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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헤브론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빛으로
본문 : 시편95편1~11절
제목 :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자
이 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며, 목자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과거의 선조들처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에 의하면 이 시의 기자는 다윗이라고 되어 있습니다(히4:7).
학자들에 의하면 이 시는 장막절 때 불러졌던 것으로,
초대교회에서 예배를 시작할 때 낭송하는 시였습니다.
95편부터 100편까지의 6편의 시는,
모두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공통된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인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로 백성을 초대합니다.
하나님께 거역했던 지난 역사를 청산하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경배하자고 독려합니다.
1. 찬양으로의 초청(1~2절)
1)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1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우리의 구원의 반석 - '반석'(추르)은 하나님의 별칭으로 잘 알려진 용어입니다(18:2,31,46;19:14;28:1;78:35;89:26;사 2:8;합 1:3).
또한 이 용어는 하나님께 대한 의존성 및 안전성을 시사하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그 반석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위대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혼자 그를 찬송하기를 아깝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인은 남들을 청하여 그 찬송에 참여하게 합니다.
"반석"은 험준한 바위산으로 둘러싸인 곳을 뜻하는 것으로서,
그 안에 도피하여 숨으면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여 찾아내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아마 미국의 그랜드케년 같은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피난에 가장 적당한 곳으로서 하나님의 불변성을 비유한 것입니다.
신32:4절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라하였고,
사26:4절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안에 피한 자의 구원은 영원히 확보됩니다.(요10:28,롬8:39).
이 말이 비유한 뜻은 성경에 몇 가지 있습니다.
(1)하나님의 힘(시62:7), (2)하나님의 보호(시31:2), (3)하나님의 구원(시89:26), (4) 그리스도의 보호(고전10:4), (5)교회의 터(마 16:18)등입니다.
여기서는 이것이 구원자를 가리켰을 것입니다.
재앙과 곤고에서 우는 자로서는, 구원자를 보고 즐거운 생각을 금 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구원자를 생각하지도 못하거나 그를 즐거워 할 줄 모르는 이유는,
아직도 자기의 처지가 비참한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즐거이 외치자.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형인 '루아'는
'즐거운 소리를 내다', '개가를 올리다'는 문자적 의미를 지니며,
여기서는 '신복의 예를 표하자'란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사울의 대관식 때에 그 백성의 충성의 외침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사용된 것과 동일한 동사이기 때문입니다(47:1;삼상 10:24;습 3:14;슥 9:9).
2) 즐거이 하나님을 찬양하자(2절)
“[2]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그 앞에 나아가며 - '나아가며'는 '앞을 향하여 재촉하며 민첩하게 나아가다' 혹은 '만나다'는 의미를 지니며, 본문에서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곳은 미 6:6입니다.
*미가6: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자가 기꺼운 마음으로 민첩하게 나아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자세라 하겠습니다(Perowne)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 여기서 '즐거이 노래자'는 1절에서“외치자”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소리를 내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을 근거로 하여 '시'를 '나팔'로 번역하는 역본도 있습니다(70인역).
그렇다면 나팔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자는 뜻이 되겠습니다.
'노래', '찬양' 외에도 '기악'이라는 뜻도 내포하지만, 대다수 영역본들은 개역 성경과 유사한 번역을 취합니다.
* 이 시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와 기쁨을 가지기는,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신 사실(1절)을 인하여서 뿐만이 아니라, 그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므로 그를 높이는 의미에서도 그리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위대하시어 땅의 깊은 곳과 높은 곳, 곧, 인간의 손이 관계할 수 없는 곳들도 창조하시고 관할하시며, 천지나 바다도 그리하셨기 때문에, 이 시인은 그를 찬송합니다.
2. 경배의 대상과 이유(3~7절)
1) 온 세상의 주권자 이신 하나님(3절)
“[3]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십니다.
기쁜 마음과 큰소리로 감사를 드려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크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크신'에 해당하는 '가돌'은 일반적으로 '위대한'을 뜻하지만,
이상 신들이 대비되고 천지 창조(4, 5절) 및 목자 개념(7절) 등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유일한 참신 및 창조주 그리고 그의 백성의 목자 되시는 자애롭고 크신 권능의 하나님을 암시하는 형용사로 보면 되겠습니다.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 이방 민족이 섬기는 모든 헛된 우상들보다 크신 왕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출 15:11;18:11).
주의할 점은 본 구절을 표면적으로 이해하여 기자가 이방 신을 어떤 실제적인 힘을 지닌 실재(實在)적 존재로 간주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일입니다.
기자는 '이방신들도 어느 정도 힘이 있지만 하나님이 더 힘이 세다'라는 식의 상대적 비교 차원의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절대적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2) 모든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4~5절)
“[4]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5]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 하시고 그 위에 계십니다.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직역하면 '그의 손들 안에 땅의 깊은 처소들이 있으며'입니다.
여기서 '손들 안'이란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제 아래'를 뜻합니다.
