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진리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로 오게 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저는 27년 동안 비파사나 명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22년 동안 하타 요가를 해 왔습니다. 이제는 쉽게 사마디로도 갈 수 있으며 40개가 넘는 나라의 300곳 이상을 순례했습니다. 비록 제가 어떤 평화에 도달했을지라도, 당신의 조언을 얻고자 합니다.
그대는 오랫동안 수행을 해 왔고 여러 곳을 순례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마디와 평화도 찾았습니다. 하지만 이곳저곳을 순례하고 많은 수행을 한다고 해서 그대에게 보상이 주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그대는 지쳐서 여기에 왔습니다. 여기서는 아무 수행법도, 가르침도 없습니다. 나는 그대에게 수행법이나 사마디를 가르쳐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대는 자신의 나로 들어가는 가장 드높은 길을 아직 가보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수행을 하고, 수없이 순례를 해 왔던 그 ‘나’에 대해서 그대는 한 번도 질문을 던져 보지 않았습니다! 그대가 이곳에 온 이유는 ‘나’라는 것이 어디서 오는지를 알아내기 위함입니다. 어떤 스승도 이것을 가르쳐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대답하십시오. ‘나’는 어디서 생겨납니까?
(침묵)
대답할 수가 없습니까? 그대가 ‘나’라는 근원을 찾을 때, 그대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대가 ‘나’의 근원을 찾으려 했던 이 짧은 순간 동안에 그대의 마음은 어떤 수행이나 순례에 있습니까? 마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또다시 그대는 모릅니다. 그러면 아마도 그대는 마음이 없다고 결론을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있었다면 마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마음, 시간, 공간 사이에 차이란 없습니다. 그대를 어떤 공간이나 장소로 인도하는 것은 마음이었습니다. 모든 수행을 했던 것도 똑같은 마음이었고
사마디로 들어간 것도 마음이었습니다. 마음은 그대를 속여 왔습니다. 그 마음이 평생 동안 그대를 속여 왔습니다. 그대는 확실히 공덕을 쌓았을 것입니다. 나는 이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합니다. 그대가 쌓은 공덕은 그대에게 지금을 보상하게 될 것입니다! 바드리나트, 케다르나트, 강 고트리, 얌노트리 같은 히말라야 꼭대기에 있는 성지를 방문하자고 하면서 자아는 그대를 방해해 왔습니다.
실상, 그런 곳에 갔던 사람들은 전보다 더 부푼 자아를 안고 돌아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랑스럽게 그곳의 사원을 방문했었다고 사람들에게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사원의 신이 무엇을 주었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사원에서 얻은 프라사드는 평화와 행복이 아니라 단것, 포라들(poras), 코코넛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가지고 돌아와 기뻐하며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세상에는 그대에게 평화를 주는 장소도, 깨달음을 주는 신도 없습니다. 그대는 많은 사원들을 방문했으나, 내가 지금 인도하는, 그대 가슴에 있는 동굴 사원은 결코 가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나’의 근원을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나’가 그 근원을 찾을 수 없었을 때, ‘나’는 사라졌습니다. 마음이 끝나 버렸고, 공간이 끝나 버렸고, 시간 또한 끝나 버렸습니다. 이제 장소, 사람, 마음, 시간을 생각하지 말고, 아무 생각도 노력도 하지 말고 이 안에 머물러 어떤 것을 본다면, 그것이 무엇이겠는지 말해 보십시오.
모르겠습니다.
아. 그대는 모르는군요.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이는 누구입니까? “모르겠습니다.” 그것조차 앎입니다. 앎도, 무도, 공도 없다는 것을 깨우치는 이 ‘나’가 무엇입니까? 이 ‘나’는 무엇입니까?
모르겠습니다.
다시 또 모르는군요나. 모르는 이유를 알려 주겠습니다. 어떤 것을 알거나 보려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손수건을 본다.”고하려면 거기에는 분명히 ‘나’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관찰자나 보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대는 보이는 대상을 보는 자입니 다. 자, 그 보는 자가 누구입니까? 찾아내십시오! 관찰 대상을 볼 때, 또 대상이 관찰될 때, 그 관찰자가 누구인지 찾아보십시오.
그것이 제가 어려워하는 부분입니다.
왜 어려운가요? 그대는 40개국에 있는 300개의 성지들을 관찰해 왔습니다. 이것이 어려웠습니까? 육체적인 어려움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로 지친 대상이 누구인지 질문할 수 있습니다. 몸이 지쳤습니다. 그 육체의 피로를 관찰했던 자는 누구입니까? 보는 자를 알아보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보는 자를 볼 수는 없습니다. 보는 자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보는 자를 볼 수 없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 지금까지 누구도 보는 자를 보지 못했고 접촉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육체는 보이기 때문에 보는 자는 몸이 아니라고 말해 주겠습니다. 마음이 관찰자일 리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생각하기 때문이고 그대는 마음이 생각하는 것을 아는 사람, 보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대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관찰자입니다!”라는 것을 그대는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것을 그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는 다른 것을 찾아다녔을 뿐, 평화 속에서 조용히 인내심 있게 있어 온 자신의 나는 찾지 않았습니다. 나를 찾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고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대가 나를 놓치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너무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그대의 눈은 손가락을 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눈이 눈을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거울을 통해서만 봅니다.
