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조루(拱潮樓). 바다의 조수를 껴안는 문루라는 뜻입니다. 원래 이 자리에 덕포진이 있었는데, 조선 현종 때 이 반대편 해안인 지금의 대곶리로 이전하고 숙종 때에 이곳에 돈대를 세우고 다시 진을 설치하였습니다. 덕진진은 용두돈대와 덕진돈대 그리고 나중에 설치된 남장포대와 덕진포대를 관할하였습니다.
이곳도 역시 신미양요 때 미군의 포격에 의하여 문루는 무너지고 홍예만 남아 있었는데 전적지정화사업의 하나로 1977년에복원되었습니다. 누 주위에는 전돌로 여장을 둘렀습니다. 문루는 성이나 궁궐의 문 위에 지은 집을 말합니다.
↑공조루 내부. 바닥에 마루를 깔고 사방에 문을 달았지만 문을 열면 외부 공간과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의 문루은 초루(譙樓)라고도 하는데 성 주위를 살피거나 지휘를 하기 위하여 지은 다락입니다. 동쪽에 쌍안경이 있어서 강화해협이나 맞은편 해안을 살필 수가 있습니다.
↑공조루 앞 건물의 담입니다. 담이 모습이나 빛깔이 공조루와는 잘 어울립니다. 이런 곳에 오면 항상 느끼는 것인데 유적지 주변에 있는 건물이 전혀 어울리지 않아 생뚱맞게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는 공조루와 조화를 이루어 보기가 좋습니다.
↑용두돈대에서 덕진진으로 들어오는 길. 갯벌에 돌을 깔아서 다니기가 편하게 되어 있습니다.
↑뒤에서 본 공조루. 공조루는 특히 가을이 되면 단풍과 어우러져 아주 아름답습니다.
↑공조루 주위의 풍경
↑남장포대로 내려가기 전에 신미양요 기록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1871년 6월 11일 새벽, 미군이 덕진진을 점령하고 난 뒤 성조기를 세우는 장면을 담은 사진입니다. >
미군들은 이 덕진진에 함포 사격으로 방어 진지를 초토화시킨 후 진격하였기 때문에 거의 무혈입성이나 마찬가지로 거침없이 점령하였습니다. 남장포대 역시 미군들의 함포 사격으로 거의 폐허가 되었습니다.
↑덕진진 앞바다를 바라보며 경비를 서고 있는 미군 병사들. 바다 건너 보이는 것이 덕포진입니다.
↑맞은편 언덕에 있는 것이 덕진돈대입니다.
↑언덕 사이에 설치되어 있는 남장포대. 강화 해안에서 광성포대와 함께 가장 강력한 포대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복원된 남장포대의 포혈에 설치된 포의 정체가 궁금합니다. 포의 크기로 보아서는 대포인데 당시 대포는 조선군의 주력화포가 아니었습니다. 주력화포는 불랑기라는 후미장전식 화포로 크기가 크지 않아 이동하기가 편하고, 자포와 모포가 분리되어 화약을 장전하여 포를 발사하는 시간을 단축시켜 주는 장점이 있어서 조선군이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불랑기는 무엇보다도 적은 양의 화약으로 운용할 수가 있어서 경제적이었습니다.
↑돈대는 높은 곳에 있고 포대는 낮은 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돈대가 점령되면 포대는 무용지물이 됩니다.
↑포좌. 포를 올려놓는 장치를 포좌라고 합니다. 이 포좌를 보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격하는 방향을 쉽게 바꿀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점이 신미양요 때 미군에게 처참하게 패한 원인 중의 하나입니다. 미군은 함대를 끌고 와서 배 위에서 사격을 하니 마음대로 위치를 바꾸어 아군의 사정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덕진돈대에서 본 남장포대. 통상 포대는 후방에 배치를 하는데 강화의 포대는 모두 전방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포가 후방에서 지원사격을 하고 보병이 공격을 하는 전술이 아니라 포가 최전방에 나서서 직접 적에게 공격을 합니다. 이런 배치는 강화해협의 지리적 조건과 화포의 사정거리와도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포가 직사포였기 때문에 높은 위치에서 아래를 보고 설치하기가 쉽지 않은 점도 고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덕진돈대에서 본 용두돈대. 카메라를 들이대면 손에 잡힐 듯이 들어옵니다. 용두돈대에서 덕진돈대까지는 2km가 채 안 되는 거리입니다.
↑덕진돈대에서 본 초지대교. 과거에는 맞은편 대명항에서 초지나루로 배를 이용하여 건넜지만 지금은 초지대교를 통하여 바로 건너 올 수 있습니다.
