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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왕
앞에
설자 | 1-6 1 ①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3 ②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5 ③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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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왕이
뉘시뇨 | 7-10 7 ④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 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8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오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 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10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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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편,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요절 : 7절,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 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24편은 오벧에돔의 집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법궤를 다윗이 시온산으로 옮겨올 때(삼하 6:12-17)에 지은 시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법궤 위 두 그룹 사이 속죄소에서 “너와 만나고 네게 명할 일을 이르리라”(출 25:22)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온다는 것은 다름 아닌 여호와께서 입성(入城)하심과 같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라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7)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두 가지 질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 “영광이 왕이 뉘시뇨?”(8) 하는 것과, ㉯ “그 앞에 설 자가 누군고?”(3) 하는 문제입니다. 이 두 질문은 불가분의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시조는 죄를 범함으로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추방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계획에 있어서 가장 큰 난제(難題)는 이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는데,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5) 한, “하나님의 의”를 얻는 것이 해답(解答)인 것입니다.
첫째 단원(1-6) 영광의 왕 앞에 설 자가 누군고
둘째 단원(7-10) 영광의 왕이 뉘시뇨
첫째 단원(1-6) 영광의 왕 앞에 설 자가 누군고
① 다윗은 어떤 의도에서 우선적으로,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1), 즉 천지만물이 여호와의 것이라고 선언을 하는가?
㉠ 지금 시온성에 입성(入城)하시는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으로써,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 즉 만물의 주인(主人)이 입성하신다는 것입니다.
㉡ 그래서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2)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맥적으로 보면 이처럼 위대하신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니,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7) 하고, 7절로 연결(連結)이 되어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② 그런데 다윗은 그 사이에 어찌하여,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3) 하고 묻고 있는가?
㉠ 다윗의 의중에는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을 나올 때에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궤를 붙들었다가 직사(直死)한 일(삼하 6:7)을 상기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죽임을 당한 일도(레 10:2) 생각했을 것입니다.
㉡ 이런 맥락에서 구원계획에 있어서 풀어야 할 숙제(宿題)는,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한, 원죄 하에 있는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를 달리 표현한 것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갈 2:16)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물음입니다. 이 문제만 해결이 되면 의로우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과 화목할 수가 있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도 가능하여지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하고, 그리스도께서 대속제물이 되어주신 목적(目的)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 이런 맥락에서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4) 한 말씀을 행위구원을 말하는 양 여겨서는 아니 됩니다. “손이 깨끗하며”가 옳은 행실(行實)을 나타낸다 하면,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심령(心靈)상태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는 율법의 행위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③ 이점이 이어지는,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5) 한 말씀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 “의를 얻으리니” 한 “의”는, 자기(自己)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대속을 통해서 이루어주신 “하나님의 의”(롬 1:17, 3:21)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하고, “구원(救援)과, 하나님의 의”가 결부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점을 사도 바울은,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난 의라”(빌 3:9) 합니다.
㉡ 그래서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6)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라는 구속사적 의미가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민 6:25) 한, 비췸을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비취심이,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신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하고, 복음의 빛을 비쳐주심으로 성취가 된 것입니다.
㉢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그 거룩한 곳에 설 자”란, “하나님께 의를 얻는 자”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얻은 자는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4) 삶을 살기를 열망하는 자인 것입니다.
계시록 14:1절에서는,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합니다. 이들은 “사람 가운데서 구속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계 14:4)이라 합니다.
다시 강조합니다만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3), 그들은 땅에서 구속함을 받아 하나님의 의를 얻은 자(5)들뿐입니다.
둘째 단원(7-10) 영광이 왕이 뉘시뇨
④ 그런 후에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7상),
㉠ “영원한 문들아 들릴 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7하) 합니다. 여기 주목하게 되는 것은 첫 번은 “문들아” 했다가 다음 연에서는, “영원한 문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영원한 문”이 있다는 말인가?
㉡ 본문은 “영광의 왕이 뉘시뇨”(8상) 하고 묻고 있는데, 형제는 “영광의 왕”이 누군지 알고 있습니까? 물론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오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8하) 하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진술들을 구속사라는 맥락에서 고찰해보면 어떤 의미가 되는가?
㉮ 첫째로 “영원한 문들아” 한, “영원”이란 세상 나라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永遠)히 보존되고 네 위가 영원(永遠)히 견고하리라”(삼하 7:16) 하신, 메시아언약과 결부가 되는 표현입니다.
㉯ 둘째로 “성소”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법궤”는 그리스도에 대한 명백한 모형인 것입니다.
㉰ 셋째로 “전쟁에 능한 여호와”라는 묘사를 구속사의 맥락으로 보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실 “여자의 후손”을 가리키는 것이 됩니다.
㉢ 이점을 이사야 선지자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하면서 이분이 누구냐 하면,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합니다. 본문은 이를 알게 하기 위해서, “영광의 왕이 뉘시뇨” 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이 시가,
하나님이 즐거이 부르는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찬양하라 우리 왕을 찬양하라(47:5-6),
한, 47편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시고”(히 2:14-15), 부활승천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9) 합니다.
㉠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10) 합니다.
㉮ 이 말씀을 통해서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 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한,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을 연상하게 됩니다. 이것이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입니다.
적용 : 주님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계 3:20) 하십니다. 형제의 마음 문은 영광의 왕을 모셔드리기 위하여 활짝 열려 있습니까? 그리고 영광의 왕을 맞이하여 거룩한 곳에 서도록 “하나님의 의”를 받아 입었다는 복음진리에 확고하게 서 있습니까?
묵상
㉠ 구속사의 맥락에서 영광의 왕이 누군가에 대해서,
㉡ 거룩한 곳에 설 자가 어떠한 자인가에 대해서,
㉢ 이 시편의 궁극적인 성취가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해서.
첫댓글 귀하신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