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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조 판서(刑曹判書) 증시(贈諡) 문간공(文簡公) 충암(冲菴) 김 선생(金先生) 신도비명 병서
아아, 어진 이와 사특한 이의 진퇴는 세도(世道)의 소장(消長)에 관계되는 법이다. 사림(士林)의 화(禍)는 예로부터 있었으나 기묘년(1519, 중종 14)보다 참혹했던 적은 없었다.
기묘제현(己卯諸賢)이 전후로 죽거나 찬축(竄逐)된 이가 매우 많았는데 충암 선생이 받은 화가 가장 혹심하여 지금까지도 그 얘기를 듣는 사람은 심장이 놀라고 넋이 달아나며, 사우(師友)를 찾아 오도(吾道)를 담론하는 사람을 보면 문득 입을 가리고 서로 경계하여 말하기를, “신무문(神武門)에서의 상변(上變)을 듣지 못했는가?” 한다.
이리하여 사림의 기운이 시들고 진작되지 못한 지가 거의 수십 년이니, 간사한 소인배가 국가에 흉독(凶毒)을 끼치는 것은 이러한 지경에 이른다. 인묘(仁廟) 말년에 이르러 어명으로 복관(復官)되었고, 선묘(宣廟) 초년에 증시(贈諡)가 내려졌다.
이에 사람들이 차츰 군자와 소인의 구별을 알게 되고 일국의 사론(士論)이 이에 정해졌다. 그러나 신학후생(新學後生)은 한갓 기묘제현이 본받을 만하다는 것만 알 뿐 그분들의 거가(居家)에서의 행의(行誼)와 조정에서의 언론 등은 처참한 살육의 와중에서 다 기록되지 못하였기에 선비들이 개탄하며 시일이 오래갈수록 더욱 세상에 전해지지 못할까 걱정한다.
선생의 손자 장령(掌令) 김성발(金聲發)이 하루는 불녕(不佞)에게 말하기를, “우리 선조의 우뚝한 사적으로도 묘도에 아직 비석이 없으니, 이는 실로 사문(斯文)의 흠전(欠典)이며 불초손(不肖孫)의 책임입니다. 감히 그대의 글을 받고자 하니, 그대는 생각해 주십시오.” 하였다.
아,《시경(詩經)》에 이르지 않았던가. “높은 산처럼 우러르고, 큰길처럼 따라간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고. 불녕은 늦게 세상에 태어났기에 늘 직접 모시고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왔던 터이니, 이제 비명(碑銘)을 지어 달라는 부탁에 어찌 감히 문사(文辭)가 서툴러 이러한 일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양하여 선생을 흠모하는 나의 정성을 거듭 저버릴 수 있겠는가.
삼가 행장을 살펴보건대, 선생은 성(姓)은 김씨(金氏)이고 휘는 정(淨), 자는 원충(元冲)이며, 충암(冲菴)은 호이다.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이다. 6대조(代祖) 장유(將有)는 판도판서(版圖判書)이며 처음으로 보은(報恩)에 와서 살았다. 증조 휘 호(滸)는 평택 현감(平澤縣監) 증 도승지(都承旨)이고, 조부 휘 처용(處庸)은 증 병조 참판(兵曹參判)이다.
부친 휘 효정(孝貞)은 호조 정랑(戶曹正郞) 증 이조 판서이며, 모친 김해 허씨(金海許氏)는 판관(判官) 윤공(允恭)의 따님으로, 성화(成化) 병오년(1486, 성종 17)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태어날 때부터 특이한 자품을 지녀 남달리 영오(穎悟)하였다.
말을 배우자 곧 문자를 알았고, 10세가 되기 전에 이미 사서(四書)와《시경(詩經)》을 다 읽었으며,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과정을 정해 열심히 공부하였다. 늘 함께 놀던 아이들에게 말하기를, “대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처럼 작은 나라에서는 큰일을 할 수 없다.” 하며, 개연히 등동산(登東山)의 뜻을 지녔다.
