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경운기
봄의 화사함은 사라지고 산과 들이 초록물결로 물들던 어느 날, 땡볕아래 노부부와 그들의 외아들 진호가 모내기를 하고 있었다. 곳곳에서 산새소리가 들리고 아무도 없는 논에는 적막함과 함께 평온하기만 했다.
진호는 노부부가 15년 만에 얻은 자식이다. 그는 순수한 마음을 가졌으며 얼굴도 시골사람답지 않게 잘생긴 편의 시골청년이다. 하지만 흠이 있다면 그는 37살, 결혼을 못한 노총각이었다. 사실 선도 많이 보고 색싯감을 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번번이 농사꾼이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퇴짜 맞기 일쑤였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진학의 꿈을 접고 부모님 밑에서 17년간 농사를 해오고 있다. 이제는 이 마을에 젊은 사람은 진호밖에 남질 않았다. 중, 고등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들도 모두 도시로 떠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잘 살고 있었다. 그런 친구들을 보며 진호는 열등감을 느끼기도 하였다.
한해의 논농사의 시작인 모내기를 다 마치고 진호네 가족은 경운기를 타고 울퉁불퉁하고 꾸불꾸불하지만 정감 있는 길을 달려 집으로 향하였다. 유일한 운송수단인 경운기, 아버지가 어렵게 장만해 15년 넘게 사용되고 있는 진호네 집의 몇 안 되는 재산이다. 집으로 온 진호는 몸은 힘들지만 편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소여물도 주고 텃밭에서 자라고 있는 잡초도 뽑아야 했기 때문이다. 집안에 기계란 것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진호네는 밭갈이도 소의 힘을 빌려 전통적인 방법으로 한다. 넓은 마당 역시 몇 그루의 과일나무들을 볼 수 있고 아담하게 핀 진달래는 분홍빛 향기를 더한다. 그렇게 하루 일을 정리하고 조용히 책상에 앉았다. 지금 시각은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지만 농사꾼의 아침은 일찍 시작되기 때문에 밤 10시 30분쯤 지나면 마을 전체가 깜깜하다.
진호는 하루하루 일기를 써 나가고 있었다. 그의 일기장에는 나이가 먹을수록 결혼에 대한 생각과 깊은 관심들이 문장 곳곳에 알게 모르게 나타나고 있었다. 올해는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6시 아직도 깜깜한 밤 속의 새벽, 거동이 불편하신 어머니를 대신해 직접 아침상을 차렸다. 어머니는 괜찮다고 해도 진호는 “오늘 아침은 제가 차려드라고 싶어요.” 하며 웃었다. 그런 진호를 보며 어머니는 눈물을 감추신다. ‘진호가 언제쯤 참한 색시를 얻을는지?’ 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불쌍하게 여겨진다.
새벽의 상쾌한 공기를 가르며 기분 좋게 갔지만 막상 밭에 도착해보니 막막하기만 했다. 사실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더 어렵고 힘들다. 진호네 밭은 규모가 크고 키우는 작물도 다양해 여러 가지 할 일이 많다. 사과나무 15그루와 복숭아나무 10그루, 파, 배추, 감자, 고구마, 고추, 수박 등이 있어 반찬과 과일을 사먹지 않을 정도로 많다. 그의 아버지도 몸이 예전 같지 않아 혼자서 반나절이면 끝내실 일도 요즘은 진호가 같이 도와드려야 겨우 끝낼 수 있었다. 두 부자는 밀짚모자를 쓰고 뜨거운 햇빛을 피하며 구슬땀을 흘렸다.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일들 속에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건,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점심이다. 어머니가 밭으로 직접 오실 수 없기 때문에 점심을 먹기 위해 경운기를 이용해야 했다. 뒤에 아버지를 태우고 힘든 농사일을 잊은 채 아버지께서는 구수한 가락을 뽑았다. 진호는 같이 따라 부르며 흥을 돋운다.
점심상에는 봄나물들이 먹음직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독특한 향과 싱그러움은 밥 한 그릇을 금새 비우기에 충분하였다. 이런 봄나물들은 매년 옆집 봉규네에서 나누어주곤 한다. 봄만 되면 그 집 아주머니들이 다 나와 산으로 나물을 캐러 갈 때마다 한 바구니씩 진호네에 갖다 준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조금 귀한 것이 생기거나 자식들이 보내준 시골에서는 구하기 힘든 음식이나 물건을 마을 전체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나눈다. 그런 점에서 진호는 정말 살기 좋은 동네라고 생각한다. 공기 좋고 인심 좋고 풍경 좋은 곳에 태어났다는 게 자랑스럽기도 했다.
