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땅이 겪은 질곡이 현재의 미군기지확장반대와 맞닿아 있습니다.
기나긴 기간 동안 타국의 군사전략지로 전락해 버려진 땅이었습니다.
생명이 깃드는 농토를 죽임의 땅으로 바꿔놓는 악의 질서가 있어왔습니다.
현재 평택 땅에 평화를 바라는 촛불들은 남과 북의 평화와 전세계의 평화와
맞닿아 있습니다. 악의 질서에 대항하기 위한 평화의 몸짓 하나 하나가
이 땅의 평화를 이루어 낼 수 있기를 성령께서 함께 하길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평택 미군 기지 발생사 |
①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평택에 외국 군대가 들어 온 것은 ‘청일 전쟁’ 때부터다.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을 서로 지배하기 위해 벌인 이 전쟁은 일본이나 청나라가 아니라, 조선에서 벌인 전쟁이다.
이 때 청나라와 일본은 성환에서 큰 전투를 벌여 일본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이들이 얼마나 심하게 싸웠던지, 지금까지도 “아산이 무너지나, 평택이 깨지나 해 보자”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일본은 1904년부터 1905년까지 러시아와 ‘러일 전쟁’이라는 전쟁을 치렀는데, 이 전쟁도 일본이나 러시아가 아니라 조선에서 치렀다. 이 때도 평택은 외국군 기지 노릇을 했다.
② 팽성 안정리, 대추리 일대 일본군 기지 건설
두 전쟁에서 이겨 조선 지배의 발판을 마련한 일본은 1941년 ‘2차세계대전’을 시작하면서 팽성 안정리 일대에 군사 기지를 설치했다. 당시 평택에서는 보국대로 끌려가 죽을 고비 넘겨가며 일본군 기지 건설에 동원된 사람이 많다. 연장은 삽과 곡괭이 정도였고, 사람 힘으로 논밭과 야산을 허물어 활주로와 격납고를 건설했다. ‘열 길에서 열댓 길’씩 곡괭이로 파고 들어가다 산이 무너져 죽은 사람도 많다.
식민지 초기와는 달리 전쟁을 치르면서부터는 일본인들이 악랄해졌다. 공출로 곡식과 가축까지도 모조리 일본으로 가져갔고, 노력 동원에 나가는 조선인들에는 콩이나 보리 같은 것을 삶아 주었다. 이렇게 만든 일본군 기지는 30~40만 평 정도 됐다. 이 때 땅을 빼앗기고 쫓겨난 사람들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③ 해방과 함께 들어온 미군
해방이 되자, 안정리 일본군 기지에는 미군이 들어와 남아 있던 일본군과 함께 지냈다. 기세 등등하던 일본군은 부대 안에서 물건을 지키거나 잡일을 했다.
미군들은 부대를 넓히기 시작했는데, 주변 마을 사람들은 ‘하우스 보이’로 미군 부대에 취직하기도 하고, 부대 공사판에서 막일도 했다. 미군들은 15~16세쯤 되는 아이들에게는 청소나 잔심부름을 시켰다.
미군들은 불도저로 공사를 했기 때문에 야산과 논밭이 순식간에 활주로로 바꾸었다. 이 때도 대추리, 안정리, 서경재, 뗏장거리, 두정리, 함정리, 내리, 동창리 사람들은 아무 말 못하고 땅을 빼앗긴 채 쫓겨났다.
미군들은 한국전쟁 때는 물론, 휴전한 뒤로도 계속 기지를 넓혀, 2005년 현재 안정리 기지는 150만 평이나 된다.
(2) 송탄 미 공군 기지 발생사
송탄 미군 기지는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2월 야리, 적봉리, 신야리, 가마굴 같은 마을 사람들을 이틀 만에 내쫓고 만들었다. 주민들은 개인 사정에 따라 용인이나 평택, 안성, 서울 같은 곳으로 떠나기도 했지만,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은 진위천 둔치로 모여들었다.
미군 부대에서 나눠준 천막과 긴 막대기 몇 개, 양쌀이나 양밀가루 두어 포씩을 가지고 끔찍한 겨울을 보낸 주민들은, 이듬해 봄이 되면서 오두막도 짓고 살다가 홍수로 모든 것을 잃은 채, 황구지나 금각리, 구장터, 회화리 같은 마을로 피눈물 나는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미군은 휴전 뒤에도 송탄 기지를 계속 넓혔고, 철거민은 계속 늘어 갔다. 1960년대 중반 국방부에서 보상해 준다는 소문이 나돌았으나, 국방부 관재과 업무 담당 공무원까지 포함된 브로커들한테 다 빼앗기고 말았다. 물론 “비행장 철거 주민 촉진회"라는 것을 결성하여 몇 년을 싸운 끝에 감정가대로 보상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송탄 미군 기지는 13번이나 넓어져 2005년 현재 2백만 평도 넘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