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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에서 서울까지
자 전 거 수 상(隨想)
하룻날 (8월 2일)
정오, 서울 광화문 광장을 목적지로 삼고, 자전거 발판을 힘껏 밟으며 곡성을 출발하였다.
여러 해 전부터 마음먹은 일인데, 이런 저런 이유로 미뤄 왔던 것을, 오늘에야 비로소 행동에 옮긴 것이다. 그동안 텐트 치는 법, 버너 조립하는 법 등을 틈나는 대로 익혀왔으며, 어머님께서 걱정하실까봐 계모임에서 며칠간 여행을 떠난다고 미리 말씀도 드렸었다.
당초에는 내일(3일) 아침에 출발하기로 마음먹었으나, 오늘 아침나절에 모든 채비가 끝나는 바람에,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어서 박차고 일어 선 것이다.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훌쩍 길을 떠나고 보니 몸과 마음이 새털처럼 가볍다. 그야말로 자유로운 나그네가 된 것이다.
전라남북도의 경계를 이루고 흘러가는 섬진강을 가로지른 금곡교를 지나 한참을 가다보면, 길가에 민물장어집이 나온다. 평소에 호형호제 할 정도로 가깝게 지내는 후배가 운영하는 가게라서, 스스럼없이 들어가니 내외간에 반갑게 맞아준다. 맛있게 점심을 대접받고, 밑반찬까지 챙겨서 가게 문을 나섰다.
앞날을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기대가 엇갈리는 가운데, 얼굴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이 그저 상쾌하기만 하다.
왼쪽 길가에 4.19의거의 단초가 되었던 김주열열사의 사당이 보인다. 여러 번 들렀던 곳이라서 그냥 지나쳤다. 다만 수많은 젊은이의 목숨으로 이루어진 민주주의가 이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다시 옛날로 되돌아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가 없다.
남원 가는 국도변 가로화단에는 배롱나무, 백당나무, 부용 등이 심어져 있었다. 지방자치시대라서 그런지 가는 곳마다 서로 다투듯이 가로화단 꾸미기에 열심이다. 그중에서 특히 배롱나무는 목 백일홍이라고도 하는데 예전에는 무덤주위나 절간 등에 주로 심었으나, 개화기간이 길고 줄기가 매끈하여 손으로 만지는 느낌이 좋아서 그런지, 요즈음은 가로수로 인기가 좋다. 이러다가는 나중에 너무 흔해져서 천해질까 걱정된다.
춘향고을 남원시 광한루 앞에 요천수라는 냇가가 있는데, 그 주변을 춘향테마파크, 관광단지, 분수대, 공연장, 산책길 등으로 잘 가꾸어 놓았다. 산책길가에 있는 정자에 배낭을 내려놓고 누웠다. 한낮의 뜨거운 햇볕아래 벚나무 고목에서 울어대는 매미소리가 시끄럽다. 가고 싶으면 가고 쉬고 싶으면 쉬는, 내 마음대로의 자유가 좋다.
남원시 산동면에서 장수 가는 길은 구비 구비 오르막이다. 이웃인 구례군에도 해마다 봄에 산수유 축제가 열리는 산동면이 있는데, 같은 지리산 자락에 있는 두 동네가 같은 이름이라서, 산동면의 소재를 놓고 서로 다투거나, 내기를 할 만큼 헷갈릴 수도 있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다.
장수읍 못미처, 하북이란 마을에서 해가 저물었다. 마침 마을 옆을 흐르는 냇가에 정자가 있어서 거기에다 짐을 풀었다
저녁준비를 하고 있는데, 곱상하게 생긴 아주머니 한분이 다가와서는, 여행을 혼자서 다니느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했더니, 혼자서 무슨 재미로 다니느냐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돌아갔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풋고추 된장에 마늘과 김치뿐인데도 맛이 있었다.
잠자리에 누웠는데, 낮에 들렀던 민물장어 집 후배한테서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란다. 성공을 확신할 수 없어,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일러뒀기에, 나의 자전거여행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혼자서 무슨 재미로 다니느냐고 하던, 아까 그 아주머니가 혹시라도 밤늦게 찾아 올라나? 아서라, 그런 횡재(?)가 어디 그리 흔하랴! 냇가를 흐르는 물소리가 꼭 빗소리 같다.
