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등불,사회의 목탁 덕산 이 한상

삼보사를 창건한 덕산 이한상 거사에 대한 책이 신문기사를 모아 나왔다.
1964년 7월1일자 제50호 대한불교(現 불교신문). 덕산(德山) 이한상(李漢相, 1917~1984) 거사가 불교신문사를 인수하고 두달만에 처음 나온 신문이다. 2개월은 그가 신문사 체제를 정립하는데 걸린 시간이다. 덕산은 불교신문을 인수하고 사무실부터 옮겨 편집과 업무의 진용을 새로 짰다. 새 사무실은 종로 관훈동 계성빌딩 2층. 1972년까지 만 8년간 불교신문을 운영한 그는 이후 조계사 맞은편 공평빌딩 자리에 있던 한국철강빌딩, 명동의 ‘달러 골목’으로 불리는 풍전산업빌딩 등으로 사무실을 옮기면서 신문사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끌어 냈다.
<서울신문> 주필을 역임한 언론인 겸 시인 유엽 주필을 중심으로 편집국장에 박경훈, 업무국장에 최인오를 영입하고 송재운, 윤영흠, 목정배 등 당시 내로라하는 ‘글쟁이’들을 기자로 등용했다. 불교전반에 걸친 풍부한 지식, 종단을 속속들이 꿰뚫어보는 안목, 그리고 언론매체에 대한 탁월한 감각으로 신문을 신문답게 만들도록 기획하고 편집했다. 유려한 문장으로 명칼럼 명논설도 자주 썼다.
재정난으로 한때 폐간위기까지 갔던 불교신문의 승승장구는 계속됐다. 지면 2개면에서 대판 4개면으로 확장됐고, 월 1회 발행됐던 월간이 월 4회 나오는 주간신문으로 일신했다. 덕산은 불교신문 제작에 재정적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취재기자로 활약했던 송재운의 회고다. “그때 제작은 <조선일보> <일요신문> <대한일보> <매일경제> 등과 함께 했는데 용지, 조판인쇄, 원고료 등 신문제작에 드는 경비는 다른 주간신문들에 비해 비교적 후한 단가에, 언제나 현금으로 지불했다…신문사 종사자들의 복리후생도 결코 인색하지 않았다. 생계에 걱정 없도록 후한 대접을 하였으며 시간이 감에 따라 편집국과 업무국의 인원도 대폭 확충하였다. 편집국의 기자를 늘리는 것은 질 좋은 신문을 만들기 위해서고, 업무국의 증원은 보급로를 크게 늘려서 보다 많은 독자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불교신문을 향한 덕산의 애정과 열정은 사장으로 봉직할 당시, 신문을 통한 칼럼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1967년 6월11일 지령 200호 발간에 즈음한 기념사다. “이제까지 우리나라에서 불교계에 단 하나뿐인 주간신문으로서 우리 불교계의 모든 사상(事象)에 관한 보도를 정확한 내용으로 널리 고루 펴는 사명을 하여오느라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 우리 대한불교신문이라고 자부한다…대한불교신문사는 우리나라 불교계에 있어 유일무이한 보도기관이고, 역시 유일무이한 공기(公器)임을 자부하매, 우리 대한불교조계종단의 3대 사업의 하나인 포교에 박차를 가하며 불교계의 제반소식을 전함에 있어 와전을 방지, 시정할 것과 각자 소신의 의견발표를 위하여 최대한 공개하도록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 불교계의 참뜻의 광장을 만드는 동시에 불교와 불교문화에 관계되는 다양한 편집으로 독자들에게 없어서는 안되고 하루 한때라도 빨리 보고싶어 기다려지는 신문이 되기를 위한 운영을 하고자 한다.”
덕산의 불교사랑은 불교신문 경영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삼보장학회, 광동학원 경영, 삼보법회 설립 및 운영, 불교종립학원연합회 구성, 삼보학회 설립, 사명대사 동상 건립 등 막대한 재원이 필요한 크고작은 불사에 총력을 기울였다. 불교계 자정을 위한 교법수호회와 군포교를 위한 군승제 실시 등에도 영향력을 펼쳤다. 특히 삼보학회를 통해 1865년부터 1965년까지 불교사를 정리한 <한국불교 최근대 백년사>를 편찬하고 삼보법회를 조직, ‘뚝섬 봉은사’에서 매주 일요법회를 봉행해서 젊은 불자들을 수련시키고 ‘대학생수도원’ 건립에 적극 후원한 공덕은 더말할 나위가 없다. 1938년 경기공립공업학교를 나와서 서른다섯에 풍전주식산업회사를 창업한 그는 1961년 대한전척공사까지 문열어 임직원 3000명이 넘는 한국 최대 토목건축회사를 운영했다. 정부종합청사, 섬진강댐, 팔당댐, 경부고속도로, 풍전상가 등 국내 대규모 사업을 도맡았다. 사업을 통해 벌어들인 수익금은 불교계 진흥을 위해 아낌없이 회향했다.
국경도 뛰어넘었다. 세계불교도대회 참가 이후 한국불교의 세계화에 눈을 떠 세계에 한국불교의 우수성을 알리고, 불교교류를 통한 외교관 역할도 톡톡히 했다. WFB(세계불교도우의회)에서 부회장을 맡아 세계 각국의 불교저명인사를 한국에 초청하여 양국의 이익을 증대하는 방안을 마련했고 한국불교를 국외에 알리는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급기야 1972년 3월26일자 지령 447호 불교신문을 마지막으로 신문사를 내려놓고 미국으로 왔다. 캘리포니아주 카멜시에 한국사찰 삼보사를 세우고 ‘한인포교’에 선두주자로 나섰다. 1960년대 가난에 찌들어 경제발전이 최우선 목표였던 시절, 자신의 사회적 성공을 불교계로 오롯이 회향한 덕산 이한상. 1984년 8월23일 미국 카멜 삼보사에서 쓸쓸하게 눈감은 그의 마지막을 당시 경향신문은 ‘부음기사’를 통해 보도했다.
‘전 불교신문사 사장 이한상씨가 지난 23일 낮 12시 미 캘리포니아주 삼보사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1917년 경기도 개풍군에서 태어난 이 씨는 1945년 풍전산업을, 1961년에 대한전척을 설립했으며 1966년에는 5.16민족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65년부터 1971년까지 불교신문사 사장을 지낸 이 씨는 1971년 미국에 삼보사를 창건, 미국에서 거주해왔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 조계사 법당에 마련되어 있으며 발인은 9월1일 미국 삼보사에서 있을 예정이다.’
첫댓글 이렇게 훌륭한 불자를 부처님께서는 어찌 그리도 빨리 불러 가셨을가요, 한국 불교나 미주에서의 포교에 정말 커다란 아쉬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