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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글로 쓴 ‘늙음’에 대하여 : 정철승 변호사의 노인 비하 이후
“백 년을 내다보는 人生. 한 치 앞도 모르는 人生”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 ‘핀핀코로리’(팔팔하게 생활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고생 없이 죽는 것)란 없다!
⊙ 고령자가 쩌렁쩌렁 소리치는 것은 귀가 나빠서
⊙ “가장 탁월한 상상력을 가진 이들은 늙고 병든 자들”
⊙ 노인은 성장이 멈춘 존재가 아냐. 새로운 성장을 도모해야
사진=조선일보DB
안녕하세요. 《월간조선》 독자 여러분!
지난 9월 1일 정철승(51) 변호사가 원로 철학자 김형석(101) 교수에게 “이래서 오래 사는 것이 위험하다는 옛말이 생겨난 것”이라고 말해 냄비 같은 우리 사회를 흥분과 광기로 몰아넣었습니다. 노인 폄하 논란이 일었습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의 〈훈민가(訓民歌)〉 중 마지막 수에 나오는 ‘늙기도 서러운데’ 구절이 떠오릅니다.
정 변호사는 김 교수가 문재인 정권을 비난한 것이 불편했나 봅니다. 그는 ‘적정 수명’을 언급하며 이런 말도 했습니다.
‘고대 로마의 귀족 남성들은 자신이 더 이상 공동체에 보탬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되면 스스로 곡기를 끊어 생을 마쳤는데 그것을 존엄을 지키는 죽음, 즉 존엄사라고 불렀다. 그 나이가 대략 70대 중반이었다고 한다. 요즘 나는 80세 정도가 그런 한도선이 아닐까 생각하는데…(하략)’
그러자, 나이 여든이 넘는 4·19혁명 건국포장 수상 국가유공자 10여 명이 《조선일보》 9월 23일 자 신문에 큰 광고를 냈습니다. 배우신 분들처럼 점잖은 내용이었지만 읽고 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부분 인용해보겠습니다.
노인 폄하 논란을 일으킨 정철승 변호사의 페이스북 글과 4·19혁명 건국포장 수상 국가유공자들이 낸 신문 광고. |
〈4·19혁명에 참여하여 건국포장을 수상한 국가유공자들입니다. 그 당시 고교와 대학에 다녔기 때문에 이미 80을 넘겼습니다.
당신이 적정 수명이라고 지정한 꼭 그 나이여서 지금부터 곡기를 끊어 생을 마쳐야 하는지 묻고자 합니다. 정 변호사의 나이가 51세라고 하면 부모님이 생존해 계실 것 같은데 부모님께도 그렇게 말씀하실 겁니까?
‘고대 로마의 귀족 남성들은 공동체에 보탬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되면 스스로 곡기를 끊어 생을 마쳤다’는 말의 출전도 밝혀주십시오. 서양 사학의 권위자 몇 분에게 문의했더니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들어본 일이 없다는 답변만 받았습니다.(하략)〉
저녁기도 시간에 마주하는 ‘늙음’
정 변호사의 발언으로 화가 나고 속이 상했다는 분이 많습니다. 그들 중 노인도 있지만 젊은이, 중년도 많습니다. 기자도 개중 한 사람입니다. 그분들과 함께 ‘늙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출판인 프랭크 커닝엄(Frank J. Cunningham)은 《나이듦의 품격》(생활성서 刊, 2019)에서 ‘늙음’을 ‘저녁기도 시간’에 비유했는데 이보다 좋은 표현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저녁기도를 바치는 시간이 찾아옵니다.