14세에 별시(別試)의 초시(初試)에 제일명(第一名)으로 합격하였으나 연소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회시(會試)에 나아가지 않으며 “과거(科擧)의 글은 배울 것이 못 된다.” 하고, 성현(聖賢)의 서책에 침잠하여 밤을 낮 삼아 공부하였다.
15세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집상(執喪)을 모두 예제(禮制)에 따랐으며, 모부인(母夫人)을 지성으로 효양(孝養)하였다.
19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22세에는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곧바로 정언(正言)에 제수되고 옥당(玉堂)의 수찬(修撰)으로 선임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리고 병조 좌랑(兵曹佐郞)ㆍ정랑(正郞), 부교리(副校理), 헌납(獻納)을 역임하고 모부인 봉양을 위해 충청 도사(忠淸都事)에 제수되었다. 소명(召命)을 받고 조정에 들어와 교리(校理)에 제수되었고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천거되었다. 또 자청하여 외직으로 나가 순창 군수(淳昌郡守)가 되었다.
을해년(1515, 중종 10)에 장경왕후(章敬王后)가 빈천(賓天)하자 선생과 담양 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이 상소하여 신씨(愼氏)를 복위하여 무고하게 폐위(廢位)된 원한을 풀어 주고 첩(妾)으로 처(妻)를 삼았다는 기롱을 끊을 것을 청하는 한편, 말하기를, “박원종(朴元宗) 등은 군부(君父)를 협박하여 국모(國母)를 방축(放逐)했으니, 만세(萬世)의 죄인입니다.
이제 그들이 비록 죽었으나 그 죄를 밝히고 바로잡아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분의(分義)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환히 알게 하면 인륜의 근본과 정시(正始)의 도가 맑고 밝아져 마치 천지를 덮었던 캄캄한 어둠이 다시 걷히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였다.
소장이 올라가자 대관(臺官)이 사론(邪論)이라 하여 국문(鞫問)할 것을 힘써 주청(奏請)하였다. 이에 사태가 예측할 수 없는 위태한 상황에 이르렀으나 대신(大臣)의 구원에 힘입어 보은(報恩)의 사림역(舍琳驛)에 도배(徒配)되는 데 그쳤다.
이때부터 조정 의론이 대립하다가 병자년(1516, 중종 11)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선생의 말을 옳다고 인정하여 서로 상소하여 선생을 방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드디어 사면을 받고 집에 돌아와서는 즉시 영동(嶺東)으로 가서 명승지를 유람하고 이어 속리산(俗離山)의 절에 들어가서 삼동(三冬) 동안 독서하며 사환(仕宦)에는 뜻이 없었다. 조정에서 선생을 소환할 것을 계청(啓請)하여 병자년에 서용(敍用)되어 사예(司藝)에 제수되었다.
정축년(1517)에 응교(應敎), 전한(典翰)에 발탁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가을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고 부제학(副提學)에 제수되자 진정소(陳情疏)를 올려 해면(解免)해 줄 것을 청한 것이 너더댓 차례에 이르렀다.
당시 정암(靜菴) 조 선생(趙先生)이 선생과 도의(道義)의 벗을 맺은 사이로 성상의 총애와 권우(眷遇)를 가장 많이 받고 있었는데 서찰을 보내어 출사(出仕)를 몹시 권면하였으며, 성상도 소명(召命)을 연이어 보내왔다.
이에 선생이 부득이 소명에 나아가서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고, 전임(轉任)하여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으며, 오래지 않아 승질(陞秩)하고 이조참판 겸 홍문관제학 동지경연사(吏曹參判兼弘文館提學同知經筵事)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곧 대사헌(大司憲), 행 부제학(行副提學),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에 제수되었다.
기묘년(1519, 중종 14)에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귀근(歸覲)하고 상소하여 종신토록 모부인을 봉양할 수 있게 해직(解職)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성상이 윤허하지 않고 특명을 내려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 판서에 제수하고 또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겸임하게 하였다.
