것은 적극적 사고방식이나 긍정의 힘과 같은 우리의 의지의 발동 때문이 아닙니다. I CAN DO, YOU CAN DO, WE CAN DO! 같이 우리를 흥분시키고 몰아치는 구호 때문도 아니고, 그저 막연한 낙관주의나 새로 시작할 수 있겠다는 우리의 기분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삶을 긍정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내 삶이 하나님의 손 안에 붙잡혀 있다는 것, 막연한 기분이 아니라, 그분의 신실함을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고요한 가운데, 우리의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거기서 그분의 생명과 능력을 맛보게 될 때, 우리는 알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어디에 달려있는지를 말입니다.
조이스 럽의 시 한편을 읽어 드립니다.
내 지나온 삶 돌아보노라면/ 오래된 포도주처럼/ 흡족한 향기에 취하는/ 그런 날들도 있네//
포근한 품에 나를 안고/ 그 손바닥에 나를 새기신 이사야의 아름다운 하나님/ 묵상하기 쉬운 날들//
허나 온 종일 기억을 곱씹어도 퀴퀴한 곰팡내 나는 메마른 빵 부스러기뿐인 그런 날들도 있네//
하나님의 불변의 사랑/ 좀처럼 느껴지지 않고/ 그분의 품 그리는 마음조차/ 허전하기만 한 날들//
그러나 또 다른 날들/ 나는 멀찍이 띠어 앉아/ 내 삶을 응시하네/ 신실함을 깊이 믿으며/ 과거의 베틀을 돌리네//
그제야 비로소 깨닫네/ 신실함은 감정과 무관한 것/ 신실함은 깊이 믿는 것임을/ 기쁨 중에 날 품으시는 분/ 슬플 때도 떠나지 않으심을//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고 계심이 느껴지지 않고, 우리 안에 감사가 올라오지 않고, 온 종일 기억을 곱씹어도 퀴퀴한 곰팡내 나는 메마른 빵 부스러기뿐인, 그런 건조한 날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 것과 같은 초조와 불안의 날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면서 우리는 이런 삶들을 다 뒤로 하고, 아니 이런 중에서도,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내 존재를 깊이 긍정하고 내 삶을 감사로 맞고 내 하는 일들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일 수 있는 그런 삶을 새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오늘 야곱의 본문은 밧단아람에서 돌아와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 생긴 일입니다. 야곱은 형과 헤어진 후에 세겜 성에 머물게 됩니다. 야곱은 자신이 머물 땅을 세겜의 아버지인 하몰에게서 은 백냥을 주고 샀습니다. 아마도 그 지역의 이름이 세겜이고 하몰이 아들이 세겜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을 보면 이 세겜은 그 당시에 그 지역의 실력자이었던 것 같습니다. 34장에 보면 그 지역의 통치자라고 명시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세겜에 살게 된 후에 야곱의 딸 디나가 그 지방의 여자들을 보러 나갔습니다. 세겜이 이 놀러 나온 디나를 보게 되었는데, 그는 디나에게 첫 눈에 반해서 디나를 끌고 가서 욕을 보였습니다. 이 일로 해서 야곱의 아들들은 큰 모욕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세겜과 협상을 하기를 디나와 결혼을 허락하면서 조건을 걸었습니다. 그것은 세겜 남자들이 모두 할례를 받아야 두 집안 간에 결혼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겜의 남자들이 모두 할례를 받은 사이에 야곱의 아들들은 그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 성을 약탈하였습니다. 이 일을 나중에 알게 된 야곱이 그 아들들을 나무랐지만 이미 저질러진 일이었습니다. 야곱은 이 일로 주변의 가나안 사람들이 자기들을 쳐 죽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크게 느꼈습니다.