오후 작업은 오전 작업보다 더 힘들었다. 온도도 올라가고 햇빛도 더 강하여 오후 늦게까지 할 수가 없었다. 며칠동안 비가 안 와서 밭과 논에 물을 공급하느냐고 일주일동안 물만 끌어왔다. 물을 정확히 다 줄 수 없었기 때문에 하늘을 향하여 밭에 넓게 물을 뿌렸다. 하늘에서 비가 빨리 오기를 바라면서......,
그러던 어느 날 진호와 친분이 있는 중매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좋은 여자가 있다며 소개 시켜 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호는 걱정부터 되었다. ‘또 퇴짜 맞으면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이 그의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퇴짜 경력은 한, 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호는 선 전날까지 고민 하다가 중매인의 오랜 설득으로 겨우 나가게 되었다. 읍내까지 나가는 마을버스를 타고 또 도시로 나가는 버스를 타고 2시간을 달린 후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화장실에서 다시 한번 거울을 본 후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쉽게 중매인과 그녀를 발견했다. 중매인이 어색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서 서로 인사를 시켰다. 서로 어색한 웃음으로 인사를 하고 중매인은 물러갔다.
커피한잔을 시켜놓고 진호와 그녀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호는 처음에는 몰랐는데 말하다보니 자신에게 맞는 점이 많아 다행이고 기뻤다. 한참을 이야기만 하다가보니 서로의 직업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없었다. 진호는 그녀의 직업을 물었다. 그녀의 직업은 초등학교 선생이란다. 진호는 당연히 중매인이 자신의 직업이 농부라고 말한 줄 알고 자신 있게 농부라고 말했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믿을 수 없는지 몇 번이고 되물어봤다. 진짜 농부가 맞는지. 그녀의 그런 행동을 접하면서 진호는 당황했다. 그제야 중매인이 그녀에게 말을 안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태도는 그 이야기가 나온 뒤부터 달라졌다. 오늘은 좀더 나은 진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진호는 그녀에 태도를 보면서 이번에도 퇴짜 맞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더 이상 그녀는 더 머물러 있을 수도 머물러 있을 이유도 없었다. 그녀가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뜨려고 할 때 그녀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진호가 물었다.
“왜 도대체 농사꾼이면 안 되는 겁니까?”
그러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 다시 앉아서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진호씨도 아시다 시피 34살 먹도록 결혼 못한 노처녀 입니다. 저도 결혼이 급해서 여기저기 선을 보고 다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농사꾼의 아내가 되기 싫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행복하게 살수 있을지 두렵습니다. 그리고 저는 교사이고 아이들을 가르치다보면 이곳저곳으로 전근을 가야하는데 농사는 이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길 것 입니다.”
진호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그녀를 그냥 보내주었다.
그가 다시 돌아오는 버스 안은 텅텅 비어있었고 그 2시간이 일주일 같아 그를 더 쓸쓸하게 하였다. 진호가 시무룩하게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는 그의 표정에서 선보았던 게 잘 안되었다는 것을 눈치 챘다. 내심 어머니도 이번 선 만큼은 잘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진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했다.
그날 저녁 중매인에게 전화가 왔다. 당연히 결과를 물어보는 전화였다. 진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꾹꾹 눌러 참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제가 농사꾼이라고 말하지 않으셨죠?”
진호의 물음에 중매인은 맥이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내가 만일 네가 농사꾼이라고 말하면 그 여자가 안나올 것 같아서였어. 한번 만나서 너를 보면 잘 될 것 같아서 그래서 이야기를 못한 거야.”
중매인의 목소리의 미안함이 역력히 배어 있어 차마 다음 말을 잊지 못하고 진호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진호는 그녀의 말이 귀에서 맴돌았다. ‘행복하게 살수 있을지 두렵습니다.’