날이 저물어 등불 아래서 저녁기도 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종교적 의미를 떠나 이 비유는 인생의 노년기와 잘 어울립니다. 저녁이 찾아오면 모든 시간이 어둠 속에 사라집니다. 누구는 내일 아침 해를 영영 볼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저녁기도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입니다. 가장 완숙하고 순수한 노년의 모습과 비슷할지 모릅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을 쓴 쇠렌 키르케고르(1813~1855)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은 앞을 내다보며 살아야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려면 뒤를 돌아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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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를 돌아보는 시간이 저녁기도 시간일지 모릅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정오의 뜨겁던 태양의 기억을 돌아보는 것이죠. 실패든 성공이든 있는 그대로, 한때 작열했던 태양에 예(禮)를 갖추는 것입니다. (겨우 50대 기자가 뭘 아느냐고 독자님들이 혀를 찰지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비유로 말하면, 노인은 수많은 산맥과 골짜기와 사막을 가로지른 여행자들입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현자(賢者)인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세상은 우리 앞에 펼쳐진 책이며 여행을 하지 않은 사람은 그 책의 한 페이지만 읽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노인의 머릿속에는 도서관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의 책들이 쌓여 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노인들, 80대 이상은 산전수전 다 겪은 분들입니다. 태어날 때 모국어를 잃었고 나라를 잃었습니다. 남의 힘으로 광복을 맞았으나 곧 좌우 이념의 극심한 갈등을 경험했고 동족(우리)끼리 서로의 가슴팍에 비수를 꽂았습니다. 분단을 겪으며 생이별의 아픔을 감내했습니다. 산업화를 위해 땀을 흘렸고 민주화를 경험했습니다. 한국의 노인들은 어쩌면 지상에서 보낼 저녁기도 시간이 아주, 아주 길지 모르겠습니다.
겪었던 정오의 뙤약볕과 지금의 경제발전상을 비교하고 나서 “마법 같은 세상”이라 혼잣말을 할지도 모릅니다. 어르신들이 한 일들입니다.
우리가 아는 여러분의 ‘그분’
1932년생인 ‘그분’을 소개할까 합니다. 경상도의 일반적인 남자들처럼 융통성 없고 정직하며 과묵한 분입니다. 허세를 부릴 줄 알았다면 좀 더 생(生)을 즐겼을 테지만 그분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대학에서 정치학과를 다니다 그만둔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생활고 때문이었을까요. 누구보다 묵직한 의회주의자였기에 선거판이 요동쳐도 누구에게 마음을 털어놓거나 특정인의 지지를 암시한 적이 없었습니다.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공장 점퍼를 벗고 안 입던 정장, 눈부신 와이셔츠로 갈아입고 투표장으로 향했습니다.
시적(詩的)으로 표현하자면 그분은 늘 길을 잃었습니다. 게으르지 않았지만 주머니가 비어 있었고 얼굴에는 우울한 표정을 달고 살았습니다. 자녀들에게 매를 든 적이 없고 술을 벌컥벌컥 마신 적도 없습니다. 힘들고 때로는 진퇴양난의 상황을 누구나 겪는데 그분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안으로 안으로 삭여야 했습니다.
무엇이 그분을 그리 괴롭혔을까요. 어느 심리학책에서 ‘과거와 화해하지 못하면 미래로 가는 길을 지속적으로 방해한다’고 하더군요. 그분이 화해할 수 없었던 과거가 무엇이었을까요? 어쩌면 굴곡 많은 한국 현대사와 닮았을지 모릅니다.
오늘 그분이 경북 경주에서 KTX를 타고 상경하였습니다. 지팡이를 쥐고 괴나리봇짐 같은 가방도 어깨에 멨습니다. 갈색 단화를 신고 대학병원을 찾았습니다. 3개월마다 진료가 있는데 신경외과, 신장내과, 비뇨기과를 찾아갑니다. 오전 11시10분, 11시20분, 11시50분입니다. 진료받기 전인 오전 9시까지 채혈실에 가서 피를 뽑고 소변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참, 전날 저녁 금식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진료실이 병동 이쪽저쪽에 흩어져 있어 건장한 성인도 우왕좌왕하기 십상입니다.
병원엔 어찌나 환자가 많은지 진료는 예약 시각보다 늦기 일쑤입니다. 마주치는 환자의 대부분이 노인들입니다. 진료는 1분을 안 넘깁니다. “약 잘 드시고, 잘 유지하세요” 하는 말이 전부입니다. 이 담당 의사 선생님도 내년 2월에 교수직에서 은퇴합니다.