선생이 혈성(血誠)을 다해 사양하고 매일 새벽에 일어나 예궐(詣闕)하여 소장을 올렸으나 성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선생은 공아(公衙)에 가서 나날이 그와 같이 사직 상소를 올린 것이 거의 몇 달이었으나 성상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양관(兩館)의 제학을 겸임한 것에 이르러서는 세상에 드문 일이라 사람들은 더욱 영광으로 여겼다. 공은 남다른 지우(知遇)에 감격하여 뜻을 같이하는 제현(諸賢)들과 충성을 다해 건백(建白)하여 폐단을 고치고 교화를 일으켰다.
예컨대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여 사전(祀典)을 바로잡을 것,《향약(鄕約)》을 간행하여 백성에게 이륜(彝倫)을 가르칠 것,《소학(小學)》을 강명(講明)하여 어린이 교육을 돈독하게 할 것, 현량과(賢良科)를 창설하여 어진 인재를 거두어들일 것, 정국 공신(靖國功臣) 중 공로가 없이 끼어든 사람들의 작록을 추삭(追削)하여 요행으로 벼슬하는 문을 막을 것 등을 청한 것은 모두 당시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라고 훈척(勳戚)들이 이를 갈며 분노했던 일이다.
사람들이 시기하고 분노하여 참소가 날로 쌓여 가자 홍경주(洪景舟)가 남곤(南袞), 심정(沈貞)과 더불어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먼저 역모를 꾸민다는 불측한 말로 상(上)의 마음을 두렵게 한 뒤 청하기를, ‘조정에 역당(逆黨)의 무리가 많으니 신무문(神武門)을 열어 놓으면 몰래 들어가서 고변(告變)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밀지(密旨)를 받았다고 칭탁하고 은밀히 척독(尺牘)을 보내 위협하여 대신들을 불러 밤중에 대옥(大獄)을 일으키니, 선생과 대사헌 조광조(趙光祖) 등 18명이 일시에 체포 수감되었다. 공초(供招)를 마치고 죄안이 이루어지자 모두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이 상의 옷소매를 잡고 눈물로 간(諫)하고 태학생(太學生) 300여 명이 대궐에 엎드려 호곡(號哭)하자 비로소 감사(減死)를 윤허하였다. 논죄하여 선생은 금산(錦山)에 장배(杖配)되었다.
금산은 보은과 100여 리 떨어진 곳인데 선생의 모부인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에 선생은 금산 수령에게 사정을 고하고 달려가서 모부인을 뵙고 작별의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금오랑(金吾郞)이 선생을 진도(珍島)로 압송해 가려고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금오랑과 함께 배소(配所)로 돌아갔다.
그런데 권신(權臣) 중에 선생에게 원한을 품고 보복하려는 자가 죄인으로서 도망쳤다고 논죄하여 선생을 나국(拿鞫)하여 옥중에서 심문하였다. 선생이 옷자락을 찢어 세 차례나 상소를 올리니 원통한 사정이 환히 드러났다. 이에 곤장 100대를 맞고 제주(濟州)에 안치되었다.
그 이듬해에 논자들이 또 일어나 더욱 혹심하게 논죄하자 마침내 자진(自盡)하라는 명이 내렸다. 선생은 명을 듣고 안색이 변하지 않은 채 술을 가져오라 하여 호쾌히 마신 뒤 형제들에게 서찰을 써서 노모를 잘 봉양하라 하고〈절명시(絶命詩)〉를 지어 자신의 뜻을 보이니, 춘추가 36세였다. 그 이듬해 신사년(1521, 중종 16)에 청주(淸州) 고해산(苦海山) 아래, 예전에 잡아두었던 터에 반장(返葬)하였다.
부인 은진 송씨(恩津宋氏)는 진사(進士) 여익(汝翼)의 따님이며, 아들이 없어 형 참봉(參奉) 광(光)의 차남 철보(哲葆)를 후사로 삼았다.