'깊은 곳'이란 외관상으로는 알 수 없고 파보아야만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땅 속 가장 깊은 곳 따위를 가리킵니다.
인간의 일상적인 관측 능력 밖에 있는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다스리는 영역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 여호와의 자연에 대한 통치는 그가 그것을 만드셨기 때문에 논쟁의 여지가 없이 그것의 주인은 바로 그분이시라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3)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자(6절)
“[6]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이 천지의 대 주재이신 여호와께 우리가 할 일은 꿇어 그에게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창조자시오, 구속자시며, 그의 백성으로 삼으신 자시니,
그에게 경배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오라(보우). -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자들임을 상기시키는 표현입니다.
“굽혀 경배하며”는 육체적 경배를 가리키나 심령으로 경배하는 내적 요소를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를 지으신(오셰누). 직역하면 '우리의 조성자'입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인격적 언약 관계롤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무릎을 꿇자 - '굽혀', '경배하며'와 의미상의 동의어로서 여호와를 향한 존경과 복종을 강조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Anderson).
4)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7절)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우리가 여호와께 굽혀 경배할 것은 그가 우리 하나님이시오, 우리를 인도하시며,
먹이시는 목자시기 때문입니다(시23:1~6, 74:1, 79:13, 80:1).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은 새 사상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경배할뿐더러 그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결단적인 오늘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향해 부르짖고 계시는데 영혼의 귀를 기울여 그 음성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3. 찬양에 대한 촉구(8~11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기자의 선조는 출애굽 당시, 광야에서 물이 없다고 모세를 비난하며 하나님을 의심했습니다.(출17:7, 민20:13,24, 27:14, 신32:51).
이스라엘 백성은 40년의 광야생활 내내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을 되풀이 했습니다(10절).
그들은 선조들처럼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말고 목자이며 세상의 주권자인 여호와를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1) 너희 마음을 강팍하게 하지 말라(8절)
“[8]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이스라엘 백성이 무리바에서(출17:2~7), 또 맛에서(민20:1~7),
하나님의 기적으로 반석에서 물을 얻어먹었으나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것입니다.
므리바 - 원어상의 뜻은 '다툼(혹은 겨룸)의 장소'를 의미하며,
물이 없으므로 백성이 모세와 다툰 곳입니다.
출 17:1 이하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임재를 의혹함으로써 하나님을 격노케 한 후 모세가 그 장소에 붙였던 이름입니다(106:32;출 17:7).
'므리바'는 시온 광야 안에 있던 가데스 바네아 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민 27:14;신 32:51;겔 47:19;48:28).
광야 - 물이 고갈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두 번째로 불평했던 가데스 인근 지역인 신 광야를 뜻합니다(민20:1,Perowne).
맛사(마사) - '시험하다', '입증하다'를 뜻하는 '나사'에서 유래된 용어로 '시험'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Johnson). 백성이 하나님을 시험한 곳입니다.
70인역(LXX)은 '유혹'으로 번역하고 있다(신 6:16).
*신6:16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두 사건은 이름과 내용이 같으므로 동일시되나 신간적으로 38년의 간격이 있었고, 장소적으로도 시내반도 남북 약 320km의 차이가 있으므로 두 사건으로 봅니다.(출17:1~17절)
2)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지 말라(9절)
“[9]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그 두 곳에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을 시험하였고(출17:2,7) 모세를 통해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하는 하나님의 행사를 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신지 혹은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실 수 있는지를 의심하여 하나님을 시험의 대상으로 삼았던 광야 시대의 한 사건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출 17:1;민 20:1).
그 후 세대들은 이 사건을 불신의 전형으로 보았습니다(78:18,41,56)
기적 같은 구원, 심판 따위를 포함한 이스라엘 민족을 유지함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든 행동들로 보아야 합니다(Perowne, Anderson).
3) 하나님의 법도를 무시하지 말라(10절)
“[10]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내가 사십 년 동안. - 히 3:9에 본 구절이 인용되어 있는데 그곳에서는 본 구절과 앞 절을 연결시켜 놓고 있습니다 :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본 구절 앞에는 의미상 '그러므로'가 생략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겠습니다.
근심하여(아쿠트) - 혐오, 구역질 따위의 의미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강한 표현입니다.
마음이 미혹된(토예 레바브) - 직역하면 '그 마음이 헤매이고 있는'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에서의 방황은 그들의 내적 방황에 따르는 필연적인 징벌 때문이었음을 반영합니다.
동일한 표현을 107:4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내적 방황'이란 다름아닌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됨으로 인해 스스로 갈피를 못잡고 헤매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내 길을 알지 못한다 - 이스라엘의 광야 방황의 이유를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따라서 본 구절 앞에는 '왜냐하면'이 생략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말쏨을 퉁해 계시된 지침 혹은 보다 포괄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오직 곧고 평탄한 한 길 곧 하나님의 법도를 무시한 것,
그것이 바로 구불구불한 길과 같은 광야에서 방황한 이유입니다.
