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청평사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 오봉산에 있는 절로 973년 승현선사가
창견하여 백암선원이라 했던 곳으로 1550년 보우가 청평사(淸平寺)라
개칭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물 제165호로 지정된 청평사(淸平寺)
회전문(廻轉門)과 극락보전, 블각 1동이 있다.
청평사는 한국전쟁 때 거의 소샐된 것을, 1970년대에 전각들을 짓고
회전문을 보수하고 범조각과 요사채를 앉쳤다. 지금은 회전문(廻轉門)
앞과 뒤, 대웅전 사이에 반듯한 건물터들만 쓸쓸히 남아 휑하니 뚫린
느낌이지만, 이곳 읍지에 따르면 고려시대 청평사(淸平寺)의 규모는
221칸이나 됐다고 전한다.
대한 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新興寺)의 말사이다. 973년
(광종 24) 영현선사(永賢禪師)가 창건하여 백암선원아라 하였다.
그 뒤 폐사가 되었다가 1068년(문종 22년) 이의가 중건하고 보현원이라
하였으며 1089년(선종 6넌) 이의의 아들인 이자현(李資玄)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자 도적이 없어지고 호랑이와 이리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이에 산이름을 청평(淸平)이라 하고 절 이름을 문수원(文殊阮)이라 한 뒤,
견성암(見性菴), 양신암, 칠성암, 등운암, 복희암, 지장암, 식암 선동암,
등 8암자를 짓고 크게 중창하였다. 1327년(충숙왕 14) 원나라 황제 진종의
비(妃)가 불경, 재물을 시주하였고, 1367년(공민왕 16)에 나옹(懶翁)이
복희암에서 2년동안 머물렀다. 1555년(명종 10) 보우(普雨)가 이곳에 와서
청평사로 개칭하였고, 대부분 건물을 신축하였다. 1711년(숙종 37)에 환성
(喚惺)이 중수하였고, 1728년(영조 4)에 각선이 삼존불상을 조성하였다.
6·25전쟁 때 구광전과 사성전 등이 소실되었다. 1977년 공철(空徹)이 극락
보전과 삼성각을 중건하였고, 1979년 향봉(香奉)이 해탈문과 적멸보궁을,
1984년 서호(西昊)가 요사와 청평루, 서향원을, 1988년 석진(石眞)이 대웅전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해서 보물 제165호로
지정된 청평사 회전문과 극락보전, 적멸보궁, 청평루 서향원, 해탈문, 불각
1동이 있으며 조금 떨어진 곳에 요사채가 있다.
회전문(廻轉門)
보물 제165호로 앞면3칸, 옆면1칸의 단층 문으로,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청평사는 조선 명종 때 보우(普雨,1509∼1565)가 다시 건립한 절인데
경내에는 국보로 지정되었던 극락전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6·25전쟁 때
불타 버렸다. 문은 대웅전으로 들어가슨 입구에 위치해 있다. 가운데
1 칸은 통로로 사용되고 있는데, 제법 넓은 편이다. 그 좌우의 협간
(夾間)은 가운데 칸에 비해서 매우 좁지만, 3먼을 모두 벽으로 마감하여
안에 천왕(天王)이나 신장(神將) 등의 입상(立像)을 모실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문의 좌우에는 악량이 길게 연결되어 있다.
대웅전 계단의 소맷돌
국보로 지정되었던 극락전이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후 지금은
그 기단 위에 대웅전이 들어섰다. 무지개처럼 공굴린 계단의
소맷돌 끝부분이 정교한 조각 솜씨를 자랑한다.
이자현은 그 때 산 이름을 '맑게 평정되었다'는 뜻의 청평(淸平)이라 하고
자신이 두번이나 친견한 문수보살으 이름을 따 절 이름을 문수원(文殊院)
이라했다. 또 전각 여러 채를 짓고 견성(見性), 양신(養神) 등 여덟 암자를
새로 세웠으며, 청평산 골짜기 전체를 사찰 경내로 삼아 정원으로 가꾸었다.
이 정원이 오늘날 고려정원의 기초이자 모범이며 가장 오래된 정원으로
전해져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문수원 정원'(文殊院庭園)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