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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집 제14권 / 묘갈명(墓碣銘)
서윤 이공 묘갈명(庶尹李公墓碣銘)
옛날 사람들이 말하는 큰 덕망을 지닌 군자는 모나거나 유별난 행동을 구차하게 하지 않고 성심을 다한 아름다운 실제가 일상의 행동에서 나타난다. 세상에서 이런 사람을 못 볼까 항상 걱정했는데, 지금 벽진(碧珍) 이공(李公)에게서 볼 수 있다.
공의 휘(諱)는 지웅(志雄)이고, 자(字)는 만부(萬夫)이니, 고려(高麗) 개국 원훈(開國元勳)으로 벽진장군(碧珍將軍)을 지낸 휘 총언(忩言)의 후손이다. 고려조(高麗朝)부터 본조(本朝)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저명한 사람이 있었는데, 성묘(成廟 성종(成宗)) 때 소재(小宰)를 지낸 평정공(平靖公) 노촌(老村) 선생 휘 약동(約東)은 명성이 더욱 성대하였다.
고조 휘 석명(碩明)은 학문과 품행으로 칭송된 인물로, 벼슬은 덕천 군수(德川郡守)에 이르렀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증조 휘 희선(喜善)은 경학과 품행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 휘 상급(尙伋)은 곧은 절개로 한 시대의 중망을 받았다. 병자년(1636, 인조14)에 병조 참지로서 어가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나라를 걱정하며 분개하다가 생을 마쳤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휘 연(堜)은 약관의 나이에 모친상을 당하여 효성을 다하다가 죽었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청강(淸江) 선생 이제신(李濟臣)의 손녀이며, 의빈부 도사를 지낸 이구준(李耈俊)의 딸로, 남편을 따라서 숙부인(淑夫人)으로 추증되었다. 공은 숭정(崇禎) 무진년(1628) 7월 1일에 서울 집에서 태어났다.
겨우 다섯 살에 승지공이 오랫동안 기이한 질병을 앓았는데, 공이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고 반드시 함께 기거하였다. 승지공은 공이 어린 나이에 몸을 상하게 될까 봐 걱정하여 번번이 몰래 출입하였는데, 공은 아무리 잠을 자던 중이라도 반드시 놀라 일어나 따라다녀서 승지공이 이 때문에 가볍게 나가지 못하였다. 여덟 살에 마침내 부친상을 당했는데 몹시 슬퍼하며 상례를 치르는 것이 모두 어른 같았다.
병자년(1636)에 대부인을 모시고 강도(江都)로 피난 갔다가 판서공의 상을 당하였는데, 전란이 끝난 뒤 영구를 모셔와 충주(忠州)에 장사 지내고, 그대로 남아 상제(喪制)를 준수하였다. 당시 공은 학질을 앓느라 수척하여 몸을 가누기 어려웠지만, 아침저녁으로 제사 지내고 곡하는 것을 하루도 그만두지 않았다. 상례를 마치고 태부인(太夫人)이 공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계부(季父)에게 수학하였고, 장성해서는 과장(科場)에서 시로 이름을 날렸다.
갑오년(1654, 효종 5)에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입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서 유학하였는데, 동학들이 모두 추앙하고 탄복하였다. 제생들이 공의 높은 재주를 들어 조정에 추천하였는데, 마침 나이순으로 인해 부망(副望)에 올랐다.
우암(尤庵) 송 선생(宋先生)이 전조(銓曹)의 장관이 되어, 공이 세족(世族)으로서 평소에 명성이 드러난 점을 가지고 드디어 순서를 뛰어넘어 수망(首望)으로 의망(擬望)하여, 선릉 참봉(宣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임기를 마치고 선공감 부봉사로 승진하였으며, 상서원 부직장을 거쳐 직장으로 승진하였다가, 다시 전생서 주부로 승진하였다. 형조 좌랑으로 옮겼다가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정미년(1667, 현종 8)에 대부인의 상을 당하였다. 3년 동안 시묘살이 하는 가운데 수척해져 가며 예법보다 지나치게 상을 치렀다. 기유년(1669, 현종10)에 호조 정랑에 임명되었고, 조지서 별제ㆍ사직서 영ㆍ종친부 전부를 역임하였다.
