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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나폴레옹 시대(2)
2. 전승과 평화와 종교 협약
나폴레옹 체제는 아직 불안정했으나 그의 체제는 지난날의 어느 체제와도 다른 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권력이 전승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폴레옹 전쟁 체험을 기초로 하여 <전쟁론(Vom Kriege)>을 저술한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는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고 하였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로 안 되면 전쟁을 일으킨다는 뜻이었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권력은 나의 명예에 유래하고 나의 명예는 나의 전승에 유래한다. 그러므로 나의 권력은 그 가반으로서의 새로운 명예와 새로운 전승을 계속하지 않으면 무너지리라. 정복이 나의 현재를 만들었고 정복만이 이 현재를 유지할 수 있다.
나폴레옹이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려면 전쟁과 승리가 필요하였다. 나폴레옹의 이름과 영광은 본래 이탈리아 정복에서 유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탈리아가 지금은 다시 오스트리아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이탈리아를 재탈환하는 것은 나폴레옹의 구미에 맞는 일일 뿐 아니라 프랑스 국민의 열광을 불러일으키기에 꼭 알맞은 일이었다. 그의 권력의 유지와 강화에 다시 없이 중요한 사건이 될 터였다.
1800년 5월 8일 나폴레옹은 제2회 이탈리아 전쟁을 치르러 파리를 출발하였다. 알프스를 넘어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여 주력부대가 밀라노에 입성한 것은 6월 2일이었다. 두 군대의 결전이 벌어진 것은 6월 14일 마렝고 평원에서였다. 오스트리아의 멜라스(Michael von Melas) 장군은 나폴레옹의 군대를 기습하였다. 멜라스는 결정적으로 유리하였다.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멜라스는 승리의 전령을 빈으로 급파하였다. 그러나 멜라스의 확신은 성급한 판단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폴레옹의 원군 드제(Louis Desaix)장군 부대가 갑자기 나타나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켰다. 마렝고의 전투는 실로 처절한 싸움이었다. 멜라스가 9,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나폴레옹이 7,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궁지에 몰린 멜라스는 이튿날 휴전을 제의했다. 나폴레옹은 롬바르디 지방을 거의 다 점령하는 조건으로 휴전에 응하였다.
마렝고의 승리는 군사적 승리에 머물지 않았다. 파리는 한때 나폴레옹이 패했다는 소문과 함께 오아당파의 쿠데타 설에 공포에 휘감겼다. 사실 나폴레옹이 마렝고에서 패했더라면 권좌에서 쫓겨났을 것이 분명하다. 파리가 마렝고의 승전보를 접한 것은 6월 20일이었다. 파리는 전승의 기쁨과 함께 왕당파 쿠데타의 공포에서 해방된 환희에 넘쳤다. 나폴레옹 타도의 음모에 가담한 왕당파 쪽 사람의 말을 빌리면 마렝고는 나폴레옹 개인의 권력을 성별(聖別)해 주었다. 마렝고의 승리자는 누구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거인이었다. 프랑스의 왕위를 되돌려달라는 편지를 보냈던 프로방스 백작에게 나폴레옹이 보낸 9월의 회신은 이렇게 답하고 있다.
귀하는 프랑스로 돌아오실 생각을 마십시오. 만일 돌아오신다면 10만 명의 시체를 밟고 넘어야 할 것입니다. 프랑스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는 귀하의 희망을 버리시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역사가 이를 증명할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프로방스 백작은 러시아 황제의 영토에서 쫓겨나 임시 망명처를 바르샤바에서 찾아야 했다.
왕당파의 기세는 꺾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저항 조직은 깨지고 있었다. 브르타뉴 지방에서 계획했던 반란이 좌절되었다. 이러한 때에 나폴레옹은 5만 명 이상의 왕당파를 망명자 명부에서 삭제하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망명자 명단에 실려 있었던 10여 만 명 중 상당수가 외국으로 망명하지 않고 국내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이제 특사한 것이다. 이들에게는 헌법 준수의 서약만이 요구되고 다른 조건은 일체 요구되지 않았다. 이 특사령은 프로방스 백작의 많은 추종자들을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하였다.
