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전국에 내린 서설(瑞雪)이 녹지 않은 가운데 공사가 한창인 충남 연기군 일대 세종시 부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찾노라면 단연 밀마루 타워다. 세종시 한복판에 있는 높이 42미터(해발 98미터)의 밀마루 타워는 타워 꼭대기로 이어지는 엘리베이터 주변을 유리벽으로 둘러싼 건물이다.
이곳 전망대에 올라서면 건설 중인 세종시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외지인들에게 낯설게 들리는 ‘밀마루’란 이름은 충남 연기군 종촌면의 옛 지명으로 ‘낮은 산등성이’란 뜻이라고 한다. 취임 직전부터 행정중심복합도시 수정 논란의 중심에 서왔던 정운찬 국무총리도 취임 직후인 지난해 10월 30일 세종시를 첫 공식 방문하는 길에 이곳 전망대에 올랐다.
그동안의 건설 진행상황을 보고받은 정 총리는 이곳 현장에서 “세종시를 명품도시로 만들어야겠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며 세계적 기업들도 입주를 선호할 명품 자족도시를 건설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혔다.
그로부터 2개월여 만인 1월 11일 세종시 발전 방안(수정안)이 발표됐다. 지난해 9월 3일 정 총리가 ‘후보’ 신분으로 세종시 계획 수정을 언급하면서 세종시 논란이 촉발된 것을 기점으로 하면 4개월여 만의 일이다.
정 총리 취임 이후 정부는 세종시 추진기획단(지난해 11월 5일)과 세종시 민관합동위원회(11월 16일)를 출범시켜 세종시 수정안을 준비해왔다. 이명박 대통령은 비등하는 여론 속에 국정 운영의 방향을 밝히기 위해 지난해 11월 27일 <특별 생방송 대통령과의 대화>란 TV 프로그램을 통해 세종시 원안을 지지했던 대선 공약에 대해 국민 앞에 사과하고 새로운 세종시 발전 방안을 모색할 것을 약속한 바 있다.
새로운 세종시 발전 방안을 들여다보면 기존 정부 조직의 일부를 뚝 잘라 9부 2처 2청이 이전하는 내용의 기존 ‘행정중심복합도시 세종’이 자족기능이 강화된 ‘교육·과학중심 경제도시 세종’으로 ‘업그레이드’됐다.
이날 발표된 발전 방안의 골자는 세종시의 성격을 교육·과학중심 도시로 새로 규정한 외에 △자족용지 확대(전체 부지의 6.7퍼센트→20.7퍼센트) △주요 기능 수정(행정→산업, 대학, 연구) △조성기간 단축(2030년까지 단계적 개발→2020년까지 집중 개발) △투자 유치 신설(과학비즈니스벨트 거점도시화, 삼성 한화 등 대기업 투자 유치) △고용인구 증대(8만4천→24만6천명) △총인구 증대(17만→50만명) △인센티브 도입(맞춤형 부지 공급, 세제 지원, 규제 완화 등)과 같은 실속 있는 정책들을 챙겨 넣었다.
세종시 발전 방안 발표 이후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평균적 여론’을 따지자면 찬성 쪽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찬반(贊反) 지형도는 지역별로 커다란 격차를 드러내고 있다.
세종시 수정안 발표 이후 언론에 보도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동아일보(코리아리서치)와 한국일보(미디어리서치)의 경우 세종시 수정안 찬성이 각각 54.2퍼센트, 51.3퍼센트로 절반을 넘어섰고, 반대여론은 37.5퍼센트, 34.0퍼센트에 그쳤다.
그러나 지역별로 속내는 복잡했다. 조선일보의 여론조사(한국갤럽) 결과는 ‘서울 압도적 찬성, 영남은 반반, 광주는 충청보다 반대가 더 많다’였다. 세종시와 ‘당장은 무관해 보이는’ 광주 지역의 반대가 더 드센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여론조사에서나 대전, 충남, 충북 등지의 여론은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 발표 이후에도 원안 추진에 대한 찬성이 과반수로 여전히 ‘다수’였다.
그래도 ‘변화의 조짐’은 있다. 세종시 수정안 발표 전 실시된 한국갤럽의 조사(지난달 26일) 결과와 비교하면 충청권에서 ‘원안대로 추진해야 한다’(57.1퍼센트→55.8퍼센트), ‘수정안대로 추진해야 한다’(25.8퍼센트→36.9퍼센트), ‘모름·무응답’(17.1퍼센트→7.3퍼센트) 등으로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 발표 이후 수정안 찬성이 다소 늘어나는 변화를 조금은 보이고 있다.