↑신미양요 때 미군의 작전지도. 미군들은 이 지역의 정보를 프랑스로부터 얻었다고 합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는 강화해협 주위를 거의 완벽하게 정찰을 한 것 같습니다. 거기다가 미군들은 1871년 5월 24일부터 27일까지 4일간의 강화해협 탐사 작업을 통하여 이 지역을 상세하게 정탐을 하였고 6월 1일에는 2차 탐사작업을 하면서 조선군과 포격을 주고받아 전력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돈대는 바다를 경계하고 바다에서 강화로 들어오는 외적을 막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기 때문에 바다에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좋은 곳에 자리를 잡습니다. 이것을 잘 아는 미군들은 덕진진을 공격할 때 바다에서 진격하지 않았습니다. 초지돈대와 초지진을 무력화시키고 그 다음날 새벽에 육로를 따라 덕진진을 배후에서 공격하였습니다.
이때 함포의 지원사격으로 덕진진과 남장포대가 무력화되어 조선군은 제대로 항전하지 못하고 물러섭니다.
↑덕진돈대 내부. 덕진돈대는 방형으로 구축되어 있습니다. 원래 이런 모습인지는 모르지만 포혈 두 구만 있고 여장(성가퀴)는 없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덕진돈대에서는 큰 전투가 없었습니다. 함포 지원 사격으로 돈대와 포대가 파괴되어 군사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대모산 후방 신현리 방향으로 후퇴하여 미군들이 힘들이지 않고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돈대에서 바다 쪽으로 내려가면 경고비가 있습니다.
↑덕진돈대 앞에 설치되어 있는 경고비. 병인양요 직후인 1867년에 대원군의 명으로 덕진진 첨사가 세웠습니다. 그러나 1871년 미국의 아시아 함대는 이곳을 지나면서 초지진과 덕진진, 광성보를 초토화시키고 말았습니다.
해문방수 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 他國船愼勿過)
바다의 문을 막고 지켜서 타국의 배들이 결코 지나가지 못하게 하라
외국의 선박이 지나가면서 이 작은 비를 볼 수가 있겠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지만 사실 이 비는 외국의 배가 보라고 세운 것이 아니라 덕진돈대를 지키는 장졸들이 명심하라고 세운 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뒷 구절은 "다른 나라의 배들은 삼가서 이곳을 지나지 말라"라고 해석하기 보다는 "다른 나라의 배를 지나가게 하지 말라'라는 뜻으로 해석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愼)을 '삼가'라고 번역하지 않고 '결코'라고 새겨야 할 것입니다.
↑조선시대 숙종 때 여기 행궁이 들어선 적이 있습니다. 이후 행궁은 강화읍성으로 들어가고 여기서 덕진진이 들어섰는데 지금 덕진돈대 뒤편을 보면 행궁같이 보이는 한옥 건물이 있습니다. 행궁을 복원하였는가 하였는데 개인 소유의 집(별장?)이라고 합니다.
↑덕진돈대를 지나 바닷가로 내려가는 길. 짧지만 숲이 제법 깊고 잘 가꾸어져 있습니다.
↑바닷가로 내려섭니다. 그러나 강이 가로 막고 있고 다리가 없어서 결국 국도변으로 다시 나와야 합니다. 앞의 제방을 보아서 이곳도 간척지였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가는 길에 예뿐 문이 있어서 사진에 담았습니다. 아마 행궁이라고 생각하였던 저택의 남쪽 문인 듯합니다.
↑초지진 가는 길. 이 길은 도보겸 자전거 도로여서 자전거 통행량이 아주 많습니다.
↑초지진 조금 못 미쳐 초지리 포구로 가는 길에 장미 꽃담이 아주 예쁜 집이 있습니다.
↑들여다보니 카페입니다. 정원도 잘 정돈되어 있고 날씨도 덥고 하여 들어가 보려니 마침 휴무일입니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갈매기
↑포구 가까이에서 낚시가 한창입니다.
↑바다 건너 맞은편의 대명포구. 김포함상공원이 있습니다. 김포함상공원은 현역에서 물러난 함대 내부를 공개하고, 시민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전쟁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무기나 물품들을 전시하고 소개하는 곳입니다.
↑드디어 오늘의 종착지인 초지진에 도착하였습니다. 사실 여기는 초지진이라기보다 초지돈대라고 하여야 합니다. 향토사학자들은 초지진의 원래 위치는 여기서 좀더 내려가야 한다고 합니다. 미군들이 작성한 지도를 보아도 초지진은 돈대보다 약간 남쪽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초지진과 초지진 남쪽에 있있던 진남포대 자리는 이미 민간들에게 소유권이 넘어가 이곳에 많은 식당과 숙박업소가 들어섰습니다. 초지진은 첨사(종3품직)가 장악하고 있는 곳이어서 그 규모가 작지 않았는데 지금 달랑 돈대 하나를 놓고 초지진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도 초지진에는 그 이름에 걸맞은 전시 유물이 남아 있습니다.