경술년(1670)에 가평 군수(加平郡守)에 제수되고, 정사년(1677, 숙종3)에 다시 형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무오년(1678)에 안성 군수(安城郡守)에 제수되고, 경신년(1680)에 영천 군수(榮川郡守)에 제수되었다. 계해년(1683)에 상의원 첨정(尙衣院僉正)에 임명되었고, 김제 군수(金堤郡守)에 제수되었다.
공은 처음에 집이 가난하고 어머니가 연로하였으므로 뜻을 굽혀 벼슬했던 것인데, 누차 군현(郡縣)을 맡으면서 녹봉을 받아도 어머니를 봉양할 수 없게 되자, 효도를 다하지 못한 슬픔이 사무쳐 수령으로서 받을 봉양을 차마 혼자서 누리지 못하였다. 스스로 검약에 힘쓰고 전념하여 백성을 보살피다 보니, 맡은 곳마다 남다른 치적이 많았다.
가평은 경기(京畿)의 쇠잔한 읍으로, 관아에 비축미가 없는 데다가 크게 흉년까지 들었다. 공은 부임해서 지극정성으로 다스려 곡식을 옮겨 주도록 조정에 요청하고, 자신의 녹봉을 덜어 위급한 사람을 구휼하였다. 고통을 겪는 노약자들은 죽을 쑤어 먹이고, 파종할 때 먹을 것이 없는 자에게는 쌀과 소금을 나누어 주니, 고을 전체가 그 덕택으로 마침내 굶어 죽는 백성이 없었다.
편의에 따라 군정(軍丁)을 징발하여 고을이 동요되지 않았는데, 오직 수군(水軍)은 법제상 과거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기피하였다. 이 상국 완(李相國浣)이 평소에 공을 중시하였기에, 공이 상국을 뵙고 의논하니, 상국이 경연에서 아뢰어 수군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윤허를 받았다.
이로부터 백성들이 수군을 기피하지 않으니, 열읍(列邑)이 편리하게 여겼다. 공의 임기가 다 되자 읍민들이 1년 더 남게 해 달라고 청하며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영천은 본래 관료의 자제들이 많았다. 공이 학교를 일으키는 것으로 일을 삼아, 문묘를 배알하는 날마다 제생을 이끌고 가서 강론하고 수업하니, 제생들이 모두 기뻐하며 흠모하였다.
전임 김제 군수가 가혹한 정사를 펴 고을의 폐단을 고치지 못하자, 전조에서 공의 관대함이면 소생시킬 수 있다고 여겨 선발해서 제수하였다. 공이 임지에 도착하여 부지런히 진무하니, 김제 사람들이 곧 크게 화합되었다. 또 흉년을 만나서는 모두 가평을 다스렸을 때와 같은 방법으로 진휼하니, 백성들이 모두 감복하였다.
전후로 고을을 다스릴 때마다, 길일과 보름날이면 반드시 궁궐을 바라보며 성상에게 절하고, 봄가을의 석채(釋菜)는 반드시 몸소 행하였다. 사직(社稷) 이하 여러 신의 위패 중에 파손되고 제 위치에 놓이지 않은 것은 즉시 위패를 바꾸고 사당을 세웠으며, 역시 모두 몸소 제사 지냈다.
기사년(1689, 숙종15)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사제로 물러나자, 공은 오공 두인(吳公斗寅)의 상소에 참여하였다. 화가 일어나자 같이 상소한 사람들과 궐하(闕下)에서 대명(待命)하였는데, 오공 이하 세 신하가 들것에 실려 피를 줄줄 흘리는 것을 목격하고는, 분하여 울며 걸어서 집에 돌아와 문을 닫고 세상일을 끊었다.