선묘(宣廟) 초년에 퇴계(退溪) 선생이 연중(筵中)에 들어갔다가 상의 물음에 아뢰기를, “중묘(中廟)께서 장차 삼대(三代)의 치세를 일으키고자 하시니, 조광조, 김정, 기준(奇遵) 등이 협심하여 그 뜻을 보필하고 이에 사방이 풍동(風動)하였습니다.
그런데 배척당한 사람이 터무니없는 죄를 날조하여 사류(士類)를 일망타진하였으니, 이는 모두 남곤, 심정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니, 상이 남곤ㆍ심정 등의 작위를 추탈(追奪)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병자년(1576, 선조 9)에는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하고 문간(文簡)이란 시호를 내렸으니, 박문다견(博文多見)을 ‘문(文)’이라 하고 거경행간(居敬行簡)을 ‘간(簡)’이라 한 것이다.
선생은 천품이 매우 높고 식견이 초매(超邁)하여 안화(安和)하면서도 장중하고 돈대(敦大)하면서도 광휘하였다. 효우(孝友)는 천성에서 나온 것이라 지행(至行)이 순수하고 학업이 정심(精深)하며 문로(門路)가 매우 발랐다.《소학》을 독신(篤信)하고《근사록(近思錄)》을 존상(尊尙)하여 입언(立言)과 행실을 언제나 고훈(古訓)에 따랐다. 평상시에는 늘 단좌(端坐)하여 집안이 쓸쓸하고 잡된 손님이 전혀 없었다.
오직 몇 사람의 어진 벗들과 깊은 이치를 토론하고 주정(主靜) 공부에 전심(專心)할 뿐 집안의 일은 묻지 않았다. 추직(騶直 상전을 따라다니는 하인)을 집안에 들여놓지 않았고 녹봉을 친척 중 가난한 사람에게 먼저 나누어 주었으며, 영진(榮進)을 좋아하지 않고 늘 급류에서 용퇴할 뜻을 품었다.
평소에 천석(泉石)을 좋아하여 매양 경치가 좋은 곳을 만나면 오래도록 배회하며 돌아갈 줄 모르고 소연(蕭然)히 속진을 벗어나는 의상(意想)이 있었다. 의로운 일에는 급급하게 달려가고 악(惡)을 보면 더러운 것을 보듯 미워했으며, 서책에 있어서는 읽지 않은 것이 없고 한번 보면 평생 동안 잊지 않았다.
문(文)은 서한(西漢)을 본받고 시는 성당(盛唐)을 배웠는데, 웅건하고 준일(俊逸)하여 전혀 진부(陳腐)한 말을 도습(蹈襲)하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재세(在世)한 기간이 몹시 짧고 또 유실한 시문이 많다. 당시《근사록》을 새로 간행하여 선비들이 제현(諸賢)에게 서발(序跋)을 부탁하자 정암(靜菴)이 굳이 선생에게 양보하였으니, 그 추중을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퇴계가 어떤 사람에게 보낸 답서에서, “충암의 학문은 사람들보다 한 등급 더 높다. 이러한 식견을 가지고서 끝내 그 뜻을 펴지 못하였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으니, 이것이 참으로 정론(定論)이다.
세상의 논자들은 혹 말하기를, “기묘제현은 짊어진 짐이 너무 무겁고 시행에 점차(漸次)가 없어 시의(時宜)에 적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하니, 아아, 어찌 그렇겠는가. 중묘(中廟)가 크게 혼란했던 시대 뒤에 나라를 바로 세워 개혁에 비상한 관심을 두고 오습(汚習)을 한바탕 혁신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어진 인재를 선발하고 겸허한 자세로 건의를 받아들였으니, 이는 참으로 천재일시(千載一時)였던 것이다.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지우(知遇)을 입지 못하면 그만이겠지만 지우를 입었다면 의당 자신의 학문을 다 기울여야 할 것이다. 어찌 그럭저럭 고식적인 태도로 지난 자취를 따라 구차하게 일하고 말아서야 되겠는가.
