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생대학 부모박복과 출신이라서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일반적으로는 즐거운 일이 기억나게 마련이지만 단 한 가지도 즐거운 기억이 없다.
출신에 어울리게 세상에 대한 좌절과 반항심이 많았지만 다행히도 신앙적으로 표출되어서 희망 없는 현실에서 오히려 극단적으로 비현실적인 꿈을 꾸게 되었다. 그것은 십대답지 않게 수도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참 대중문화에 관심을 갖는 10 대 때 친구들이 팝송을 들으며 가사를 옮겨 적고 했었지만 나는 한 번도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수도사가 되기로 해서 성인전에 관심이 많던 나에게 사랑이니 이별이니 하는 팝송의 내용들이 관심을 끌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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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막상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수도자가 되려고 했을 때는 성당 신부가 허락을 해주지 않아서 갈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는 천주교가 아직 철이 덜 들어서 집안 전체가 신자가 아닌 경우 수도원도 신학교도 받아주지를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수녀가 되었으면 틀림없이 마더 테레사의 사촌쯤은 되었을 여동생도 받아주지 않아서 결국 술주정뱅이의 아내가 되어서 별 볼일 없이 평범한 주부로서 살고 있다.
의지할 곳이 없는 우리 남매 입장에서는 신부나 수녀가 되는 것이 필요했지만 제도 교회는 우리 같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고 안정된 신앙가정 출신의 성소 후보자가 필요 했던 것이다. 즉 당시 천주교와 우리 남매 사이의 필요충분조건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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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생활은 멋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도사가 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는 세상의 모든 것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고 둘째는 세상에서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야만 한다.
수도원은 영성을 추구하기 이전에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이다. 공동체 훈련이 안되면 제 아무리 고귀한 영성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수도원 생활이 유지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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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가르침은 실제의 생활에서 개인들이 실천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예수는 말끝 마다 ‘너희는 서로…… ’라고 하면서 ‘서로’를 강조 했다.
예수의 가르침은 일차적으로 그를 따르는 제자공동체를 대상으로 한 말이다. 즉 예수의 윤리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가르친 윤리가 아니고 공동체 안에서 실천해야 하는 윤리라는 말이다. 그래서 슈바이처는 예수의 윤리를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중간 윤리]라고 표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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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부처, 불법, 승가의 3 보배에 귀의한다는 말이 있다. 부처나 불법에 귀의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승가에 귀의한다고 하면 왜 스님들에 의지해야 하느냐고 의문이 제기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스님들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는 불자들이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다. 즉 부처도 공동체를 보배로 생각 했다는 것이다.
불교의 공동체는 수행을 하고자 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형성된 것이다. 다시 말해 여기엔 개인주의적인 정서가 깔려 있다. 반면에 기독교의 공동체는 수행을 할 만한 여건이 현실적으로 되지 않는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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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의 불교와 기독교는 기본원리 면에서부터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불교는 '수행을 하려면 먼저 공동체를 이루어라'이지만 기독교는 '세상을 공동체로 만들어라. 그러면 삶 자체가 수행이 된다.'는 것이다. 자발적인 수행자들이 모이는 불교에 비해서 결과적으로 기독교적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더 어렵다.
28Hum Kim, 곽영관, 외 2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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