그렇습니다. 거울은 눈의 투사입니다. 하지만 거울을 없앤다면 투사를 없애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투사인 ‘나’라는 거울을 없애고 나에게 말하십시오. 다른 투사를 보기 위해서 ‘나’ 안에서 누가 투사하고 있습니까? 눈의 망막 뒤로 가십시오.
어떻게 갑니까?
망막을 통하여 보기 위해서 망막 이전의 곳에서 정보를 받듯이, ‘나’는 투사이며, 관찰자의 망막입니다. 다시 되돌아가십시오. 그대가 보는 모든 것이 그대의 나에서 옵니다. “나는 나이다. 나는 나이다.”
이 사실을 의심할 수 있습니까?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은 의심입니다. 의심과 “하지만”은 차이가 없습니다. 지옥, 7번 째 지옥은 의심의 산물입니다. 쉬바가 그대에게 걸어올 때, 그가 샹카라(쉬바의 다른 이름)인가 아닌가를 의심하는 것은 지옥으로 가는 직행길입니다. 그곳에서 그대는 다음 번 칼파 때까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창조자가 다시 태어난 후에야, 그대는 삿상으로올수 있는또 다른 기회를 부여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의심에서 오는 결과입니다.
저는 강둑에 서서 강으로 뛰어들지 않았음을 느낍니다.
그대가 행했던 은거와 수행은 모두 강둑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대는 어느 곳으로도 움직이지 않아야 합니다. 또 그대는 어느 곳으로도 은거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 그대는 계속해서 은거를 합니까? 지금에 머무는 것, 그것이 즉시의 은거입니다!
언제, 어떤 것이라도 포기하거나 단념해서는 안 됩니다. 그대가 어느 곳에 있든, 그대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대가 해야 할 일은 이것이 실재가 아니라는 개념을 버리거나 그것이 실재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곳으로도 움직이지 말며, 어떤 것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오직 무엇이 실재인지를 찾아내며, 실재가 아닌 것에는 애착을 가지지 마십시오.
스승과 성스러운 장소들을 찾아다니는 것은 그대가 아직 강둑 위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대가 삿구루에게로 간다면 그는 그대를 보고 고요히 있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런 방법으로는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최고의 메 카는 그대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디로 여행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고요하십시오. 마음이 달려가지 않도록 하십시오. 처음에 마음이 달려가 버렸다면, 다시 마음을 가지고 오십시오. 다시 마음은 가 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가지고 오십시오. 마음은 서서히 고요해지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은 채찍질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대의 마음을 단련시키는 방법입니다. 마음은 오늘이나 내일로 행복해지지는 않을 것이지만, 결국에는 그대가 주건 주지 않건 행복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황소’가 날뛰고 다른 곳을 약탈하여 매 맞지 않도록 하십시오. 황소를 집에 두십시오. 그러면 그것은 고요를 배울 것입니다.
방법은 모두 지식 위주이고 심리적일 뿐이지, 실제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무 방법도 없는 것이 실제적입니다. 방법을 쓰지 않을 때 모든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방법을 쓰지 않을 때 모든 열망과 욕망이 사라집니다. 탐색을 보내십시오. 탐색은 노력도 비노력도 아니다. 그것은 생각도 생각하지 않음도 아닙니다.
저는 노력이 들지 않는다는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 뭔가가 일어나게 되는 유일한 방법은 제 방법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늘 믿어 왔습니다.
그대가 미는 것을 멈춘다면 끌어당기는 힘을 느낄 것입니다. 모든 노력을 포기하십시오. 왜냐하면 끌어당기는 힘만이 그대를 내면으로 움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는 것은 효과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대를 안으로 끌어당겨 가라앉혀 버리는 소용돌이와 같습니다. 노를 버리고 돛대를 부러뜨리십시오. 그리고 고요하십시오keep Quiet. 그렇게 하면 그대를 위한 방향 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제가 하지 않는데도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 일은 그것 스스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기Here에서 그대가 무엇을 한다고 생각합니까? 그저 고요하십시오keep Quiet. 그리고 지녔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던져 버리십시오. 그러면 평탄한 항해가 될 것입니다. 노를 저어 배를 움직였기에 그대는 많은 사고를 겪었습니다. 노를 버리고 이 강을 따라 가십시오. 이 가슴에게 문을 열 시간을 주십시오.
노력하면 가슴은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고요하여, 마음을 안으로 돌리십시오. 그리하여 이 가슴이 말을 하고 그대를 안내하도록 하십시오. 생각이 없는 곳에 가슴은 문을 열 것입니다. 가슴이 문을 열도록 내버려두십시오. 노력하여 그것을 방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이것을 느낍니다. 저는 열리는 에너지를 느낍니다. 하지만 그것은 물결들로서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에너지에 대한 방해물이 있는 듯합니다.
‘오는 것’은 열린다는 것입니다. ‘닫히는 것’은 노력이라는 형태를 띤 그대의 저항입니다. 그대는 수백만 년 동안 노력해 왔고 고통을 겪었습니다. 지금 그대가 원하는 것을 결정하십시오. 노력과 고통인가? 아니면 열린 가슴과 행복인가? 결정은 그대에게 달렸습니다!
방해물은 없습니다. 단지 지금Now만이 있을 뿐.
완성해야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의도하지 마십시오라. 왜냐하면 방해물을 피하기 위한 수행이 바로 방해물이기 때문입니다. 고요Silence는 항상 존재하며Is, 항상 완전하며, 개념을 넘어섭니다.
저는 이제 수행을 끝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지금 마치도록 하십시오. 누가 그대를 방해합니까? 잘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말고 낙담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