외부에서 뜻하지 않게 오는 화복(禍福)은 시운(時運)과 성쇠(盛衰)에 달린 것으로 천지(天地) 조화에서 유감스러운 점이니, 선생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천운(天運)은 늘 순환하고 시비는 백년이 못 가서 밝혀지는 법이라 열성(列聖)의 숭장(崇奬)과 유림의 흥성이 오늘에까지 이르러 선비 된 사람이면 누구나 선(善)은 해야 하고 악(惡)은 해서는 안 되며 선을 한 사람은 죽더라도 영광스럽고 불선(不善)한 사람은 살더라도 죽은 것과 같다는 이치를 알아 한 가닥 정론(正論)이 끝내 민멸(泯滅)되지 않은 것은 그 누구의 힘이겠는가. 이에 명(銘)을 붙이노라.
도가 장차 행해질 때에는 / 道之將行(도지장행)
하늘이 훌륭한 인재를 내어 / 天篤降才(천독항재)
반드시 그 근본을 배양하는 법 / 必厚其培(필후기배)
도가 장차 무너질 때에는 / 道之將廢(도지장폐)
혹 방해하고 혹 저지하니 / 或泥或止(혹니혹지)
그 누가 이것을 주관하는가 / 孰主張是(숙주장시)
우리 공이 태어난 것은 / 我公之生(아공지생)
실로 국운이 창성하던 시기라 / 實際昌期(실제창기)
그 도가 실로 공에게 있었지 / 文在於玆(문재어자)
행실은 진실로 천부적인 것 / 行固天得(행고천득)
학문은 양성을 위주하였고 / 學主養性(학주양성)
마음은 거경에 전일했어라 / 心專居敬(심전거경)
임천에 은거하다 일어나자 / 起自林泉(기자림천)
조정 사대부들 용동했으니 / 聳動簪紳(용동잠신)
상서로운 봉황이요 기린이었지 / 瑞鳳祥麟(서봉상린)
상소하여 인륜을 돈독하게 하니 / 抗疏惇倫(항소돈륜)
그 의리 바르고 치우치지 않아 / 義正無偏(의정무편)
조정의 기강이 숙연해졌어라 / 朝綱肅然(조강숙연)
맑은 명성과 높은 인망이 / 淸名儁望(청명준망)
굽혀졌다가 더욱 펴지니 / 屈而益舒(굴이익서)
젊은 나이에 판서가 됐어라 / 妙年尙書(묘년상서)
이에 성상의 신임이 두텁고 / 聖君注倚(성군주의)
어진 벗들이 곁에서 보익하니 / 賢友輔翼(현우보익)
마치 수레바퀴를 밀어주는 듯 / 若車推轂(약거추곡)
밝은 임금 어진 신하 서로 만나 / 明良相遇(명량상우)
그 계합이 풍운의 제회였으니 / 契合風雲(계합풍운)
밤낮으로 국가 경륜 토론하였지 / 夙夜經綸(숙야경륜)
조정에서 정색을 하고 서서 / 正色法筵(정색법연)
반드시 요순의 도리 얘기하니 / 必稱堯舜(필칭요순)
말하면 성상이 반드시 믿었어라 / 有言則信(유언측신)
이에 예악 문물을 다시 일으켜 / 庶幾禮樂(서기예악)
장차 큰일을 이루려 했는데 / 將大有爲(장대유위)
그만 시기하는 자가 미워하였지 / 忌者惎之(기자기지)
계략을 꾸며서 몰래 음해하고 / 潛吹蜮弩(잠취역노)
또 혹독한 형벌로 위협하였으니 / 脅以三木(협이삼목)
저 소인들의 참소는 망극했어라 / 彼讒罔極(피참망극)
빛나던 해가 구름에 가리고 / 赫日晝曀(혁일주예)
된서리가 한여름에 내렸으니 / 繁霜夏隕(번상하운)
긴긴 밤 어둠에 혼란이 이어졌지 / 長夜泯泯(장액민민)
재능은 어이 그리 많이 주었으며 / 畀之何豐(비지하풍)
