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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16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주의 말씀이 나의 말씀이 되기 위하여
본문 : 욥기 42장 5절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새번역>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말’로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입니다. 기도해야지, 말씀 읽어야지, 예배 드려야지, 찬양 불러야지, 대부분의 신앙생활은 사실 말로 다 표현이 되는 영역에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말로 선포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결심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너무도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로 선포하고 나면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혹여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말로만 하는 신앙생활이 될 수도 있습니다. 소위 입만 살아있고 행함이 없는 믿음을 소유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고민’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말씀대로 사는 것일까? 이 말씀은 어떤 뜻일까? 저 동역자는 왜 저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내일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나님은 내게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등등 늘 질문이 있는 고민으로 가득한 신앙생활입니다. 질문이 있는 고민은 정말 좋은 태도입니다. 이 고민이 기도로 이어진다면 금상첨화입니다. 이 고민이 성경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면 축복입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혹여 ‘고민만’ 하는 신앙생활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감사를 방해하는 걱정과 염려가 가득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방관’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입니다. 다 하나님께 맡겼기에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구하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하시라고 선포합니다. 어차피 하나님 뜻대로 하실 것이기에 굳이 기도해야 할 필요도 느끼지 않습니다. 그저 일어나는 모든 일에 순응할 준비를 합니다.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인도하실 것이기에 염려할 필요도 없고, 준비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 알아서 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진짜 어마무시한 믿음입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혹여 믿음이 결여된 방관은 곧 ‘긍정’과 ‘무관심’이라는 태도로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말씀’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입니다. 말씀을 기초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기초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기초로 해야 할 것들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말씀에 나를 비추고, 말씀을 묵상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사실은 가장 어려운 신앙생활의 유형이라 많은 분들이 선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장 추천하는 방식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꼭 선택해야 할 유형의 신앙생활입니다.
욥기의 주인공인 욥은 욥기 42장 5절을 통해 자신은 ‘말’과 ‘고민’과 ‘방관’으로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그저 귀로만 들었던 하나님을 향한 신앙생활을 해 왔다고 이야기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생각이었지 하나님의 인정이 아니었다는 것을 명확히 깨달았기에 나온 고백입니다. 이 모습이 말씀 앞에 선 사람의 모습일 것입니다. 내가 생각할 때 내가 어떤 그리스도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내가 어떤 그리스도인지가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린 다시! 늘! 말씀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판단이 아닌 말씀의 판단을 받아, 말씀을 기초로 하여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귀로만 들었던 하나님이 아니라 눈으로 주님을 뵙는다는 욥의 고백에 큰 감동을 느끼곤 합니다. 그래서 자신도 이제는 귀가 아닌 눈으로 주님을 뵙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마음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욥이 했던 고백의 핵심은 눈으로 주님을 뵈었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욥기 42장 5절을 보겠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욥기 42장 5절, 새번역>
이 구절에서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눈으로 주님을 뵙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 서기 위하여,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내가 말씀 앞에 서는 이유와 다시 태어나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 ‘하나님과 나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에 따라 관계가 천차만별로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아주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다면 너무도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면 제법 거리가 멀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과 어떤 관계이십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존재이십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명확하게 고백할 수 있으십니까? 언제나 이 4가지 질문에 답을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고백이 있어야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 앞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말씀이 되기 위하여, Born Again,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오늘 하나님에 대해서 새롭게 배워보는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먼저 귀로 듣고, 삶에서 눈으로 뵙게 되길 바라면서 성경 가운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스스로 밝히신 부분을 찾아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여호와’이십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곧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 하나님이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한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바로 너희가 대대로 기억할 나의 이름이다. <출애굽기 3장 13~15절, 새번역>
여호와! 야훼! “나는 곧 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라고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처음으로 밝히고 계십니다. 사실 당시에 이 말을 듣고 있던 모세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이런 이름은 처음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창조된 존재가 아닌 스스로 있는 자, 그래서 자신이 곧 자신이라고 하는 신을 우리는 지금 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파와 오메가, 처음이면서 동시에 나중이시고, 시작이면서 동시에 끝이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영원이라고 하는 영역에 사시는 존재입니다. ‘유한’을 사는 인간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범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브라함에게도, 이삭에게도, 야곱에게도 하나님이었던 분이라고 덧붙여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브라함만의 하나님이 아니고, 이삭만의, 야곱만의 하나님도 아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과거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미래에도 계실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 순간 구약의 하나님을 묵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 하나님이 지금 우리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우리는 구약도 신약도 조금도 묵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때도, 지금도 동일하신 하나님이시기에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과거에 그 때도, 지금 이 순간도, 먼 훗날에도 동일하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결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의 주인공이 되시는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전능자’이신 것입니다. 사실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 자체가 오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해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믿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바로에게 갈 수 있었고, 출애굽의 여정을 떠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계속해서 이해의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이해가 되지 않을뿐더러, 계속해서 관계가 어그러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입니다.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영역에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믿고, 의지하고, 기도하며, 예배하는 것입니다. 절대적 영역에 대한 경외입니다. 섣불리 상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인간의 상상이라는 창고에 가두어 지는 개념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어떤 수식어를 붙이기 이 전에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우선의 일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지금 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고 약속하셨기에 그 약속을 믿고,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알려 주신 이유일 것입니다. 분명한 관계를 설정하신 것입니다. 예배의 대상과 예배자의 관계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주인’이십니다.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연하게도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셨으니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창조주인 동시에 주인이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주님’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 1절, 새번역>
태초라는 시간에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말씀으로 지으셨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방법입니까? 만약에 과학으로 설명되는 어떤 물질로 만들었다면 우리는 그 물질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또 고민하고 의심했을 것입니다. 과연 스스로 있는 자, 전능자다우신 방법입니다. 말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실 수 있으니 말입니다. 도무지 어떤 영역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창조하신 것으로 끝내신 것이 아니라 친히 주관하시고, 역사하시고, 운행하십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모든 것들을 보시며 만족하셨습니다. 그래서 너무도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하나하나 연결하시고 이어가시면서 조화를 이루어 가십니다. 만들어 놓고 뒷짐 지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먹이시고, 입히시고, 챙기시고, 돌보시는 창조주입니다. 애정과 관심이 가득한 창조주이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마태복음 6장 30절, 새번역>
욥이 결정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눈으로 뵙게 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창조주’로서의 면모를 다시금 보여주셨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욥기 38~41장을 보면 하나님께 폭풍 가운데서 자신이 창조주로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그리고 그 역사가 이 땅 가운데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이 창조주이신 것에 의심이 생기는 분이 있다면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다 읽고 나면 분명 욥처럼 이렇게 고백하게 되실 것입니다.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욥기 42장 1~3절, 새번역>
이런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는 피조물의 고백은 오로지 ‘찬양’일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한 노래가 끊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이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지금도 이 세상은 ‘His Story’ 창조주의 역사임을 믿어 의심치 않을 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더욱 확고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아바 아버지’입니다.
