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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 王 朝 世 家
西周(서주) BC. 1046∼BC. 771 위치 화북 성 姬(희)
代數 | 在位其間 | 시호 | 諱 | 關係 | 首都 | 現地名 |
太王(태왕) | 亶(단) | 공숙서의 아들 | 鎬京(호경) | 山西省(산서성) | ||
季歷(계력) | 태왕의 3남 | |||||
文王(문왕) | 昌(창) | 계력의 아들 | ||||
제 1대 | BC. 1046∼BC. 1043 | 武王(무왕) | 發(발) | 문왕의 차남 | ||
제 2대 | BC. 1042∼BC. 1021 | 成王(성왕) | 誦(송) | 무왕의 태자 | ||
제 3대 | BC. 1021∼BC. 982 | 康王(강왕) | 釗(조) | 성왕의 아들 | ||
제 4대 | BC. 982∼BC. 963 | 昭王(소왕) | 瑕(하) | 강왕의 아들 | ||
제 5대 | BC. 963∼BC. 908 | 穆王(목왕) | 滿(만) | 소왕의 아들 | ||
제 6대 | BC. 908∼BC. 896 | 共王(공왕) | 繄扈(예호) | 목왕의 아들 | ||
제 7대 | BC. 896∼BC. 871 | 懿王(의왕) | 艱(간) | 공왕의 아들 | ||
제 8대 | BC. 871∼BC. 862 | 孝王(효왕) | 辟方(벽방) | 의왕의 동생 | ||
제 9대 | BC. 862∼BC. 854 | 夷王(이왕) | 燮(섭) | 의왕의 아들 | ||
제 10대 | BC. 854∼BC. 841 | 厲王(여왕) | 胡(호) | 이왕의 아들 | ||
임시 | BC. 841∼BC. 828 | 干王(간왕) | 和(화) | |||
제 11대 | BC. 828∼BC. 782 | 宣王(선왕) | 靜(정) | 여왕의 태자 | ||
제 12대 | BC. 782∼BC. 771 | 幽王(유왕) | 宮涅(궁열) | 선왕의 아들 |
주나라 시조 后稷(후직)의 이름은 원래 棄(기)의 옛 글자인 弃(기)다. 요 임금이 농업을 관장하는 農師 (농사)로 발탁했다. 이어 邰(태)에 봉하고 후직으로 칭했다. 희씨 성도 하사했다. 부친은 帝嚳(제곡)이고 모친은 有台氏(유태씨)의 딸로 姜原(강원)이라 했다.
후직의 계보라
제곡에 의어 后稷(후직). 不窋(부줄). 鞠(국). 公劉(공류). 慶節(경절). 皇僕(황복). 差弗(차불). 毁鍮(훼 유). 公非(공비). 高圄(고어). 亞圄(아어). 公叔鉏(공숙서). 古公亶父(고공단보). 季歷(계력). 文王 昌(문 왕 창)이어 武王 發(무왕 발)이다. 西伯 昌은 사후 周 文王으로 불리었다. 할아버지는 周 太王 亶父 (주 태왕 단보)이며, 아버지는 周王 季歷(주왕 계력)이고 모친은 太妊(태임)이다.
태왕 고공단보(BC. ?∼BC. ?)
태왕은 商(상)나라의 제후국인 周(주)의 제후이다. 성은 姬(희)이고, 이름은 亶父(단보)이다. 季歷(계력) 의 아버지이며, 훗날 西周 武王(서주 무왕)이 太王(태왕)으로 추숭했다. 추숭되기 이전에는 고공으로 정해졌고 사기에서는 그 고공과 이름인 단보를 합쳐서 고공단보라 정해졌다.
戎狄(융적)들 중 하나인 薰育(훈육)이 두 차례나 공격하자 豳(빈)을 떠나서 漆水(칠수)와 沮水(저수)를 건너고 梁山(양산)을 넘어 岐山(기산)아래에 정착했다.