그는 그런 편견이 너무 싫었다. 사람들 대부분이 아마 그녀처럼 생각할 것이다. 시골이 불편하고 도시는 이런저런 시설들로 편하게 즐겁게 지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도시가 공기와도 같이 적응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숨쉬는 것을 못 느끼는 것처럼 그들의 생활을 잘 못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문을 이중삼중으로 잠그고 다녀야 안심되고 옆집에 살면서도 서로 얼굴도 모르고 지내고 매연에 사람들 버글거림에 어쩌면 도시의 사람들이 더 불쌍한 인생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복잡한 생각을 떨쳐보려 아침 일찍 일어나 경운기를 타고 밭으로 향했다. 그는 더 열심히 일했다. 항상 되는 일이 없거나 머리의 잡념을 떨쳐버리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생각 없이 자연 속에서 일만 열심히 하는 것이었다. 3일이면 겨우 끝낼 일을 혼자서 오전 내내하여 끝내 갈 때쯤 아버지께서 봉규 아버지의 트럭을 얻어 타고 오셨다. 아버지의 손에는 점심이 들려있었다.
아버지께서 일하고 있는 아들에게 점심을 주시려고 봉규 아버지와 함께 오신 것이었다. 점심을 건네주시고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밥 먹는 아들의 얼굴을 쳐다볼 뿐이다. 속 타는 마음은 아버지나 아들이나 같은데 아버지의 얼굴에는 유난히 주름이 많아 보였다.
점심을 먹고 오후 일을 시작하려고 하니까 하늘에서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다. 정말 오랜만에 내리는 반가운 비었다. 진호는 신이나 비가 내리는 밭을 가로질러 달렸다. 시원하게 내리는 비처럼 그의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도 시원하게 씻겨 내려갔다.
비가 많이 내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진호는 신이 나서 속도는 별로 안 나지만 열심히 경운기를 끌고 왔다. 진호는 집에 와서도 내내 창밖만 쳐다보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틀 동안 꼬박 비만 내렸다. 그동안 안 내렸던 비가 계속 내린 것 같았다. 비가 너무 많이 내리면 농사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에 진호는 비를 맞으면서 논에 물을 빼고 밭에도 고인 물을 도랑으로 연결시키는 작업을 계속했다. 비속에서 작업은 더 힘든 일이었다. 땅은 질퍽질퍽해서 장화를 신고 일하는데 발이 잘 안 빠지고 계속 내리는 비는 그의 옷을 더 무겁게 했다.
저녁이 되어 돌아오니 온 몸이 진흙투성이였다. 그는 힘이 들어 씻고 그냥 방에 들어가 잠이 들었다. 비를 맞으며 힘들 일을 해서 일까? 그는 아침에 일어날 수 없었다. 몸에서는 열이 나고 온 몸이 쑤시고 아팠다. 약국도 가까이에 없는 지역이라 경운기를 타고 나가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비 오는 날에는 경운기 운전이 힘들었고 그날따라 옆집 봉규네도 트럭을 타고 나간 상태였다. 이틀에 한번씩은 마을을 방문하던 보건소 직원들도 비가 많이 내려서 찾아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노부부가 진호를 간호했다. 오후 들어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비는 서서히 멈추었고 읍내에 나갔던 봉규 아버지도 돌아왔다. 봉규 아버지는 진호를 태우고 다시 읍내로 나가야했다.
읍내 병원에서 진호가 다행히 몸살감기라며 며칠만 푹 쉬면된다고 했다. 노부부는 그래도 걱정되어 진호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 며칠 후 많이 좋아진 진호는 쉽게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진호가 누워있는 동안 밭에 가지 못해서 할 일이 더 많았다. 그는 나가서 일하겠다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좀 더 쉬어야한다고 하면서 그를 말렸다. 그는 아버지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시간은 계속 흘러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열심히 잘 지내고 있던 그에게 저번 일을 안타깝게 생각했던 중매인이 연락을 해왔다. 잠깐 만나서 이야기 하자는 것이었다.
진호는 별 뜻 없이 중매인을 만나러 읍내로 나갔다. 중매인은 그에게 외국인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생각은 없느냐며 신중하게 물었다.
그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오랜만에 불러내서 한다는 소리가 외국인여자를 아내로 맞으라니?
하지만 천천히 생각해 보니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텔레비전에서도 외국인여자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여러 번 비추어준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결혼 못 할 바에야 외국인여자랑 결혼하는 것도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쉽게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중매인에게 생각해볼 일주일의 시간을 달라고 하였다.
