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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바울로)
무슨 말인가? 언제는 자기가 살았던가? 그리스도 없이 자기가 자기로 살았던가? 그랬을 리 없다. 나뭇가지가 나무를 떠나서 어떻게 살았으랴? 실인즉 처음부터 그리스도가 바울로 안에서 바울로 모습으로 살았다. 그런데 본인은 그런 줄 몰랐다. 내가 나로 산다는 착각 때문이다. 그러다가 빛인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와 하나 되기를 갈망한 끝에 마침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그의 ‘나’가 죽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나로 존재한다는 착각이 깨어지는 순간 “이제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신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 그가 아직 미망(迷妄)에 빠져 그리스도를 핍박할 때도, 스테파노를 돌로 치는 자들의 옷을 간수하던 때도, 실은 그리스도가 그 안에서 그렇게 하셨던 것이다. 집을 떠나는 아들과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이 서로 다른 두 아들이 아니다. 같은 아들이다. 가까이서 보면 안 보인다. 멀리서 보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