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별거 없더라, 황진이 지족선사 vs 홍련 태전선사, 법구경 7-8 마하깔라 장로이야기
암자를 불지른 노파
파자소암(婆子燒庵)이야기가 있다. 선가에서 ‘화두(話頭)’로도 사용 된다는 파자소암은 암자를 불 태운 노파의 이야기이다.
암자에서 수년 째 용맹정진하고 있는 스님에 대하여, 이를 시험하고자 노파는 자신의 딸을 암자로 보낸다. 감각접촉을 하게 함으로써 그 동안 억눌려 있었던 ‘오관’을 폭발하게 하여, 공부가 얼마나 진척 되었는지 알아 보자는 의도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노파의 딸을 마치 고목나무 보듯이 한다. 온기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나무토막으로 본 것이다. 이 소식을 듣자 노파는 “헛공부 했다”며 실망하고, 더 이상 공양하지 않고 암자를 불살라 버리기에 이른다.
수행자가 제대로 수행을 했음에도 불구 하고 노파가 암자를 불질러 버렸다는 이야기는 한국불교에서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라 한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노파의 행위에 대하여 정당성을 부여 할 뿐만 아니라, 이를 합리화 하고 있다고 비판 하기도 한다. 그런데 ‘황진이와 지족(知足)선사’의 이야기를 보면 그 합리화가 도를 넘는다.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
16세기 조선시대에 지족선사라 하면 십 년간을 오로지 수도에만 전념하여 송도에서는 ‘생불(生佛)’이라 일컬어질 만큼 유명한 고승이었다. 이 지족 선사가 바로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 십년 공부가 하루 밤 사이에 수포로 돌아 간다는 이야기이다.
이를 두고 나온 속담이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이다. 이에 대하여 어느 스님은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대체적으로 당시 식자들이 모두 관념론에 빠져 허우적 댔던 것처럼 불교의 학자들도 대개는 관념론적 유희로만 흐르고 있던 때에 지족 선사는 황진이로부터 현실적 인생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월간불광 200년 5월, 동봉)
지족선사가 출세간의 도는 배웠으나 세간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황진이를 통하여 세간의 도를 알게 되었는데, 지족선사의 입을 빌어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황진이를 통하여 세간의 허상을 분명히 알았다. 부처님께서 인생의 복잡성을 말씀하신 의도를 관념론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안 것이다. 황진이는 나의 위대한 스승이다. 부처님께서 인간의 실상을 이론적으로 가르쳐준 스승이었다면, 그녀는 나에게 실제적으로 인간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준 스승이었다.”
세간의 허상을 알게 해준 황진이야말로 지족선사에게 있어서 진정한 스승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족선사에게 생불이라는 ‘딱지’를 떼어준 황진이야말로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다고 표현한다.
이 글은 일반인도 아니고 스님이 쓴 글이다. 글을 보면 지족선사라는 파계승의 행위에 대하여 정당성을 부여하고, 또한 황진이를 큰 깨달음을 이끈 보살로서 합리화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파자소암이나 황진이와 지족선사이야기 모두 계를 가벼이 볼 뿐만 아니라 정당화 내지 합리화 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도 그럴까.
태전선사와 홍련의 이야기
테라와다불교 국가에서 교학의 나라는 스리랑카, 수행의 나라는 미얀마, 계율의 나라는 태국이라 한다. 이와 비교하여 동아시아의 경우, 교학의 나라는 일본, 수행의 나라는 한국, 계율의 나라는 중국이라는 말이 있다.
계율의 나라 중국에서 황진이와 지족선사의 이야기와 매우 유사한 이야기가전해져 온다. 그런데 결말은 다르다.
여허공님이 다음블로그에서 연재 하고 있는 반야심경 강의 중에 ‘태전선사와홍련의 이야기(http://blog.daum.net/hekong/16059206)’가 있는데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
꼬시는데 무슨 100일씩이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술과 문장으로 세월을 보내던 한유(韓愈, 韓退之, 768~824)는 조주에 훌륭한 태전선사(太顚禪師, 732~824)라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스님을 타락시켜 불교가 하찮은 것임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래서 가장 젊고 이쁜 홍련(紅蓮)이라는 기생에게 “백일의 기한을 줄 것이니, 태전선사라는 중을 파계(破戒) 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목을 칠 것이니라” 라고 말했다.