↑초지돈대. 역시 최근에 복구하였습니다. 초지진은 5진 가운데 가장 남단에 있습니다. 초지진은 인천 영종도를 거쳐 강화해협으로 들어오는 들머리에 있습니다. 강화해협의 남쪽 관문이어서 개항기에 우리나라로 밀려드는 서구 세력들과 크고 작은 충돌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서구 열강들의 세력이 이곳을 지나면 당시 쇄국정책을 기조로 하던 조선과의 무력 충돌이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었습니다. 신미양요 때 미국의 아시아 함대, 그리고 일본의 운요 호와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 이 초지진이었습니다. 그러나 초지진 전투에서 조선군은 적의 막강한 화력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지돈대 앞 소나무. 흰색으로 표시된 것이 포탄 자국이라고 합니다. 다른 돈대에서는 격전의 흔적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그래도 이곳에는 그 당시의 전투를 생생하게 증언하여 주는 나무와 돌들이 있습니다.
저 소나무의 상처가 신미양요 때 생긴 것인지 운요호 사건 상처로 남은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백수십년 전 두 번의 전란을 겪고도 생명을 이어온 저 나무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당시 미국과 일본은 엄청난 양의 포탄을 쏟아 부어 이곳을 초토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초지진에 상륙한 미군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군들은 사상자가 없었습니다. 돌로 쌓은 성곽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돈대는 파괴되었습니다.
1871년 5월 16일 미국의 아시아 함대 제독인 로저스 해군 소장은 군함 5척과 병력 일천여 명을 이끌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할 목적으로 일본 나가사키항을 출발합니다. 5월 30일 함대는 강화도 입구 작약도와 율도 사이의 해협에 정박을 합니다. 6월 1일 포함 모노케시호를 앞세우고 강화해협을 정찰합니다. 이때 손돌목 포격 사건이 일어납니다. 미국은 이 포격 사건을 빌미로 삼아 조선 조정에 항의를 하고 6월 10일로 시한을 정해 놓고 조선의 사과를 요구합니다. 평화로운 탐측활동에 대하여 군사적인 공격을 하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작약도. 인천과 영종도(현 인천 국제 비행장) 사이에 있는 무인도로 신미양요와 운요호 사건 때 미국과 일본 함대의 정박지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신미양요 때 전사한 미군 3명의 묘지가 남아 있습니다.
조선 조정이 오히려 미군이 허락도 없이 조선의 해협에 들어왔으므로 이는 명백한 주권의 침탈이라 주장하며 사과할 이유가 없다고 하자 미군은 6월 10일 오전 작약도 앞바다에서 출발하여 초지진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미군들이 보유한 포는 유효 사거리가 1,5km가 넘는 대형 함포가 주력이었고 개인화기는 유효사거리가 400m인 레밍턴소총이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조선군이 보유한 주력 화포는 불랑기포로서 유효사거리가 400m에 불과하였고 개인 화기인 화승총은 유효사거리가 120m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또 미군은 상륙하여서 사용할 12파운드 야포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것도 사정거리가 910m나 됩니다. 후에 조선군은 기습 공격을 시도하여 보지만 이 포 때문에 번번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벽에도 당시의 포탄 자국이 있습니다.
↑초지돈대로 들어가는 입구
↑초지돈대 안의 포각. 미군은 12시경에 이 초지진 앞 바다에 도착하자 곧바로 함포 사격을 시작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2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합니다. 이 사격으로 초지진과 초지돈대 그리고 초지진 남쪽에 배치되어 있던 진남포대는 완전히 무력화 되고 방어군은 철수를 합니다.
↑초지진의 갯벌로 야포를 밀고 오르는 미군들. 오후 2시부터 미군들의 지상 상륙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조선군은 미군의 함포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진지에서 철수한 상태였기 때문에 저항은 없었습니다. 당시 초지진을 방어하던 첨사 이렴은 화력으로 대항할 수 없음을 알고 군사들은 삼랑성 쪽 봉화곡으로 퇴진시켰습니다.