집에 와서 그는 다시 깊게 생각해 봤다. 과연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수 있을까? 말도 안 통하는 여자랑 잘 살 수 있을까? 그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드디어 결정하기로 한 일주일이 모두 흘러가고 그는 마음을 확고히 잡았다. 도저히 총각으로 있기 싫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결혼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자신이 있었다. 이번이 아니면 진호는 평생 결혼을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기회임을 알고 어려운 결정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결정을 내리고 중매인에게 연락을 했다. 중매인은 오늘 당장이라도 그 여자와 만나자고 야단법석이었다. 그녀가 한국에 일하러 왔다가 한국생활이 맘에 들고 장녀로써 그녀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매월 돈을 부쳐주어야 하는데 더 이상은 고달픈 외국인 노동자 생활을 버텨내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국생활보다는 한국에서 결혼하여 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중매인에게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름은 장옥화, 나이가 잔호보다 7살 어리고 조선족 마을에서 자란 중국인이란다. 나이차이와 중국인이라는 소리에 아버지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마음씨도 좋고 한국말도 어느 정도 잘 한다고 하니 진호는 기대가 되었다.
약속한 그날, 그는 신은 안 믿지만 두 손이 모아졌다. 읍내로 나가는 내내 두 손을 꼭 붙잡고 무엇인가 중얼거렸다. 길기만한 읍내로 나가는 길, 그렇게 조급했을까? 그는 오늘따라 느린 버스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읍내다방에서 만난 그녀는 전혀 외국인 같이 생기지가 않았다. 정말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모르는 사람이 만났으면 한국인이라고 믿어버렸을 지도 모른다. 서로 말은 잘 안 통하지만 그녀의 서투른 한국어 솜씨와 진호의 손짓, 발짓으로 어느 정도의 대화는 거의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진호는 그녀와 이야기 나눈 몇 시간동안 행복해서 입가에 배어나오는 미소를 멈출 수가 없었다. 이제 맘이 완전 결정되었다. 그녀도 그가 맘에 들었는지 계속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진호는 농사일로 한참 바쁠 시기에 그녀와 시간을 내어 데이트를 하는 등, 그녀에게 완전 푹 빠져있었다. 만난지 한달 째가 되어가는 날 진호는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하고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말하기로 했다.
잘 안 열리는 안방 창호지문을 삐거덕거리며 수줍게 열고 들어간 진호는 한참 망설이더니 어색한지 머릴 긁적이며 힘겨운 말을 꺼냈다.
“아버지 저.......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머뭇거리는 진호를 보면서 아버지는 뭔지 더 궁금해졌다. 조바심이 난 아버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떨어 넣으며 말했다.
"뭔 말인데 그러냐? 이 아비 답답해 죽것다. “
“저 사실은 한 달 동안 여자를 만나고 있었습니다.”
진호의 아버지는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그에게 물었다.
“그게 사실이냐? 참 말이여?”
아버지의 기뻐하는 모습이 얼굴에 나타나자 뒷말은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외국인 여자라고 그 것도 중국인여자라고.......
6.25전쟁 때 군인이셨던 진호의 아버지는 중공군에게 포로로 체포되어 당한 고초 때문에 지금까지도 중국인들은 별로 탐탁치 여겨오지 않으시던 분이시다. 그는 그런 아버지라는 걸 잘 알기에 당신이 당하신 상처를 이야기를 통해 너무나도 잘 알기에 어린아이처럼 물어보는 아버지에게 아무 대답도 드릴 수 없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못 드리고 힘없이 안방을 나왔다.
아버지를 속이고 데이트를 한 지도 보름이 더 흘렀다. 헤어지는 읍내 버스정류장, 장옥화가 심각하게 진호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찐호씨 저 드릴 말슴이 있슴다.”
그녀는 표정만큼이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뭔데요?”
진호는 어색한 웃음으로 물었다.
“사씰 저 산업연수생으로 와서 한국에 머무는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슴다. 그 몇 개월만 지나면 불법체류자가 되고 맙니다. 그로니 결혼을 서둘러야 함다. 이야기는 잘 되고 있겠죠?”
진호는 할말을 잃었다. 아버지에게 자세한 이야기도 안했는데 그녀는 벌써 한국에 머무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아 불법체류자가 된다니....... 그녀는 진호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와 결혼해서 한국 국적을 갖고 중국에서 삶보다 더 편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진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결국 돌파구는 하나였다.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해서 어떻게든 설득해야 했다. 진호는 아버지 앞에 섰다. 드디어 진실을 말해야 한다. 아버지도 사실을 아실 권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지난번에 제가 사귄다는 여자, 사실은 외국 여자예요.”
기가 막힌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 외국인 여자라고? 그래 그 여자 어느 나라 여자냐?”
그 뒷일이 두려웠지만 이미 진행된 일이었다.
“그게 중국인여자입니다.”
충격이 크신 듯 했다. 고통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뭐? 외국인 여자! 그것도 중국여자! 너 아무리 여자가 궁해도 지금 제정신이냐?”