홍련이 생각 하기를“그까짓 중하나 꼬시는데 무슨 100일씩이나 걸리나” 라고 우습게 여기며, 예쁘게 단장하고 태전선사가 계시는 축륭봉으로 올라갔다.
홍련은 태전선사에게 100일 기도를 드리러 왔다고 말씀 드리고 유혹하려 했지만, 100일이 다 되도록 어떻게 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녀는 태전선사의 수행에 감화 되었다.
마지막 날이 되자 겁이 난 홍련은 태전선사에게 예절을 갖추어 삼배를 드렸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사실은 제가 이곳의 자사인 한유의 명으로 큰스님을 타락시키고자 왔는데, 오늘까지 타락시키지 못하면 저를 죽이겠다 하였습니다. 큰스님, 제가 어찌하면 좋겠나이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태전선사는 홍련에게 하얀 속치마를 내어 펼치라 하고는 게송을 써 주며, “이곳 자사가 문장이 뛰어나다고 하니, 이 글을 보여주면 너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치마를 펼쳐 보이니
홍련은 감사한 마음으로 예를 올려 작별하고 조주자사인 한유에게로 가서 태전선사의 게송이 적힌 치마를 펼쳐 보이니, 한유는 한 번 읽고는 감탄하하였다.
그러면서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 이름이 헛되이 전해지지 않음)이구나. 내 친히 가서 만나봐야 되겠다.”하고 생각 하였다.
十年不下鷲融峰 십년 동안 축융봉을 내려가지 않고 (십년불하축융봉) 觀色觀空卽色空 색을 관하고 공을 관하니, 색이고 공일 뿐이었네. (관색관공즉색공)
如何曹溪一適水 어찌 조계의 한 방울 물을 (여하조계일적수) 肯墮紅蓮一葉中 홍련의 한 잎새에 떨어 뜨리겠는가. (긍타홍련일엽중)
한유가 태전선사에게 가니, 선사가 묻기를 “어떠한 불교경전을 읽어보았습니까?” “뭐 특별히 읽어 본 경전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자, 태전선사는 “문장(학문)으로 이름 높은 자사께서 어찌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불교를 비난하셨습니까?”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한유는 자신의 잘못됨을 뉘우치고 태전선사에게 귀의하여, 독실한 불교신자가 되어서 불교에 관한 문장도 많이 썼다고 전한다.
뭐 별거 없더라
그렇다면 위의 게송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구절은 十年不下鷲融峰(십년불하축융봉)이다. 태전선사가 머무르 던 곳이 축륭봉인데, 십년 동안 산을 내려오지 않고, 수행만 하였다라는 내용이다.
두 번째 구절은 觀色觀空卽色空(관색관공즉색공)이다. 오온(색수상행식)에서 물질(몸뚱이)인 색(色)을 관조(觀照, 관찰)해 보니, 인연(조건)에 따라 뭉쳤다 흩어지는 것일 뿐, 독립되거나 영원히 불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었더라는 것이다. 즉, 공(空)이더라는 말이다.
그래서 다시 공(空)을 관조해 보니, 본래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었던 것이 대상(조건)을 만나자 또 뭔가가 생기더라는 것이다. 즉, 색(色)이 생기더라는 말이다. 그래서 변화무쌍한 색과 공에 집착을 하지 않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니, 색은 색(色)이고 공은 공(空)이더라는 것이다.
세 번째 구절은 如何曹溪一適水(여하조계일적수)이다. 조계(曹溪)는 육조혜능대사가 조계산에서 오랫동안 오래 법을 펴시며 머물렀기 때문에 선종(禪宗)의 정법을 상징하고, 또 조계는 계곡이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심산유곡의 맑고 맑은 청정한 한 방울의 물로서 남자의 정액(精液)을 비유한 것이다.
마지막 구절은 肯墮紅蓮一葉中(긍타홍련일엽중)이다. 홍련이라는 기생의 이름에 ‘붉을 홍(紅)’자 있는데, 예로부터 붉은 색은 음탕하고 청정하지 못한 것으로서, 기녀들이 모여 살며 술을 팔고 웃음을 파는 홍등가(紅燈街)를 의미 한다. 또 붉은 먼지라는 표현의 홍진(紅塵)은 번뇌가 많고 지저분한 세속을 말한다.