처방전을 받고 약국에 가서도 기다리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기다리기 심심해 문득 백년하청(百年河淸)이라는 말을 떠올려봅니다. ‘황허강의 물이 맑아지기를 무작정 기다린다’는 뜻인데, 황허강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깨끗해질 리 없지만 약은 기다리면 나옵니다. 비유가 너무 거창했나요?
“노인이 약을 먹는지 약이 노인을 먹는지”
3개월 치 약이 한 보따리입니다. 약국 또한 노인들이 즐비합니다. “노인이 약을 먹는지 약이 노인을 먹는지 모르겠다”며 그분이 너털웃음을 짓습니다.
문득, 아흔을 앞둔 지난 1월 중순쯤이 떠오릅니다. 그분은 ‘내일이면 아흔 살이 되는구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일흔다섯이 되면 죽을 것”이라고 예언처럼 말하였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시간이 흐를지 몰랐습니다.
그날 저녁 그분은 집 밖으로 나갔습니다. 마당을 오가다 어둑해지는 밭둑을 거닐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깜깜한 하늘, 자세히 보니 눈인지 별인지가 공중에서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눈이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다시 고요가 찾아왔습니다. “나의 생이 별처럼 흩날려 지상에 안착한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아흔을 함께한 생, 이제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답니다.
노인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그분처럼 노인이 되는 과정은 아주 단순합니다.
어느 날 허리가 결리고 몸이 굼뜹니다. 중년부터 전조(前兆)현상을 숱하게 겪었을 터입니다. 툭하면 까먹습니다. 방금 동작을 잊어버리고 이름과 지명이 생각 안 나 어쩔 줄을 모릅니다. 어제 읽었던 성경 구절이 오늘 가물가물합니다.
〈의인은 야자나무처럼 돋아나고 레바논의 향백나무처럼 자라리라. 주님의 집에 심겨 우리 하느님의 앞뜰에서 돋아나리라. 늙어서도 열매 맺으며 수액이 많고 싱싱하리니…〉(시편 92장 13~15절)
가톨릭 수도원에 사는 늙은 수사(修士)들이 활력(活力)을 기대하며 암송한다는 시편 구절로, 짧음에도 하루만 안 외워도 몇몇 단어가 가물가물합니다. 일주일을 안 외우면 아예 기억에서 사라질지 모릅니다.
인터넷 회원 가입을 위해 마련한 아이디와 패스워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종류가 많고 어떤 사이트는 몇 개월에 한 번씩 비밀번호를 바꾸라고 해서 더 헷갈립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반복적인 일상을 받아들일 각오
영화 〈죽여주는 여자〉(2016)의 한 장면. 성을 팔고 사는 노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실존과 공허, 죽음을 담담하게 들여다본다. 사진=조선일보DB |
무엇보다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이 때로 견딜 수 없습니다. 한창 시절엔 늘 계획을 세웠으나 지금은 하루가 어제 같고 내일이 모레 같습니다. 어제 했던 일을 오늘도 합니다. 오늘 한 일을 내일도 합니다. 내일 할 일을 모레도 합니다.
반복적인 일상을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 합니다. 체념이 아닙니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죠. 지루하지 않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둬야 합니다. 일종의 각오입니다. 오늘 아무렇지 않게 했던 일을 내일부터는 건강상의 이유로, 혹은 다른 이유로 못 하게 될지 모릅니다. 이 단조로운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는 순간입니다.