“하지만 전 그 여자를 정말 사랑합니다. 그 여자도 저를 아껴주고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굳은 표정으로 말하는 진호를 보며 그의 아버지는 한번도 대든 적이나 말썽 피우지도 않던 그런 아들에게 배신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충격이었다. 너무 큰 상처를 받은 탓일까? 아버지는 머리를 감싸 쥐며 그 자리에 힘없이 쓰러졌다. 순간 진호는 당황했다. 그의 말이 아버지에게 충격을 준다는 것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큰 반응이 올 줄 몰랐다. 급한 마음에 아버지를 업고 봉규네집으로 뛰었다. 11시가 넘은 시각 깜깜한 봉규네집에 적막을 깨는 소리가 있었다. 진호는 대문을 힘껏 두드렸다. 10분쯤 불렀을까? 봉규의 아버지가 졸린 눈을 비비며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진호의 등 뒤에 업혀있는 아버지를 보자 놀라서 달려 나왔다. 트럭에 시동을 걸고 재빨리 읍내 병원으로 향했다. 그동안 당뇨 등으로 고생하시던 아버지를 생각하니 걱정이 많이 되었다. 시골길, 차는 없었지만 울퉁불퉁한 좁은 비포장도로와 양옆에는 익어가는 벼가 있는 논이라서 조금만 잘못운전하면 빠지기가 쉽기 때문에 속력을 낼 수 없었다. 진호는 너무 급했다. 한시라도 병원에 빨리 도착해서 의사선생님께 아버지를 보여드려야 했다. 쓰러진 이후로 그의 아버지는 의식이 없었다. 드디어 시내로 나왔지만 읍내병원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안 그래도 사람이 드문데다 저녁에는 사람이 끊어지기 때문에 야간진료라는 게 없었다.
할 수 없이 차를 국도로 돌려서 가까운 도시로 나가야 했다. 비포장도로보단 빨랐지만 진호에겐 한시가 급했다. 봉규네 아버지도 어느새 이마에는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1시간을 달린 끝에 도시의 병원에 도착하게 되었다. 재빨리 응급실로 들어갔고 진호는 초조히 지켜볼 뿐이었다.
여기저기 둘러본 의사선생님의 말씀은 아버지가 쇼크에 합병증까지 왔다는 것이었다. 정밀 검진을 해봐야겠지만 오래 사시기 에는 좀 무리 일 것이라고 말했다.
진호는 눈앞이 캄캄했다. 정말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그냥 바닥에 주저앉자 버렸다. 봉규네 아버지는 진호를 일으켜 세우며 우선 입원절차부터 하자고 했다. 입원실로 옮겨진 진호의 아버지는 산소 호흡기를 하고 있었다. 진호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침대 곁을 떠나지 않았다. 꼬박 밤을 샌 진호는 다음날 어머니를 모시고 짐을 가져오기 위해 집으로 갔다. 어머니도 많이 걱정하셨는지 잠을 못 주무신 모습이었다. 봉규네에서 선 듯 트럭을 빌려주셨다. 한창 바쁜 추수시기에 그들의 발인 트럭을 빌려준다는 것은 정말 이웃을 걱정하는 따듯한 마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진호는 농사일을 마치고 밤마다 병원을 찾아갔다. 나날이 초췌해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 아팠다. 자신 때문에 이런 것 같아, 너무 죄송하고 미안했다.
그는 낮에는 농사일로 밤에는 아버지 병간호로 몸이 두개라도 모자라는 실정이었다. 추수 시기가 다가와 다른 논들은 거의 다 추수를 끝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진호네 논만이 황금벌판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 경운기를 끌고 나갔다. 이웃사람들도 진호네의 뻔한 사정을 잘 아는 터라 주변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이 같이 추수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추수는 일찍 끝날 수 있었다. 풍년이 든 한해는 아니었지만 그런 대로 흐뭇한 수확을 맛볼 수 있었다. 그렇게 논도 밭도 한해농사를 잘 마무리해나갔다.
진호는 용기를 내어 추수를 마친 다음날 아버지의 병실에 찾아갔다. 매일 밤에만 가고 아버지가 깨어 계실 때는 두려워 한발도 안 들어갔던 곳이었다.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간 진호에게 아버지는 호통부터 하셨다.