4)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11절)
“[11]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내 안식 들어오지 못하리라(임 예보운 엘 메누하티) - 여기서 '임'은 부정사(not...) 역할도 지니는 말이나 조건문을 이끄는 접속사(if...)로도 사용됩니다.
여기서 본문을 조건문으로 번역해 보면, '만일 그들이 나의 안식으로 들어간다면'이 됩니다. 히브리 어법에서 그 맹세의 일부 내용이 생략된 이 같은 조건문은 강한 부정과 맞먹는 의미를 지닙니다(Alexander).
그렇다면 이렇게 번역될 수 있겠습니다.
'그들은 결코 나의 안식으로 들어올 수 없으리라.'
또한'메누하티킥'.곧 '나의 안식'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처소를 뜻하지만(132:8,14) 문맥상으로는 광야에서 방황 이후 있을 안식의 터전으로서 약속된 땅,
가나안이 적절한 의미입니다(신 12:9).
약속된 가나안 땅은, 영적 안목에서 보면,
하나님의 언약을 준수하고 순종하는 자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결코 그 안식의 땅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본 절의 경고는 주님 재림 때까지 오고 가는 모든 세대 중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모든 인류를 겨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본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말씀은 심판의 경고임에 분명하지만,
이와 아울러 여호와의 메시지를 경청하여 과거의 실패를 답습하지 말도륵
이스라엘 회중에서 권면하는 적극적인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M. A. Tate).
‘므리바’와 ‘맛사’는 ‘쟁론’과 ‘도전’을 의미합니다(출 17:1-7).
아직도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까?
목회자나 그룹의 인도자에게 곤혹스러울 정도로 필요 이상의 질문을 하지는 않습니까? 내 마음이 미혹된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따지는 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믿고 따르는 자들의 모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십니다(3절).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 하시고 그 위에 계십니다(4,5절).
내가 의지하고 즐기던 것을 꺾으시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여전히 즐겁게 찬양하며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되 굽혀 무릎을 꿇고 겸비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에게 물과 꼴을 먹여 주시며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며 보호해 주십니다(7절시 23편, 요 10:1-18).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내 삶에 기쁨의 찬양과 감사가 그쳤다면, 그건 매우 위태로운 신앙의 적신호입니다.
그분 없이 살수 없고, 그분 없이 안전할 수 없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기쁨이 있고서야 참된 기쁨이 깃습니다.
나는 요즘 목자가 주시는 꼴을 잘 먹으며, 목자의 음성을 잘 듣고 있습니까?
애굽에서 나온 백성이 다 가나안에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8~11절민 14:29-38).
불순종하는 자를 거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나도 불순종의 길로 계속 나아간다면 거부당하게 됨을 잊지 마십시오.
어제의 고통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 내가 해야 할 일은 찬양과 감사입니다.
오늘이라는 하루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찬양과 감사가 넘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맹먹적인 찬양이 아니라 이야기가 있는 찬양, 경배가 있는 찬양, 회개가 있는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은혜가 넘치는 삶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하나님은 날마다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구원의 반석이요, 위대한 왕이십니다.(1~5절).
그 어떤 우상도 하나님과 견줄 수 없습니다.
우상은 인간이 만든 형상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니 그에 합당한 찬양을 우상이 아닌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찬양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인정하고 드러내는 일이며,
그분께 합당한 영광을 드리는 일입니다.
2) 백성인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요, 양인 우리를 기르시는 목자입니다(6,7a절).
이것을 머리로, 가슴으로, 몸으로 알 때 즐거이 노래할 수 있고 기쁘게 섬길 수 있습니다.
그분을 떠나서는 우리의 존재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인생의 주인 노릇 하는 자리에서 내려와 경배의 자리로 나아갑시다.
자신이 피조물이요 구원받은 백성임을 아는 겸손한 인식에서 찬양은 시작됩니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시인은 우리를 예배로 초대합니다(1~5절).
그는 자신이 예베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온 백성을 향해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초대합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요 구원의 반석임을 진정하는 사람은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구원을 선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가 감격을 부르고, 사랑이 새 노래를 부릅니다.
멈춤이 없으면 묵상이 없고, 묵상이 없으면 찬양이 없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며, 나는 그분을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자문해보십시오. 그 대답이 찬양이 되게 하십시오.
2) 찬양 대신 반역을 선택한 백성에게 안식이란 없습니다(7b~11절).
하나님은 과거 선조들이 거역했던 부끄러운 역사를 상기시키며 다시는 불평과 불순종의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일깨우십니다.
왕과 백성, 창조주와 피조물, 목자와 양의 경계를 지우고 거역하는 순간, 생명과 안식은 사라질 것입니다.
왕이요 목자이신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는 ‘순종’입니다.
순종 없는 찬양은 현실도피로, 찬양 없는 순종은 율법적인 맹종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주를 향한 감사와 감격이 순종으로 이어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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