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파 연필깎이 / 심재휘
사춘기는 수식어가 없는 밤이다
열여섯을 앓고 있는 딸이 눈물방울을 떨구고
아직은 식지 않은 여름밤에
선풍기는 소리 없이 돌고
나는 연필깎이로 샤파 샤파 연필을 깎는다
연필은 어둠 속에다 무엇을 쓰려는 걸까
선풍기는 고개를 좌우로 젓기만 하고
나는 연필깎이를 적당히
정말 적당하게 힘을 주어 돌리는 오래된 손
아빠의 달은 창밖을 공전하고
딸의 별빛은 너무나 희미하고 이 넓은 우주에서
샤파 샤파 아프게 깎고 깎이는 연필의 밤
셀 수 없는 몇 자루의 밤을 몸 안에 품고 오늘은 딸이 운다
그럴 때면 나는 뭉툭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연필을 연필깎이에 넣고
길고 까만 심이 나오도록 손잡이를 돌리는데
살살 돌리는 방법밖에 알지 못하는 나의 손에는
얇고 구불구불한 눈물의 밥만 가득한데
연필의 내심이 제법 뾰족해져도 나에게는
열여섯 사춘기를 베껴 쓸 수 있는 연필이 끝내 없다
서글픈 딸의 봄밤은 작고 가지런한 그녀의 발등 위로
수식어도 없이 한 방울씩
툭툭 떨어져 번지고 있다
중국인 맹인 안마사 / 심재휘
상해의 변두리 시장 뒷골목에
그의 가게가 있다
하나뿐인 안마용 침상에는 가을비가
아픈 소리로 누워 있다
주렴 안쪽의 어둑한 나무 의자에 곧게 앉아
한 가닥 한 가닥
비의 상처들을 헤아리고 있는 맹인 안마사
곧 가을비도 그치는 저녁이 된다
간혹 처음 만나는 뒷골목에도
지독하도록 낯익은 풍경이 있으니
손으로 더듬어도 잘 만져지지 않는 것들아
눈을 감아도 자꾸만 가늘어지는 것들아
숨을 쉬면 결리는 나의 늑골 어디쯤에
그의 가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