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창조자 하느님께 불순명한 죄로
하느님께서는 아담은 이마의 땀을 흘리며 노동하면서 살도록 하셨고
하와는 아이를 낳을 때 해산의 고통을 주셨다.
그리고 마침내 흙으로 빚은 그들의 몸이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성인 성녀이시다.
♤루치아노 St.Lucian ? 순교자
♤메뜨로비오 St.Metrobius ? 순교자
♤바울로 St.Paul ? 순교자
♤제노비오 St.Zenobius ? 순교자
♤테오띠모 St.Theotimus ? 순교자
♤드루소 St.Drusus ? 순교자
♤에우티미오(니코메디아) St.Euthymius of Nicomedia 303년 순교자
♤그레고리오(스폴레또) St.Gregory of Spolete 304년경 순교자
막시미안 황제가 크리스챤들을 무차별 학살할 당시,
움브리아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신전에 희생 바치기를 거절하였는데,
그들 중에서도 가장 용감했던 사람이 그레고리오였다.
군인들이 그를 법정에 연행하여 심문을 받았는데,
"너희 하느님은 누구냐?"는 질문을 받자,
그는 "당신 모상대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전능하시고 불사불멸이시며,
우리의 행업에 따라 상벌을 주시는 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이 대답 때문에 그는 설독죄로 판정되어 불에 거슬려 죽이기로 하였으나,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므로써 그 다음날에 참수치명하였다.
♤델피노(보르도) St.Delphinus of Bordeaux 404년 주교
델피노 Delphinus 403년 축일: 12-24 주교 보르도
그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그는 보르도의 두 번째 주교로서, 381년의 사라고싸 시노드에 참석한 기록이 있다.
이 시노드는 프리쉴리안과 다른 이단들을 단죄했던 중요한 시노드였다.
델피노의 사람됨과 성덕을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성 암브로시아와 절친한 사이로 늘 연락하던 사람이며,
또 뽄씨우스 바울리누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 사람은 놀라의 성 바울리노이다.
성 바울리노의 편지 다섯 통은 영적 지도자인 델피노에게 드린 편지이다.
♤베네란도(클레르몽) St.Venerandus of Clermont 423년 주교
★에밀리아나 emiliana 550년경 축일: 12-24 증거자 로마
성 대그레고리오의 숙모인 그녀와 동생 타르실라는 그들의 오빠이고,
그레고리오의 아버지 집이 있는 로마에서 기도생활과 엄격한 보속생활을 행하여 높은 성덕을 쌓았다.
에밀리아나는 동생 타르실라가 죽은 뒤 며칠 후에 운명하였다.
♤타르실라(로마) St.Tarsilla of Rome 581년경 동정
♤카라노(스코틀랜드) St.Caranus of Scotland 7세기경 주교
♤이르미나(외렌) St.Irmina of Oehren 708년경 여원장,베네딕또회
공주이던 이르미나는 성 다고베르토 2세의 딸로서 헤르만 백작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다.
결혼 준비가 다 되어 갈 즈음에, 그녀를 사모하던 어떤 사람이 남편될 사람을 죽여버린 참사가 벌어졌다.
이 참극을 당한 그녀는 부친의 허가를 받고 수녀가 되기로 결심하니,
부친이 그녀를 위해 트리엘에 수녀원을 세웠다.
그녀는 당시의 유명한 선교사인 성 빌리브로르드를 열렬히 지원하였다.
♤아델라(파젤) St.Adela of Pfalzel 730년경 수절,여원장,베네딕또회
다고베르트 2세의 딸인 성녀 아델라는 그녀의 남편 알베릭이 죽자 수녀가 되었다.
그녀는 트리엘 근교 팔젤에 수도원을 세우고, 초대 원장이 되었다.
♤브루노(오토뵈렌) St.Bruno of Ottobeuren 1050년경 증거자,베네딕또회
★바울라 체리올리 paula cerioli 1816~1865 축일: 12-24 창설자 손치노
꼰스딴스 체리올리는 베르가모 교외 손치노에서 태어났는데,
돈 프란치스꼬 체리올리와 프란치스까 꼬르니아니의 16명의 자녀 가운데 맨 막내로 태어났다.
19세 때 그녀는 부유한 홀아비인 60세의 가에따노 부제치-타씨스와 결혼했는데,
돈은 많았지만 염세적이고 매우 시시한 사람이었다.
이 결혼은 시대와 지방 풍습에 따른 부모들이 주선했는데,
페데리치 신부에 의하면 " 이 결혼은 그리 불합리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 결과는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비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19년이나 결혼생활을 하였고 자녀를 셋이나 두었다.
그러나 둘은 아기 때에 죽고, 맏이는 16세에 죽어버렸다.
남편은 1854년에 사별하였다.
그후 그녀는 많은 유산으로 고아들 특히 농부의 자녀들을 양육하는데 힘쓰게 되었다.
이리하여 주변에 모인 협조자들과 함께 한 단체를 구성했고,
1857년에는 꼰스딴스가 바울라 엘리사벳이란 이름으로 수도서원을 발하였다.
그리고 몇 개월 뒤에는 "성가정 수녀회"가 탄생한 것이다.
그녀는 항상 농촌생활을 하는 어린이와 젊은이를 위한 교육사업에 관심을 쏟았다.
그 당시의 농어촌은 오늘날처럼 관심을 받지 못하는 상태였으므로
그녀의 업적은 놀랄만큼 큰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그녀는 1865년 성탄 전야의 잠자리에서 선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