한때 일본은 EU의 2배, 미국의 3배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어 ‘세계에서 고령화가 가장 빠른 나라’로 불려왔습니다. 일본은 1970년 고령화 사회(만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7% 이상), 1994년 고령 사회(14% 이상), 2005년 초고령 사회(20% 이상)로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이 속도보다 더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지난해 우리나라 고령화율(총인구 중 65세 이상 인구 비율)은 15.7%로, 일본(28.9%)보다 13%포인트 낮았지만 향후 가파르게 올라 2045년 37.0%로 일본(36.7%)을 넘어서고 이후 일본과의 격차가 더 벌어질 것으로 분석됐습니다.(《조선일보》 10월 1일 자 ‘한국, 2045년엔 일본보다 늙은 나라 된다’ 참조)
초고령 사회 일본에서는 ‘핀핀코로리(ぴんぴんころり)’라는 말이 유명합니다. 팔팔한 모습을 뜻하는 ‘핀핀’과 갑자기 죽는다의 ‘고로리’의 합성어입니다. 팔팔하게 생활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고생 없이 죽는 것이 어디 생각처럼 쉽나요?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 (2016)를 보았습니다. 영화 〈미나리〉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윤여정이 출연한 작품이지요.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노인의 현실상 혹은 고민입니다. 외견상 이 영화는 노인의 성욕, 빈곤 등을 그리는 듯하지만 노인의 실존(實存)을 다루고 있습니다. ‘죽여달라’는 노인의 욕구와 ‘죽여주는’ 여자의 필요가 만날 수밖에 없는 막다른 골목이 영화의 현실, 오늘의 우리 사회입니다. 매춘 단속에 걸린 소영의 이 대사가 여운에 남습니다.
“혹시 봄 돼서 감방 가면 안 될까요? 제가 추위를 많이 타서…. 도망 안 갈게요. 차라리 잘됐지 뭐. 어차피 양로원 갈 형편도 안 되고…. 거기 가면 세끼 밥은 먹여주는 거잖아요. 요즘 반찬이 뭐가 나오나. 올겨울은 안 추웠으면 좋겠다.”
나이가 들수록 실제보다 나이를 부풀리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
가스가 기스요가 쓴 《백 살까지 살 각오는 하셨습니까?》(AGORA 刊, 2019)를 읽었습니다. 흥미로운 대목이 있었는데 저자가 일본 노인들을 인터뷰할 때 노인들이 실제보다 자신의 나이를 늘려서 대답하는 사람이 꽤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88세는 “이제 곧 90세”, 93세는 “이제 곧 95세”, 98세는 “이제 곧 100세”라고 대답하더라는 겁니다.
70대까지만 해도 특히 여성들은 자기 나이를 숨기려 하고 나이를 물어보면 불쾌해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든 살이 넘어서면 묻지 않아도 스스로 자기 나이를 밝히고, 또 조금 과장해서 대답하는 사람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한국도 그럴까요?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사람들에게 나이에 비해 건강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나는 젊다”라는 자기평가로 이어지고, 그래서 노인이 되면 실제보다 나이를 늘려 말하려는 심리가 발동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실제보다 나이를 부풀리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노인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현재 노인의 기준이 되는 만 65세라는 나이도 언젠가는 수정될지 모릅니다.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나선 하태경 의원이 “현행 65세 기준으로 되어 있는 지하철 무임승차 연령을 70세로 상향 조정하겠다”는 공약을 밝혔습니다. 이를 두고 정치권 안팎에서는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솔직히 현실화될지 의문입니다.
하 의원은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서울교통공사의 누적 손실액이 3조1495억원이고 지난해에는 1조1137억원 적자로 손실률이 무려 69.2%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적자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무임승차로 인한 손실”이라고 말합니다.
2030년이면 65세 이상 어르신 인구 비율이 전체의 25%, 약 1300만 명입니다. “현 상황을 방치하면 결국 전국의 지하철은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멈춰 설 것”이라는 하 의원의 주장이 무섭게 느껴집니다.
언젠가는 ‘65세 이상’이라는 노인의 기준도 달라질지 모릅니다. 정년의 기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정년을 늘려야 한다는 논의가 정치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65세 이상 인구가 증가하는 인구 통계는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미래의 경제에 커다란 도전으로 떠오를지 모릅니다.
요즘 일본 매스컴은 ‘2025년 문제’를 자주 다룬다고 합니다. 2025년에는 단카이 세대(1947~49년생)가 75세를 넘기기 때문입니다. 고령 인구의 증가로 의료나 돌봄 서비스 등의 서비스가 늘어나 사회보장비가 크게 증가할 것으로 우려합니다.