갑술년(1694, 숙종20)에 정세가 바뀌자, 가장 먼저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에 임명되었다. 무인년(1698)에 세자익위사 사어에 임명되었다. 임기를 마치고 집에 거처할 때에는 방 한 칸을 정갈하게 청소하고 주위에 서적을 두고 읽어 날마다 마음을 깨끗하게 하였다.
신사년(1701) 7월 14일에 정침(正寢)에서 별세하니, 향년 74세이다. 이날도 무탈하여 기사회(耆社會)에 가려고 자제에게 입으로 불러주어 답서를 쓰게 하였는데, 잠시 후 기운이 빠져 편안히 숨을 거두었다. 9월 6일에 판서공의 묘소 옆 사향(巳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의 품성은 온화하고 후덕하며 일 처리는 근면하고 검소하였다. 기뻐하거나 노여워하는 감정을 내색하지 않았고, 용모에서 태만한 기운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매일 새벽이면 관건(冠巾)을 단정하게 쓰고 반드시 바른 자리에 앉으며 일정한 곳에 거처하였다.
남을 위한 계책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마음을 다하였고, 남의 시비와 선악은 듣더라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재물과 이익, 음란한 음악과 여색은 마치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여겼고, 남을 해치려는 생각은 마음에 싹트지 않았다. 선조를 받드는 예절엔 공경을 지극하게 하였고, 종친을 화목하게 하는 도리엔 은혜롭게 함을 힘썼다. 관직을 맡았을 때 청렴과 검약을 극진히 하여, 벼슬을 그만두어서는 처자식이 곤궁하였으나 담담하게 개의치 않았다.
부인 숙인(淑人) 이씨(李氏)는 본관이 경주(慶州)이고, 신라(新羅) 좌명공신(佐命功臣)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으로, 장령(掌令)을 지내고 전한(典翰)으로 추증된 광해조(光海朝)의 절사(節士)인 간옹(艮翁) 선생 이익(李瀷)의 손녀이며, 세자익위사 사어를 지낸 이인실(李仁實)의 딸이고, 지평을 지내고 호조 판서로 추증된 월천군(月川君) 김공 원량(金公元亮)의 외손녀이다.
숙인은 부인의 도리가 갖추어져, 길쌈과 바느질에 힘써 제사와 손님접대에 드는 물품을 마련하였다. 집안 살림이 쪼들려도 근심하는 얼굴을 보인 적이 없었다. 자식들 교육은 엄격하여 조금이라도 잘못을 하면 가차 없었고,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는 매질을 하며 말하기를 “무릇 자식이 불초한 것은 어미가 그 잘못을 덮어 주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내외 친척이 모두 부인의 아름다운 품행을 칭찬하였고, 장로들은 저만큼 남편을 내조하여 집안을 잘 다스리기는 더욱 어렵다고 여겼다. 병으로 몸져누웠을 때에도 탕제를 들이지 않고 시월(時月)의 준비를 하게 하면서 직접 살펴보았다.
정묘년(1627, 인조 5) 3월 18일에 태어나 정축년(1697, 숙종23) 2월 2일에 별세하였다. 처음에 선영(先塋)의 왼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가, 공을 장사 지낼 때에 옮겨 합장하였다. 장남 세황(世璜)은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목사(牧使)이다.
그 다음 세구(世球)와 세관(世瓘)은 모두 일찍 죽었고, 다음 세환(世瑍)은 위솔(衛率)이다. 장녀는 참봉 윤규(尹揆)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윤황(尹熀)에게 시집갔다. 목사의 아들인 정상(挺相)은 사마시에 모두 합격하여 의금부 도사가 되었고, 딸은 유면(柳緬)에게 시집갔다.
서자는 정장(挺樟)과 정량(挺樑)이고, 서녀는 조탁(趙倬)에게 시집갔다. 세구의 딸은 김성대(金聲大)에게 시집갔다. 세관의 두 딸은 진사(進士) 한덕일(韓德一)과 장령 박징빈(朴徵賓)에게 시집갔고, 계자(繼子) 정박(挺樸)은 문학(文學)이다. 세환의 아들 정욱(挺郁)은 정자(正字)이고, 정박은 출계(出繼)하였다.