이틀째 (8월 3일)
나는 산보다는 길이 더 좋다. 높은 산을 바라보면서 오르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드는데, 길만 보면 가고 싶다. 등산이 남성적인 운동이라는데, 그렇다면 나는 덜 남성적이라는 말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지금 찌는 듯한 삼복더위에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어가며, 짐 싫은 자전거를 끌고 끝도 없는 고갯길을 숨 가쁘게 올라가고 있다. 오르막길에서 자전거는 한낱 짐일 뿐이다. 이 고개를 넘어야 장수읍이 나온다.
고갯길 양쪽으로 복숭아밭이 즐비한데, 곳곳에다 복숭아를 쌓아 놓고 팔고 있는 것을 보면, 이 고장의 특산물이 복숭아 인듯하다. 날은 덥고 목은 타는데 견물생심이라고 잘 익은 복숭아를 보니 침이 꼴깍 넘어간다. 그렇다고, 달랑 한 개만 사기도 그렇고 해서,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힐끗힐끗 바라보고 가는데, 그저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한다. 허탈한 마음으로 계속해서 올라가는데, 포도나무로 울타리를 친 외딴집 한 채가 나타난다. 주렁주렁 열린 포도가 길가에서도 손에 바로 잡힌다. 포도 알 하나를 따서 입에다 넣었다. 장마 탓인지 약간은 시었지만 내 입에는 달았다.
지나가는 나그네의 손이 닿을만한 곳에 포도나무를 심은 것으로 보아, 이 집 주인은 틀림없이 좋은 사람이리라.
동네도, 나라도, 좋은 사람끼리 모여 살아야 행복하다. 그런데 요새는 내 눈이 잘못되었는지, 온통 못된 놈들이 설치는 모습만 눈에 띈다. 포도 알 몇 개를 더 따서 입에다 넣고 길을 재촉하였다.
눈앞이 환해지는 것을 보니 고갯마루에 다다른 것 같다. 자전거를 받쳐놓고 길가에 주저앉았다. 숨 막히는 오르막도 끝까지 가다보면 반드시 정상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시원한 내리막이다. 인생길도 마찬가지라면, 고통도 삶의 한 부분이기에 소중한 것이 아닐까?
갑자기 고 노무현 전 대통령님이 떠오른다. 「삶과 죽음이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님 의 마지막 말씀이 서럽게 가슴을 파고든다.
장수읍 입구에 있는 논개사당에 올라갔다. 노인 두 분이 새우깡에다 소주로 우정을 나누시다가 나를 보고는 한사코 잔을 권하면서 한 말씀하신다. 씨잘 대기 없이 사랑타령 밖에 모르는 남원의 춘향이사당은 관람객이 줄을 선다는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논개 사당이 이렇게 썰렁해야 쓰겠냐며, 우리 논개님이 춘향이보다 못한 것이 무엇이냐며 제법 핏대를 올려 말씀하신다. 지당하신 말씀이라고 맞장구 치고는 얼른 사당을 내려오는데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저수지의 풍광이 제법 아름답다.
진안 가는 고갯길 중간쯤에「조신마을」이 있다. 그 마을 입구에「춘송정」이라는 샘물이 있는데, 동네사람에게 물어보니 먹을 수 있단다. 마침 목이 말랐던 터라 한바가지 떠서 마셨더니 속이 다 시원했다. 길가에 마실 수 있는 샘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이 여간 반갑지 않았다.
고갯길 양쪽에 피어난 갖가지 꽃들이 피곤한 나그네의 몸과 마음을 달래준다. 개망초, 애기똥풀, 패랭이꽃, 갈퀴나물, 마타리, 원추리, 참나리, 산도라지, 칡꽃, 노랑코스모스, 민들레홀씨, 붉은토끼풀, 설악초, 봉숭아, 상사화, 호박꽃, 등이 잡초 속에서 자연스럽게 피어있다. 질서정연하게 만들어놓은 가로화단보다 훨씬 더 정답게 느껴졌다.
