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 보면 / 아빌라의 데레사
지금 생각해 보면, 나를 지도해 줄 분을 만나지 못했던 것은 주님의 섭리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런 시련과 이처럼 심하게 메마른 상태를 참으면서 18년 동안이나 견딘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나는 오성을 써서 묵상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이 시기에 영성체 후를 제외하고는, 책 없이 기도를 시작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내 영혼은 책 없이 기도하는 것을 마치 수많은 원수들과 싸우러 가야 하는 것처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도와주는 책이 있으면 친구처럼, 수많은 잡념의 화살을 받아 넘기는 방패처럼 나를 보호해 주어서, 나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나는 평소에는 메마름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책이 없을 때면 늘 그 상태에 빠져 버려, 내 영혼은 즉시 불안해지고 생각들은 산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평소에는 메마름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모든 생각들을 다시 모을 수 있었는데, 책은 내 영혼을 낚아 올리는 미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종종 책이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에 따라 어떤 때는 조금만 읽었고 어떤 때는 많이 읽었습니다.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시기의 처음에는, 만일 나에게 책이 있고 홀로 고요히 지낼 수만 있다면, 내가 품고 있는 이처럼 큰 보물을 어떠한 위험도 앗아 가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죄를 짓는 기회에서 곧 피하도록 처음에 타일러 주거나 그런 함정에 빠지기 시작했을 때 빨리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나 스승이 있었다면, 나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 소중한 보화를 그렇게 바로 잃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 비록 악마가 공공연히 나를 공격했더라도, 내가 큰 죄를 짓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악마는 너무도 교활했고 나는 너무나 나약했기에, 내 모든 결정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주님을 충실히 섬기던 시기에는 이런 결심들이 참으로 큰 도움이 되었고, 내가 겪어야 했던 무서운 병고를 엄위하신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그 큰 인내로 잘 견딜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나는 자주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얼마나 선하신가를 생각하면 탄복했고, 내 영혼은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무한한 자비를 생각하며 기쁨에 잠겼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온갖 은총을 베푸셨으니 찬미받으소서! 그분은 나의 착한 소망들 가운데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보답해 주셨음을 확실히 깨달았으니까요. 나의 선행이 아무리 보잘것없고 불완전할지라도, 주님께서는 내 안에서 이런 잘못들과 죄를 본 사람들의 눈이 이제는 그런 것들을 못 보게 만드시고, 그들의 기억에서 지워 버리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잘못 위에 도금을 하시고 나의 덕들은 더욱 빛나게 만드십니다. 하지만 그 덕을 나에게 주신 분은 바로 주님이고, 내가 그 덕을 지니도록 거의 강요하셨습니다.
이제 다시, 나에게 쓰라고 명하신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초기 단계에 주님께서 나를 다루신 방식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야 한다면, 내가 지닌 지성보다는 훨씬 뛰어난 지성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주님께 어떤 은혜들들 받았는지, 또한 나의 비참함과 배은망덕에 대해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런 것들을 다 잊어버리고 말았으니까요. 나를 그토록 오래 참아 주신 주님께서는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아멘.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자서전> / 고성·밀양 가르멜 여자 수도원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