고공단보에게는 장남인 太伯(태백)과 차남인 仲熊(중웅)이 있었다. 그의 아내 太姜(태강)이 낳은 막내 아들 季歷(계력)은 太任(태임)을 아내로 맞이 했는데 태강과 태임은 모두 어진 부인이었다. 태임이 昌 (창)을 낳을 때 성스러운 조짐이 있었다. 태백과 중웅은 아버지가 창을 세우려는 뜻을 알고 둘이서 荊 蠻(형만)으로 달아나서 문신을 하고 머리털을 짧게 자르고서 자리를 계력에게 양보했다. 마침내 고공 단보의 아들인 계력이 뒤를 이었다
문왕 창(BC. 1152∼1056. ?)
무왕의 아버지며, 고공단보의 손자다. 벼슬은 西伯(서백)이고 商(상)나라의 조공국이던 周(주)나라를 다 스렸다. 당시 주나라는 현 섬서성 기산현인 岐山(기산)에 있는 작은 나라였다. 이후 상나라의 폭군 주 왕이 문왕을 소환하여 가두어 두었는데 주나라에서 미녀와 보물을 바쳐 풀려나왔다. 이때 문왕은 주나 라 영지에서 가장 비옥한 낙서지역을 바치는 조건으로 포락지형을 폐해달라고 했다. 이후에는 주변 이 민족을 평정하고 태공망 姜尙(강상)을 등용하였다. 문왕은 많은 자식을 두었다.
장남 고(일명 백읍고. 일찍사망).
차남 발(주 무왕).
삼남 선(관숙선). 관나라에 봉해졌으나 상감의 난 이후 봉지를 박탈당했고 후손도 남기지 못했다.
사남 단(주공단. 노나라의 시조)
오남 도(채숙도. 채나라의 시조)
육남 진탁(조숙진탁. 조나라의 시조)
칠남 무 (성숙무. 성나라의 시조였으나 춘추시대에 제나라에 멸망해 후손을 알수없음)
*성숙무는 창녕 성씨의 시조. 열 둘째 아들 진탁은 창녕 조씨의 시조. 열 다섯째 아들 필공고는 거제 반씨의 시조)
팔남 처(곽숙처. 곽나라의 시조 상감의 난 이후 3년간 봉지를 박탈 당했다가 복귀함)
구남 봉((강숙봉. 위나라의 시조 주나라에서 사도직 수행)
십남 재(염계재. 염나라의 시조이나 후손은 알수 없다고 함)
서자
석(소공석. 연나라의 시조)
고(필공고. 주나라에서 태사를 지냈다. 필나라의 시조이나 필나라는 적인의 침공을 받아 멸망했다. 아들은 반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훗날 후손인 필만이 힘이 셌는데 진 헌공의 눈에 들어 그의 거우가 되었으며 그의 손자인 필주(위주)가 晉 文公(진 문공)을 따라 망명생활을 하여 즉위에 기여하고 성복 대전에서 공을 세워서 위 땅에 봉해져 위나라의 시조가 된다).
제 1대 무왕(BC. ?∼BC. 1043)
아버지는 문왕(서백 창)이고, 장남이 아니라 차남이다. 동복 형제로써 형 백읍고. 동생으로는 관숙선. 주 공단. 채숙도. 곽숙처. 강숙봉. 필공고 등이 있다. 목야대전으로 대표되는 2년간의 격전 끝에, BC. 1046 년, 상나라를 멸하고 주왕조를 성립한다. 이후 주공 단과 강태공을 비롯한 공신들을 포상하여 봉건제도를 실시한다.
무왕은 선대 성군을 기리기 위해 神農(신농)의 후손을 焦(초). 皇帝(황제)의 후손을 祝(축). 堯(요)의 후손 을 薊(계). 舜(순)의 후손을 陳(진). 禹(우)의 후손을 杞(기)에 봉했다. 또한 呂尙(여상)을 營丘(영구)에 도 읍한 齊(제)나라. 동생 周公 丹(주공 단)을 曲阜(곡부)에 도읍한 魯(노)나라. 召公 奭(소공 석)을 薊(계)에 도읍한 燕(연)나라에 봉했다. 또 동생 叔鮮(숙선)을 管(관). 동생 叔度(숙도)을 蔡(채)에 봉했다.