진안읍 못가서 주천면 가는 길에, 용담댐 수몰한계선이라는 팻말이 보였다. 조금 더 가니까 널따란 용담호가 눈앞에 나타났다. 말이 호수이지 마치 남해안 다도해에 온 느낌이다.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호숫가에 있는 산모퉁이인지, 호수 안에 있는 섬 안인지 구별이 잘 안 된다.
나지막한 산위에 정자가 하나 보였다. 날은 이미 저물고, 진작부터 잠자리를 찾고 있던 터라 자전거를 끌고 산위로 올라갔다. 팔각정 모양의 3층 전망대였다.
1999년에 만들어 졌으며, 팔각정 옆에는 높이 10미터쯤 되어 보이는 망향탑이 세워져 있었다. 팔각정 1층은 매점을 했던 곳인지, 자물쇠가 채워져 있기에 서둘러 잔디밭에다 텐트를 쳤다. 사방이 적막하고 약간은 으스스 했지만 텐트 안으로 들어가니 그저 아늑하기만 했다. 닭이 쫒기다가 다급하면 머리만 처박는다고, 눈에 안보이면 잊는 법이다.
하루아침에 고향을 잃은 수몰민의 애환과, 조국분단으로 인한 실향민의 아픔이 묘하게 어우러진다.
아, 조국통일! 그날이 언제일까?
사흘째 (8월 4일)
아침에 일어나니, 자욱한 안개 속에 누워있는 호수가 평화롭기만 하다. 팔각정 옆에 적힌 망향의동산 조성 배경이다.
「 1976년에는 1567호에 9139명이 거주할 만큼 번창하였으나 전라북도의 용수 난을 해결하기위한 용담댐 건설로 인해 17개 분리와 많은 유적이 수몰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조상의 얼과 숨결을 되새겨보는 한편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산의 한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따뜻한 정을 담아 면민의 뜻으로 이곳에 망향의 동산을 조성하게 되었습니다.」
손오공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말처럼, 한참을 달렸지만 여전히 용담호 안이다.「용담호쉼터」라고 써진 가게 앞 호숫가에서 중년의 수몰민 한사람을 만났다. 이곳에 조상의 묘가 있어서 자주 온단다. 지금은 배가 보이지 않지만, 명절 때는 배를 띄워서 성묘를 할 수 있게 해준단다.
고향이 뭐 길래, 명절도 아닌 이때 쓸쓸히 혼자 와서, 애틋한 마음으로 하염없이 호수만 바라보는 것일까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류시화님의 시처럼, 나 역시 맨 날 고향에 살고 있어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판에,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길가 절개지에 싸리 꽃이 만발했다. 싸리를 비롯하여 참싸리, 풀싸리, 조록싸리, 땅비싸리, 족제비싸리, 광대싸리를 나는 싸리 7형제라고 부른다.
용담댐이 끝나는 곳에서 충청남도 금산이 마중 나온다. 그전에는 전라북도였다는데, 충남이 고향인 김종필이가 바꿔놓았단다.
한적한 시골길을 한참을 달리다보니「지금부터 1km는 솔 재 구간입니다」라는 교통 표지판이 보인다. 앞으로 1km를 애마인지? 애물단지이지 모르는 자전거를 끌고, 솔 재정상까지 올라가야 한다. 길가에 쑥부쟁이 연보라 꽃이 바람에 하늘거린다.
금산경찰서 남일 치안센터 마당에 있는 유선각에다 짐을 풀고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났더니, 내 옆자리에서 젊은 청년 한사람이 전화를 하고 있었다. 행색을 보니 나와 같은 자전거 여행자였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무척 반가웠다.
「자네는 어디서 와서 어디까지 가는가?」
「예, 부산까지 갑니다. 서울에서 왔는데요, 어르신은요?」
「나는 전라남도 곡성에서 왔는데 서울까지 간다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부산까지 가는가?」
「여자 친구 만나러 갑니다.」
마치 부산이 옆 동네나 된 것처럼 서슴지 않고 대답한다. 갑자기 젊음이 부러워진다.