마쓰바라 준코가 쓴 《장수지옥》(동아엠앤비 刊, 2019)을 읽으니 ‘독거노인이 거리를 가득 메울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자녀가 있으니 안심’ ‘아내보다 먼저 죽을 거니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가혹하고 긴 노후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노인이 시끄러운 이유
기왕에 지하철 이야기가 나왔으니 흔히 지하철에서 만날 수 있는 노인들 이야기를 해볼까요?
노인들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크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나요? 시끄러운 노인들은 가끔 폭력 사건에 휘말리기도 합니다.
〈지하철 객차 안에서 ‘시끄럽게 대화한다’며 노인 승객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등 무차별 폭행한 중년 남성에 대해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서울 수서경찰서는 전날 오후 8시쯤 지하철 3호선 오금 방면 객차 안에서 남성 A씨가 노인 승객을 폭행한 사건이 발생해 수사하고 있다고 18일 밝혔다.
경찰 등에 따르면 A씨는 당시 지하철 안에서 대화하던 노인 2명에게 “시끄럽다”며 욕설하고, 폭행했다. 객차 내 비상전화로 신고를 받은 승무원은 A씨를 하차시킨 뒤 다시 출발했고 (하략)〉(YTN, 4월 18일 자 기사 ‘“시끄럽다” 지하철서 노인 무차별 폭행한 남성’ 중에서)
노인들은 어린 학생들이 조금만 떠들어도 성을 내고 야단을 칩니다. 학생들은 갑작스러운 분노에 기가 막힙니다.
그런데 고령자가 쩌렁쩌렁 소리치는 이유는 귀가 나빠서라고 합니다. 큰 소리로 말하는 이나 듣는 이나 안 들려서 그러는 것을 젊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또 혼자서 절벽 같은 생활을 하다가 친구를 만나면 반가워서 목소리가 들떠 시끄럽다고 합니다. 때로 대화가 서로 싸우는 듯 들려도, 실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나이가 들어 성격이 나빠졌다’고들 생각하지만, 나빠진 것은 성격이 아니라 청력입니다.
일본에서는 노인학 연구가 우리나라보다 활발한 모양입니다. 관련 서적이 국내 많이 출간되었는데 히라마쓰 루이가 쓴 《노년의 부모를 이해하는 16가지 방법》(뜨인돌 刊, 2018)은 아주 흥미로운 책입니다. 소개된 16가지 노인의 이상행동 중 몇 가지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본인에게 불리한 말은 못 들은 척한다. / “나 따위 있어 봤자 짐이다” 하고 부정적인 말만 한다. / 애써 준비한 음식에 간장이나 소스를 흠뻑 뿌린다. / 말수가 적고 무뚝뚝하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면 오히려 입을 닫아버린다. /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었는데도 천천히 걷는다. 등등〉
집안에 노인이 없으면 어디서 꿔라도 오라?
영화 〈어바웃 슈미트〉에서 워렌(잭 니컬슨 분)이 마지막 퇴근을 하는 장면이다. 워렌은 보험회사에서 40년 이상 시계추와 같이 ‘9 to 5’의 생을 살았다. 사진=조선일보DB |
노인들은 “나 따위 있어 봤자 짐”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정반대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관심받고 싶어 합니다. 노인이 예외일 수 없습니다. 젊은 사람 하는 일에 참견하고 싶고 자신의 경험을 나눠주고 싶어 합니다. 내남직없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 속담에 ‘집안에 노인이 없으면 어디서 꿔라도 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자가 귀했던 시대에 노인의 숙련된 지식과 정보를 나누고 가르쳐야 사회가 돌아갔으니까요.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프레야 맨프레드(Freya Manfred·78)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장 탁월한 상상력을 가진 이들은 좁은 선택의 폭 사이를 헤엄쳐 나온 늙고 병든 자들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이 바로 늙고 병든 자들, 노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요? 각종 정보와 최신 지식이 매일, 매시간 업데이트되는데 케케묵은 노인들의 가르침이 필요할 리 없지요. 그러니 구태여 노인에게 찾아가 질문하는 이가 없습니다.
