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국(대장)공주 사후 공민왕이
직접 설계-감독한 것으로 알려진 개성 소재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쌍릉](玄陵과 正陵) 전경...!!!
ⓒ단하/PHK/DB/
노국공주
궁전옥좌 꿈을 꾸던
1349년 시월 어느 날
부풀은 가슴으로/ 파초선에 새긴 첫사랑
청담의 은빛 여울/ 꽃바람에 흩어질 때
연화의 침전에 곱게 잠드는
내 사랑 노국공주여
눈보라가 몰아치던
1365년 이월 어느 날
흥왕사 극락전에/ 빌고 빌던 그 사랑이
한 줌의 흙이 되어/ 꽃상여에 여울질 때
당신은 어이해서 말이 없는가
내 사랑 노국공주여
[이호섭 작사/이현준 작곡/문희옥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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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쌍릉(현-정릉) 배치도
공민왕릉(현룽) 내부
쌍릉 사이에 뚫려 있는 지하 영혼통로
접사/ 영혼통로
고려 제31대 공민왕(왕전, 1330-1374, 재위 1351-1374)은 제28대 충숙왕의 차남으로 어린 두 조카의 뒤를 이어 어렵게 왕위에 오르는데, 그 후원 세력이 바로 원나라 노국대장공주[보르지긴 부다시리(寶塔實里)]*의 부왕인 위왕 아무케 황족이다.
*여기서 보르지긴(孛兒只斤) 혹은 보르지기트(博爾濟吉特)란 [대몽골제국]**의 황금씨족 즉, 칭기즈칸(본명 보르지긴 테무친)의 혈통임을 뜻한다.
**예케 몽골 울루스(원나라도 그 일원이다)
황성옛터... 만월대... 그리고 송악산
노국공주는 1349년 10월 공민왕에게 시집와 1365년 2월 해산(중년 나이로 이때가 초산)도중 숨지는데, 노국공주와 함께 한 이 기간이 공민왕의 전성기에 해당한다.
원나라가 쇠망해 가던 바로 이 시기가 우리 민족이 맞이한 절호의 중흥 기회였지만, 노국공주(인덕왕후) 사후 공민왕은 초심을 잃고 정사를 그르치다
1374년 환관 최만생과 자제위 소속 홍륜 등 측근에게 시해되어 풍운의 일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한편 1364년경 공민왕이 발탁한 신돈(편조)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족에게 수탈당한 양민들의 땅과 노비를 빼앗아 원상복귀해 주는 등 대개혁정책을 펼쳐 백성들로부터 폭발적 지지를 얻었으나,
공민왕이 권문세족의 극심한 반발과 신변 위협을 극복하지 못하고 1371년 [신돈의 목]으로 이들과 타협한 결과 고려왕조는 석양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그 이후 우왕-창왕으로 이어지는 왕조 말기, 위화도 회군(1388년, 군사반란)에 성공한 이성계는 최영 장군을 주살하고 공양왕을 허수아비 왕으로 삼은 후, 결국 조선을 창업함으로써 5백년
고려왕조는 막을 내렸던 것이다. 이와 함께 多勿(고토회복)의 꿈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이성계 일파는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우왕과 창왕을 모두 신돈의 자손으로 몰아갔을 뿐만 아니라[고려사, 고려사절요], 원 지배기를 제외하고는 자주독립국이었던 大고려국을 대륙왕조의 제후국으로 격하하여 [世家-列傳] 체계로 [고려사]를 편찬하였다(本紀 없음).
이렇듯 반정세력이 멋대로 휘두른 [역사권력]은 두고두고 민족정기를 좀먹는 것이다.
[삼태사]를 모신 안동 태사묘/太師廟
안동(옛 古昌)은 고려왕조의 탯줄과 같은 곳...!!!
927년 음력 11월 후백제의 견훤(軍)은 경주 포석사(포석정)에서 제례를 올리던 경애왕을 주살하고 김부를 허수아비 왕(경순왕)으로 세운 다음 철군하였는데, 뒤늦게 도착한
고려의 왕건(軍)은 대구 공산 인근(현 팔공산)에서 견훤을 따라잡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이 공산전투에서 왕건은 신숭겸 김락 일행의 목숨과 바꾸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고창(안동)까지 쫒기게 된다.
여기서 전열을 재정비한 왕건은 고창 호족 [김선평 권행 장정필](三太師) 등의 지략과 민초들의 전폭 지원으로 승승장구하던 견훤군을 역습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 결과에 따라 후삼국의 주인이
왕건으로 바뀌게 되었다.
공민왕 어필 [영호루]
공민왕 어필 [안동웅부]
왕건의 고창전투로부터 430여 년이 지난 1361년, 공민왕은 홍건봉기군(홍건적)에 쫓겨 안동으로 몽진하였다. 공민왕은 이 곳에서 지친 심신을 추스리며 중흥의 발판을 다진 인연으로(훗날 요동까지 정벌),
1362년 안동(당시 福州牧)을 '안동대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위 [안동웅부]라는 어필을 하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왕조 명필 중 명필로 꼽히는 공민왕 어필
공민왕 어필 천산대렵도(일부)/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공민왕이 타던 거문고(琴)/ 오동나무/
구한말 의친왕 이강을 거쳐 예산 수덕사에서 소장하고 있다.
(滿空스님 증)
거문고 뒷판/ 만공스님 낙관
만공스님은 수덕사 초당에서 거문고를 즐겨 탔다고 한다
<김덕권, 만공의 거문고 소리, 뉴스프리존, 2021>
공민왕신당(고려 공민왕 영정 봉안지당)/종묘
종묘(宗廟)는 사직단과 더불어 조선왕조에서 국가적 제례를 봉행하는 신성한 곳이다.
그런데 이 곳에 고려 공민왕의 신당을 건립한 것은 '위 건립 경위와는 달리'
조선 건국과정에서 이방원 일당이 수많은 고려 왕씨 종친들과 무고한 충신들을 도륙한 데 대한 천벌의 두려움 때문으로(그들의 원혼이나마 달래고자 한 것으로) 판단된다.
신당 내 정면에 봉안된
공민왕-노국공주 영정. 찻잔을 앞에 두고 있다
신당 내 좌측에 봉안 된 공민왕 어필 준마도1
동 어필 준마도2
동 어필 준마도3
마포 공민왕사당/ 광흥창터
억울한 죽음일수록 이른바 '영빨'을 잘 받는다고 하여 공민왕사당은 전국에 산재해 있다고 한다
자료/ 한국학중앙연구원/ 성남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