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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독자를 위하여!
안동 말이 외래어, 외국어, 표준어에 잠식되어 사라지고 100년 뒤. 애타게 우리말을 찾아다닐지도 모르는 미래 언어학자에게 이 글과 음성을 드립니다.
('향토 문화의 사랑방 [안동]誌 통권 212호에 실린 글입니다.)
동계수 애가哀歌
1976년 한여름에, 안동땜 물이 기어꾸 우리 마을을 덮어뿌렜니더.
물이 배나들꺼짐 챘다는동, 예안장터 아래 외내가 장갰다는동 초여름부터 전해오는 입마다 말이 쪼맨끔쓱 달랐니더. 그래도 점령군 물이 우리 마을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거는 여축없었니더.
칠월, 디게 더운 어느 날에 아부지가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메로 집에 오셌니더. 메칠 딴에 비가 찌점벅거리다 날이 드든 날 저억답에 삼천리호 자전차를 타고 돌아오셌니더. 아부지도 다음 날부터 어메겉이 날만 새먼 땅콩밭으로 나가셌니더. 추수 가을꺼짐 그늠으 땜 물이 참아 줄 텍이 없다는 거는 나도 알고 아부지도 아셌니더. 아부지는 맥고자를 쓰고 목에 건 수건으로 연신 땀을 딲으멘서 밭을 매다아 컹컴해져야 집에 들오셌니더. 그르다아 중복이 오기 전에 또 힝하이 안동 시내로 가세뿌렜니더. 물 아가리는 곧에 마을로 들이 밀 껕은데 어메하고 내가 못 후아낼 땅콩밭은 어예라꼬 길손겉이 또 집을 비우는 아부지가 야속했니더. 그르이 어예니껴. 구체없재요, 머.
당세 부포 살았든 현애형님이 쓴 수몰일기를 내가 일전에 밨니더. 예안장터를 한입에 자먹고도 야量이 안 찬 수마水魔가 절벡 겉은 남강 뚝을 반쯤 생킨 8월 14일에 짱때비가 항정없이 퍼벘다 그래요. 가마이 도도 머잖애 물에 장겔 따아다 작달비가 그크러 들이버 제캤으이...
나도 기억하니더. 하늘 한짝이 타잤는동 주야로 쏟아지든 빗줄기를요. 나락 한 말이라도 건제 볼라꼬 천둥에 개 띠듯 하든 사람들이 고마 포기해뿌고 뻐이 보고 있었든 그 빗줄기를요. 수몰민들이 뽀끈 뿥잡고 있든 실래끼겉은 희망으 끈을 고마 툭 끊어부렜어요.
풋바심이라도 해가 고향을 뜰라 그랬는데, 우는 가슴에 말뚝 박기도 유분수지. 형님으 일기에는 다음 날인 15일에 다래 잠수교가 물에 드가뿌렜고요. 고 다음 날 16일에는 부포 원껄 버재이아재네 가수원도 물이 들었다 그래요. 원껄이 머라 카먼요, 낙동 강변 부포 마을 입구에 부라워浮羅院이라 카는 역원驛院으 누가 있었니더. 그 부라원 누가 있는 마을을 원껄이라 캤니더. ‘껄’은 ‘걸’인데요, ‘거리’으 안동말이시데이.
아침마다 해는 방그랗게 솟았지만, 손을 거둔 사람들은 방깐걸에 모예가 소금 친 미꾸라지겉이 소란을 떠는 게 일과렜니더. 인겔 누우 집이 어제 떠났고 지촌은 누구 누구네가 안즉 남았고 먼저 간 사람들은 어예 산다는데 남은 우리는 낭패 아이라. 그때 나는 아직만 머먼 샘끝 딧산에 올라갔니더. 이설도로 옆 멍석마 한 방구에 슬플 ‘애哀’ 자를 쌔기고 있었그든요. 그양 그래라도 해야 댈 껕앴어요. 내가 어레서 그른동, 수몰댄다 캐서 통곡하드륵 서럽지도 않앴니더. 호랑불이 진절머리 나가 전기 쓰는 도시 생활이 꿀뜨름할 때도 많앴으이께내요. 그른데도 참말로 기올로 오는 물 아가리를 보이 어예 그꾸 허뿌든동요. 마음이 솔개처름 창고蒼空오 떠있었니더. 멫날 걸렜는지는 몰시더마는 땡벹을 맞으먼서 망치로 정을 뚜디레가 애哀 자를 완성했니더. 시시름가다아 메칠 후먼 용구龍宮이 댈 우리 마을을 내레다보먼서요.
마주보는 하계뜩[宅]과 버재이뜩 큰 개와집 새로 다디다디 어깨를 붙인 고통 마을 초가지붕들. 입으로 나비물을 뿜어가 다린 이불 홑처을
마다아 널고 있는 우리 어메. 은행나무 고목이 비이고 여치집마 한 건물도 독골로 옮게진 예배당 자리. 소냉기가 소 잔등을 따개가 내리든 천방 뚝길. 얌얌한 새덕들이 빨래하먼서 시시만끔 시어마이 흉을 보든 동계수 . 꿀무리한 날이먼 옹천 짝에서 기적소리가 밀레오든 뱃가 손영호네 가수원.
'앞니 빠진 갈가지 웅굴 가에 가지 마라. 붕어 새끼 놀긴다. 딧니 빠진 갈가지 통시 가에 가지 마라. 구데기 새끼 놀긴다. 거랑 가에 가지 마라. 까재 새끼 놀긴다.'