쓰는 것은 어이 그리 인색했으며 / 用之何嗇(용지하색)
빼앗아 간 건 어이 그리 빨랐던고 / 奪之何速(탈지하속)
공이 지은 〈절명시〉를 보면 / 絶命之辭(절명지사)
온통 혈성으로 가득하니 / 一團誠血(일단성혈)
만고에 읽는 사람 오열하리라 / 萬古嗚咽(만고오열)
그렇지만 이 바른 기운은 / 惟玆正氣(유자정기)
해와 별처럼 높고 밝은 법 / 日揭星明(일게성명)
공은 늠름히 아직도 외려 살았어라 / 凜凜猶生(늠름유생)
저 산은 푸르고 푸른데 / 有山蒼蒼(유산창창)
무덤이 우뚝 솟아 있으니 / 有丘睪如(유구역여)
공이 은거하던 그 유허일세 / 考槃之墟(고반지허)
이에 비석을 세우매 / 樹之貞珉(수지정민)
공의 향기는 어제와 같으니 / 芳徽如昨(방휘여작)
지나는 사람은 반드시 공경하도다 / 過者必式(과자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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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刑曹判書贈諡文簡公沖菴金先生神道碑銘 幷序。
嗚呼。賢邪進退。係世道消長。士林之禍。自古有之。而未有慘於己卯。己卯諸賢之前後死若竄者甚多。而沖菴先生。受禍最酷。至今聞者心驚魄奪。見有尋師友談道學者。輒掩口而相戒曰。不聞神武上變之事乎。士氣萎靡而不振者殆數十年。憸小之凶于人國。乃至於是矣。逮乎仁廟末命復官。宣廟初年贈諡。人始稍稍知君子小人之別。一邦之士論乃定。然而新學後生。徒知己卯諸賢之爲可師法。而其居家行誼。立朝言論。不能盡記於斬伐銷鑠之餘。多士慨然。恐久益無傳。先生之孫金掌令聲發。一日謂不佞曰。夫以吾先祖之卓卓。而墓道尙闕顯刻。是實斯文之欠典。而不肖孫之責也。敢徼惠子一言。願子圖之。噫。詩不云乎。高山仰止。景行行止。不佞生晩。常恨未得趨承下風於函丈之間。今於不朽之託。安敢以文辭衰拙。不足以自效爲解。而重孤慕用之誠乎。謹按狀。先生姓金。諱淨。字元沖。沖菴號也。新羅敬順王之後。六代祖將有。版圖判書。始家於報恩。曾祖諱滸。平澤縣監贈都承旨。祖諱處庸。贈兵曹參判。考諱孝貞。戶曹正郞贈吏曹判書。妣金海許氏。判官允恭之女。以成化丙午。生先生。生有異質。俊穎出人。學語便知文字。未十歲。已通四書。一經不待提誨。能自課勉。常語同遊諸兒曰。大丈夫生斯世。偏小如此邦。不足爲也。慨然有登東山之志。年十四。中別試初試第一名。辭以年幼。不赴會試曰。科擧之文。不足學也。沈潛聖賢書。夜以繼日。十五而孤。持喪悉遵禮制。事母夫人。至誠色養。十九。中司馬。二十二。擢文科狀元。旋拜正言。選玉堂修撰。賜暇書堂。歷兵曹佐郞正郞副校理獻納。爲養除忠淸都事。召拜校理。薦吏曹正郞。又乞外出。補淳昌郡守。乙亥。章敬王后賓天。先生與潭陽府使朴祥上疏。請復立愼氏。伸無辜廢處之冤。絶以妾爲妻之譏。且言朴元宗等脅制君父。放逐國母。萬世之罪人。今雖已死。明正其罪。使後世灼然知分義之不可犯。則人倫之本。正始之道。澄澈光明。如天地晦塞而開豁矣。疏上。臺官以爲邪論。力請鞫問。事將叵測。賴大臣之救。徒配於報恩之含琳驛。自是廷論角立。至丙子。始以先生言爲是。交章請放。遂蒙赦還家。卽往嶺東。遍踏名區。仍入俗離山寺。讀書三冬。無意仕宦。朝廷啓請召還。丙子。敍拜司藝。丁丑。擢應敎典翰。皆不赴。秋。