나폴레옹은 이미 로마 교황과의 사이에 종교 협약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는 왕당파의 중요한 불만이 공화국의 종교 정책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왕당파의 불만을 줄여서 힘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당시의 나폴레옹의 생각이었다. 이때에 마침 나폴레옹 암살 미수사건이 일어났다. 1800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나폴레옹이 하이든(Franz Joseph Haydn)의 신작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듣기 위해 마차를 타고 오페라 극장으로 가는 도중에 폭탄이 터졌다. 22명이 죽고 56명이 부상했으나 나폴레옹은 기적같이 무사하였다. 경찰 장관 푸셰가 조사한 끝에 암살 사건은 왕당파의 소행임이 드러났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 사건을 공화파를 숙청하는 데 이용하였다. 당시의 정세로 보아 그에게 더 큰 위협은 왕당파보다 공화파였던 것이다. 그는 가장 똑똑한 공화주의자 130명에게 암살 사건의 책임을 물어 유형을 시켰다. 그리고 1801년 한 해 사이에 특별 재판을 통하여 700명이 넘는 자유주의자와 자코뱅 계통 인사들을 투옥하였다. 이 좌익 탄압 정책은 호민원과 입법원의 자유주의 의원들의 불만과 반대를 불러일으켰으나 왕당파는 환영하였다.
나폴레옹이 종신 통령이 되어 황제로의 길을 확실히 마련한 것은 1802년 8월이다. 그는 그때까지 해야 할 일이 세 가지 있었다. 하나는 마렝고의 승리와 영예를 더욱 드높여 아탈리아와 독일에서 군사적으로 완전히 승리를 거두어 프랑스 국민이 진심으로 바라는 평화를 실현하는 일이고, 둘째는 국내의 혁명을 종식 시키고 외국의 반혁명 전쟁을 멈추게 하기 위하여 국내의 왕당파 및 로마 교황과의 화해를 달성하는 일이고, 끝으로 셋째는 아직 입법부에 남아 있는 국내 공화파의 나머지 세력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이 세 가지 일을 어떻게 실현하는가를 잠시 살펴보자. 마렝고의 승리 후 이탈리아에서는 브륀(Guillaume Marie Anne Brune) 장군과 뮈라(Joachim Murat) 장군이 이탈리아 재정복에 성공하였다. 브륀은 오스트리아군을 포 강 계곡에서 몰아내고 뮈라는 영국군과 나폴리 왕군을 투스카니 지방에서 몰아냈다. 한편 독일에서는 모로 장군이 남부 독일 바바리아의 호엔린덴에서 제2차 반불 동맹군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후 빈 50마일 밖까지 육박하였다. 오스트리아가 휴전을 제의하자 1801년 2월 9일 프랑스는 뤼네빌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벨기에, 이탈리아 및 라인 지방의 영토 할양에 관한 캄포 포르미오조약을 확인하는 것으로서, 일찍이 나폴레옹이 정복했다가 총재정부가 잃었던 것을 이제 다시 회복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에서 베네치아 지방 이외의 모든 영토와 이권을 상실하였다. 이탈리아의 지배자는 다시 프랑스가 되었다. 프랑스와 나폴리 왕국의 3월 18일 조약에서 프랑스군은 타란토 항에 주둔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군은 나폴리 왕국의 어느 항구에도 기항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제2차 반불동맹은 깨지고 프랑스와 계속 싸우는 나라는 영국뿐이었다. 영국 해군은 몰타 섬과 이집트를 프랑스에서 탈환하여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할 뿐만 아니라 북해와 발트 해도 지배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영국과의 강화를 바랐다. 왜냐하면 그가 오랜 전쟁에 지친 프랑스의 내정을 정비하고 권력을 공고히하여 황제로 가는 길을 닦으려면 평화의 시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영국에서도 평화를 바라는 기운이 일고 있었다. 영국은 주전파인 피트(William Pitt) 내각이 1801년 봄에 실각하고 평화파의 애딩턴(Henry Addington) 내각이 들어서면서 나폴레옹의 평화 제의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영국은 나폴레옹에 의하여 금지된 유럽 국가들과의 무역의 재개를 바라고 있었다. 1801년 봄부터 평화 회담이 시작되어 그해 10울 가조약이 조인되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평화조약의 내용이 영국의 해상 이익과 대륙 무역에 불리하다고 하여 가조약의 수정을 요구하는 여론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평화조약의 정식 조인은 6개월이 지난 뒤 1802년 3월 25일에 겨우 실현되었다. 이것이 아미앵 조약이다. 이 조약은 프랑스에 유리하였다. 프랑스는 유럽 대륙의 왕자가 되었다. 외무 장관 탈레랑의 말을 빌려보자.