그래서 십 년을 꼼짝 않고 수행하여, 색(色)을 관하고 공(空)을 관해보니, 색은 색이고 공은 공이더라는 것이다. 뭐 별거 없더라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선종의 정법을 닦아서 세속의 집착이 없는 내가 “어찌 색(色)과 공(空)을 ‘분별’하고 ‘집착’하여 청정한 법신(法身) 더럽히겠는가”라는 내용이다.
수행자를 내버려 두지 않는
예쁜 꽃을 보면 꺽고 싶어 한다. 그 꽃을 꺽어서 꽃병에 담아 자기 혼자만 보고자 함이다. 또 매력만점의 이성을 보면 소유하고픈 욕망이 발동한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종교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스님, 신부, 목사등 유명종교인들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신자들은 이들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들을 존경하기 때문에 만나 뵙고자 한다.
종교인들을 시험에 들게 하는 전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늘 있는 일이다. 그 중에 출가수행자가 가장 큰 타겟일 것이다. 특히 수행경력이 많아 도력이 높은 청정한 수행자가 가장 큰 대상이다. 이들을 시험하기 위하여 여인을 보내는데, 넘어가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똑 같이 10년을 공부를 한 지족선사와 태전선사, 똑 같이 100일 기도를 올리려 간 황진이와 홍련의 이야기에서, 황진이는 100일 안에 지족선사를 파계 하는데 성공 하지만, 홍련은 100일이 지나도록 성공 하지 못하고 오히려 태전선사로부터 감화를 받는다. 그 차이점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법구경의 7번 게송과 8번 게송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재생(再生)의 원인이 되는
법구경의 7번과 8번 게송은 마하깔라(Mahakala) 형제의 이야기이다. 형인 마하깔라는 전처들이 ‘노랑가사’를 벗기려는 유혹에 넘어 가지 않았지만, 동생인 쭐라깔라(Culakala)는 전처들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 노랑가사를 벗었다.
이들 형제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물론 형인 마하깔라가 이미 ‘아라한’과를 증득한 상태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게송에서 말하는 핵심 키워드는 ‘마음집중’여부이다. 즉, 알아차림이다. 알아차림이 계속 유지 되는 한 계(戒)는 자동적으로 지켜 질 것이기 때문이다.
알아차림이 없다면, 마음이 감각적 쾌락을 추구 하며 눈, 귀, 코, 혀, 몸과 같은 오관을 잘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마라의 유혹에 쉽게 넘어 갈 것이다.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 10년공부가 ‘도로아미타불’이 된 지족선가가 이에 해당된다. 이를 두고 법구경 게송7번에서, 뿌리가 약한 나무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쉽게 쓰러지는 이치와 같다고 설명 하고 있다.
그러나 알아차림이 유지 된다면, 오관을 잘 다스릴 수 있어서 마라도 어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홍련의 유혹에도 불구 하고 오히려 그녀를 감화 시키는 태전선사가 이에 해당 될 것이다. 이를 두고 법구경 게송8번에서, 큰 바위산은 어떤 폭풍이 몰아 닥쳐도 흔들림이 없다고 설명 하고 있다.
파자소암이야기의 스님이나 태전선사의 경우, 법구경의 인연담을 참고 한다면 이미 ‘아라한’이라 볼 수 있다. 나(我)가 있다는 유신견(有身見)을 비롯하여 탐진치가 소멸 되었으므로, 재생(再生)의 원인이 되는 업(業)지을 일을 일체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 법구경 빠알리어
1-7 Subh?nupassi? viharanta?, 수바아누빳싱 위하란땅 indriyesu asa?vuta? 인드리예수 아상유땅 Bhojanamhi c?matta??u?, 보자남히 짜아맛딴늉 kus?ta? h?nav?riya? 꾸시이땅 히이나위이리양 Ta? ve pasahati m?ro, 땅 웨 빠사하띠 마아로 v?to rukkha? ’va dubbala?. 와아또 룩캉 와 둡발랑
1-8 Asubh?nupassi? viharanta?, 아수바아누빳싱 위하란땅 indriyesu susa?vuta? 인드리예수 수상유땅 Bhojanamhi ca matta??u?, 보자남히 짜 맛딴늉 saddha? ?raddhav?riya? 삿당 아아랏다위이리양 Ta? ve nappasahati m?ro, 땀 웨 나빳사하띠 마아로 v?to sela? ’va pabbata?. 와아또 세랑 와 빱바땅
빠알리 챈팅 법구경 7번과 8번 게송. 스리랑카의 라뜨나야까(V.S. Ratnayaka)음성
2. 우리말
1) 거해스님
1-7 오관을 잘 다스려지지 않아 바쁘며 음식의 때와 양을 모르고 게을러 노력이 없는 수행자를 마라는 쉽게 쓰러뜨린다. 마치 뿌리 약한 나무를 바람이 쓰러뜨리듯이.