너는 바로에게 말하여라.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 <출애굽기 4장 22절>
하나님은 모세에게 분명히 자신이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장자로 두고 있는 아버지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쉽게 부를 수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망령되이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가장 먼저 하나님에 대한 호칭을 이렇게 사용하셨습니다.
예수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누가복음 2장 49절, 새번역>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셨다는 것도 충격이지만 당시의 문화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굳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전능자이시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라 일컬어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3장 1절, 새번역>
하나님은 그저 창조주로서 피조물인 우리를 마음대로 조정하시거나 사용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인이시기에 우리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거나, 하찮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하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저 멀리 동떨어진 관계가 아닌 ‘가족’이라는 이름의 공동체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을 통해 깨달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이 먼저 움직이셨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 될 수 없는 우리와 하나가 되기 위하여 ‘죄’의 문제를 해결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독생자 아들을 ‘우리’라는 아들과 바꾸셨습니다. 독생자 예수에게 죄를 대신 지게하고, ‘우리’라고 하는 죽어 마땅한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친아들을 양아들을 위해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양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손을 내미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싶어 하십니다. 아담과 하와와 함께 거닐던 에덴동산, 즉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회복하길 원하십니다. 절대 강제로 회복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여’, ‘기쁨으로’, ‘인정함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길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상속자로 우리의 이름을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로마서 8장 15절, 새번역>
CCM 사역자 조준모씨가 부른 ‘십자가에서’라는 곡이 있습니다. 그 곡의 가사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아에서 아들로, 거절에서 용납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꾸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저주에서 축복으로, 원수에서 연인으로, 창기에서 신부로 바꾸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찬양을 들으며 ‘고아에서 아들로’ 라는 첫 구절에서 너무도 마음이 먹먹해 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셔도 되는 분이십니다. 인간을 포기하셔도 되고, 피조물이니 멋대로 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잊지 않으십니다. 사랑하십니다. 전능자이시며 창조주이시고, 주인이신 자신을 ‘아버지’의 영역으로 낮추심으로 피조물이며 행악자이며, 종인 우리를 ‘자녀’라 하시며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잊지 마십시오. 끝 날까지 결코 이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늘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돌아갈 집이 있습니다. 상속받을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질투하는 분’이십니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너희는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 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출애굽기 20장 3~5절, 새번역>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주바라기’가 되는 것입니다. 결코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는 분이십니다. 만약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질투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태양이라는 가수가 부른 ‘나만 바라봐’를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부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주다. 이것이 나의 이름이다. 나는, 내가 받을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 주지 않고, 내가 받을 찬양을 우상들에게 양보하지 않는다. <이사야 42장 8절, 새번역>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바라보기를 바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너무도 빠르게 집중력을 잃어버리고, 시선이 분산되고 맙니다. 그리고 곧 하나님은 질투하심으로 다시 자신만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호세아에게 고멜을 만나라고 하시면서 이스라엘을 향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시는 분이십니다.
신랑 되신 하나님을 기다리는 신부되어 살기를 바라지만 우리의 현실은 너무도 많은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럴 때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가장 최우선의 자리로 계실 때 만족하시는 분이십니다. ‘먼저’를 분명하게 할 때 모든 것을 약속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로서는 어찌 보면 가장 쉬운 계약서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의 자리, 최우선의 자리, 'Priority'의 자리만 내어드린다면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6장 33절, 새번역>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은 우리를 더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여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보다 더 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만큼은 사랑하고 계심을, ‘질투하신다’라는 표현으로 역설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이제 너희는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 가운데 있다는 것과,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것과, 나 말고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의 백성이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요엘 2장 27절, 새번역>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오늘 주의 말씀이 나의 말씀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묵상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점검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금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지금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명확해 집니다. 오늘 함께 나누었던 ‘여호와 하나님!’, ‘창조주이며 주인이신 하나님!’, ‘아바 아버지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 이 결론적으로 모두 ‘나의 하나님’이란 고백으로 마무리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의 말씀이 된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 앞에 다시 서서 Born Again의 시간을 보낼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하나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질투하실 만큼 사랑이 넘치시는 사랑이신 하나님!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하나님! 경배합니다. 찬양합니다. 사랑합니다. 예배합니다.
결단찬양 - 그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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