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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34 제16차 문화답사: 청계천
작년 6.12(토) 청계천을 답사할 때 광화문역에서는 조금씩 내리던 빗방울이 점점 굵어져
廣橋에서 계획을 변경, 國立故宮博物館을 답사했었다.
그런데 제16차 문화답사날인 7.9(토) 오전에도 비가 계속 내려 우리34 문화답사회와
청계천은 ‘비와 끈끈한 인연(?)을 맺었나?’ 했더니 11시경부터 비가 그치고 오후에는 가끔
뜨거운 햇살까지 쪼여 조금 덥기는 해도 무사히 답사를 마쳤다.
코스는 광화문역에서 출발하여 청계광장에서 청계천 물길 따라 청계천 6가 五間水門과
二間水門을 거쳐 光熙門까지 답사하고 장충동 <평양냉면>에서 즐거운 시간으로 마무리했다.
청계천의 일부 교량이름이 헷갈리고 누락된 사진 때문에 어제(7.12/화) 청계천을 다시
다녀왔는데 流量증가로 청계천 산책로는 출입금지, 청계천 위 인도를 따라 청계광장에서
오간수교까지 가면서 누락된 자료를 확인하였다.
2011. 7. 13 孤 山 朴 春 慶
淸溪川(원래 이름은 開川)
청계천은 內四山(北岳山∙仁王山∙南山∙駱山)으로 둘러싸인 서울盆地의 모든 물이 모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살곶이다리[箭串橋] 부근에서 中浪川과 합쳐 서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합류하는,
都城의 한 가운데로 흐르는 길이 10.84km의 하천이다.
太祖 李成桂가 漢陽으로 遷都할 때 자연하천으로 건기에는 乾川으로 汚水가 모이고, 우기에는
홍수로 가옥의 침수는 물론 인명피해까지 발생하였다.
太宗은 즉위 초에 몇 차례의 정비로 하천의 형태를 만들어가다가 太宗 11년(1411) 12월
하천정비를 위하여 開渠都監을 설치하고, 이듬해 開川都監으로 바꾸고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
하천을 정비했는데 이를 계기로 ‘내를 파내다’의 공사명인 보통명사 ‘開川’이 청계천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태종 때는 주로 本流를 정비한 반면 세종 때는 支川과 市廛行廊 뒤편에 도랑을 파는 등
細川을 정비하고 世宗 23년(1441) 馬廛橋 서쪽에 水標를 세워 水位를 측정하여 홍수예방에
도움이 되었다.
壬辰倭亂(1592)과 丙子胡亂(1636) 두 차례의 兵亂 이후 流民이 도성으로 몰려들어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개천 주변은 채소밭 경작으로 수로가 막히고, 땔감 벌목으로 인한 민둥산에서
토사가 밀려 내려오는데다 17~8세기에는 이상기온으로 강수량도 많아 英祖가 즉위한
1725년 경에는 개천은 토사가 쌓여 평지와 같은 높이에 이르러 준설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英祖 35년(1759) 10월 濬川司를 설치하고 이듬해 2월 土砂를 준설하여 개천의 깊이와 폭을
예전처럼 회복하고 무너진 다리를 복구하는 등 濬川(*濬: 깊을 준)의 大役事가 시작되었다.
동원된 인력은 漢城府民 15만 명, 雇丁(고용인력) 5만 명 등 20만 명이 동원되었는데 濬川의
대역사는 개천을 복구하면서 빈민구제를 위한 救恤의 목적도 있었다.
영조 49년(1773)에는 三軍門(訓鍊都監∙御營廳∙禁衛營)이 3개 구간으로 나누어 兩岸은 石築,
水路는 直線化, 뚝에는 버드나무를 심어 보강하였다.
純祖와 高宗 때에도 준설공사는 계속되었으며 개천에 놓인 다리는 水標橋·五間水橋·廣橋·
永尾橋·觀水橋 등 모두 24개에 이르렀다.
國權被奪 後 日帝가 1914년 조선의 하천명칭을 정리할 때 ‘淸溪川’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25년부터 新橋洞~都染洞간 청계천의 원류를 覆蓋하고, 1937년 太平路~武橋洞 구간을
복개했으며 日帝의 하천정비와 電車線路가설로 많은 교량이 철거 또는 훼손되었다.
光復 後 1955년 廣通橋 상류 약 136m를 복개하고 1958~1977까지 3차로 나누어 廣橋~
新踏鐵橋 구간을 복개하고 1967~1971.8 淸溪高架道路를 건설하였으며 1990년대 중반에는
복개도로와 高架道路의 안전문제로 床板, 보(빔), 橋脚 등을 보수하였다.