「어르신은 왜 이런 고생을 하십니까?」
「글쎄, 그냥 좋아서 그러지 뭐.」
현문우답인 것이다. 다만 자전거 여행을 작정하고서 지금까지, 그 목적과 의미에 대하여 나 스스로 명쾌하게 정리하지 못한 부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어정쩡한 대답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건강하게 잘 가시라고 깍듯이 인사하고, 먼저 떠나가는 젊은이의 예의바른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목적지가 같았으면 좋았을 것을! 아쉬운 마음에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금산이 가까워지니, 인삼밭의 까만색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아스팔트위에「자연이 아름다운 고장 금산」이라는 플래카드가 바람에 펄럭인다. 자연이 아름다운고장? 인삼밭의 까만색이 아름답다는 것인가? 현실과 맞지 않는 어색한 구호가 지나가는 나그네의 코웃음을 자아낸다.
대전가는 국도 17호선은 편도 3차선이나 되는 고속도로 같은 국도이다. 갓길도 넓은데다가 평지라서 자전거 타기에 안성맞춤이다.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이런 길을 갈 때에는 갖가지 상념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느닷없는 생각들이 제멋대로 떠올라 서로 토론하고, 다투고, 대들고, 가르치고, 배우고. 후회하고, 고백하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갑자기 눈앞에 터널이 나타났다. 1.7km라고 적혀 있었다. 나에게는 익숙하지 않는 낯선 길이다. 터널 안을 살펴보니 갓길이 1m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찌하랴! 되돌아갈 수 없을 바에야 앞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숨을 가다듬고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당기면서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오는 차들이, 알아서 잘보고 피해가주기만을 바라면서 정신없이 달렸다. 되돌아볼 수도, 멈출 수도 없다. 터널 안에서 자동차소리는 또 왜 그렇게 큰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어차피 비싼 돈 들여서 터널을 뚫을 바에야, 갓길도 좀 넉넉하게 만들었어야지! 멍청한 놈들, 바보 천치 같은 놈들, 한치 앞도 못 보는 근시안 같은 놈들 , 둘도 모르는 단세포 같은 놈들, 누구한테 인지도 모르는 욕지거리를 퍼붓다보니, 멀리서 나가는 문이 희끄무레하게 나타난다. 목숨을 건 주행이었다면 엄살일까?
땀을 닦고 숨을 고른 후에 다시 자전거에 올라탔다. 위기탈출의 안도감 때문인지, 내리막길의 시원한 바람결에 다시 콧노래를 날렸다
대전 들머리에 있는 산내초등학교에다 텐트를 쳤다.
나흘째 (8월 5일)
엊저녁에 만들어놓은 누룽지를 아침에 끓여 먹었다. 숭늉 맛이 더 구수했다. 「숭늉 맛이 얼마나 좋았으면 우리 선조들은 숭늉을 숭님이라고 깍듯이 높여서 불러왔다.」고 그 옛날 광주교대 어느 교수님이 그랬다.
대전역을 지나 대덕구청 부근에서, 우체국을 물어서 찾아갔다. 소용없는 짐을 싸서 택배로 부치기 위해서였다. 주로 지붕아래에다 텐트를 치다보니 차광막과 땅깔개, 쇠말뚝이 소용없었다. 비옷도 그렇고, 사진기도 가벼운 1회용으로 바꾸기로 하였다. 짐이 무거우면 힘 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전거를 마음대로 조종하기 어려워 그만큼 안전성이 떨어진다. 짐을 덜고 나니 몸보다 마음이 더 가볍다.
신탄진 가는 길은 맥문동으로 꾸며져 있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연보라색 꽃은 언제보아도 산뜻하고 귀엽다.
탄약사령부 제1탄약창을 지나 회덕 나선교로 들어섰다. 회색 반바지를 입었는데, 바지 끝이 자꾸 무릎에 걸리적거려 그럴 때마다 손바닥으로 바지 끝을 말아 올리려니 제법 신경이 쓰였다.
