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세우신 하나님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3:25).
본문을 가리켜 학자들은 “신학의 정수(精髓)라고들 말합니다. 본문은 두 가지 신학적인 난제를 설명해주고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은 어찌하여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내어주시고야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실 수가 있었는가 하는 문제요, 둘째는 구약시대의 죄는 어떻게 처리가 되었는가 하는 신학적인 오의(奧義)를 말씀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① “이 예수를 하나님이”(25상),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 구원계획의 주체(主體)는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은 그 계획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하셨다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②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25중)이라고 말씀합니다.
㉠ 우리는 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라는 말씀을 대한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화목제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구속과, 화목제물”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넓은 의미에서는 뜻을 같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현을 달리 한 것은,
㉡ 24절의 “구속”은 죄인들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죄 값을 대신 구속(救贖)해주셨기 때문에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가능하여졌다는 말씀입니다.
③ 그런데 25절의 “화목제물”은 초점이 하나님께 맞춰져 있습니다. 즉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25하)과 결부되는 것으로, 죄인과 화목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손상이 되지 않는가 하는, 하나님의 공의를 옹호하는 말씀입니다.
㉠ 26절에서도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하고 재차 강조되어 있는데, “의로우심을 나타내셨다”는 말은 죄에 대한 진노(震怒)를 나타내셨다는 의미입니다. 죄인을 의롭다고 여겨주시고 화목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公義)에 어긋난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에게 대신 진노를 쏟으시고 이루어주신 정당한 행사라는 말씀입니다.
㉡ “화목(和睦)제물”이라 말씀함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죄로 말미암아 불화(不和)한 관계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과 불화하게 된 자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화목제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이점을 5:10절에서는,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다” 하고 말씀합니다.
④ “그의 피로 인하여” 라고 말씀합니다.
㉠ “그의 피”란 곧 죽음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화목제물의 필수조건은 대신 “피”를 흘리는 죽음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하십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의 피”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 애굽의 처음 난 것을 다 멸하시던 날 밤에 이스라엘의 집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는 피가 뿌려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출 12:13)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뿌려진 “피”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집에는 벌써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집에서도 죽음은 있었습니다. 다만 어린양이 대신 죽었던 것입니다. 뿌려진 피는 그 집에는 이미 심판이 시행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피를 보실 때에 넘어가실 수가 있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을 구원한 것은 “피”에 있었습니다.
⑤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25중) 합니다.
㉠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갈보리 십자가에 세우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았다고 말합니다.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줄 수도 있었는데 십자가에 못 박도록 사형언도를 내렸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구속교리는 거기서 멈춰서는 아니 됩니다.
㉡ 왜냐하면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를 세우시고 그 위에 당신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못 박으신 분은 다른 이가 아닌 하나님 자신이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 때문이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세우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 “십자가를 지심은 무슨 죄가 있나 저 무지한 사람들 메시아 죽였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그런 감상적인 차원으로만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극치인 십자가사건을 인간적인 감상으로 끌어내려서는 아니 된다는 말씀입니다.
㉮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8:32), 하고 말씀합니다.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신 이는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벌레만도 못한 우리를 아끼시기 때문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 성령강림 후에 행한 베드로 사도의 첫 설교는,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행 2:23) 하고 말씀합니다.
⑥ 창세기 22장에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얻은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이를 아브라함 개인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한 것인 양 말해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를 예표로 하여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세우실 것을 계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번제에 쓸 나무를 등에 지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는 이삭의 뒤를 칼과 불을 손에 들고 뒤 따라 간 분은 다른 이가 아닌 아버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이삭을 결박하여 단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창 22:9) 한 것은 아버지 자신이었습니다.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22:16) 하고 말씀합니다.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화목제물로 내어 주신 이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시었습니다.
㉡ 아브라함이 이삭을 내려치려는 순간 하늘에서는 급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여 두신 수풀에 매여 있는 수양을 “아들을 대신하여”(창 22:13)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형제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부르짖으셨을 때에는 하늘에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왜 그러했습니까? 그를 대신(代身)하여 화목제물로 드릴 다른 제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의 죄를 구속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8:3),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代身)하여 죄를 삼으신”(고후 5:21) 분은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하나님이시라도 이길 외에는 다른 길은 없으셨던 것입니다.
㉣ 형제의 마음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는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가 뿌려져 있습니까?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세우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