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그것은 수행
강인준 ― 경기도 과천시 부림동 ―
따뜻한 사랑에 목말라 하는 이에
미약하나마 용기와 힘을 주는게
얼마나 보람있고 정법을 실천…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홈.
어디에선가 한번쯤 들은 소리, 귀에 익숙한 소리인 독경 소리를 듣다 보면 아련하게 이끌리는 무엇인가가 가슴속에 메아리 친다. 요즘 나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불교와 인연이 있었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독경 소리를 들으면 분명히 태(胎) 속에서, 아니 그 이전의 세상에서부터 들어온 소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고명 딸이셨던 어머니는 2대 독자인 아버지께 시집오셔서 딸 셋을 낳은 후 그토록 바라던 아들을 낳기 위해, 아니 당신 스스로 불교경전을 공부하며 한글을 깨치시려고 가까운 사찰에 다니셨다. 그러던 중 원하던 아들을 낳으셨지만 그 아들이 백일도 되기 전에 홀연히 부처님 나라로 떠나셨다. 세상을 겨우 30여 년 사시고 가시다니…. 내가 불교에 귀의하게 된 것은 어쩌면 이런 어머니의 정성과 끝없는 이끌림이 마음속 한가운데 깔려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가난으로부터 벗어나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고 싶어서 교회에 나가 찬송가도 부르고 하나님께 기도도 해 봤지만 해결점을 찾지 못했다. 중·고등학교 친구들 대부분이 교회에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친구들의 인도로 이 교회 저 교회 무던히도 따라다녔다. 그러나 가슴 한 구석에는 ‘이것은 아닌데, 내 갈 길은 다른 데 있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후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삶에는 철학과 목표점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잊고 지내던 불교를 다시 찾게 된 것이 재가 신행모임인 ‘부처님마을’에서 였다. 부처님마을은 불교학생회에서 활동하던 일부 사람들이 학교 시절 열심히 하던 포교와 수행을 계속하자고 결성한 모임이다. 회원들 대부분이 사회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기반을 잡고 살아가는 중산층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처음 사찰에서 1박2일 동안 열린 가족단위 여름수련회에 참석했을 때, 같은 뜻을 지닌 법우들과 함께 절하며 참선했던 시간이 인상에 남았다. 또 체계적인 불교 교리를 배운 것이나 스님들의 수행 경험담을 들은 것도 신행 생활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돼 연례행사처럼 한 해 두 해 빠지지 않고 참석하게 되었다.
이때의 소중한 경험들이 성인이 된 지금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또 어떻게 살아야 바르고 후회없이 사는 방법인지를 깨닫게 해 주었다. 곧 태어날 아이들, 나 하나만 보고 시집 온 아내,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니 등 내 가족을 위한 삶이 어떤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부처님마을’ 지역모임을 결성하고 가정 법회를 개최하며 이웃과 가족을 위한 기도를 시작했다. 이런 기도가 관음 기도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관세음보살님이 바로 돌아가신 어머님이라고 생각하며 어머니가 보고 싶어도 관세음보살님, 어머니가 그리워도 관세음보살님의 명호를 부르며 오로지 관세음보살님께 의지했다. 거실에다가도 관세음보살을 탁본한 사진을 구해 모셔놓고 조석으로 절을 올렸다.
나는 매일 출근하기전 관세음보살님을 향해 “오늘도 힘차고 즐겁게 시작하겠습니다” 다짐하고, 또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서는 “부처님 오늘은 이런 속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기분 좋은 일도 있었습니다” “나만의 행복으로는 아쉬워 이웃과 함께 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등 하루동안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고하며 참회하는 것이 주된 일과가 되었다. 이러한 일을 15년동안 반복하다보니 저절로 자기 반성의 시간을 갖게되었고 그러다보니 내성적이고 폐쇄적이며 소극적인 나의 성격에도 많은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요즘도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 관세음보살을 염하고 ‘오늘도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렇게 무사히 잠자리에 들게 되어 감사합니다’를 수없이 되뇌인다. 그러면 가끔씩 꿈에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의 모습과 부처님의 모습이 보이며 어릴 적 살던 고향집과 산과 들판 등이 보이곤 한다.
아침에는 예불을 올리고 <천수경>을 독송한다. 또 시간이 없으면 아침 운동 시간을 이용해 집 근처 약수터에서 입을 깨끗이 씻고 물 한모금 마신 후 예불과 천수경을 올린다.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은 절에서 예불을 올려야 한다는 생각에 마지막 주 일요일에는 새벽 일찍 관악산 연주암에 올라 예불을 드린다. 기도가 끝나면 산사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한 달 계획을 구상하고 직장에서 해결하기 어려웠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이런 생활을 몇 년간 지속하다 보니 이 습관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출장이나 집안 행사 등으로 몇 번씩 거르게 되면 이제는 오히려 허전한 마음이 들 정도다. 현재는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접할 수 있게 직장내 불교 신행모임을 결성해 선지식 초청법회를 열고 성지 순례까지 주선하고 있다. 처음엔 몇 명 안되던 회원들이 이제는 제법 많아져 서로 만나 얘기할 때도 경전이나 사찰 이야기가 주된 화제가 되곤 한다.