그런데 상륙하는 미군들에게 뜻하지 않는 복병이 있었습니다. 바로 초지진 앞의 갯벌이었습니다. 이 갯벌을 통과하는데 미군은 예상치 않게 2시간이 걸렸다 합니다. 함포 사격에 대응하지 않고 숨어 있다가 차라리 상륙 작전을 할 때 공격을 하였으면 어떠했겠는가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초지진 앞의 갯벌. 초지진으로 상륙작전을 펴는 미군을 가장 괴롭힌 것은 조선군의 화포가 아니라 바로 이 갯벌이었습니다. 이 갯벌에 무거운 야포를 밀고 오려니 쉽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고생을 하여 끌고온 야포는 다음날 육로로 덕진진을 공략할 때 그 고생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큰 공을 세웁니다.
↑포각 안에 전시되어 있는 홍이포. 홍이포는 머리가 붉은 오랑캐의 대포라는 뜻입니다. 유럽에서 도입한 대포입니다. 사거리가 길고 포환이 무거워서 성벽을 부수고 성을 공격하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습니다.
후금의 누루하치(청태조)가 1826년 명나라를 공격할 때 명나라 장수 원승환은 영원성에서 포르투칼로부터 구입한 11문의 홍이포와 2만의 군사로 14만의 정예 청나라 군사를 일거에 제압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부상당한 누르하치가 그해에 죽자 홍타이지(청태종)가 등극을 합니다. 홍이포의 위력을 실감한 홍타이지는 1831년 홍이포를 손에 넣는데 성공을 합니다. 홍이포는 병자호란 때 갑곶전투와 남한산성 싸움에서 그 위력을 십분 발휘합니다.
↑전면에서 본 홍이포. 조선도 이 홍이포의 놀라운 파괴력에 관심을 갖습니다. 정묘호란이 일어난 해인 1627년, 네덜란드 선원 벨테브레이가 동료 2명과 함께 난파되어 제주도에 도착합니다. 이들은 곧 조정에 압송되었는데 홍이포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훈련도감에 근무하게 됩니다. 이후 병자호란에 참전하여 벨테브레이를 제외한 2명은 전사합니다.
벨테브레이가 조선에 귀화하여 박연이라는 이름으로 지낼 때 1653년 다시 제주도에 네덜란드 선박이 난파되어 떠내려옵니다. 하멜표류기로 유명한 하멜 일행입니다. 난파된 이들의 배에서 홍이포 12문을 건져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홍이포가 바로 실전에 배치된 사례는 없습니다. 이들이 가지고 온 홍이포는 해체되어 다른 포로 제작되는 데 쓰이고 1문만 후대를 위하여 보관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후 영조 때 홍이포 2문을 제작하여 시험 발사에 성공하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 후 홍이포는 기록에서 사라집니다.
홍이포는 무겁고 화약이 많이 들어서 조선에서는 주력화포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조선의 주력화포는 불랑기 화포였습니다.
↑ 그날 전투를 증언할 소나무가 돈대 앞을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습니다.
봉화곡으로 패퇴한 첨사 이렴은 그날 저녁 기습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미군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이들의 기습 시도는 실패합니다.
↑초지진 성벽. 다음날 새벽부터 미군은 덕진진과 남장포대를 향하여 함포로 지원사격을 합니다. 그리고 초지진에서 숙영한 상륙군은 4시에 기상하여 초지진에 남아있는 군사시설과 장비를 모조리 파괴합니다. 그리고 6시경에 덕진진을 향하여 행군합니다. 오전 7시 30분 경에 덕진진 후방에 도착하였으나 덕진진을 수비하던 군사는 이미 모두 철수하고 없었어 미군들은 무혈입성하여 성조기를 세웁니다. 그리고 덕진진과 덕진보에 있는 군사시설과 무기들을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 철수한 조선병사들이 전열를 정비하여 다시 기습을 시작합니다만 접근도 하기 전에 미군 포대의 공격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군은 화력이 절대적으로 열세하였으며, 미군은 사전에 충분한 정보와 정탐으로 조선군의 움직임을 정확히 예측하여 방비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6월 11일 광성보 전투를 마치고 미군은 이곳으로 돌아와 숙영을 하고 다음날 아침 12일 초지진에서 철군을 합니다. 작약도 앞바다로 돌아온 미국은 청나라 주재 미국 공사 로우를 통하여 고종 앞으로 서신을 보내어 자신의 공격이 합법적이었음을 강변하고 이후의 제반 사항을 합의하기 위하여 자신과 동등한 지위의 관원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이를 묵살합니다.
강화조약을 체결하는데 실패한 미군은 7월 3일 작약도를 떠나 조선에서 완전 철수하고 조선 조정에서는 해협의 경비를 더욱 강화하게 됩니다. 그러나 4년 뒤 1875년 9월 20일 일본의 운요 호로 인하여 초지진은 다시 한 번 역사의 격랑을 맞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