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제 2대 교구장(第二代敎區長) 앵베르(Imbert) 주교의 활동(活動)
제 2의 갑사(Capsa) 주교(主敎)인 앵베르(Imbert) 주교
① 로랑 ․ 마리 ․ 앵베르(Imbert)(그의 한국명(韓國名)은 범세형(范世亨), 본명은 라우렌시 오(구식은 로렌조)) 는 액스(Aix)에서 2,30리 떨어진 까브리애(Cabries) 읍에 속하 는 깔라(Calas)라는 조그마한 촌락(村落)의 라보리(Labori)의 소유지에서, 1797 년 4월 15일에 태어났다.
아버지 루이 ․ 앵베르(Imbert)와 어머니 스잔 ․ 플로뺑(Flopin)은 매우 가난하 여, 아들에게 아무런 교육(敎育)도 시킬 수가 없었다. 8세 때 어느 날 길에서 1 전을 주운 라우렌시오는, 이내 초보독본(初步讀本)을 살 생각을 하였다. 그는 아 버지에게 이 책을 사다 달래서, 그 조그마한 책을 들고, 이웃에 사는 착한 할머 니를 찾아가, 글자 이름을 가르쳐달라고 하였다.
그 훌륭한 부인(婦人)은 서둘러 그의 청을 들어주었고, 소년은 귀를 기울여 듣 고 반복하여, 배운 것을 다시 익히고, 자주 선생을 찾아가고 하여, 오래지 않아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다음 진보(進步)하는 데 따라 그의 야심(野心) 이 커져, 숯덩이를 가지고 그의 책에 있는 글자들을 벽에 베꼈다.
사례금(謝禮金)이라고는 고맙다는 인사밖에는 제자(弟子)에게서 받지 못하던, 마음씨 착한 여선생은 그의 이런 열심을 보고 감동(感動)하여, 펜과 필기체 글자 를 쓴 공책 한 권을 그에게 선사했다. 이렇게 해서 라우렌시오는 읽고 쓰는 것 을 배웠다.
② 까브리애(Cabries)의 본당 주임신부(主任神父)는 이 어린이의 훌륭한 소질(素質) 에 마음이 끌려, 그의 아버지에게 청하여, 그를 신부 댁(神父宅)에 두고자 했다.
아르망(Armand) 신부는 소년에게 불어문법(佛語文法)의 처음 과정(課程)을 가르 쳐 주고, 얼마동안 시험한 뒤에 어떤 학교(學校)에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일이 수월하지는 않았다. 때는1808년 이었는데, 소년들이 그리스도교 교육(敎育)을 위한 교육기관(敎育機關)의 수가 적고, 자원(資源)도 부족하였다. 라우렌시오는 가난하여 소신학교(小神學校)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라우렌시오에게는 다행한 일로, 액스(Aix) 시에서는 그리스도교 은수(隱修)의 수사(修士)라고 불리우는 수도자(修道者)가 몇 명 있었는데, 이들은 입헌의회(立 憲議會)가 모든 수도회(修道會)의 철폐(撤廢)를 의결한 바로 그시기에, 기도(祈 禱)와 남에게 봉사(奉仕)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 수사(修士)들이 귀양살 이에서 15년간 참다운 수련생활(修練生活)을 한 뒤에, 프랑스로 돌아온 길이 었는데, 액스(Aix)의 드 ․ 씨쎄(De Cice) 대주교(大主敎)는, 성(聖) 요아킴을 주 보(主保)로 모신 집을 하나 주어, 청소년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라우렌시오는 성 (聖) 요아킴 기숙학교(寄宿學校)에 무료로 입학(入學)이 허가되었다. 그는 단지 옷과 일용품(日用品) 값만 내면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린 학생의 아버지 는 이 약소한 비용(費用)마저도 낼만한 처지(處地)도 되지 못했다. 까브리애(Ca bries) 주임신부(主任神父)가 처음에는 그를 도와줄 수밖에 없었으나, 그도 오랫 동안 이 부담(負擔)을 감당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③ 기쁨과 감사(感謝)의 정을 가슴 가득히 안은 라우렌시오는, 믿을 수 없을 만한 활동력(活動力)으로 모든 의무(義務)에 전심하였다.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기도 (祈禱)하고, 공부하고, 일하였다. 그의 동창(同窓)들은 그가 한 번이라도 노는 것 을 봄 기억(記憶)이 없었다.