윤규의 아들은 윤장교(尹莊敎)와 윤영교(尹英敎)이고, 딸은 이석기(李錫祺)에게 시집갔다. 윤황의 아들 윤정은(尹挺殷)과 무과에 급제한 윤정각(尹挺覺)이고, 딸은 이점(李漸)에게 시집갔다. 증손 학보(學普)와 나머지 어린아이는 정상의 소생이고, 심보(心普)와 나머지 어린아이는 정박의 소생이며, 천보(天普)ㆍ산보(山普)ㆍ일보(日普)와 나머지 어린아이는 정욱의 소생이다. 외손과 외증손이 모두 자녀가 있으니, 내외의 증손과 현손이 모두 80여 명이다.
아, 공의 아름다운 자질로도 주묵(朱墨)으로 고생하다 끝내 떨치지 못하였으니, 하늘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하늘이 이미 공을 화락하고 장수하게 하였고, 자손이 많은 데다 재주가 있어 점점 과거 급제하여 나아가니, 하늘을 신뢰할 수 없겠는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논하는 후세의 사람들은 반드시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정사를 민간에서 볼만하였으니 / 政可觀於民社
어찌 경상을 해야만 하는가 / 豈其卿
선을 반드시 쌓아야 경사가 되니 / 善必積而爲慶
후손이 번성하였네 / 後也昌
온화한 천성 보존하여 참되게 돌아갔으니 / 葆天和而歸眞
순리대로 살았으니 죽어서도 편안하리 / 生順歿寧
<끝>
[註解]
[주01] 소재(小宰) : 이조 참판(吏曹參判)의 별칭이다. 춘추(春秋) 시대에는 태재(太宰)를 보좌하여 국정을 다스렸고, 명(明)ㆍ청(淸) 시
대에는 이부시랑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春秋左氏傳 宣公2年》
[주02] 아버지 …… 죽었고 : 이련(李堜, 1607~1635)은 모친상을 당하여 절도(節度)에 넘게 몸이 야위도록 상을 치르다가 점점 고질병이
되어 마침내 별세하였다. 《국역 한수재집 제32권 증 승지 이공 묘표》
[주03] 병자년에 …… 지내고 : 병자호란 때 이상급(李尙伋)의 형 충숙공(忠肅公) 이상길(李尙吉)이 묘사(廟社)를 모시고 강도로 들어갔
는데, 이상급이 강도가 함락됐다는 말을 듣고 형을 찾아가다가 1637년(인조15) 3월에 도중에서 적을 만나 살해당했다. 이후에 충
주 황금곡(黃金谷) 부해(負亥)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宋子大全 卷166 參知贈判書李公神道碑銘, 韓國文集叢刊 113輯》
[주04]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입격하여 : 사마 양시는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를 가리킨다. 이지웅은 효종 5년 생원시에 3등
(等) 21위로 입격하였고, 같은 해 진사시에 3등 24위로 입격하였다. 《司馬榜目 孝宗 5年 甲午 式年試》
[주05] 우암(尤庵) …… 제수되었다 : 송시열은 1658년(효종9)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었다. 《국역 효종실록 9년 9월 18일》
이지웅은 이해에 31세의 나이로 선릉 참봉에 제수되었다. 《국역 명재유고 제39권 한성부 서윤 이공 묘갈명》
[주06] 3년 …… 치렀다 : 이지웅은 시묘살이하는 동안 몹시 애통해하다가 몸을 상하여 죽을 뻔하였다. 《국역 명재유고 제39권 한성부 서
윤 이공 묘갈명》
[주07] 석채(釋菜) :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서울은 성균관, 지방은 향교에서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주08] 사직(社稷) : 사(社)는 토지를 관장하는 신이고, 직(稷)은 곡식을 관장하는 신이다.
[주09] 공은 …… 참여하였다 : 오두인(吳斗寅, 1624~1689)의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원징(元徵), 호는 양곡(陽谷)이다. 1649년(인
조 27)에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공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인현왕후가 폐비된 후 상소를 올려 간하다가 형신을 받고
의주(義州)로 유배 가는 중에 파주(坡州)에서 별세하였다.