삼각팬티! 그렇다. 여름에 자전거 여행을 할 때는 삼각팬티가 제격일 것 같다. 보는 사람만 없다면….
신탄진에 도착하여 길옆 가게에 들어가서, 행정구역상 신탄진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물어봤다. 오는 내내 궁금했기 때문이다. 「대전시 대덕구 신탄진동」이란다. 도시의 말단 행정구역인 한낱 동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진 것은 바로 신탄진담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신탄진 다리를 건너가면 청원군이다. 청원 가는 국도변은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청주여자교도소를 지나니 「직지의 본향 아름다운 교육 문화도시 청주」라는 현수막이 보인다.
어떻게 알았는지, 며느리한테서 전화가 왔다. 몸조심하란다. 아들녀석이 대학 다닐 때, 운동권에서 같이 있었던 아이다. 광양이 친정이고, 이름이 채순덕인데, 순덕이란 촌스런 이름이 하도 좋아서, 손자 놈 낳기 전까지는 그냥 순덕이라고 불러댔다. 나에게 과분할 정도로 여러모로 괜찮은 아이다. 특히, 부부금슬이 샘이 날 정도로 좋아서 걱정할 일이 별로 없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는 생각만큼 쉽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오창초등학교에다 텐트를 쳤다. 운동화를 신고 달리다보니, 날마다 양말을 빨아야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차라리 맨발이 더 났겠다 싶어서, 고무신을 사러 밖으로 나갔다. 술집간판이 맨 먼저 눈에 띈다. 갑자기, 며칠 동안 참아왔던 술 생각이 났다. 고무신집 주인에게 막걸리 집을 물었더니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좁다란 골목길, 허름한 막걸리 집을 찾아들어가니, 텅 빈 가게 안에서 늙은 아줌마 둘이 반갑게 맞아준다. 한사람은 주인이고 또 한사람은 이웃마을에 사는 친구인데 장날만 되면 만나서 시간을 보낸단다. 주인은 소주, 친구 분은 맥주, 나는 막걸리, 서민3대명주를 한군데 모아놓고 마음껏 마셔댔다. 막걸리 맛이 생각보다 좋았다. 술맛이 좋은날은 1차로 끝난 적이 거의 없다. 호프집으로 2차를 갔다. 주객이 똑같이 신이 나서 돌아다녔다.
닷새째 (8월 6일)
아침에 눈을 뜨니 텐트 안이다. 머리가 어지럽고, 뱃속은 거북하여 죽을 맛이다. 숙취가 심한데도 술 마실 땐 잊어버린다.
진천가는 17번 국도는 적당한 오르막으로 땀 빼기에 좋았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이마에 땀이 흐르고, 속옷이 척척해진다. 어느새, 머리가 맑아지고 속도 많이 편해졌다. 아까는 죽을 맛이더니, 이제는 다시 살맛으로 바뀌었다.
길가에는 플라타너스아래 빨간 칸나, 노란 칸나가 번갈아서 예쁘게 피어있다. 빨간색 칸나는 흔히 보는 것이지만, 노란색 칸나는 처음 본 것 같다.
바야흐로 색의시대이다. 지방자치가 열리면서 저마다 자기지역을 돋보이기 위해, 색의 경쟁을 벌이고 있다.
20여 년 전, 곡성서교에서 근무할 때다. 어느 날 저녁, 환경정리 때문에 학교에서 물감을 섞어가며 붓으로 글씨를 쓰고 있는데, 가까운 동료 한사람아 다가와서 말을 건넨다.
「야, 색을 참 잘 쓴다!」
「그렇게 봐주니까 고맙구먼.」
「색을 이렇게 간드러지게 잘 쓴 사람은 처음 봐.」
「갖고 놀다 제자리에 갖다놔!」
「여자들이 좋아하겠어.」
「뭐야? 예끼, 이사람! 그런 색을 말했던 거야?」
그날 저녁, 주막집에서 주모들과 어울려 흘러간 옛 노래에 상다리를 두들겨가며 막걸리를 퍼마시던 기억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K선생, 지금쯤 아마 교장이 되어있을게다. 성실하고 실력 있는 선생이, 소신을 갖고 교실을 끝까지 지키고 있어도 관리자이상의 권위와 명예가 보장되는 사회 제도가 아쉽다.
