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국공주는 1349년 10월 공민왕에게 시집와 1365년 2월 해산(중년 나이로 이때가 초산)도중 숨지는데, 노국공주와 함께 한 이 기간이 공민왕의 전성기에 해당한다.
원나라가 쇠망해 가던 바로 이 시기가 우리 민족이 맞이한 절호의 중흥 기회였지만, 노국공주(인덕왕후) 사후 공민왕은 초심을 잃고 정사를 그르치다
1374년 환관 최만생과 자제위 소속 홍륜 등 측근에게 시해되어 풍운의 일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한편 1364년경 공민왕이 발탁한 신돈(편조)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족에게 수탈당한 양민들의 땅과 노비를 빼앗아 원상복귀해 주는 등 대개혁정책을 펼쳐 백성들로부터 폭발적 지지를 얻었으나,
공민왕이 권문세족의 극심한 반발과 신변 위협을 극복하지 못하고 1371년 [신돈의 목]으로 이들과 타협한 결과 고려왕조는 석양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그 이후 우왕-창왕으로 이어지는 왕조 말기, 위화도 회군(1388년, 군사반란)에 성공한 이성계는 최영 장군을 주살하고 공양왕을 허수아비 왕으로 삼은 후, 결국 조선을 창업함으로써 5백년
고려왕조는 막을 내렸던 것이다. 이와 함께 多勿(고토회복)의 꿈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이성계 일파는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우왕과 창왕을 모두 신돈의 자손으로 몰아갔을 뿐만 아니라[고려사, 고려사절요], 원 지배기를 제외하고는 자주독립국이었던 大고려국을 대륙왕조의 제후국으로 격하하여 [世家-列傳] 체계로 [고려사]를 편찬하였다(本紀 없음).
이렇듯 반정세력이 멋대로 휘두른 [역사권력]은 두고두고 민족정기를 좀먹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