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까
2001.04.23 이상용(영화평론가)
개인적 관계에 묶인 인물들과 그 속에서 죽음과 삶을
넘어선 초월적인 것을 꿈꾸는 사랑은 눈물샘을 자극하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연민에 빠진 비극일 뿐이다. <파이란>의 '여성적인 것'은 이강재를 구원했을망정 관객들을 카타르시스와 구원으로 이끌기에는 울림이 작다.
<파이란>은 한 여자가 한 남자의 인생을 구원하는 영화다. 그것은 정신의 승리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은 우리를 이끈다'는 말처럼, 파이란의 여성적인 것은 삼류 양아치 이강재를 초월적인 세계로 이끈다. 전작 <카라>를 생각하면, 환골탈태라는 말 이외에 달리 표현할 길 없는 송해성 감독의 두번째 영화 <파이란>은 주연 배우들의 매력적인 연기와
매끈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파이란>은 아사다 지로의 단편 '러브레터'에 두툼한 살을 입혔다. 조직 내에서 겪는 갈등이나 두목이 친구라는 설정은 원작에는 없는 것이다. 덕분에 영화는 이강재가 죽음을 맞게 되는 동기를 부여하며, 개과천선하는 이강재의 삶을 더욱 극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놓친 게 있다. <파이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삼류 인생 이강재가 위장결혼한 파이란의 장례를 치르며 그녀를 아내로 인정하는 심리적인 반전이다. 영화 <파이란>에서 이러한 동기를 부여받게 된 것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삼류 인생
이강재를 고맙다고 여기는 파이란의 착한 마음 때문이다.
그러나 원작 '러브레터'에서 파이란에게 느끼는 남자 주인공의
심리는 좀더 복잡하다. 그는 파이란의 죽음을 "너무나 명백하게
경찰도 조직도 묵과한 일이었고, 경찰을 비롯한 우리 모두가 공모해서 죽인 거라고 생각한다." 즉, 남자 주인공은 파이란의 죽음에 대한 사회적 책임의식과 개인적인 애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파이란>은 이러한 심리적 무게를 개인 중심주의로 좁히고 말았다. 원작에서는 파이란의 직업이 몸
파는 일인데, 영화에서는 세탁소로 일터가 바뀐다. 이것은 장백지라는 배우의 청순미를 십분 활용한 것이기는 하지만 원작이
지닌 삼류 인생 사이에 교감하는 동질감을 영화로 끌어오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사회적 이해관계들이 거세된 채 장백지의
순수함(청순함)과 최민식의 타락함이 대조를 이룰 뿐이다.
그리하여 원작에서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기 위해 일본으로 왔던 파이란의 행적과는 달리, 한국에서 머물 아무런 목적이 없는
영화판 파이란의 행동은 설득력이 없다. 어째서 병든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이강재를 만나러 인천까지 갈 능력이 있는 인물이면서도 그녀는 도망가지 않고 고된 노동을 계속하고 있었을까.
중국에 연고가 없기 때문에 귀향하지 않는 것도 개연성이 없다.
도대체 그녀의 노동은 무엇을 위한 희생이란 말인가. 송해성 감독은 전작에 비해 세련된 감성을 연출하는 재능을 확인시켜 주기는 했지만 여전히 등장인물의 성격 부여와 심리극에 머문 좁은 멜로드라마를 만들고 만 것이다. 그것은 요즘 한국 멜로드라마의 추세이기도 하다. 개인적 관계에 묶인 인물들과 그 속에서
죽음과 삶을 넘어선 초월적인 것을 꿈꾸는 사랑은 눈물샘을 자극하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연민에 빠진 비극일 뿐이다. <파이란>의 '여성적인 것'은 이강재를 구원했을망정 관객들을 카타르시스와 구원으로 이끌기에는 울림이 작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