2003.7~2005.9월에는 태평로~신답철교 구간(5.84km)의 淸溪川을 사업비 3,868억여 원을
투입하여 현재와 같이 復元하여 서울을 대표하는 都心 속의 生態河川으로 자리 잡았다.
서울 淸溪川遺蹟(廣通橋址, 水標橋址, 五間水門址) -史蹟 제261호-
*廣通橋
都城 제일의 다리로 경복궁-六曹거리-雲從街(鍾路)-(광통교)-崇禮門 등 도성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중심통로에 위치하고 있었다.
임금이 陵幸(임금이 능에 거둥함)을 하거나 성밖으로 행차할 때 이 광통교를 건너 다녔으며,
중국에서 사신들이 왕래할 때도 숭례문을 지나 이 다리를 건너 궁궐로 들어갔다.
따라서 광통교는 御駕行列이나 使臣행렬이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도성 안에서 가장 큰
다리였다(길이 12m, 폭 15m).
광통교는 도성건설 때는 土橋였으나 太宗 10년(1410) 큰 비로 유실되어 옛 貞陵에 남아있던
무덤 돌을 사용하여 石橋로 다시 축조하였다.
貞陵은 太祖의 繼妃 神德王后(芳碩의 母后)의 무덤으로 원래는 聚賢坊(중구 貞洞 일대)에
있었으나 世子책봉문제로 恨이 맺힌 太宗은 정릉만 都城 안에 있는 것은 부적당하다는
名分을 내세워 태종 9년(1409) 지금의 성북구 貞陵洞으로 이장하면서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설치하지 않고 다른 구조물도 줄여 石物들이 옛 터에 남아 있었다.
*水標와 水標橋
수표교는 광통교와 함께 도성에서 가장 유명한 다리로 世宗 2년(1420)에 축조될 때에는
이곳에 말 시장인 馬廛(*廛: 전방 전)이 있다고 馬廛橋라고 했으나 세종 23년(1441)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하여 水標를 설치하면서 水標橋라고 불렀다.
水標는 測雨器와 함께 세종 때 만든 대표적인 과학기기의 하나로 처음에는 목재로 만들었으나
나중에 석재로 만들었다.
英祖 때 만든 水標(보물 제838호)는 청계천복개공사 때(1959) 장충단공원으로 이전했다가
1973년 청량리동 世宗大王記念館으로 옮겨놓았다.
水標橋(서울유형문화재 제18호)는 1959년 청계천복개공사 때 장충단공원으로 이전하였는데
수표교는 肅宗과 張禧嬪이 만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숙종이 수표교 남쪽 薰陶坊에 있는 永禧殿(太祖 등 여섯 임금의 御眞을 봉안한 곳)을 展拜하고
돌아오는 길에 수표교를 건너다가 여염집에서 문밖으로 임금의 행차를 구경하던 張玉貞을
궁궐로 불러들였는데 바로 禧嬪 張氏이다.
*五間水門
興仁之門(東大門) 남쪽 성벽아래로 개천물이 도성 밖으로 빠지도록 설치한 수문으로,
오간수문 조금 남쪽에는 남산 남소문동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빠져나가는 二間水門이
있었는데 五間 또는 二間은 수문의 수를 일컫는 것이다.
五間水門은 크기가 五尺으로 쇠창살문을 설치하여 사람들이 출입하지 못하게 했으나
明宗 때 義賊 임꺽정이 오간수문을 통하여 달아났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외부사람들이
몰래 출입하는 통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1907년 中樞院 參議 劉猛 토목국장이 물과 토사가 쉽게 흐르도록 한다는 명분으로 수문을
철거하고, 1908년에는 동대문∙오간수문 부근의 성벽도 헐어버리고 콘크리트교량을
가설하여 ‘五間水門’은 사라지고 ‘五間水橋’ 또는 ‘오간수다리’라고 부르게 되었고 오간수교는
電車의 주요통로가 되었다.
假山(造山) 터
청계천 주변에는 오간수문 안쪽의 개천 남북에 假山이 하나씩 있었다.
개천을 浚渫한 토사를 하천 양쪽에 방치하면 비가 오면 다시 흘러 대역사가 허사가 된다는
당시 원로 대신 知守齋 兪拓基의 의견을 받아들여 英祖는 엄청난 양의 토사를 멀리 운반할
수단이 없어 오간수문 兩岸에 산처럼 쌓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假山은 개천 변 거지들의 근거지가 되어 토굴을 파고 살았으며 이들에게
뱀을 잡아 팔 수 있게 했는데 뱀잡이를 ‘땅꾼’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들이 가산에서 땅굴을
파고 살았기 때문이다.