또한 무왕은 주왕의 아들인 무경에게 조가 현을 수도로 한 송나라를 봉읍으로 주었다.
제 2대 성왕(BC. ?∼BC. 1021)
무왕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즉위한 탓에 숙부 周 文公(주 문공. 주공 단) 섭정을 하여 정사를 보았다. 남동생은 唐叔虞(당숙우)로써 晉(진)의 시조다. 그 외의 동생들은 韓(한). 邘(우). 應(응) 세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한다. 주공 단은 제후들이 주 성왕이 어린 것을 얕보고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했다. 삼감의 난 을 진압하는데 전심전력을 다했고, 결국 무경과 관숙을 죽이고 채숙은 봉지를 옮겼다. 그리고 곽숙은 서 민으로 강등시켰다.
그 후에 성왕이 성년이 되자 주공은 정치의 대권을 다시 돌려주었다. 주 성왕은 酆(풍) 땅에 머물면서 洛 邑(낙읍. 하남성 낙양)을 경영해 무왕의 뜻을 이었다고 한다. 주공이 점을 친 뒤 九鼎(구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주성왕은 소공을 태보에 주공을 태사에 임명해 동쪽의 淮夷(회의)를 정벌하고 奄(엄)나라를 멸한 뒤 그 군주를 박고 땅으로 옮겼다고 한다.
다음의 나라는 주 성왕이 분봉한 제후국들이다.
宋(송)나라: 삼감의 난 이후 미자 계를 송나라의 공작으로 임명해 상나라의 제사를 잇도록 했다.
衛(위)나라: 상감의 난 평정 뒤 주공이 주 성왕의 막내 동생인 희봉에게 분봉해 세워진 나라이다. 희봉의 군주로서의 명칭은 위강숙이다.
魯(노)나라: 주공단이 자신이 받은 노나라를 다스릴 수 없어서 자신의 아들 백금에게 다스리게 하였다.
晉(진)나라: 주 성왕이 소꿉놀이를 하면서 자신의 아우인 당숙우에게 唐(당)나라 땅에 분봉했는데 그것은 장난이었으나 군주는 장난을 하면 안된다고 해서 세워진 나라이다. 그리고 진후 섭 때 봉지 가 진수 유역으로 옮겨져 晉(진)나라가 되었다
楚(초)나라: 그는 주 문왕의 스승인 육웅의 자손인 웅역을 단양 땅에 봉해 초나라가 세워졌다.
蔡(채)나라: 상감의 난 이후 채숙이 봉지를 옮긴 뒤 그 아들 희호가 채나라 후작이 되면서 경사로서 주나 라에서 일하게 되었다
聃(담): 담계재를 담나라에 봉하고 사공이 되어 주 성왕을 보좌했다.
⁂.父(부) 자는 아버지가 아니라 사람이나 접미사로 쓸 때는 부가 아닌 보라고 읽어야 한다.
제 3대 강왕(BC. 1040∼BC. 996)
성왕의 유언대로 소공 석과 필공 고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다. 이때가 바로 바로 주 강왕이 21세 때로 강왕 원년(BC. 1020년)이다. 그리고 호경을 수도로 확정지었다. 성왕과 강왕 사이에 東夷(동의)가 반란을 일으켰다. 강왕은 숙부 위 강백. 태보인 소공 석(연나라 시조)에게 명해 군대를 이끌고 여러 길에서 나눠 진격했다. 그 전투로 인해 동의의 사기가 꺾여 다시는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지 못할 지경이었다. 주 강왕 은 왕이 된지 25년 만인 BC. 996년에 죽었다.
제 4대 소왕(BC. 1027∼BC. 977)
소왕 원년(BC. 995년), 東夷族(동의족)이 모반하자 병사를 거느리고 정벌했다. 같은 해 소나라의 후작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 반란을 평정했다. 소왕 11년(BC. 985년), 소왕은 첫 번째로 초나라 정벌에 떠났으 나 병력만 잃었고 한수를 건너 큰 코뿔소만 보고온 것이 소득이었다. 소왕 14년(BC. 982년), 소왕은 제 공과 신나라 백작과 함께 초나라를 쳤으나 병력만 잃었다.