젖니 빠진 언나들을 놀기던 웅굴터.
현애형님으 일기에, 8월 22일 낮에 인겔 천바[防川]이 반쯤 장겠다 카이, 우리 땅콩밭에도 그날 물이 든 껕애요. 그때 어메하고 내가 얼매나 운짐이 다든동, 땅콩 싹을 손에 잽히는 대로 뽑아올렜잖니껴. 아찌분해가 하는 짓이지, 쭐거리 속에 딸레온 붕어만 퍼덕거리고, 껍떼기를 까보먼 게우 알이 맺히기 시작하는 물고물 뿌이렜어요. 추수는 캐도 메칠 안에 마을로 물이 들어올 파이라 이사가 급했니더. 뚝밭 자두나무에 포동포동한 자두가 개락으로 달레 있어도 그거 한나 따멀 정시情神이 없었니더. 언제 오실동 모르는 아부지를 하염없이 기다릴 수도 없고. 어메하고 둘이서 짐을 쌌니더. 후채이도 나뚜고 멍석도 내빼리고 바소가리도, 호랑도 내빼리고, 내빼리고...
와중에 두루봉 너머 탯골 사람들이 집을 사러 왔니더. 삼만 원 받았딘동? 탯골 사람들은 우리 집 본채를 순식간에 허디마는 쓸만한 목재를 지게로 지고 고통골 아홉사리를 넘어갔니더. 마당 뻠뿌터에는 잘 익은 포도가 늘어져 있고. 담 우에는 장마아 죽은 가안지 뱃대지 겉은 고지도 얹헤있고...
이삿짐 실을 차를 못 구했니더. 야곰야곰 물은 대구 기들오고. 차게차게 들게 논 이삿짐이 어예먼 밤새 물에 장겔지도 모른다는 걱저어 시달렜니더, 어메하고 나는 낮삠도 없이 내리는 빗줄기만 그양 멍하이 바라볼 수밲에 없었니더. 해그름에 어예 어예 짐차가 왔니더. 한실꺼짐 짐 실고 온 내 동무 부포 임용희네 작은아부지가 우리 짐을 실어좄니더. 안즉 못 떠나고 남아있는 멫 사람이 짐을 같이 실어 좄니더. 곧에 어두워질 파이라 안이 달았니더. 급하게 나대는 통에 차 우에서 고무 바를 땡기든 박용태가 고마 바닥에 떨어졌니더. 아이고 이 일을 어에노, 참말로 크일났다 시웠니더. 두루봉 산신려이 도았는동, 한창때래가 그른동 용태는 가무친 데도 없이 뿌시시 일나가 우리 이삿짐을 마주 실어좄니더. 요새 겉으먼 입원해가 베라벨 검사를 다했으 껜데 참 순하고 어둔은 시절이렜재요. 남은 사람들한테 고마우이데이, 잘 계시이세이, 인사 한마디도 모하고 길을 떴니더.
다래나들 건네가 예안장터로 나가는 길이 물에 장개뿌렜으이 안도오로 갈라먼 삥삥 돌아가는 수밲에 없었니더. 개넘이재부터 큰 재를 세 버이나 넘는 임도오로 가는 길은 꺼칠었니더. 구룡 배대기꺼짐 기침없이 잘 갔는데, 압시골인동 생전 첨 가보는 어느 잿대배기로 넘어가는 진흙길이 너무 질었니더. 차가 배미처름 요리조리 기올라가는데, 색시겉은 비가 점점 우악시러졌니더. 여자나 아아가 이카리를 잡으먼 뜰라꼬 뿔을 들이대는 부사리 처름 부랑시러졌니더. 눈물인동 빗물인동 앵두마 한 빗빠울이 차 유리를 뿌사불껕이 내리때렜재요. 니야까 길보다 쪼매 더 너른 길에서 운전수가 한도리를 급하게 돌레제키이 골째기로 내리조백일 껕은 차가 선불 맞은 호래이 소리를 냈니더.
가늘게 떨래는 손으로 내 팔을 꼭 뿥잡고 가는 어메가 얼매나 안댔든동요. 어메 눈망울이 논싯골 논둑 우에 오도카이 서있는 노루 눈 겉앴어요. 현애형님으 조부인 구현할배는 고향 떠나든 날, 부포 마을 산모티이를 돌아설 때 눈물을 지으셌다 캐요. 청량산 장인봉 겉은 선비 어르이 다리이가 보는 데서 우시다이요. 건설부장관은 보상금 멫 푼을 조놓고 으당 도리를 다했다꼬 생각했으 께래요. 고향 따을 벗어나 보지 않은 어른들을 이레 낯선 따으로 몰아내면서도요. 단지 지고 당나구 탄 껕은 촌사람들으 객지 생활이 그날부터 시작댔니더.
임동 챗거리장터를 지내가 반변천을 따라가는 차에서 빗소리에 썪앤 노래가 흘러나왔니더. ‘봄날은 간다’도 나왔으께고 ‘신라의 달밤’도 나왔으께지만, 간들바람에 떠는 풍지 소리 겉은 남인수 어른으 그때 그 초성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니더.
♫울며 헤진 부산항을 돌아다보니
연락선 난간머리 흘러온 달빛
이별만은 어렵더라
이별만은 슬프더라
더구나 정들인 사람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