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 되자 다도해 건너 제주도에서 화사한 봄소식이 들려온다. 제주도 여행은 한라산을 빼놓을 수 없지만, 사실 초겨울부터 이른 봄까지는 항상 많은 눈 때문에 한라산 등반이 쉽지는 않다. 그래서 제주도를 찾는 대부분의 관광객은 손쉽게 도로변에 있는 성산일출봉(182m)과 산방산(山房山; 395m)을 많이 찾는데, 그런 상황은 제주도 관광통계에서도 잘 나타난다(2014. 2.26. 성산일출봉 참조).
제주시에서 해안도로인 12번 도로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서 서귀포 서남쪽에 이르면 대정읍과 안덕면 사이에 산방산이 있다. 산은 비교적 낮지만 주변에 높은 지대가 없어서 실제보다 훨씬 더 높아 보이는데, 도로에서 한라산 쪽이 산방산이고, 바닷가 쪽이 용머리 해안이다.
제주도에서는 12번 도로 중 멀리 펼쳐지는 바다 풍경이 아주 절경인 전망이 좋은 곳에 산방산전망대와 휴게소를 만들어서 관광객에게 제공하고 있는데, 거대한 절벽으로 이뤄진 남성미 넘치는 산방산 정상에서 용머리 해안을 바라보는 경관은 특히 압권이다.
좁은 섬 제주도에서도 동쪽의 성산일출봉은 현해탄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이 아직은 차갑지만, 산방산에서는 이어도와 마라도 건너 따뜻한 남쪽에서 불어오는 훈풍을 먼저 느낄 수 있다.
제주도 서남부 평야지대에 기암광석으로 이루어진 산방산(위 사진)과 용이 바다로 들어가는 형상을 닮았다하여 이름 붙여진 용머리 해안. |
산방산은 제주도의 다른 오름 들과 달리 화산 폭발로 형성되지 않고 산 전체가 거대한 용암 덩어리로 이뤄진 것이 특징인데, 산의 모습도 뭍의 산처럼 뾰족하지 않고 마치 바가지를 뒤집어 놓은 것 같이 생겼다.
산방산의 생성 설화는 두 가지가 전해오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오랜 옛날 어느 사냥꾼이 한라산에 사냥을 갔다가 실수로 활로 산신의 엉덩이를 쏘게 되었는데, 화가 난 산신이 손에 잡히는 대로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던진 것이 날아와서 산방산이 되고, 봉우리가 뽑힌 자리는 백록담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다른 하나는 여신 산방덕과 고승(高升)이란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이곳의 주관(州官)으로 있던 자가 산방덕의 미모를 탐내어 남편 고승에게 누명을 씌우고 야욕을 채우려 하다가 이를 알아차린 산방덕이 속세에 온 것을 한탄하며 산방굴로 숨어서 바윗돌로 변했다는 것이다.
암반 덩어리인 산방산은 등반이 매우 위험해서 오랫동안 입산을 통제하다가 2011년 2월 1일 해제했지만, 자연훼손의 우려와 등산객들의 안전문제가 불거져서 불과 이틀 만에 다시 2021년까지 입산을 통제해버렸다. 결국 관광객들은 산방산은 올라가지 못하고 해발 200m쯤에 있는 산방굴사까지만 갈 수 있는데, 산방굴사는 너비 5m, 높이 약5m, 깊이 약 10m 정도인 작은 굴에 불상을 모셔놓은 절집을 말한다.
고려시대의 고승 혜일(蕙日)이 수도를 했으며, 조선 말기 제주도로 유배된 추사 김정희가 즐겨 찾았다고 하는 산방굴사는 특이하게도 불상 앞 동굴 천장에서 약수가 떨어지는데, 이 물은 산방산의 여신 산방덕이 흘리는 사랑의 눈물이며, 이 물을 마시면 장수한다는 속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풍류를 즐기던 조선 선비들은 산방굴사를 영주십경(瀛州十景)중 제8경으로 꼽기도 했지만(2014. 2.26. 성산일출봉 참조), 산방굴사로 가는 길은 들머리부터 서로 다른 세 곳의 절집에서 들리는 목탁소리와 독경소리가 뒤섞이는데다가 큼지막하게 세운 매끈한 석불도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산방산 앞자락 유채꽃밭. |
산방산 중턱을 가로지르는 12번 도로 아래는 조선시대 한양과 통신수단으로 불과 연기를 피우던 봉화 터인 산방연대(山房煙臺)가 있는데, 제주도에서도 가장 남쪽에 있는 이곳에서부터 바다를 향해서 마치 용이 용틀임을 하듯 튀어나온 산줄기를 용머리라고 한다. 용머리 해안에서 송악산으로 이어지는 해안 길은 기암괴석과 아름다운 꽃이 어우러지고, 이른 봄이면 유채꽃이 온통 샛노래서 이른 봄 제주도 풍경을 담은 사진에 단골로 등장하는 관광명소이다.