가정에서는 지중한 인연을 통해 내게 온 두 딸들이 스스로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줄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달라고 항상 부처님께 기원하고 있다. 또 이 아이들이 지혜롭게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문수보살님의 대 지혜를 얻고 보현보살님의 행을 따라 맑고 티없이 명랑하게 생활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문수·보현 보살님의 모습을 그린 병풍을 애들 방에 놓아 주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기도란 단순히 원하는 것을 이루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비는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을 몸소 실천하며 보시행을 베풀수 있는 지혜와 힘을 달라고 발원하는 것이란 것도 빼놓지 않고 가르친다. 그래서 아이들이 직접 소년원 법회에도 참석하게 해 피아노 반주를 하며 소년원 언니들과 함께 찬불가를 부르면서 죄를 짓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를 깨닫게 해주었다. 또 이렇게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따뜻한 사랑에 목말라 살아가는 이들에게 미약한 힘이나마 용기와 힘을 주는 것이 얼마나 보람있고 부처님 정법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길인가도 설명해 주곤 한다. 그래서인지 두 아이들은 요즘 청소년 답지 않게 본인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명확히 구분할 줄 안다. 또 열심히 독서하고 사고하며 어른을 공경하고 이웃과 잘 어울리고 친구에게 양보하는 이타행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다. 학교 성적도 뛰어나 선생님은 물론 주변 이웃 어른들의 칭찬이 자자해 부모로서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이 모두가 부처님의 가피라 생각한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큰 아이는 평소에도 열심히 기도하고 있지만 대학입시를 앞두고는 온 가족이 모여 “경민이가 대학에서 한의학을 공부해 평소 몸이 불편한 스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아픈 중생들을 치료하고 보호할 수 있는 능력과 기회를 주시옵소서!”라고 온 정성을 모아 기도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가족끼리 모이는 시간도 많아져 예전보다 더 화목해 졌다. 온 가족이 하는 기도는 단순히 공동으로 발원하는 행위 자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화합도 도모시켜줘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을 알게됐다. 기도도 성적을 올리게 해달라는 내용보다는 “큰 딸 경민이가 열심히 공부할 수 있도록 가족 모두가 합심해 배려하도록 하겠습니다.”라는 식이 많아 공부와 성적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또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이렇게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온 가족의 정성을 알았는지 경민이도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열심히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1학기 성적보다 2학기 성적이 조금 나아지고 1학년 성적보다 2학년 성적이 높아지면서 원하는 목표점을 향해 차근차근 진행해 가는 모습을 보니 부모로서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경험상 수험생을 둔 가정에서 기도 할 때 유념해야 할 것은 절대로 목적을 바라는 기도를 해서 자녀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은 금물이라는 것이다. 만일 ‘성적을 올려달라’ 든가 ‘일류대학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본인이 상당한 부담을 느끼게 돼 오히려 탈선할 염려도 있기 때문이다. 91년부터 재소자 청소년 교화 차원에서 소년원에서 법회도 봉행하고 있다. 두 딸을 둔 아버지로서 소년 소녀들에게 불법을 알려 그들이 다시는 악업을 짓지 않도록 보살피고 있다. 다. 특히 수원 소년원이 안양 석수동에 신축 이전되면서 종교실을 배정 받아 매주 일요일 마다 소년원 아이들과 함께 열심히 기도하고 관세음보살님을 마음껏 부를 수 있는 조그만 법당을 만든 것이 기억에 남는다.
소년원에는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절도, 유해물 취급, 성폭행 등 다양한 범죄를 저질러 이곳으로 들어온 아이들은 놀기 좋아하고 집중력이 떨어져 포교 하기가 일반 청소년들보다 몇배나 힘들다. 하지만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노라면 모두가 내 자식같아 사회에서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히 든다.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의 이 아이들을 어떻게 포교할 것인가?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화두였다. 이들을 대상으로 가정환경을 조사한 결과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결손가정의 아이, 편부모 아래에서 자란 아이, 할머니나 친척집에서 살고 있는 아이, 부모가 있어도 대화를 거의 해본적이 없는 아이,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가정의 아이, 정을 받고 자라지 못한 아이 등 천차만별 이었지만 공통된 현상은 부모로부터의 애정 결핍이었다. 이들을 만나보니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나의 유년시절이 생각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아 이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자고 원을 세워 기도했다.
매주 일요일 하루만이라도 소년원 아이들을 내 딸들과 똑같이 여기고 그들에게 친아빠가 되주려고 노력했다. 또 그들이 부처님법에 의지할 수 있도록 소년원 법당에 모실 관세음부처님을 전남 나주에서 모셔와 법당을 꾸몄다.
아이들과 같이 법회때마다 관음정근도 하고 틈나는대로 찬불가 배우기, 108배 참회기도, 경전 퀴즈대회, 연등 만들기 및 반야심경 염송대회 등도 열어 부처님법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게 했다.
요즘은 한 달에 두 번 밖에 소년원 선재법당에 계시는 부처님을 만나지 못하지만 10년동안 열심히 그들과 함께 기도하며 포교했다. 그 10년 동안 많은 아이들이 선재법당을 거쳐갔다. 지금도 그 아이들이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삶을 살도록 기도하고 있다. 10년 동안 소년원 포교를 하면서 우리 가족도 사회에서 그늘지고 소외된 곳에 있는 이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자 노력하며 살아왔다. 앞으로 남은 세월도 가족을 위해, 주변의 동료와 이웃을 위해, 온 우주의 생명체를 위해, 찬불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끝없는 정진의 시간으로 자리매김 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