진천에 도착하니, 헬리콥터가 낮게 떠서 오르락 내리락 하얀 연기를 뿜어대며 항공방제를 하고 있었는데, 어린애처럼 재미있게 구경하였다.
광혜원 가는 지방도에 내려서니, 탁 트인 시야가 온통 초록일색이다. 자연의 색중에서 압권은, 여름 논의 초록색과 가을 논의 황금색이 아닐까한다. 그 규모와 색상이 다른 것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길가에는 해바라기가 활짝 피었고, 능수버들 늘어진 가지가 소슬바람에 춤을 춘다.
버드나무에도 7형제가 있다. 버드나무, 능수(수양)버들, 왕버들, 키(고리)버들, 용버들 ,호랑버들, 갯버들이 그것이다. 능수버들과 수양버들은 새로 난 가지를 빼곤 구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하나로 묶었으며, 우리가 흔히 버들강아지라고 하는 것은 갯버들을 말한다.
점심을 먹기 위해, 양평해장국이라고 써 붙인 집으로 들어갔다. 차림표를 보니 해장국 6,000원, 내장탕 8,000원이라고 씌어있었다. 비싼 것이 더 맛있겠다싶어서, 얼른 내장탕을 시켜놓고 옆 탁자를 쳐다보니, 다른 손님들이 내가 좋아하는 선지해장국을 먹고 있었다. 아차, 주문을 잘못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선지해장국을 쳐다보느라 2,000원이나 더 비싼 내장탕을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먹었다.
해가 서산마루에 걸릴 즈음, 경기도로 들어섰다. 아침부터 슬슬 아프기 시작한 엉덩이가 이제는 더 이상 갈 수 없을 만큼 아팠다. 오늘은 조금 일찍 쉬어야할 것 같아서, 용인시 양주 초등학교에다 텐트를 쳤다.
엿새째 (8월 7일)
태풍의 영향으로 아침부터 비가 오고 있다.
엊저녁에 들렀던 맥주 집에다 두고 나왔는지 모자가 없다. 엉덩이가 아파서 자전거 안장위에다 수건을 깔았는데, 언제 빠져버렸는지 보이지 않는다. 몸과 마음이 피로하면, 이렇듯 자잘한 사고가 생기기 마련이다. 몸 관리를 제대로 못한 탓이다.
수원을 향해가다가 한국 민속촌에 들렀다. 입장료가 12,000원이다. 예상보다 비쌌다. 민속촌 앞에 있는 매장에서 모자와 수건을 다시 샀다. 헛돈이 든 것이다. 1회용 사진기도 같이 샀다.
민속촌은 가는 곳마다, 우리 것을 그대로 보존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문경 새재같이 텅텅 비어있는 죽은 세트장이 아니고, 집집마다 옛 모습 그대로 사람이 살고 있는 생생한 삶의 현장이었다. 외국인 관광객의 모습도 눈에 많이 띄었다. 역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초가집이 모여 있는 마을 어귀 곳곳에 상수리나무가 서있는데, 가지마다 열매가 토실토실 여물어가고 있었다. 상수리나무는 참나무의 하나이다. 상수리나무를 비롯하여 굴참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를 싸잡아서 참나무 6형제라고 부른다. 또 다른 이름으로 도토리나무라고도 하는데, 그중에서 상수리나무 열매가 가장 탐스럽다. 그래서 다른 열매들은 모두 도토리라고 부르는데, 이것만 상수리라고 한다.
한국 민속촌 관람을 마치고, 정문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어두고 싶어서, 가까이에 혼자 서있는 아주머니에게 부탁을 하였다.
「아주머니 사진 한 장만 찍어주시겠어요?」
「‥‥‥」
아무런 반응이 없다.
잘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한 번 부탁을 하였다.
「아주머니, 사진 한 장만 찍어주세요」
「‥‥‥」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은근히 화가 나서 큰소리로 불렀다.