산방연대에서 100m쯤 내려오면 360년 전인 조선 효종 3년(1653)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인 바타비아(지금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타이완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무역선 스퍼로 호크(Sparrow Hawk)호가 풍랑으로 난파되었다가 14년만인 1668년 탈출한 하멜 일행을 기념하는 하멜 표류 기념탑이 있다. 스퍼로 호크호는 선원 64명 중 28명이 죽고 36명이 구조되었는데, 조선에서 14년 동안 억류되던 선원들은 하멜 등 8명만이 1668년 일본 나가사키로 탈출했다가 귀국했다. 그 후 하멜은 조선에서 머물렀던 동안의 표류기를 출간하여 조선을 유럽에 최초로 소개했다.
기념탑에서 좁은 산길을 내려와 바닷가에 이르면 왼편은 용머리 해안을 둘러볼 수 있는 매표소 입구이고, 오른편은 하멜 일행이 타고 온 무역선 스퍼로 호크 호를 복원해둔 사계리 마을로 가는데, 산방연대 아래 하멜 표류 기념탑을 세우고, 산방산에서 용머리 해안을 따라 밀려온 토사가 완만한 안덕면 사계리(沙溪里) 해안에는 난파되었던 무역선을 복원한 것이다(2014. 2.19. 제주도의 봄 참조). 지금 이곳은 온통 노란 유채꽃 천지다.
용머리해안 형제섬(왼쪽)과 하멜표류상선. |
제주도에는 아름다운 해안도로가 많지만, 특히 사계 해안도로는 이국적이고 주변 풍경이 매우 뛰어나다. 산방연대에서 좁은 산길을 내려가는 동안 바다를 향해서 뻗어나간 용머리 해안의 기기묘묘한 바위 형상은 무려 20m가 넘는 용암이 흘러 만들어진 절벽의 모습이지만, 신이 빚어놓은 수직 암벽의 이 모습을 배경으로 일 년 내내 많은 CF와 영화 촬영장소가 되고 있다. 바다를 끼고 돌아가는 해안의 바위 아래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연합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뚫었다는 동굴이 남아있지만, 과거를 알지 못하는 관광객의 눈에는 모든 것이 평화롭게만 보인다.
아쉬운 점은 파도가 거친 날에는 용머리 해안의 출입이 금지되고, 밀물 때도 그 장관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또, 최고의 비경을 자랑하던 용머리 해안이 유네스코 지질공원명소에 포함되어 대표적인 제주도 관광지로 되면서부터 하멜 일행이 은둔의 나라 조선에 표착한 표류 기념탑과 그가 타고 온 무역선을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는 것은 뒷전으로 밀린 느낌이다.
하멜 일행의 표착을 기념하여 난파한 배를 만들고 기념관까지 지었다면 제대로 관리해야 할텐데도 표류 기념탑은 돌보는 사람이 없는지 황량하기만 하고, 복원한 뱃머리까지는 1회 승마에 5천원씩이라며 관광객들을 유혹하는 호리꾼들이 매어둔 조랑말과 배설물들이 질퍽해서 코를 막게 한다. 더더구나 하멜의 나라 네덜란드를 엿보라며 만든 체험관이란 조립식 건물조차 관광객들의 주머니를 훑어내려는 얄팍한 상혼이 판을 치고 있어서 뜻있는 사람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용머리 해안을 둘러보는 매표소 입구도 마치 해안을 지키는 군부대초소처럼 옹색하고 딱딱할 뿐 아니라, 사계리 입구의 주차장에서 용머리 해안으로 가는 길은 마치 시골마을 골목길처럼 구불거리고, 관광객들을 위한 조랑말들과 그 배설물의 악취가 심해서 외국인 관광객은 물론 내국인 관광객들도 이맛살을 찌푸린다. 이것은 제아무리 자연보존을 위한 배려(?)라고 십분 자위하더라도 최고의 절경을 외면하게 만드는 옹색하고 편협한 관광지 관리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정승열 법무사
한국공무원문학협회장
대전시임대차상담관, 대전시옥외광고협회자문위원
한국토지공사, 한국수자원공사연수원외래강사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외부인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