소왕 19년(BC. 977년), 소왕은 초나라를 정벌하다가 한수에서 빠져 죽었다.
제 5대 목왕(BC. 992∼BC. 922)
목왕은 소왕의 원정으로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인재 등용에 힘썼다. 백경을 太僕(태복)에 임명하고 冏命 (경명)을 반포해 어느 정도 국력을 회복하였다. 목왕이 犬戎(견융) 정벌에 나서려 하자 祭公 謨父(제경 모 보)가 간했다. 목왕 12년, 견융족 정벌에 나섰으나 소득이 없었다. 제후 가운데 따르지 않는 자들이 나타 나자 甫侯(보후)가 건의하여 형벌을 제정했다. 徐(서)나라의 偃王(언왕)이 반란하자 이를 정복하였다.
목왕 재위 55년에 죽고 아들 주 공왕 예호가 즉위했다.
제 6대 공왕(BC. ?∼BC. 900)
공왕 15년, 逕水(경수)로 놀러갈 때 密(밀)나라의 康公이 수행했다. 세 여인이 공왕에게 가자 강공은 분노 했다. 그것을 안 노모가 왕에게 바치라고 하자 듣지 않았고 결국 공왕이 밀나라를 쳐서 멸망하였다. 그가 죽고 아들인 간이 즉위하였다.
제 7대 의왕(BC. ?∼BC. 892)
이 시기에 현저하게 쇠퇴해 玁狁(험윤)의 공격을 가끔 받았다. 鎬(호)에서 견구로 도읍을 옮겼으며, 25년 동안 재위했다. 의왕 원년, 鄭(정. 섬서성 화현)에서 “하늘이 두 번 밝았다“는 일식 기록이 있다.
제 8대 효왕(BC. ?∼BC. 886)
의왕의 아우이며, 이왕의 삼촌이다.
제 9대 이왕(BC. ?∼BC. 878)
紀(기)나라의 煬侯(양후)의 모함을 듣고 齊(제) 애공을 죽이는 실정을 저질렀다. 견융족을 토벌해 1천 필 의 말을 얻는 등 선전했다.
제 10대 여왕(BC. 890∼BC. 828)
왕이 되자마자 간신배인 榮 夷公(영 이공)을 중용하여 폭정을 자행했다. 여왕 31년(BC. 841년), 국인들 이 그 횡포를 견디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여왕은 彘(체. 山西省 平陽 산서성 평양) 땅으로 달아나 버렸고, 태자(정. 훗날의 주선왕)는 소목공의 집으로 숨었다. 周 定公(주 정공)과 召 穆公(소 목공)이 나 라를 다스렸는데 이것을 共和(공화)시기라 한다. 여왕은 체 땅에서 죽었다.
제 11대 선왕(BC. 850∼BC. 782)
아버지 여왕이 BC. 828년에 죽자 周 定公(주 정공)과 召 穆公(소 목공)은 장성한 그를 왕으로 모셨다. 선왕은 신하들의 간언을 잘 들었으며,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정사에 힘썼다. 이때 선왕을 보좌한 이들은 소 목공. 尹吉甫(윤길보). 仲山甫(중산보). 休父(휴보). 곽문공. 신백. 한후. 顯父(현보). 仍叔(잉숙) 등이었 다. 그리하여 주나라 왕실의 위세가 중흥했다. 선왕 5년(BC. 824년), 서융이 강성해져 서부 국경을 침략 하자 秦仲(진중)을 대부로 임용해 서융을 토벌하게 했다. 선왕 7년(BC. 822년), 진중은 서융과 싸우다가 죽었다. 선왕 12년(BC. 817년), 노 무공이 장남 희괄 대신 작은 아들 姬劃(희획)을 데리고 주나라에 입 조하였다. 선왕은 그것을 보고 기뻐하며, 노 무공의 아들 희획을 노나라의 태자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 자 중산보가 전례에 없는 일이라고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같은 해 여름 노 무공이 선왕을 알현 했다가 돌아가는 길에 죽자 희획이 노후가 되니 그가 바로 노 의공이다. 선왕 22년(BC. 807년), 희괄의 아들 백어가 노나라의 국인들과 함께 노 의공을 죽였다. 이에 분노한 주 선왕 33년(BC. 796년), 노나라를 쳐 서 백어를 죽이고 중산보의 건의를 받아들여 노 의공의 아우를 노후로 올리니 그가 바로 노 효공이다. 이 일로 주 선왕은 제후들의 마음을 잃게 되었다. 선왕 45년(BC. 785년), 무고한 대부 두백을 죽였다. 그 이유는 예언에 나온 요망한 여자를 찿으라 했으나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해 죽였다. 결국 두백의 아들 隰叔(습숙)은 진나라로 달아나 范(범씨)씨의 조상이 되었다. 선왕은 재위 48년 째인 BC. 782년에 죽었 다.