“야 이 자슥아, 여긴 뭣하러와? 난 너 같은 아들 둔 적 없다. 암만 여자가 없어도 그렇지 외국인여자랑 사귀고 있어? 그것도 중국인이랑? 부자관계를 끝내자, 그래 아주 호적을 파버리자. 파버려!”
“아버지, 죄송해요. 뻔히 싫어하실 것이란 거 알면서도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하지만 아버지, 전 정말 아버지가 원하시는 데로 평범한 여자와 만나서 결혼 할 수 없어요. 요즘시대에 누가 이 촌구석 농사꾼한테 시집을 오겠느냔 말이 예요. 어린아이들도 다 도시로 떠나 남아있는 학교란 거의 없는 판인데…….”
진호는 자신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아버지에게 말했다.
“됐다. 그런 변명 필요 없다. 나가라, 내 눈앞에서 없어지란 말이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절대 그건 허락 못한다.”
아버지는 흥분하며 말했다. 진호는 할 수 없이 자리를 떠나야했다. 그렇게 기가 팍 죽어서 어깨가 축져진 상태로 병원을 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병실 창가에서 바라보고 있던 아버지는 너무 호되게 군 것 같아 미안한 심정이 들기도 했다. 이제까지 하나 말썽도 없이 바르게 자랐는데, 진호가 떠난 후에도 아버지는 창가에 앉자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트럭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진호는 머릿속에 아버지가 하셨던 말들이 맴돌았다.
‘난 너 같은 아들 둔 적 없다. 그래 아주 호적을 파버리자. 파버려!’
아버지께서 그렇게 화를 내시는 모습에 진호는 충격이 컸다. 또 지금까지 그에게 화나실 일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진호는 집에 돌아와 멍하니 앉아있었다. 귀뚜라미 소리만 들리고 적막한 시골 밤 숨죽이고 잠들어 있던 것들을 깨울 것 같은 전화벨 소리가 울려왔다.
진호는 긴장한 듯 수화기를 조심스레 들었다. 수화기 안에서는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장옥화
“찐호씨, 잘 지내고 계셨쬬?”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진호는 풀이 죽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하였다.
“요즘 소식이 없기에 궁금해써 전화 걸었슴다. 무슨 일이 있으신 건 아니쬬?
“예 제가 요즘 농사일 때문에 많이 바쁘거든요,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네 그럼 연락기다리겠슴다.”
맑게 이야기 하는 그녀에게 아버지와 그녀의 일로 다투고 있다고 차마 말 할 수 없었다. 진호는 이런 저런 생각에 밤잠을 설쳤다.
진호는 아버지와의 일을 잊으려 매일 아침 일찍 경운기를 타고 나가 하루 종일 일만하다 밤늦게 돌아왔다. 농작물의 수확은 거의 다 끝나고 잎은 하나, 둘씩 떨어져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어김없이 진호는 경운기를 타고 밭으로 향하고 있었다. 낙엽은 떨어져 길은 오색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하였고 가을바람은 솔솔 불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스쳐갔다. 밭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 갑자기 경운기가 멈추어 버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경운기를 사고 나서 10여년 탔지만 한번의 고장도 없었다. 진호는 경운기를 살펴보았다. 아무리 사동을 다시 걸고 둘러보아도 경운기는 미동조차 없었다. 순간 진호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아 그 길로 경운기를 두고 아버지의 병원으로 향하였다.
땀을 비 오듯이 쏟으며 집으로 도착해 트럭을 타고 달렸다. 진호의 머릿속에는 아버지가 경운기를 처음 사고 무척이나 좋아하셨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운전하시는 경운기를 타고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일이며 자라서는 아버지에게 운전법을 배우다가 바퀴가 논으로 빠져 둘이서 겨우 밖으로 빼내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경운기와 함께 했던 시간만큼이나 아버지에 대한 추억들도 많이 남아있었다.
국도로 들어서자 차들의 정체는 심했다. 불길한 생각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가서 아버지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던 그는 주말을 이용해 놀러가는 사람들이 미웠다.
가까스로 지름길을 통해 평소 걸리던 시간보다 30~40분 늦게 도착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병실은 8층에 있었지만 엘리베이터를 기다려 볼 생각도 안하고 계단으로 올라갔다. 진호가 아버지의 병실에 문을 열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버지도, 어머니의 모습도 보이질 않았다. 더 불안했다. 지나가던 간호사를 붙잡고 병실 안에 있던 환자 못 보았냐고 물었다.
“그 환자분 1~2시간 전에 중환자실로 내려갔습니다.”
“네? 중환자실로 내려갔다고요?”