노인들이 너무 흔해진 탓도 있습니다. 과거 그리스 시대에는 백전노장의 노인이 손으로 꼽을 정도였을 겁니다. AI 역할이 더 커지면 노인의 지혜는 더욱 빛이 바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노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까요.
〈어바웃 슈미트(About Schmidt)〉 (2002)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 《나이듦의 품격》이라는 책에서도 소개하는 영화인데요, 배우 잭 니컬슨(워렌 역)이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워렌은 보험회사 고위직에서 일하다 66세가 되어 정년퇴직을 합니다. 그의 인생은 시계추와 같이 ‘9 to 5’의 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정확히 오후 5시가 되어 워렌은 40년 이상을 일했던 직장에서 마지막 퇴근을 합니다.
어느 날 예고 없이 회사를 찾아갑니다. 후임자에게 업무를 인계했지만, 혹시나 어려움을 겪지 않을까 해서요. 사무실로 들어서자 동료들의 반응은 의외로 차가웠습니다. 후임자는 그를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로 우리가 당신이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생각하십니까?”
새로운 인연, 새로운 희망
만 85세에 첫 책을 펴낸 양순자씨. |
낙담을 한 그는 이렇게 혼잣말을 합니다.
“내가 죽으면 세상도 죽는 거야. 흔적조차 안 남겠지. 내 삶이 누군가를 변화시켰던가? 전혀 내 인생은 의미가 없었어.”
은퇴 후 워렌은 아내마저 사망합니다. 유품을 정리하다 아내가 자기의 친구와 사랑에 빠진 사실을 알게 됩니다. 퇴직 후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된 워렌은 딸을 찾아 길을 나섭니다. 딸과 약혼한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결혼을 막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가는 길에 고향에 들르고 모교도 찾습니다. 그런데 만나는 사람들의 반응이 시큰둥합니다. 워렌은 속이 상합니다. 모두가 그를 외면하고 등을 진다는 생각이 든 순간 미칠 듯이 외로움을 느낍니다. 딸마저 냉담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대로 죽어야 할까요?
그런데 워렌에게 손을 내미는 이가 있었습니다. 뜻밖에도 아주 먼 나라, 탄자니아의 한 소년이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워렌은 은퇴 후 구호단체의 후원자로 참여하게 되는데 탄자니아의 ‘엔두구’라는 아이를 도왔던 겁니다. 편지에는 그와 소년이 손을 맞잡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보잘것없이 보이더라도 새로운 인연, 아니 새로운 희망에 워렌은 참아왔던 눈물을 터뜨립니다. 이 장면이 영화의 마지막입니다.
노인이 된다는 것은 또 다른 ‘워렌’이 되는 일이 아닐까요. 외로운 노인, 몹쓸 노인으로 늙기보다 새로운 인연, 새로운 희망을 찾는 워렌이어야 합니다.
노인은 성장이 멈춘 존재가 아닙니다. 새로운 성장을 도모하는 존재입니다. 노인이 노인을 돕는 노노(老老) 자원봉사나 취미, 여가를 시작하는 것도 좋습니다. 비록 우리의 능력이나 관심사, 갈망이 점점 줄어들지만, 무기력에서 벗어나 영적(靈的) 성장을 추구해야 합니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한쪽 문을 열어야 합니다.
지난 《월간조선》 5월호에 만 85세 할머니 양순자(梁順子·1936~)가 쓴 첫 책 《한성고녀 1학년 1반 1번》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평생 써온 수필과 시를 여든이 넘어 책으로 묶었는데 ‘좋은 삶이 명문을 낳는다’는 경구에 부합한 책이었습니다. 끝으로 그분이 쓴 시 ‘행복’을 소개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행복은 남이 보는 행복
자기가 느끼는 행복
행복을 모르고 살 때가 행복인가
행복은 욕심쟁이인가
역경을 겪고 나면 행복을 알게 된다
받은 것을 세어봐라
성경 말씀을 생각하라
너를 늘 지켜보고 계신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백년을 내다보고 사는 인생
한 치 앞도 모르고 사는 인생
그것이 바로 인생이기에
-양순자의 시 ‘행복’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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