분명 수정된 세종시 발전 방안이 원안과 비교해 ‘풍성한 선물꾸러미’로 보이는데도 왜 충청권의 민심은 아직도 큰 틀에서 볼 때 요지부동일까. 송석구 세종시 민관합동위원회 위원장은 “충청인들의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한때 원안 고수를 다짐했던 대통령의 공약이 지켜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불신도 깔려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이 세종시의 출생과 성장의 이력을 한번 되짚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종시의 출발점은 2002년 9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충청권 행정수도 공약 발표에서 비롯됐다. 당시 충청권으로의 수도이전 계획은 수도권 민심의 이반을 부르고 국론이 분열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결국 2004년 10월 신행정수도 특별조치법은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대선 공약 이행’이란 부담을 안은 당시 정권은 결국 정부 조직의 일부인 9부 2처 2청을 충청권 행정수도로 이전하기로 하고,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특별법을 밀어붙여 지금의 한나라당인 야당의 반발 속에 2005년 3월 국회에서 통과됐다.
당시에도 정부 조직의 일부를 분리해 충청권으로 이전하는 것에 대해 비효율성 우려가 제기됐으나 화상회의, 책임총리제 등이 대안으로 제시됐고, 예정된 이주 시작 일정이 2014년부터로 당장 ‘코앞의 현실’이 아니다 보니 실제 상황에 대한 분석은 일단 미뤄둔 상태였다.
그러다 2014년이 점차 목전으로 다가오며 잠재됐던 우려가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한국행정연구원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정부 부처 간 분리된 거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연간 3조~5조원의 비용이 발생, 부분적 정부 부처 이전으로 향후 20년간 1백조원 이상의 비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기존 계획에 반영된 자족기능 용지 비율은 수도권 신도시에도 못 미치는 6.7퍼센트에 불과해 실제 유입이 가능한 인구는 17만명에 불과한 것으로 분석됐다. 이미 단추를 잘못 꿰고 있었던 것이다.
조원동(총리실 사무차장) 세종시 기획단장은 “세종시 발전 방안은 어제의 잘못된 약속을 바로잡는 일이자 새로운 내일의 토대를 다지는 시대적 과업”이라며 세종시 발전 방안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세종시 발전 방안 발표와 함께 일각에서는 땅값과 세제 지원 등 ‘특혜 논란’과 다른 지역에 피해를 준다는 ‘블랙홀’ 논란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세종시 정부지원협의회 의장인 권태신 국무총리실장은 “많은 사람이 ‘역차별’을 말하고 있으나 이것은 하나씩 따져보면 절대 특혜가 아니다”며 “세종시가 타 지역에서 유치할 기관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란 지적도 있지만 오히려 과학비즈니스벨트 거점도시로서 세종시의 발전 원동력이 여타 지역으로 확산되는 핵분열 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세종시에 제공되는 세제 혜택은 혁신도시 입주기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권 실장은 “세종시의 산업용지 저가 공급은 정부가 재정 지원을 해서 낮춘 게 아니라 용지매각 순서를 조정하고 사업비를 절감한 것으로 다른 도시에도 가능하다. 세종시 입주기업은 모두 신규 사업으로, 타 지방과 협의됐던 사업은 없다”고 설명했다.
세종시 한 곳으로 국가 자원이 지나치게 몰리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으나 중이온가속기 등 과학비즈니스벨트 핵심 시설 투자 말고는 현행 특별법에 규정된 8조5천억원 이상의 재정부담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 정부 설명이다.
세종시 민관합동위원회 위원이기도 한 박양호 국토연구원장은 “민관합동위원회에서는 국가의 미래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 가장 큰 고민을 했다”며 “국가정책의 품질을 높이고 실질적인 균형발전을 이루어 국가와 충청권 발전에 도움이 되는 최적의 안을 도출하는 데 애썼다”고 전했다.
박 원장은 “세종시 원안 고수를 주장하는 분들은 여전히 정부 부처가 이전해야 국가 균형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으나 이는 엄청난 비효율을 발생시키고 국가 운영에 있어서 부실만 낳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이번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세계는 더욱 치열한 국가 간 경쟁관계에 놓여 경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21세기 먹을거리 창조와 경제적 우위를 찾기 위해 새로운 경제발전 모델이 나와야 하고, 실질적인 지역 균형발전과 국가경쟁력 강화가 동시에 이뤄질 수 있는 방안으로 지금의 세종시 발전 방안이 탄생하게 됐습니다.”
누군가는 세종시 발전 방안을 ‘뜨거운 감자’라고 불렀다. 혹은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이라고 했다. 찬성과 반대의 양 진영으로 나뉘어 우리 국민은 또 한 번 국론 분열 시험대 앞에 놓여 있다. 국회의 관련법 개정이란 다음 수순을 밟아야 하는데도 여야 정치인들이 서로 각을 세우는 것은 물론이고 여권 내에서조차 맞서 있다. 더구나 6·2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권의 ‘예민한 시점’이다. ‘진실’보단 날선 비판과 대안 없는 지적이 난무할 때다.
세종시 발전 방안을 발표한 정 총리는 앞으로 매주 충청권에 내려가 현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수정안의 진정한 의미를 몸소 알린다는 계획이다. 세종시 발전 방안이 진정 ‘판도라의 상자’라면 우리에게, 대한민국의 미래에 아직 희망이 있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나온 것은 ‘희망’이기 때문이다.
글·박경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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