1-8 몸이 더럽고 허무하다는 진실에 마음을 집중하여 오관을 잘 다스리고 음식을 절제하며 신심이 충만하여 밤낮으로 정진하는 수행자는 마라도 감히 어찌하지 못한다. 마치 폭풍이 큰 바위를 흔들지 못하듯이
2) 석지현스님
1-7 오직 쾌락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 감각을 절제하지 않는 사람. 음식을 무절제하게 먹는 사람. 게으르고 무기력한 저 사람은 결국 마라(악마)에게 정복당하고 만다. 연약한 나뭇가지가 바람에 꺽이듯…
1-8 쾌락만을 위하여 살지 않는 사람. 감각을 잘 절제하고 음식에 대한 탐이 없는 사람. 신념이 강하고 활기찬 저 사람을 마라는 결코 정복할 수 없다. 저 바위산이 아무리 센바람에도 움직이지 않듯...
3. 영문
1) Acharya Buddharakkhita
1-7 Just as a storm throws down a weak tree, so does Mara overpower the man who lives for the pursuit of pleasures, who is uncontrolled in his senses, immoderate in eating, indolent, and dissipated.
1-8 Just as a storm cannot prevail against a rocky mountain, so Mara can never overpower the man who lives meditating on the impurities, who is controlled in his senses, moderate in eating, and filled with faith and earnest effort.
2) Thanissaro Bhikkhu
1-7 One who stays focused on the beautiful, is unrestrained with the senses, knowing no moderation in food, apathetic, unenergetic: Mara overcomes him as the wind, a weak tree.
1-8 One who stays focused on the foul, is restrained with regard to the senses, knowing moderation in food, full of conviction & energy: Mara does not overcome him as the wind, a mountain of rock.
5. 한문(法增比丘)
1-7 若人逐欲樂(不淨以?淨), 不攝護根門,?食不節量, 懈怠不精進, 必?魔(mara陰魔,業行魔,死魔,煩惱魔,天魔,這裡指煩惱)所制, 如風倒弱樹。
1-8 若觀身不淨(三十二身分觀,墓墟觀), 攝護諸根門, ?食知節量, 正信(對三寶的信心)勤精進, 魔不能??, 如風難搖石。
6. 일문(西津紘一)
1-7
1-8
7. 인연담
1) 영어 (Daw Mya Tin)
The Story of Thera Mahakala
While residing in the neighbourhood of the town of
Mahakala was serious in his ascetic practice at the cemetery (Sosanika dhutinga) and diligently meditated on decay and impermanence. He finally gained Insight and attained arahatship.
Later, the Buddha and his disciples, including the brothers, happened to be staying in the
The next day, the wives of Mahakala invited the Buddha and his disciples to their house hoping to do the same with Mahakala as the wives of Culakala had done to Culakala. After the meal they requested the Buddha to let Mahakala remain to "express appreciation" (anumodana). So the Buddha and the other disciples left.
Arriving at the village gate the bhikkhus expressed their dissatisfaction and apprehension. They were dissatisfied because Mahakala was permitted to stay behind and they were afraid that, like Culakala, his brother, Mahakala, too, would be made to leave the Order by his former wives. To this, the Buddha replied that the two brothers were not alike. Culakala indulged in sensual pleasures and was lazy and weak; he was just like a weak tree. Mahakala, on the other hand, was diligent, steadfast and strong in his faith of the Buddha, the Dhamma and the Samgha; he was like a mountain of rock.