陞通政爲副提學。陳情乞免。至於四五。時靜菴趙先生與先生結道義交。最蒙恩眷。移書敦勉。上亦召旨絡繹。先生不得已赴命。拜同副承旨。轉至都承旨。俄命陞秩吏曹參判。兼弘文館提學同知經筵事。旋授大司憲行副提學同知成均館事。己卯。以大司憲歸覲。上疏乞解職終養。不許。特陞資憲大夫刑曹判書。又兼藝文館提學。先生血誠控辭。每日晨起詣闕呈疏。不許則仍赴公衙。日日如是。殆數月而終不允准。至如兼帶兩館提學。世所罕有。人益榮之。先生感激殊遇。與同德諸賢。竭誠建白。革弊興化。如請罷昭格署。以正祀典。刊行鄕約。以敎民彝。講明小學。以敦蒙養。創設賢良科。以收賢俊。追削靖國功臣之濫參者。以杜倖門者。皆流俗之所駭異。勳戚之所切齒也。群猜衆怒。讒搆日積。洪景舟與衮,貞謀。先以不測之言。恐動宸聽。請開神武門。稱受密旨。潛納小牘。脅召大臣。夜起大獄。先生與大司憲趙光祖等十八人。一時收繫。供畢獄具。竝當以死。首相鄭光弼牽裾泣諫。太學生三百餘人。伏闕號哭。始許減死。論先生杖配錦山。錦距報恩百餘里。先生之母病危劇。告於錦倅。乞馳往面訣。還途。聞金吾郞押移珍島。卽偕還配所。權臣有修郤者。論以亡命拿鞫。置對獄中。裂衣帛上三疏。白見冤狀。決百棍安置濟州。翌年。論者又起而甚之。遂賜自盡。聞命色不變。呼酒快飮。移書兄弟。勉以善養老母。作絶命辭以見志。春秋三十六。明年辛巳。返葬于淸州苦海山下。曾所卜築之地。夫人恩津宋氏。進士汝翼之女。無后。取兄參奉光之次子哲葆爲嗣。宣廟初。退溪先生入筵中。因上問啓曰。中廟將興三代之治。趙光祖,金淨,奇遵等。協心贊襄。四方風動。見擯者搆捏。網打士流。皆由南衮,沈貞。上命奪衮,貞等爵。丙子。遣禮官致祭。賜諡文簡。博聞多見曰文。居敬行簡曰簡。先生天分甚高。識見超邁。安和而莊重。敦大而輝光。孝友出天。至行純備。學業精深。門路最正。篤信小學書。尊尙
近思錄。立言制行。動遵古訓。平居。終日端坐。門庭蕭然。絶無雜賓。唯與數三賢益。討論奧義。專心於主靜工夫。不問家人產業。騶直不入於門。祿俸先班於親戚之貧者。不樂榮進。常懷急流勇退之志。雅好泉石。每遇佳處。倘佯忘返。蕭然有出塵之想。奔義如不及。疾惡若將浼。於書無所不讀。一掛眼終身不忘。文法西京。詩學盛唐。雄健俊逸。絶不沿襲陳言。惜乎。其在世苦短。遺失又多也。時新刊近思錄。多士求序跋於諸賢。靜菴固讓於先生。其見重如此。退溪答人書曰。沖菴學問。高於人一等。有此見識。而終不得行其志。豈不悲哉。斯眞定論也。世之論者。或云己卯諸賢負荷太重。設施無漸。不能調適時宜。以至於此。嗚呼。豈其然乎。中廟立國於大亂之後。銳意更化。一新汚習。簡任賢才。虛己以聽。此誠千載一時也。士生斯世。不遇則已。遇則當盡所學。豈可循常守故。苟焉而已。若其倘來之禍福。關時運係興喪。天地之有所憾。於先生何預焉。雖然。天運無往不復。是非不待百年。列聖崇奬。儒林興勸。以至于今。爲士者皆知善之當爲。惡之不可爲。爲善者雖死亦榮。不善者雖生如死。一線正論。終不泯滅者。伊誰之力也。銘曰。
道之將行。天篤降才。必厚其培。道之將廢。或泥或止。孰主張是。我公之生。實際昌期。文在於茲。行固天得。學主養性。
心專居敬。起自林泉。聳動簪紳。瑞鳳祥麟。抗疏惇倫。義正無偏。朝綱肅然。淸名儁望。屈而益舒。妙年尙書。聖君注倚。
賢友輔翼。若車推轂。明良相遇。契合風雲。夙夜經綸。正色法筵。必稱堯舜。有言則信。庶幾禮樂。將大有爲。忌者惎之。
潛吹蜮弩。脅以三木。彼讒罔極。赫日晝曀。繁霜夏隕。長夜泯泯。畀之何豐。用之何嗇。奪之何速。絶命之辭。一團誠血。