진호는 당황해서 물었다.
“예, 숨이 가빠지고 심장박동수가 불안정해져서요.”
간호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호는 다시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중환자실에 도착했을 때 울먹이는 어머니의 모습과 맥없이 누어계시는 아버지를 살펴보는 의사가 눈에 띠었다.
의사가 진호에게 다가왔다.
“아드님, 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아마도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밤 고비를 넘기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의사선생님께서 잘못 아신 것은 아니죠?”
그는 아니길 애원하면서 말했다.
“환자분께서는 오랫동안 힘든 일과 당뇨에 쇼크로 몸이 많이 쇠하셔서 원만한 치료 받는 것조차 불가능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진호는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아버지 곁으로 다가가 손을 꼭 잡았다. 아버지는 가늘게 눈을 뜨고 작은 목소리로 진호를 불렀다.
“예, 아버지 말씀하세요.”
“진호야, 니 엄마 잘 부탁한다. 나 만나서 평생 고생하고 살았어. 내가 죽을 때가 되니 나의 이기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구나.”
목소리는 점점 더 줄어들었고 떨려가고 있었다.
“진호야, 내가 내가…….”
마지막 말을 하려던 순간 잡고 있던 손에는 힘이 빠졌고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의사들이 달려와 여러 시도를 해보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진호의 어머니는 통곡을 하며 땅바닥에 주저앉았고 진호 역시 한없이 눈물만 흘리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마지막 가시는 아버지의 표정이 평온해 보였다.
아버지의 시신은 병원에서 집으로 옮겨졌고 앞마당은 장례식장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문상을 왔다. 상주인 진호는 잘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자고 애써 와주신분들을 맞이하였다. 동네 분들은 자신의 일처럼 조문객을 위해 음식을 장만하였다. 봉규네 아버지께서는 트럭으로 몇 번씩이나 읍내에 나가 필요한 물건이나 음식재료를 사오셨다. 그렇게 이웃주민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3일을 보내고 상여가 나가던 날, 진호네 일행은 미리 산소자리를 정해 놓은 밭 근처에 야트막한 산으로 향하였다.
산으로 가는 길, 아버지의 죽음을 알려주었던 경운기가 며칠째 방치된 채 서 있었다. 진호는 그 경운기를 바라보며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았다. 그는 경운기를 바라보며 아버지께서 그 것을 물려줄 때 못내 아쉬워하던 표정이 떠올랐다.
산에는 전날 동네 남자들이 미리 산소의 틀을 잡아 놓은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의 관이 들어가고 진호는 삽을 들고 흙을 덮었다. 그의 어머니는 눈물도 말랐는지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흙이 서서히 덮어지고 그렇게 영영 아버지는 진호의 곁은 떠났다. 언제나 같이 있을 것만 같았고 죽음은 생각해 보지도 않은 그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신 이유가 자신한테 있는 것만 같았다.
진호는 괴로워하며 흙냄새가 가득한 아버지의 산소를 부둥켜 잡고 서럽게 울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우두커니 놓인 경운기를 여러 사람들과 함께 끌고 왔다. 사람들이 다 가고 휑한 집을 둘러보며 그냥 바닥에 앉자 울고 또 울었다.
그는 이제 아무런 삶의 의미도 없어졌다. 하루하루를 술로 보냈고 그의 생활은 점점 폐인이 되어갔다. 아버지를 자신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생각에 무거운 죄책감으로 무의미 없는 나날들로 보냈다.
해는 중천에 있는데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집으로 들어가는 진호를 보며 봉규네 아버지께서 그를 불러 말했다.
“진호야, 너 언제까지 그렇게 지낼래? 이러는 네 모습 보면 아버지에게 더 죄를 짓는 거야. 이제 그만 잊고 새롭게 다시 시작해.”
“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왜 이러는지.”
하고 짧게 답하고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 후 중매인에게 진호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안타깝게 생각한 옥화가 집까지 찾아왔다. 그녀는 어두운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을 걸었다.
“찐호씨, 왜 말을 안 하셨어요? 아버님께서 반대하셨다는 껄요.”
“말하기 미안했습니다. 옥화씨는 나만 믿고 있는데 실망을 주는 것 같아 말하지 못했어요.”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는 괜찮슴다. 오히려 찐호씨의 이런 모습이 더 보기 힘듭니다. 어서 마음을 정리하시고 일어나쎄요.”
“저도 노력해 볼게요. 이만 돌아가십시오. 혼자 있고 싶네요.”