Then the Buddha spoke in verse as follows:
Verse 7:
He who keeps his mind on pleasant objects, who is uncontrolled in his senses, immoderate in his food, and is lazy and lacking in energy, will certainly be overwhelmed by Mara, just as stormy winds uproot a weak tree.
Verse 8:
He who keeps his mind on the impurities (of the body), who is well-controlled in his senses and is full of faith and energy, will certainly be not overwhelmed by Mara, just as stormy winds cannot shake a mountain of rock.
Meanwhile, the former wives of Mahakala surrounded him and tried to remove his yellow robes. The thera, sensing their attitude, stood up and rising up into the air by his supernormal powers passed through the roof of the house into the sky. He landed at the feet of the Buddha at the very moment the master was coming to the end of his utterance of the above two stanzas. At the same time, all the bhikkhus assembled there were established in Sotapatti Fruition.
2)우리말(진흙속의연꽃)
마하깔라 장로 이야기
부처님이 세따브와 마을에서 가까운 곳에 계셨을 때, 마하깔라(Mahakala)와 그의 동생 쭐라깔라(Culakala) 마하깔라와 관련된 게송 7번과 8번을 읊으시었다.
마하깔라 형제가 교단에 들어 오기 전에 그들은 세따브와 마을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하였는데, 어느 날 부처님의 설법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설법이 끝나자 마하깔라는 비구가 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처님에게 간청 하였다. 동생 쭐라깔라도 형의 권유로 비구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다시 형을 세속으로 되돌아 오게 할 목적으로 출가 하였다.
마하깔라는 공동묘지에서 금욕적인 수행(Sosanika dhutinga) 을 하였고, 무상과 고와 무아를 알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서 아라한이 되었다.
후에 부처님과 그의 동생을 포함한 부처님의 제자들은 세따브야의 근처에 있는 심사빠에 머무르게 되었다. 거기서 머무는 동안 쭐라깔라의 전처들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을 초청 하였다.
쭐라깔라는 부처님과 부처님이 앉을 좌석을 준비 하기 위하여 먼저 출발 하였다. 거기에 있게 되자 그의 전처들은 그를 속인의 옷으로 갈아 입게 만들었다.
다음 날 마하깔라의 아내들은 쭐라깔라의 아내들이 했던 것처럼 기대 하면서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을 초청 하였다. 식사 후에 그들은 부처님에게 감사의 표시로서 마하깔라를 남게 해달라고 요청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은 그를 남겨 놓고 떠나 갔다.
마을 입구에 도착하였을 때 비구들은 자신들의 불만과 염려를 표출 하였다. 마하깔라를 아내들의 집에 머물게 함으로서, 그의 동생 쭐라깔라의 아내들이 그랬던 것처럼 계가 깨질 것을 염려 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두 형제는 서로 같지 않음을 말씀 하시었다.
쭐라깔라는 감각적욕망의 빠져 있기 때문에 게으르고 약한 심성의 소유자로서, 마치 뿌리가 약한 나무와 같다고 말씀 하시었고, 반면에 마하깔라는 근면하고, 확고부동하고, 부처님과 담마와 상가에 대한 강한 믿을 가지고 있어서, 마치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큰 바위산과 같다고 표현 하시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으시었다.
그의 마음이 쾌락의 대상을 추구하고 오관은 잘 다스려지지 않아 바쁘며 음식의 때와 양을 모르고 게을러 노력이 없는 수행자를 마라는 쉽게 쓰러뜨린다. 마치 뿌리 약한 나무를 바람이 쓰러뜨리듯이.
몸이 더럽고 허무하다는 진실에 마음을 집중하여 오관을 잘 다스리고 음식을 절제하며 신심이 충만하여 밤낮으로 정진하는 수행자는 마라도 감히 어찌하지 못한다. 마치 폭풍이 큰 바위를 흔들지 못하듯이.
그러는 동안 마하깔라의 전아내들은 그를 둘러싸고 그의 노랑 가사를 벗기려 하였다. 장로는 그들의 태도를 눈치채고 일어나, 그의 신통력으로 공중으로 날아 갔다.
그가 부처님의 발아래로 되돌아 오는 순간, 부처님은 두번째 게송을 막 끝마칠 때 이었다. 동시에 거기에 모였던 모든 비구들은 수다원과를 얻었다.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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