萬古嗚咽。惟茲正氣。日揭星明。凜凜猶生。有山蒼蒼。有丘睪如考。槃之墟。樹之貞珉。芳徽如昨。過者必式。
[註解]
[주01] 등동산(登東山) : 천하를 굽어보는 큰 뜻을 뜻한다. ‘공자가 동산에 올라 노(魯)나라를 작게 여겼고 태산(泰山)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겼다.〔孔子登東山而小魯 登泰山而小天下〕’고 한다.《孟子 盡心上》
[주02] 신씨(愼氏)를 …… 삼았다 : 신씨는 중종의 비 단경왕후(端敬王后)를 가리킨다. 신씨는 익창부원군(益昌府院君) 신수근(愼守勤)
의 딸로, 1499년(연산군5)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晉城大君)과 혼인하였다.
1506년 진성대군이 중종으로 추대되자 왕후에 올랐으나, 신수근이 연산군의 매부로서 연산군 축출을 위한 반정 모의에 반대한 일로
성희안(成希顔) 등에게 살해되었기 때문에 공신들의 압력으로 폐위되었다. 그 뒤 1515년(중종 10)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
氏)의 죽음을 계기로 김정(金淨)과 박상(朴祥) 등이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연명으로 올려 복위 운동을 폈으나, 이행(李荇), 권민수
(勸敏手) 등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주03] 정시(正始)의 도 :〈모시서(毛詩序)〉에 “《시경》주남(周南)ㆍ소남(召南)은 정시(正始)의 도요, 왕화(王化)의 기반이다.” 하였
는데, 유량(劉良)의 주(註)에 “정시의 도란 왕도(王道)의 시초를 바로잡는 것을 이른다.” 하였다. 여기서는 특히 주남〈관저(關
雎)〉에서 말한 것과 같은 부부의 도리를 가리킨다.
[주04] 거경행간(居敬行簡) : 중궁(仲弓)이 “스스로 경에 처하여 간략함으로써 백성을 다스리면 또한 옳지 않겠는가.〔居敬而行簡 不亦
可乎〕” 하였다. 거경(居敬)의 자세로 자신을 다스리고 번거로운 일로 백성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다.《論語 雍也》
[주05] 풍운(風雲)의 제회 : 풍운은《주역(周易)》건괘(乾卦) 구오효사(九五爻辭) 문언전(文言傳)의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른다.〔雲從龍 風從虎〕”에서 온 말로, 군주와 신하의 훌륭한 만남을 뜻한다.
[주06] 빛나던 …… 가리고 : 소인배들이 임금의 총명을 가리는 것을 뜻한다. 고시(古詩)에 “뜬구름이 밝은 해를 가리니 쫓겨난 신하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浮雲蔽白日 遊子不復返〕” 하였다.《古文眞寶前集 卷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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