우리가 읽은 35장의 배경은 바로 이렇습니다. 이때 야곱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린 것은 “어서 베델로 올라가, 거기에서 살아라. 형 에서 앞에서 피해 도망칠 때, 나타나셨던 그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라”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야곱은 자기의 모든 식구들에게 명령합니다. “가지고 있는 이방신상을 다 버리고,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어라. 이제 이 곳을 떠나 베델로 올라간다. 내가 고생할 때 간구를 들어주시고 내 가는 길에 늘 나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 바치려 한다.” 그리고는 자기 식구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이방 신상들, 귀고리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그 성읍을 떠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번의 위기를 맞게 된 야곱을 보게 됩니다. 이때 야곱이 한 일은 베델의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은 먼저, 자신들이 그동안 살면서 알게 모르게 달고 살았던, 의지하던 것들,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다 놓아버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살면서 오염된 것들을 씻고 옷을 갈아입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을 떠나 베델로 올라가 거기서 단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삶에 분명한 매듭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아내 스마트 폰이 먹통이 돼서 서비스센터에 가지고 갔습니다. 먹통이 된 스마트 폰을 본 기사가 하는 말이, 앞으로 이런 일이 있을 때는 먼저 전원을 껐다 켜보세요, 스마트 폰도 컴퓨터와 마찬가지로 쉬지 않고 계속 일하면 피로가 쌓입니다. 그러면 내부적으로 프로그램이 엉키는 수가 있어요. 그럴 때 껐다 키면 정리가 됩니다, 하더라구요. 리셋 하라는 거지요.
오늘 본문은 한마디로 야곱이 리셋을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리셋을 어떻게 합니까? 베델의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 삶의 여정에서 이렇게 저렇게 달고 살게 된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내려놓는 것,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는 것, 베델로 올라가 거기서 단을 쌓는 것! 예배란 새로운 전환,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한 해를 마감하고 또 새로운 해를 맞는 시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리셋을 해야 할까요?
우선, 시편 31편의 시인처럼, 나의 시간이 주님 손에 달려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 그것이 내가 보기에는 하찮게 보일지라도, 그러나 주님께서 나의 시간의 주인이었으며, 우리의 삶은 오로지 주님 손에 달려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조이스 럽의 싯구처럼, 한 걸음 띠어 앉아 내 삶을 응시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신실함을 믿으며, 기쁨 중에서 뿐 아니라 슬픔 속에 있을 때도 내 삶이 그분 손 안에 붙잡혀 있음을 가만히 묵상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삶의 질곡을 걸어가면서 생긴 부산물들,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있습니다. 우선 우리의 감정으로, 우리의 생각으로 올라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심하면 정말 우리가 콘트롤할 수 없을 만큼 올라옵니다. 여러분, 이제 이런 것들을 기도 중에 놓아버리도록 합시다. 향심기도 시간을 가지세요. 그리고 올라오는 모든 것들을 놓아버리세요. 그리고 앞에서 말했던 내 삶이 그분 손 안에 붙잡혀 있음으로 돌아가세요.
셋째로, 내 몸을 씻고 새 옷을 갈아입는 것입니다. 우리의 에너지를 바꾸는 일입니다. 부정적인 에너지에서 긍정적인 에너지로! 오늘 골로새서 3장에 있는 말씀대로, 동정심, 친절함, 겸손함, 온유함, 오래 참음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기운에 막혀서 이런 것들이 드러나지 못합니다. 만일 이것을 깊이 묻어두었다면, 할 수 있는 만큼 이것을 꺼내 표현해봅시다.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해주고...”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근거는 내 삶이 그분의 손에 붙잡혀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속해있는 가정, 교회, 이웃, 친구들, 이 사회 속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깃들도록 지속적으로 기도합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살아있게 하십시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찬양합시다.
그리고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에게서 힘을 얻어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고대 모든 문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름은 그 인격 전부를 나타내는 표현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인격, 에너지, 이 모든 것이 그 이름 안에 담겨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전통에서는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 사람으로 존재하게 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그의 삶의 인격과 에너지가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이름은 그 존재의 힘이었습니다.
그래서 후기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 야훼를 그냥 주님(아도나이)이라고 바꾸어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이름)에게서 힘을 얻는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현하도록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예수의 이름이 주술적으로 쓰이거나, 아무렇게나 불려지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속의 깊은 주의를 가지고 깊은 속에서 그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교회가 가장 중요한 신앙의 행위로 말하는 예수기도의 핵심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예수의 이름이 내 속에서 공명되고 메아리칠 때, 그분의 이름의 능력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첫댓글 뉴욕의 현실로 돌아오길 거부하려는 나의 마음과 생각들을 단방에 "내 삶과 나의 시간이 주님 손에 있습니다"라고 고백하게 하시니 진심으로 감사가 우러나옵니다.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도우소서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