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병 발자취를 추적하다최초 여성 의병, 온몸으로 일본과 맞서다입력 2023.10.18. 18:26이관우 기자
②양방매
유생 딸이자 의병 오빠 둔 투사
심남일 의병장 참모 강무경과 혼인
남편 따라 일본군과 전투 참여
남평 거성동 전투서 日병사 사살
전북 무주에 세워진 강무경 의병장 동상과 강무경·양방매 사적비
'남도 의병' 발자취를 추적하다 ②양방매
의병을 칭할 때 의병부대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 대표 의병장을 칭하거나, 의병부대의 근거지를 사용하는 등 기준이 일정치 않다. 의병장 명칭을 사용한다면 한 인물을 통해 의병부대의 성격을 파악하는 장점도 있지만, 그 부대를 구성했던 인물들을 미처 살피지 못한 문제점도 있다.
을사 의병을 대표하는 최익현은 경기도 포천 출신이지만,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의 의병부대를 '태인 의병'이라 부른다. 단순히 출신지를 기준으로만 의병부대의 명칭이 정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019년 영암 의병을 최초로 본격적으로 다룬 '영암의병연구(영암문화원 간행)'에선 영암 의병이 전남 중남부 지방을 호령했던 심남일이 이끄는 '호남의소(湖南義所)'의 주력임을 밝혔다.
호남의소가 가장 활발히 움직일 때 '남도 의병'의 전설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국사봉에 의병사령부를 설치해 일본과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영암 금정면 소재 국사봉은 험준한 지세와 사방으로 이어지는 요충지여서 일찍부터 의병들의 근거지가 됐다. 한말 의병 전쟁의 성지라 할 정도로 항쟁의 역사를 남겼던 국사봉은 전남 제일 의병장 심남일이 이곳에 사령부를 두고 청사에 아로새긴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영암군 금정면 청룡리(내산)와 장흥군 유치면을 끼고 있는 국사봉(해발 614m)은 영암에서는 월출산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원래는 덕룡산(德龍山)이라 불렀으나, 산기슭에 있는 쌍계사에서 2명의 국사가 배출됐다 하여 '국사봉'이라 불렸다 한다.
이곳은 심산유곡이 중첩된 '겹산'으로 서쪽으로는 영암 금정면, 북쪽으로는 나주 세지면·다도면·봉황면과 연결되며, 동쪽으로는 화순 도암면·청풍면, 남쪽으로는 장흥 유치면, 강진 옴천면과 연결되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이 때문에 1907년 영암 의병이 처음 결성됐을 때, 영암 의병들은 이곳 국사봉 에 거점을 마련했다. 1908년 2월 함평에서 의병부대를 이끌고 영암으로 이동한 심남일도 이곳에 사령부를 뒀다.
그런데 심남일이 이끄는 함평 부대가 국사봉으로 이동하면서 금정면에 있는 유생 양덕관 집에 유숙했다. 양덕관은 그의 아들 양성일이 이미 '영암 의병'으로 활동하고 있어서 의병들에게 호의적이었다.
양덕관에게는 딸이 있었다. 1890년 생으로 양방매라 하는데, 의병에 뛰어든 오빠를 직간접적으로 돕고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이미 여성의병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때 심남일의 선봉장으로 핵심 참모 역할을 한 전북 무주 출신 강무경이 있었다. 의병에 뛰어들기 이전에 강무경은 필묵 장사를 한 관계로 서당 훈장을 했던 심남일과는 잘 아는 처지였다.
심남일이 거병할 때 강무경이 주도적으로 이를 도왔다. 이후 심남일과 강무경은 운명을 같이했다. 심남일은 양방매와 강무경의 혼인을 주선했고, 강무경의 강한 눈빛이 맘에 들었던 양덕관은 결혼을 허락했다.
1984년 처음으로 남편 강무경의 묘지를 찾은 양방매 선생의 모습.
혼인 서약만 간단히 했을 뿐 곧장 전장터로 남편을 떠나보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심남일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국사봉을 중심으로 강진, 심지어 해남까지 진출해 그곳 의병부대와 연합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렇게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이라 강무경은 그의 아내인 양방매를 금정의 양덕관 집에 머무르게 했다. 하지만 양방매는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남편,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며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강무경을 따라 나섰다.