아미앵의 평화 시기에 프랑스는 그 군사적 우월권에 의하여 어떤 야심가라도 그 이상 더 바랄 수 없는 권력과 영광과 세력을 해외에 떨쳤다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이 매우 신속히 이뤄진 사실이다. 2년 반 미만에…..프랑스는 총재정부 시대에 추락했던 밑바닥에서 이제 유럽 최고의 자리로 상승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영국은 10년 전쟁에서 실론과. 트리니다드 두 섬을 얻었을 뿐이었다.
종신 통령을 향하여 나폴레옹이 행한 두 번째 일은 교황과의 종교협약(Concordat) 체결이었다. 아미앵 조약이 조인된 지 채 한 달이 안 되는 4월 18일 부활 주일에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종교 협약 체결을 축하하는 종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혁명과 교회의 궁극적 화해를 알리는 종소리였다.
프랑스의 교회는 1791년 이래 분열과 혼란을 거듭했는데, 나폴레옹은 마렝고의 승리에서 파리로 돌아오는 길에 교황 피우스 7세에게 협약을 제의했던 것이다. 그 교섭은 매우 복잡했다.
나폴레옹은 종교 자체에 아무 관심도 흥미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중에게는 종교가 필요하고 또 종교 없이는 사회질서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에게 교회는 대중을 지도하는 훌륭한 도구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사회란 재산의 불평등 없이 성립될 수 없고, 재산의 불평등은 종교 없이 성립될 수 없다…..나는 종교에서 그리스도의 강림이라는 기적은 인정하지 않으나 사회의 질서라는 기적은 인정한다…..성직자들은 칸트(Immanuel Kant)와 같은 철학자나 독일의 온갖 몽상가들보다 몇 배나 더 유력하다. ….나는 그 성직자들을 누르면서 이용할 수 있다.
나폴레옹이 교황에게 종교 협약을 제의한 동기는 순전히 정치적이었다. 혁명을 통하여 교회의 재산이 국유화되었는데 그 재산을 매입한 사람들은 아직도 불안해하였다. 교회가 정식으로 취득권을 승인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국유화된 교회 재산이 다른 국유재산만큼 잘 팔리지 않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이 재산 문제를 종교 협약에서 해결하겠다는 것이 나폴레옹의 첫째 동기였다. 둘째 동기는 현 체제를 부정하는 망명 귀족과 국내의 가톨릭 신도를 떼어놓으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는 왕정복고의 두려움을 불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혈과 소란 없이 프랑스의 가톨릭 신자들을 공화국에 순종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교황뿐이라는 것을 나폴레옹은 잘 알고 있었다. 이상의 두 동기에 못지않게 중요한 또 하나의 동기는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에 붙어다니는 자코뱅의 꼬리표를 떼어버리려는 것이었다. 종교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혁명을 정치적 무정부 및 종교적 무신론과 동일시하는 유럽의 일반적 통념을 일소하여 유럽의 낡은 군주들에게 나폴레옹을 재인식시키려는 것이었다.
로마와 파리 사이의 협상은 실로 복잡 미묘하였다. 협약 초안만도 무려 스물한 가지가 기초되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1801년 7월 16일 타결을 보게 되었다. 이 종교 협약은 양쪽의 상반된 입장과 주장이 타협한 결과물이었다. 이러한 타협적 성격은 조약 서두에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프랑스 공화국 정부는 로마 가톨릭교가 프랑스 국민 대다수의 종교임을 승인한다. 로마 교황도 프랑스에 가톨릭 신앙이 수립되고 공화국 통령들이 개인적으로 이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이 종교가 최대의 이익과 위임을 얻어왔고 또 이 순간에도 얻고 있다는 것을 승인한다.
이러한 타협에 의하여 교황은 프랑스를 세속화하려는 보나파르트의 위협을 막았고 보나파르트는 가톨릭교를 프랑스의 국교로 선언하려는 교황의 욕구를 좌절시킨 동시에 교황으로 하여금 프랑스 공화국을 승인하게 하였다. 이 종교 협약의 내용을 보면 가톨릭교는 예배의 자유를 얻는 동시에 공화국의 치안법의 규제를 받았다. 공화국의 제1통령이 프랑스 교회 주교들의 임명권을 가졌고 주교들은 교구 신부들의 임명권을 가졌다. 그리고 주교구를 도에 일치시켰다. 공화국 정부는 모든 주교와 사제에게 봉급을 지불하고 성직자들은 공화국 정부에 충성을 서약해야 했다. 교황은 정부가 몰수한 미처분의 교회 재산에 대한 청구를 포기하는 동시에 혁명 정부의 토지개혁을 승인하고 교회 재산 처분의 불가변(不可變)을 선언했다. 주교는 가자 자기 성당에서 신부 총회를 열 수 있었고, 한 교구에 신학교 하나를 설립할 수 있었다.