임시 간왕(BC. ?∼BC. ?)
共伯(공백) 또는 干王 和(간왕 화)는 주나라 시대의 제후로 共(공. 허난성 신샹시)나라의 군주(백자)였다. 주나라의 공화시기에 집권했다고 전해주며, 간왕을 칭했다고 한다.
제 12대 유왕(BC. ?∼BC. 771)
유왕 원년(BC. 781년), 선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신후의 딸인 왕후 소생의 의구를 태자로 봉했다.
또한 숙부인 정 환공을 사도로 봉했다. 그리고 전국의 토지를 조사하게 했다. 주 유왕 3년(BC. 779년), 포사라는 절세 미녀를 얻어 伯服(백복)이라는 아들을 얻었다. 유왕은 포사를 총애한 나머지 申后(신후)와 태자 의구를 폐위한 뒤 포사를 왕후 백복을 태자로 세웠다. 포사는 잘 웃지 않았다. 주 유왕이 온갖 방 법으로 그녀를 웃게 만들여 했으나 허사였다. 주 유왕이 마침내 봉화와 큰 북을 만든 뒤 봉화를 올리게 했다. 제후들 모두가 달려왔지만 적은 없었다. 포사가 마침내 웃었다. 주 유왕이 기뻐하며 누차 봉화를 올렸다. 이런 일이 잦아지자 아무도 믿지 아니하고 . 제후들은 더욱 오지 않았다. 주 유왕이 虢石父(괵 석보)를 왕실의 경으로 삼아 정사를 맡겼다. 괵석보는 위인이 간사하고 아첨을 잘하며 이익을 탐했다.
신후가 폐해지고 태자가 궁에서 쫓겨나자 태자의 외조부며 申后(신후)의 아버지인 申侯(신후)가 대로해 견융과 합세해 주 유왕을 쳤다. 유왕이 봉화를 올려 군사를 소집했으나 아무도 오질 않았다, 신후가 마 침내 주 유왕과 백복을 여산 아래서 죽인 뒤 포사를 생포하였다. 그리고 태자 의구를 옹립했다.
수도의 변천사
公劉(공류)는 豳(빈. 山西 또는 陝西省 산서 또는 섬서성)에 정착했다.
고공단보 때 岐山(기산)으로 천도하고 나라이름을 周(주)라고 했다.
주공은 河南省 洛陽(하남성 낙양)부근에 낙읍을 건설하여 成周(성주)라 했다.
무왕 때 山西省(산서성) 서안부근의 鎬(호)로 천도. 이를 宗周(종주)라 했다.
문왕 때 서안으로 천도. 서안은 주나라 당시에는 豊鎬(풍호)로 불렀음.( 풍호는 豊京(풍경)과 鎬京(호경) 을 합친 명칭이다)
사료 출처
司馬遷(사마촌)의 史記本己(사기본기)와 曾先之(증선지)의 十八史略(십팔사략), 그리고 馮夢龍(풍몽룡)의 東周列國志(동주열국지)와 사마광의 資治通鑑(자치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