「예! 아주머니, 사진 한 장 ‥‥」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분은 일본사람이에요!」라고 정문에서 표를 받고 있던 젊은이가 소리친다. 무안하고 창피해서 얼른 그 자리를 뜨고 말았다.
신갈 면허시험장을 지나 수지구 죽전에서 아래쪽 하천으로 내려가니, 자전거 전용도로가 나타났다. 복잡한 도로의 한 복판에서 자전거 전용도로를 찾게 되니,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천변 자전거 도로에 내려서니 먼저, 깔끔하게 다듬어진 유선각과 그 옆에 화장실이 눈에 띈다. 배낭을 내려놓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 안은 에어콘 시설이 되어있어서 한여름인데도 시원하기 그지없었고, 손 씻는 물도 단추만 누르면 저절로 조절되어서 나왔다. 거기다 클래식 음악까지 잔잔하게 흐르고 있어, 땀에 젖은 몸을 화장실 바닥에 눕히고 싶을 만큼 아늑하였다.
곡성에서, 서울 어느 여자중학교로 전근 가셨다가 지금은 퇴직하신, L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청소시간에, 안거! 그랬더니, 몇 사람 빼놓고는 대분이 앉더란다, 다음에, 엎져! 그랬더니, 절반만 엎드리더란다. 마지막으로, 둔너! 그랬더니, 대부분이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더란다. 항상 좌중을 압도하시던 입담 좋은 그분이 궁금해진다.
어쨌든, 도시가 살기에 편하다는 말은 맞는가 보다. 그러기에, 퇴직만하면 다시 내려온다고 큰소리 뻥뻥 치며 서울로 떠난 내 친구가, 퇴직을 했는데도 도무지 내려올 생각을 안 한다.
하천이름이 탄천이란다. 위험한 찻길을 혼자서 외롭게 달리다가, 안전한 길에서 오가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우레탄으로 매끈하게 포장된 길을 달리는 기분이란 비교조차 못할 만큼 신나고 즐겁다. 이명박 정부가 4대강사업 같은 것, 제발 좀 그만두고, 온 나라에 자전거도로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만들어서, 저탄소 녹색성장에 맞게 기름도 아끼고, 체력도 증진시켜 국민의 상쾌 지수나 한 단계 높였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탄천은, 굽이굽이 쉼터와 체력단련장등으로 잘 만들어져 있었고, 특히 군데군데 물놀이장이 문을 열어, 어린이들의 즐거운 비명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자전거길 따라, 벌개미취의 산뜻한 모습이 눈길을 끈다. 벌개미취는 들국화의 하나인데 쑥부쟁이, 구절초와 함께 들국화 세 자매라고 나는 부른다.
이 길을 끝까지 가다보면 한강과 이어진다기에, 오늘은 좀 무리를 해서라도 많이 가기로 하였다. 그래야 서울로 들어가는 내일이 그만큼 더 수월해질 것 같았다. 그리하여 오랜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렸는데도 한강은 좀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제, 지친데다가 엉덩이까지 아파서 더 이상 가기가 힘들었다. 한강보기를 포기하고, 숲이 우거져있는 언덕으로 올라섰다. 자전거를 받쳐놓고 주위를 살펴보니 분당중앙공원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그때 자전거 전용복장을 한 남자하나가 다가와서 묻는다.
「어디서 오셨어요?」
「예, 멀리 전라도 곡성에서 왔습니다.
「아이구, 그렇게 먼 곳에서 여기까지 오시다니 며칠 걸리셨겠어요?」
「5박 6일째입니다.」
멀리서 오신 분에게 차 한 잔 대접하겠다며, 자판기에서 커피한잔을 빼서 권한다. 그러고 보니 나이가 꽤 들어 보인다.
「아까는 몰랐는데, 연세가 들어 보이십니다.」
「올해가 70이에요, 여기 자전거 타는 사람 중에 저 같은 노인들도 참 많아요.」 나긋나긋한 서울 말씨가 귀에 간지럽다.