이런 내용으로 이루어진 종교 협약은 실시하기까지 세부적인 갈등과 문제가 적지 않았으나,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1817년 약간의 수정이 가해졌을 뿐 1905년까지 프랑스 정부와 교황청의 관계를 유지시킨 중요한 협정이었다. 나폴레옹은 이 협약을 체결함으로써 노린 정치적 목적들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었다. 이 협약이 발표되어 프랑스의 가톨릭 신부들과 신도들이 나폴레옹을 지지하게 됨으로써 왕당파는 나폴레옹 체제를 반대할 구실을 잃게 되었다. 왕당파가 대체로 열렬한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종교 협약이 왕당파에 미친 정치적 영향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더구나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을 때 교황 피우스 7세 자신이 대관식에 참석하여 나폴레옹에게 제관을 씌워주고 또 심지어 1806년의 교리서에는 “황제를 경외하고 받듦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고 받듦이니라”는 문구를 넣었다. 이제 프랑스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가톨릭 신자는, 나폴레옹을 경외하고 받들지 않으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받들지 않는 자들에게 내려지는 영원한 저주를 받는다고 믿었다.
종교 협약의 규정 가운데는 “그 집행 과정에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중대한 불편에 대해서는 따로 규정을 만들 수 있다”는 조항이나, 예배 의식은 “정부가 공공 안녕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찰 법규에 따르도록”하는 조항 등이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이런 조항들을 제멋대로 이용하여 따로 ‘기본 조목(Organic Articles)’을 제정하였다. 이는 종교 협약에 대한 지식인, 자유주의자, 신교도의 비판을 누그러뜨리고, 특히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서 국가의 우위를 확보하려는 세심한 의도였다. 나폴레옹은 이 ‘기본 조목’을 종교 협약과 함께 묶어서 종교법(Loi des cultes)이라는 하나의 법을 1802년 4월 8일 공포하였다. 그리고 열흘 후 부활주일에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평화를 축하하는 장엄한 예배를 올렸던 것이다. 아미앵 평화조약이 조인된 지 한 달이 안 되는 4월 18일이었다. 사람들은 13년간의 혁명과 10년 간의 전쟁의 혼란과 고통에서 해방되어 이제 평화와 번영의 새 시대를 맞았다고 환희에 넘쳤다.
그렇다면 이 기적 같은 위업을 성취한 자는 누구일까? 사람들은 누구나 그것이 나폴레옹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이후 3년도 안 되어 이 위업을 성취할 수 있었으니 그는 희세의 천재였다. 사람들은 나폴레옹을 군사적 천재로만이 아니라 정치적 천재로 우러러 보았다. 또한 이제 곧 구세주로도 우러러보게 될 터였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가는 길을 닦기 위하여 해야 했던 세 가지 일 중에 이제 남은 것은 입법부 안에 아직 잔존하여 심심치 않게 정부를 비판하는 브뤼메르파 중심의 낡은 공화주의자들을 소탕하는 일이었다. 이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1802년 봄에는 헌법에 따라 입법부 의원의 5분의 1을 새로 선출해야 하였다. 헌법에 의하면 제비를 뽑아서 5분의 1이 사임하고 그 자리를 새 의원들로 충당하기로 규정되어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제비뽑기 대신 원로원으로 하여금 호민원과 입법원 의원 중 5분의 4를 골라 계속 유임시키고 탈락된 5분의 1의 자리를 새 사람으로 채우게 하였다. 이러한 불법적 방법으로 반정부적인 공화파 의원들을 입법부에서 쫓아냈다. 입법부는 이제 나폴레옹에게 양순한 무리들로만 이루어졌다. 브뤼메르 쿠데타 직후의 관용 정책은 이제는 옛 말이 되었다.
동시에 나폴레옹은 1802년 4월 26일 망명자 명부에서 마렝고의 승리 후 5만여 명을 사면하고도 아직 남아 있는 자들 가운데 약 1,000명의 골수분자를 제외하고 전원 사면하였다. 이들에게는 9월가지 귀국할 것과 헌법 준수를 서약할 것만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몰수한 재산 가운데 아직 팔리지 않은 것은 되돌려줄 것도 약속하였다. 이 특사 조치는 조직적인 반대 세력을 완전히 없애 버렸다. 이제 외국에 망명한 왕당파로부터의 위험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