진호는 단호하게 말했다.
“찐호씨가 언능 웃는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슴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슴다.”
그녀는 쓸쓸히 떠났고 진호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아버지 때문에 냉정하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떠나간 후, 혼자 술을 마시며 깊게 생각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봉규 아버지의 말씀이 맞았다 이러고 지내면 아버지에게 더 죄만 되는 일이라는 것을…….
다음 날 아침, 너저분하게 널려있던 술병을 모두 치워버리고 고장 났던 경운기도 새로 손보았다. 쌓여있던 짚도 정리하고 아버지의 물건들도 하나, 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 진호를 보며 어머니는 다시 정신을 차린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진호가 아버지의 옷들을 정리하던 도중 낡은 회색 양복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봉투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리 오래된 것 같지 않은 봉투 안에는 아버지의 친필로 적은 유서가 들어있었다.
그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천천히 읽어나갔다.
“내 아들 진호야.
내가 너에게 편지를 쓰는 게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일 것 같구나.
이제 내가 갈 때가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점점 내 스스로 느끼고 있다.
요즘 너의 태도를 보고 많이 당황했었다. 너의 입에서 나온 말들도…….
네가 병원에 찾아왔다가 나에게 혼나고 돌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혼자 많은 생각을 했다.
내 이기심이 너의 행복을 빼앗는 건 아닌지, 내가 잘 못 판단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네가 대학진학을 고민하고 있을 때 난 너의 꿈을 펼쳐주지는 못하고 농사를 해볼 것을 권유했을 때, 흔쾌히 응해줘서 난 너무 고마웠다.
그렇게 반듯하게 자라준 진호인데 내 생각이 잘 못되었다. 과거의 일로 인하여 평생 마음속에 묻어두고 소수의 사람들이 저지른 일을 다수에게 적용하였으니 아비가 어리석었다.
진호야 내가 그 여자 얼굴도 못 보았지만 부디 결혼해서 행복하게만 살아다오, 그게 내 마지막 부탁이자, 선물이다.
네가 행복하면 난 그걸로 됐다. 그 대신 열심히 잘 살아야 한다.
이 말이 처음 하는 말 같은데……. 사랑한다. 진호야!
어느새 편지지에는 흐르는 눈물로 잉크가 번 저가고 있었다.
진호는 중환자실에서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 하려던 말이 이 것이었다는 걸, 마지막 아버지의 평온한 표정이 의미하는 것도 이것 때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미워하시는 것 같았지만 그의 마음속엔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게 존재하고 있다는 걸 진호는 편지를 읽으며 느낄 수 있었다.
그 길로 경운기를 타고 아버지의 산소로 갔다. 그는 아버지 산소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말했다.
“아버지 제가 잘 못했어요, 아버지의 깊은 마음도 모르고 아버지를 원망 했어요, 아버지의 유언대로 정말 열심히 잘 살게요.”
어느새 늦은 가을비가 내리고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심은 지 얼마 안 되는 잔디가 비에 촉촉이 젖어가고 있었다. 진호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왔다. 어머니도 그 편지를 보셨는지 한쪽 구석에서 울고 계셨다. 그는 어머니를 끌어안으며 같이 울었다. 모자의 울음은 굵어지는 빗방울 속에서 하염없이 흘렀다.
이튿날, 옥화를 만나러 읍내로 나갔다. 약속한 장소에 나와 있던 그녀는 그때 진호가 그냥 돌려보낸 것 때문에 좀 불안한 표정이었다.
“찐호씨, 이제 저 중국으로 감다. 부띠 좋은 사람 만나길 바람다.”
“옥화씨, 이제 안 가도 되요, 중국 가서 돈도 많이 못 벌고 힘들게 고생할 거잖아요. 이젠 여기서 같이 살아요.”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예? 같이 살자 꾸요?”
“네, 제가 매월 가족들의 생계비는 보내드릴게요. 여기서 행복하게 살아요.”
진호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그녀도 기뻐하며 웃음을 멈추지 못하였다. 그 길로 집으로 같이 가 그녀를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소개시켜드렸고 어머니도 그녀의 고운 모습과 싹싹함에 맘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그들의 결혼식은 아버지의 49제가 안 지난 관계로 조촐히 치러졌다. 동네사람들이 모인 가운데서 그들의 축복을 받으며 진호와 옥화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첫댓글 으음.. 한편의 동화를 보는 듯한 기분으로 읽었습니다.. 그외에도 많은것을 느꼈는데.. 문예부 모일때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