그는 의병들의 전투를 지원하거나 직접 총을 들고 일본군과 싸우기도 했다. 1909년 화순군 능주면 풍치 바윗굴에서 남편과 함께 일경에 체포될 때까지 1년 동안 장흥·보성·강진·해남·광양 등 전남 동남부 일대 산악지방을 무대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특히 1909년 3월 8일 강무경 의병이 남평 월교리에 머물다가 일본군 15명이 운곡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고 본진을 장암에 두고, 의진을 대치(大峙)·대항봉(大巷峰)·월임치(月任峙)·덕룡산(德龍山)·병암치(屛岩峙) 등 5개로 나눠 매복시켜 놓고 유인작전으로 협공을 벌여 수많은 일본군을 사살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던 유명한 남평 거성동 전투에는 직접 참전했다. 남도 의병을 빛낸 최초의 여성 의병으로 거듭났다.
양방매의 남편으로 이름이 더 유명해진 강무경은 심남일이 함평에서 처음 거병할 때부터 나중에 일본군에 체포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까지 항상 같이 있었다.
심남일 의병부대는 광주·나주 등지에서 맹활약하던 김율 의병부대에 합류했다. 1908년 4월 김율 의병장이 어등산 전투에서 전사하자 부대를 수습한 강무경은 심남일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선봉장이 됐다.
그리고 의병활동이 왕성한 영암으로 와 호남의소를 창설한 것이다. 호남의소는 강진 오치동 전투를 시작으로 장흥 곽암, 남평 장담원, 능주 노구두, 영암 사촌, 해남 성내, 능주 돌정 등지에서 일제를 상대로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1909년 7월 순종의 의병 해산 조칙으로 심남일은 의병부대를 해산할 수밖에 없었으나, 심남일이 이끈 호남의소의 예하 부대들은 부대 해산 명령을 따르지 않고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계속했다.
심남일은 부대 해산 후에도 강무경과 능주의 풍치 바위 굴에서 은신하면서 새로운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 무렵 일제는 1909년 9월 1일부터 이른바 소위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추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심남일과 강무경, 그리고 양방매는 밀정의 밀고로 풍치 은신처에서 함께 체포됐다. 이들은 대구 감옥에 수감됐다.
이곳에는 이미 박영근, 오성술, 전해산 등 남도를 대표하는 의병장들이 수감돼 있었다. 이곳에서 심남일 등 다른 의병장과 함께 강무경은 1910년 8월 32세의 젊은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강무경 의병장이 사형당하기 직전, "꿈에서조차 그리던 나라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철천지원수의 총칼에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오호 애재라! 내 혼백과 육신의 혈흔이라도 이승의 청강석이 되어 못 다한 천추의 한을 풀리라"고 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함께 체포된 양방매는 여성의 몸에다 벙어리 행세를 하여 석방될 수 있었다. 양방매는 고향인 금정의 생가에서 은둔하며 국립묘지에 묻힌 남편인 강무경의 공적을 기리다 1986년 남편 곁으로 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강무경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양방매는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박해현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공학과 부교수
지난 13일 찾은 양방매 선생 생가터. 현재는 안내판을 제외하곤 과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사유지로 남아 있다.
'남도 의병' 현장을 찾아서
지난 13일 찾은 영암군 금정면 양방매 생가터에는 최근 세워진 안내판이 100여 년전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었다. 안내판에는 양방매의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과 함께 '최초 여성 의병 양방매'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양방매는 이곳에 숨어 살다 9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생가터 주변에 위치한 국사봉을 자주 오르내렸다고 한다. 국사봉은 한말 의병 전쟁의 성지라 할 정도로 항쟁의 역사가 곳곳에 남아 있다.
현재 양방매 생가터는 사유지라 과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소유주가 이곳을 개발하지 않고 남겨 뒀다.
양방매를 비롯해 국사봉에서 활약했던 남도 의병을 기억·기념하기 위한 활용 방안을 고민해야할 시점이다. 국사봉 유적지와 양방매 생가터를 연결하는 의병길 조성 등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강무경 의병장의 고향인 무주에는 그의 빛나는 의병 공적을 기리는 기념비와 동상이 세워져 있다. 최근 강무경 의병장 동상 옆에 양방매 의병의 동상을 세워 최초의 여성 의병이자 부부 의병의 역사를 기리고자 하는 움직임이 무주에서 있다. 강무경은 비록 무주출신이나 그가 영암에서 활동을 했고, 영암의 딸과 혼인한 영암의 사위다. 곧 남도 의병의 핵심인 영암 의병의 구성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