학교의 수사(修士)들이 묵주(黙珠)를 만들기 위해 철사를 꼬는 것을 보고, 그 도 수사들과 같이 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그는 묵주(黙珠)만드는 법을 배웠고, 그때부터는 쉴 사이 없이 이 일을 열심히 했었다. 쉬는 시간이나 자유로운 시간 에도 문법(文法)과 고전작품(古典作品)들을 익히든지 했고, 학교에 가거나 집에 돌아 올 때에도, 그는 언제나 철사를 팔에 감고, 집게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이 묵주(黙珠)들을 팔아 얻은 돈으로 책과 공책과 옷값을 내고 여유를 만들 줄 알았으므로, 나머지는 이미 연세가 높아 거의 일을 하지 못하게 된 아버지에게 보냈다.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열심(熱心)을 배가(倍加)하여, 기술(技術)을 완 성하였고, 리옹(Lyon)에서 은실과 예쁜 메달을 주문해다가, 값진 묵주(黙珠)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만든 묵주를 보깨르(Beaucaire) 시장(市場)에까지
보냈고, 이리하여 월 15 프랑이라는 자그마한 고정수입(固定收入)을 아버지에게 확보(確保)해 드리는 방법(方法)을 발견하였다.
손으로 하는 이 일도, 앵베르(Imbert) 소년이 착실하게 공부를 하고 있는 신 심행위(信心行爲)에 충실히 하는 것을 방해(妨害)하지는 않았다. 고전학급(古典 學級)을 마친 후 그는 문학부문(文學部門)의 대학 입학자격(入學資格)을 얻었고,
신학(神學)을 공부하기 위하여, 액스(Aix)의 대신학교(大神學校)에 들어갔다. 그 는 마음속에 이미 미신자(未信者)들에게 신앙(信仰)을 전파(傳播)하러 갈 결심을 굳게 하였었고, 포교지방(布敎地方) 생각이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게 되었다.
포교활동(布敎活動)에서 오는 피로(疲勞)에 대비해서 몸을 단단하게 하기 위하 여, 여러 가지 고난(苦難)을 스스로 취하고, 추위와 더위를 무릅쓰며, 끊임없는 극기(克己)중에 살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묵주 만드는 일을 계속하였다. 왜냐하 면 이것이야 말로 자기에게 필요한 비용(費用)을 장만하고, 늙은 아버지를 도와 드리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신학(神學)공부를 끝냈을 때에도, 라우렌시오는 아직 부제품(副祭品)을 받는
데 요구되는 나이가 차지 못했었다. 그는 지보로(Givors)의 어떤 부유하고 점잖 은 가정(家庭)에 초빙(招聘)되어 가서, 그 집 어린이들의 가정교사(家庭敎師) 노 릇을 하게 되었다.
거기에서도 신학교(神學校)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받았고, 대단히 귀한 추 억(追憶)을 남겨놓은 모양이어서, 일생동안 그의 옛날 제자(弟子)들이 그와 편지 왕래(便紙往來)를 계속하였다.
④ 그러나 포교지방(布敎地方) 생각이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성소 (聖召)라고 부르는 신비롭고 힘 있는 목소리가 그의 마음속에서 점점 더 분명(分 明)하게 들려왔고, 얼마 후에 앵베르(Imbert) 청년(靑年)은 지보를 떠나 몽뗄리 마르(Montelimar) 근처에 있는 애그벨(Aiguebelle)의 트랍피스트 수도원(修道 院)에 가서 피정(避靜)을 하였다.
그는 침묵(沈黙)과 기도(祈禱) 중에, 그리고 자기의 마음속을 전부 털어 보인, 성덕(聖德)있는 원장(院長)과의 오랜 협의(協議) 중에, 천주의 성의(聖意)를 물었 다. 이 존경할만한 지도자(指導者)는 젊은 성직자(聖職者)의 열렬한 소원(所願)에 서, 천주의 부르심을 알아보고, 자신이 직접 그를 외방전교회 신학교(外邦傳敎會 神學校)로 보냈다. 앵베르(Imbert)씨는 1818년 10월 8일에 그곳에 도착했는데, 그의 나이가 아직 22세가 되지 못했었다.
그는1819년 3월 27일에 차부제품(次副祭品)을 받고, 연령제한(年齡制限)에 대 한 특별 인가를 얻어(만 24세가 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교황청의 허가가 필요했다), 그 해도 저문 12월 18일에 성품(聖品)을 받았다. 사천포교지(四川布敎地)에 임명(任 命)되어 파리를 떠난 것이 1820년 3월 20일, 5월 1일에는 보르도(Bordeaux)항 을 출범(出帆)하였다.