친절하고 고마운 서울 토박이 영감님과 헤어진 후, 공원 안에 있는 팔각정 2층 마룻바닥에 텐트를 쳤다. 어는 학교에서 체험학습을 왔는지, 남녀 고등학생 여럿이서, 밤늦도록 시끌벅적대다가 돌아갔다.
이레째 (8월 8일)
자전거 길가에는 강아지풀, 수크렁, 띠 같은 풀들이 우거져있고, 조금 떨어진 냇가에는 버드나무, 자귀나무, 아까시나무, 벚나무같은 키 큰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한강이 가까울 즈음, 쉴 겸해서 길가에다 자전거를 받쳐놓고 수첩에다 메모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쿵하고, 무엇이 내 등에 쳐 박혔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뒤따라오던 자전거가 나를 들이받은 것이다. 미련하게 생긴 한 녀석이 미적미적 일어나더니, 땅만 쳐다보고 가다가 그랬다며, 죄송하다는 말에 큰소리 몇 번 치고 말았지만, 지금까지 그 위험한 찻길에서도 아무런 사고 없이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안전한 자전거 길에서 자전거에 받치다니,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한강에 도착하니 유람선도 보이고, 시원하게 물살을 가르는 수상스키도 보였다. 목적지인 광화문 광장이 강 너머에 있기 때문에 서강대교로 올라섰다. 한강물을 발아래에다 두고, 높은 다리를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데 잔잔한 흥분과 함께 묘한 감동이 일었다.
광화문 광장이 가까워질수록, 어린아이 손을 잡은 나들이객들로 붐볐다. 최근 광화문 광장이 새 단장 되어 일반에게 공개된 때문이다.
2009년 8월 8일 낮 12시, 마침내 목적지인 광화문 광장에 들어섰다. 곡성에서 자전거로 출발한지 꼭 이레째 되는 날이다.
광화문광장은 장방형으로 되어있는데, 가운데에서 이순신장군 동상 쪽으로 절반은, 분수대가 만들어져 있어서 어린이들로 넘쳐났고, 새로 이사 오게 될 세종대왕 쪽 절반은, 꽃밭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구경꾼들로 북적거렸다.
민주주의의 보루가 되어야할 국민의 광장이, 놀이터와 꽃밭으로 가로막힌 것 같아서, 속이 상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둘러보니 KT, 교보빌딩, 광화문우체국, 조선일보, 현대해상, 현대자동차광화문지점등의 크고 우람한 빌딩들이 광화문광장을 어깨동무하듯이 빙 둘러싸고 있었다. 마치, 이 나라의 심장부가 거대한 자본의 쇠사슬에 가로막혀 꼼짝달싹 못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순신장군 동상을 배경으로, 사랑하는 나의 애마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뒤, 옆에 있는 세종문화회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미술관 전시장에는 외로운 나그네의 피로를 풀어 주려는 듯이 온통 누드화만 걸려있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님의 흔적을 찾아 서울광장으로 갔다. 영결식이 있었던 대한문 광장을 길 건너편에다 두고 서울광장은, 텔레비전에서 본 것처럼 동그란 모양인데, 파랗게 잔디가 깔려있었다.
아! 세상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는데, 그날의 함성은 어디가고, 드문드문 나들이객만 시름없이 왔다갔다 할뿐이다.
이제, 자전거여행의 긴 여정을 마쳐야할 시간이다.
언젠가, 통일된 조국의 북녘 땅을, 내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달려볼 수 있는 가슴 벅찬 그날을 학수고대하며, 택배회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리운 나의 고향 역을 향해, 전라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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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산보다 길이 좋다. 길만 보변 가고 싶다.'란 글귀에서 현대판 삿갓(안삿갓)을 만난듯 하네. 대단한 일 해 내셨네. 혼자서 자전거로 곡성에 서울까지 다녀왔단 말인가? 김삿갓의 정신이 아니면 해내지 못했을 것 같네. '안삿갓' 축하드리네.
안삿갓(안창순) 김삿갓(김 목) 틈내서 함 같이 가세. 길만 보면, 산모롱이만 보면 궁금해서 가보고 싶은 맘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