북쪽 가산은 光武 2년(1898) 전차차고를 만들 때, 남쪽 가산은 조선약학교(1918년),
경성사범학교(1922년)를 건립할 때 사용되었다.
중구 芳山洞은 假山에 심은 무궁화 향기가 이 마을로 퍼진 데서 유래되었다.
청계천 사진
(01) 광화문광장에서 보이는 경복궁과 北(白)岳山,
저 뒤에는 북한산 碑峰과 사모바위로 이어지는 비봉능선이 보인다.
(02) 광화문에서 白岳과 북한산 비봉을 바라보며….
(03) 청계천의 발원지
(04) 서울 성곽 北岳山의 彰義門(紫霞門) 바로 남쪽에 있는 청계천 발원지 標石
-2008.11.30 촬영-
(05) 청계광장의 조형물 <스프링(Spring)>
미국의 팝 아트 미술가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erg)’와 ‘코샤 반
브루군(Coosje Van Bruggen)'의 공동작품.
높이 20m로 생동감 있게 도약하는 서울을 상징한다고 함.
(06) 白九 金裕元 동문의 설명, 청계광장에서.
(07) 청계광장 분수,
청계천 물길이 시작하는 곳으로 하루에 사용하는 물은 자양취수장에서 취수한 한강물
12만톤과 지하철 지하수 약 2만톤이다.
(08) 청계광장에서 흘러내리는 물
(09) 八道의 기운과 정기를 한곳에 담은 곳 八石潭
(10) 팔석담에 있는 ‘행운의 동전 던지기’
(11) 毛廛橋
(12) 청계천의 여울, 물에 산소를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고…
(13) 廣通橋
(14) 광통교 橋脚
(15) 광통교 교각에 음각된 <庚辰地平>
庚辰年(영조 36년/1760) 濬川工事가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동시에 항상
이 네 글자가 보이도록 준천을 당부하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한다.
(16) 광통교 橋臺에 사용된 옛 貞陵의 神將石, 彫刻솜씨가 精巧하다.
(17) 광통교 橋臺의 거꾸로 놓인 神將石, 故意일까? 失手일까?
(18) 광통교 橋臺의 신장석
(19)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貞陵 (사적 제208호) 陵上,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다.
-2008.9.13 촬영-
(20) 열띈 설명과 경청
(21) 원추리
(22) 廣橋
(23) 首善全圖
古山子 金正浩가 그려 木刻한 서울의 지도 首善全圖木板(보물 제853호/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을 청계천 타일 벽면에 재현한 1820년대의 서울지도.
(24) 正祖班次圖(正祖大王華城幸行班次圖)
惠慶宮 洪氏의 회갑을 맞아 顯隆園(思悼世子의 묘/후에 隆陵)으로 향하는 正祖의
華城行次를 檀園 金弘道의 책임아래 그린 木板그림(奎章閣 소장)을 세라믹 타일
5,120장에 높이 2.4m, 길이 192m에 사람 1,779명, 말 779필 등을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이 그림의 ‘慈宮駕較’는 혜경궁 홍씨가 탄 가마이다.
*班次圖; 나라의 의식에 문무백관이 늘어서는 차례와 행사 장면을 그린 그림
(25) 正祖가 탄 ‘座馬’, 임금을 그릴 수 없어 말만 그렸다.
(26) 삼각동천 벽천분수(water screen)
下水냄새를 차단하고 景觀造成을 위해 커튼형태의 분수가 설치된 下水排出口
(27) 三一橋, 三一路를 연결하는 다리
(28) 베를린장벽
1961년 동독에 설치되었던 베를린장벽(높이 3.5m, 폭 1.2m, 두께 0.4m),
독일이 통일되면서 1989년에 철거되었다. 休戰線은 언제?
(29) ‘行動하는 愛國者’
(30) 淸溪川, 수표교에서
(31) 水標橋, 원래 수표교의 위치에 가설된 臨時步道橋 -2011.7.12 촬영-
(32) 水標 -보물 제838호- -2008.8.19 촬영-
英祖 때 만든 水標로 청계천복개공사 때(1959) 장충단공원으로 이전,
1973년 청량리동 世宗大王記念館으로 옮겼다.
(33) 水標橋 -서울유형문화재 제18호- -2008.7.15 촬영-
1959년 청계천복개공사 때 장충단공원으로 이전하였다.
(34) 징검다리도 건너고…
(35) 觀水橋, 옛 濬川司에서 개천의 수위를 관측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36) 물에 쓸렸던 원추리
(37) 물에 쏠렸어도 꽃을 피우는 끈질긴 생명력의 원추리
- (2-2)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