여러 가지 사정(事情)으로 그의 여행(旅行)은 굉장히 오랜 시일이 걸렸다. 처 음에는 레위니옹(Reunion) 섬에서, 다음에는 벵갈(Bengale)에서 수개월간을 머 물러 있어야 했기 때문에, 1821년 3월 19일 에야 겨우 뿔로 ․ 삐낭(Poulo- Pinang)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 신학교(神學校)의 교수 무똥(Mouton) 신부가 세상을 떠난 직후라, 새로 온 선교사(宣敎師)는 그를 대신해서 몇 달 동안 라틴 어와 신학(神學)을 가르쳐야 했다.
그해 12월 2일에 영국 배를 타고 마카오를 향해 출발하였는데, 1822년 2월 10일에야 그곳에 도착했다. 그때 중국을 건너질러 사천(四川)으로 가는 도로(道 路)는 완전히 막혀있었으므로, 앵베르(Imbert) 신부는 며칠 동안을 쉰 다음, 코 친차이나로 배를 타고 가서 5,6개월 그곳에 머물렀다. 거기에서 통킹으로 건너 갔는데, 거기에서 2년 이상이나 머물러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동안 지칠 줄 모르는 열성(熱性)으로 신자들을 돌보며, 중국의 운남성(雲南 省)을 통해 자기가 임명(任命)된 포교지(布敎地)로 들어갈 방법을 늘 찾고 있었 다. 마침내 천주의 도우심으로 그 방법(方法)을 찾아내는데 성공(成功)하여, 1825년 3월에, 당시 사천의 보좌주교(補佐主敎)이던 뻬로쇼(Perrocheau) 주교 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그를 기다린 지 5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앵베르(Imbert) 신부는 12년 이상을 이 포교지(布敎地)에 머물렀다. 그 넓은 여러 지방(地方)의 일을 규칙적(規則的)으로 돌아보기 위한 그의 수고, 병과 박 해(迫害)중에 보여준 그의 인내(忍耐), 티벹 국경지대(國境地帶)의 모삥(Mo- ping)에 신학교(神學校)를 세우는 데 나타낸 그의 경험(經驗)있는 열정(熱情), 그 가 끊임없이 남겨 준 성덕(聖德)과 열심(熱心)의 아름다운 모범(模範)같은 것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이야기하지 않겠다. 교훈(敎訓)이 되는 이 모든 점은 오히려 중국교회사(中國敎會史)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는 즉시 조선교구장(朝鮮敎區長) 의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하자.
⑤ 포교성성(布敎聖省)이 조선포교지(朝鮮布敎地)를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에 맡기겠다고 한다는 내용(內容)을 가진, 외방전교회 신학교(外邦傳敎會神學校)의 편지를 사천(四川)에서 받았을 때, 앵베르(Imbert) 신부는, 그의 동료(同僚)들이 모두 그런 것처럼, 이 제안(提案)을 수락(受諾)하라고 강력히 호소(呼訴)하는 것 으로 만족(滿足)하지 않고, 만일 허락(許諾)만 한다면 자기가 직접 떠나겠다고 자원(自願)했다.
갑사(Capsa) 주교의 별세가 로마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곧 앵베르(Imbert) 신부를 그 후계자(後繼者)로 생각하게 되었다. 모방(Maubant) 신부와 샤스탕 (Chastan) 신부도 그들의 편지(便紙)에서 앵베르(Imbert) 신부를 지명(指名)했었 고, 그의 상사(上司)들도, 성덕(聖德)으로 보나 수완(手腕)으로 보나, 중국의 언어 (言語)와 풍속(風俗)을 오래 체험(體驗)한 것으로 보나, 그가 이 위험(危險)한 직 무(職務)를 맡기에 가장 적합(適合)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교황성하(敎皇聖下) 는 그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게 하였다(처음부터 조선교구장으로 추천된 것이 아 니고, 브뤼기에르(Bruguiere) 주교가 아직 생존해 있을 때, 그의 보좌주교(補佐主敎)로 추천되어 있었다. 브뤼기에르(Bruguiere) 주교가 조선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망함에 따 라, 앵베르(Imbert) 주교는 자연적으로 조선교구장직을 승계(承繼)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앵베르(Imbert) 주교가 떠나는 포교지(布敎地)의 교구장(敎區長)인 시니뜨(Sinite) 명의(名義)의 폰따나(Fontana) 주교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