《明谷集 卷26 贈領議政忠貞吳公墓誌銘, 韓國文集叢刊 153輯》 숙종이 소의(昭儀) 장씨(張氏)가 낳은 아들을 원자로 정하는 것
을 반대한 서인(西人)을 쫓아낸 뒤 남인(南人)을 등용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을 단행하면서 인현왕후를 폐비시키자, 전임 사직
(司直) 오두인(吳斗寅) 등 86인이 상소를 올려 간한 일이 있다. 《국역 숙종실록 15년 4월 25일》
[주10] 오공 …… 것 : 세 신하는 오두인ㆍ이세화(李世華)ㆍ박태보(朴泰輔)를 가리킨다. 오두인 등이 올린 상소에 후궁과 서로 알력하고
핍박하는 사이에 화가 일어났다는 등의 말에 숙종이 분노하여 밤새 세 신하를 친국하며 누가 주도하여 상소하였는지 누가 지었는지
등을 물으며 형신을 가하였다.
[주11] 갑술년에 정세가 바뀌자 :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다시 득세한 갑술환국(甲戌換局)을 말한다.
[주12] 시월(時月)의 준비 : 수의(壽衣)와 염습(斂襲) 준비를 말한다.
[주13] 주묵(朱墨) : 고대에 관부의 문서에 사용하던 붉은 먹과 검은 먹으로, 관청의 사무를 가리킨다.
[주14] 순리대로 …… 편안하리 :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살아서는 내가 하늘에 순응하고, 죽어서는 내가 편안하리라.[存吾順事,
沒吾寧也.]” 한 데서 나온 말이다. 《張子全書 卷1 西銘》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전형윤 김건우 (공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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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庶尹李公墓碣銘
古稱長德君子者。不苟爲崖異斬截之行。而肫肫乎美實。著於日用事爲之間。常患世未見其人。今於碧珍李公焉得之。公諱志雄字萬夫。高麗開國元勳碧珍將軍諱忩言之後也。自麗代至本朝。世有聞人。而成廟時小宰平靖公老村先生諱約東。聲名尤盛。高祖諱碩明。以學行稱。官至德川郡守贈兵曹參判。曾祖諱喜善。以經行授童蒙敎官。贈左贊成。 祖諱尙伋。以直節重一世。丙子以兵曹參知。扈駕入南漢。憂憤以卒。贈吏曹判書。考諱埬。弱歲丁內艱。以孝圽。贈左承旨。妣全義李氏。淸江先生諱濟臣之孫。儀賓都事諱耈俊之女。從贈淑夫人。公以崇禎戊辰七月一日。生于京第。甫五歲承旨公久嬰奇疾。公晝夜不離側。起居必偕。承旨公慮幼年致傷。出入輒諱之。公雖在昏睡中。必驚起趍從。承旨公爲此不得輕出。八歲竟罹荼毒。哀毁執禮。一如成人。丙子奉大夫人避兵江都。遭判書公喪。難已奉柩葬于忠州。仍留守制。時公痁病。羸瘁難支。而朝晡奠哭。未嘗一日廢。制畢太夫人挈歸京師。受學於季父。及長以詩名塲屋。甲午中司馬兩試。游學泮宮。同學咸推服。諸生擧高才應薦於朝。而適以年次居副。尤庵宋先生長銓席。以公世族名素著。遂越次首擬。拜宣陵參奉。報滿。陞繕工監副奉事歷尙瑞院副直長仍陞直長。轉陞典牲署主簿。移刑曹佐郞陞正郞。丁未遭大夫人憂。廬墓三年。居瘠踰節。己酉拜戶曹正郞。歷造紙署別提,社稷署令,宗親府典簿。庚戌除加平郡守。丁巳復拜刑曹正郞。戊午除安城郡守。庚申除榮川郡守。癸亥拜尙衣院僉正。除金堤郡守。公初以家貧親老。屈意就仕。及累典郡縣。祿不逮養。深懷風樹之痛。不忍以專城之供。獨奉其身。務自儉約。專心恤民。所居多異績。加平以畿甸殘邑。官無宿儲。年且大侵。公至則至誠經理。請於朝移粟。捐其俸周急。老羸之顚連者。糜粥以饋之。播饁之罄絶者。米鹽以分之。一境賴焉。終無捐瘠。方便簽丁。閭里不擾。惟水軍法不許赴擧。故民皆避之。李相國浣素重公。公面議得其筵奏。許水軍赴試。自是民不憚。列邑便之。秩滿邑民乞留一年。樹石頌德。榮川固多搢紳子弟。公以興學爲事。每謁文廟日。引諸生講論指授。諸生莫不歡忭慕悅。前任金堤者政苛刻。郡弊莫之救。銓曹以公寬仁可蘇完。選除之。公下車。孜孜撫摩。堤人卽大和。又値歲儉。賙賑一如在加時。民皆感服。前後在郡。吉日月半。必望宸拜聖。春秋釋菜。必親行之。社稷以下諸神版缺破而置非其所者。輒易版建宇。亦皆躬祀之。己巳坤聖遜位。公參吳公斗寅疏。禍作。與疏下諸君胥命闕下。目見吳公以下三臣擔舁出血淋漓。憤泣徒步還家。杜門絶世事。甲戌改紀。首拜漢城府庶尹。戊寅拜翊衛司司禦。秩滿家居。靜掃一室。左右圖書。日蕭灑其中。辛巳七月十四日。考終于正寢。享年七十四。是日平善。將赴耆社會。口授子弟答書。俄而氣乏。逌然而逝。九月六日。葬于判書公墓傍巳向之原。公稟性溫厚。處事勤儉。喜怒之色不形於外。惰慢之氣不施於容。每日晨起。整攝冠巾。坐必正席。處有常所。爲人謀。雖微細必盡心。聞人是非善惡。絶口不言。貨利聲色。若將凂之。傷人害物之念不萌於心。致敬於奉先之節。懋恩於敦宗之誼。居官極廉約。及其家食。妻子內窘。而泊然不以爲意也。配淑人李氏。籍慶州。新羅佐命功臣諱謁平之後。昏朝節士掌令贈典翰艮翁先生諱瀷之孫。翊衛司司禦諱仁實之女。持平贈戶曹判書月川君金公諱元亮之外孫。淑人婦道備。力紡績鍼縷。以供祭祀賓客之需。井臼蕭然。未嘗有戚戚容。敎諸子嚴。小有過。不假借。重則笞之曰。凡子所不肖。母掩其過也。內外親戚。皆稱其媺行。而長老尤以佐君子成內治爲難及也。寢疾不進湯劑。命修時月之備。臨檢之。以丁卯三月十八日生。卒于丁丑二月二日。初窆于先塋左崗。及公喪。移而同穴焉。男長世璜。武科通政牧使。次世球,世瓘俱早歿。次世瑍。衛率。女長適參奉尹揆。次適尹熀。牧使男挺相。俱中司馬。爲禁府都事。女適柳緬。庶男挺樟,挺樑。庶女趙倬。世球女適金聲大。世瓘二女。適進士韓德一,掌令朴徵賓。繼子挺樸文學。世瑍男挺郁正字。挺樸出繼。尹揆男莊敎,英敎。女李錫祺。尹熀男挺殷,挺覺武科。女李漸。曾孫學普。餘幼。挺相出。心普。餘幼。挺樸出。天普,山普,日普。餘幼。挺郁出。外孫曾俱有男女。內外曾玄摠八十餘人。嗚呼。以公之資之美。勞碌朱墨。終莫之振。天可必乎。天旣錫公以寬樂壽考。子孫衆且才。稍稍以科甲進。天不可必乎。後之尙論者。必有以辨之矣。銘曰。
政可觀於民社。豈其卿。善必積而爲慶。後也昌。葆天和而歸眞。生順歿寧。<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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