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종중사 이야기
2020년 4월 8일 영암 류근섭법무사를 방문하였고 이천4구 부선(옛이름 부선장,구장터)에 남재공 종손 봉석이 조성한 관광버스 주차장의 종중에 대한 요구 사항을 들었습니다.
1. 남재공영암종중 토지가 45필지에 650,922.7㎡(197,249평)인데 6년전 2014년 종중땅 대표를 류**로 했는데 말도 안되는 이유(노령연금, 농민수당 감소, 농자금대출불리 등)를 들어 종중토지 등기부 대표에서 빼달라기에 법무사를 통하여 대표 변경하는데 거액의 수수료를 들고 토지 대표자를 변경했습니다.(법무사가 노령연금 등과 관련 없다고 해도 등기부 종중대표에서 빼라고 함)
그래서 은행 거래용 고유번호증, 토지등기부 대표 내이름으로 되어 있어 종중통장거래나 문중토지 사용 승낙서 등은 모두 내 이름과 인감이 들어갑니다(회장이나 차기 회장은 법적 책임이 없으며 나는 회장단이 아니기에 의사 결정에 참여 하지 않음).
2. 남재공서울종중은 2020년 결산보고서에 의하면 자산총액이 약48억이지만 현금제외하고 공시가격으로 대지 약 17억, 임야 5.2억, 논(沓) 9억, 밭(田) 5억인데 임야 논 밭이 군사보호지역에서 해지되면 현재보다 약 100배이상 가격 상승이 예상되는 자산을 보유한 종중입니다.
3. 서울과 고양시 재산중 임야는 남재공 子婦(평산신씨)가 친정 아버지 휘 신화국(신립장군 아버지)에게 시아버지 묘자리를 달라고 해서 신립장군집에서 준 임야로 20017년 서울문산고속도로 수용되고 남은 임야이며 논은 1946년 영암종원들이 당시 벼(나락)를 한근 두근 모아 허리춤에 전대(돈주머니)를 차고 서울에 가서 55년전인 1965년 고양군 사리현동에 논 1,000평을 아버지와 분토할아버지(諱寅亨)께서 재량형님과 함께 새나라택시를 타고 가서 사고 당시 서울 중구청옆에 고양군청에 가서 등기를 마친 논인데 남재공 위토답으로 마련한 땅이며 남재공 영암종중은 숙종조에 금정연소, 금수리, 이목동, 태리동에 임야를 확보되었고 1953년 남재공 5-6대손자들 위토답을 마련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자산이 모아졌습니다.
4. 祠堂(齋閣) 제사와 묘역안내판
① 서당동 남재공 묘역
사교당 집안은 말이 없는데 모산 낙향조 모강공 다른 아들 중 몇분이 450년만에 경기도 고양시 사리현동에서 부모와 형제 곁으로 온 남재공 묘를 시비하는(모강공 이사회에서 승인한 묘자리임) 것이 둘레석을 제거하라, 문관(인)석을 제거하라, 구비가 한자라서 한글로 번역한 신비를 제거하라, 안내판을 제거하라입니다,
② 영수재 위패
남재공 증손 (대승공 22세) 부터 25세까지 태리동 영수재에 위패를 모시고 54분 시제를 지내는 것도 예법에 어긋난다고 시비합니다.
(영수재 24분할아버지와 할머니 포함 54분이 모두 위토답이 있어 제사를 지내 주어야 하는데 묘제에 헌관과 재관이 없어 합동제사를 모시기에 영수사로 승격할 예정임, 남재공음 묘제를 지내는데 위패는 일기불순때 제사용임)
※ 대종회는 포천 모성재를 모성사로 승격시켜 대승공부터 아래로 대승공10세후손까지 12분을 위패로 모시도록 추진한 전례위원들은 예법을 모르 것이 아닙니다.
※ 광주전남에 10여 타 문중에서 사당(祠堂)마케팅을 해 가면서 정승판서 관직이 없는 조상들(현고학생부군신위로 선조분들 구별이 안됨)에게 위패를 서상법으로 항렬과 생년월일순으로 모신 것이 보통 집안의 지방과 축문(紙榜, 祝文)으로 제사를 지낸 제례와 같다고 마케팅해 갔습니다.
③ 위패의 위치
㉠서상법(西上法)
조선왕조의 종묘는 서상법(西上法)으로 신주를 모십니다.
서상은 좌상(左上)을 동하는 우하(右下)로 왼쪽이 상석입니다.(살아 있는 사람은 오른쪽이 상석)
㉡소목법(昭穆法) : 원칙적으로 시조를 모신 사당을 중심으로 남쪽을 향하여 오른쪽에 세운 사당을 목(穆)으로 5대가 돌아가시면 1소에 신주를 꺼내고 그 자리에 2소 신주를 옮기고 2소 자리에 5대 신주를 모십니다.
西 | | 시조 | | 東 |
| | | | |
1목(2대) | | | | 1소(1대) |
| | | | |
2목(4대) | | | | 2소(3대) |
(신주를 바라보고 있을 때 방향으로 오른쪽이 동쪽임)
㉢ 소목법은 시조(중시조)에게 잔을 올리고 다음에 우전작이 우측 1대에 짐주하여 잔을 올리고 다음에 좌전작이 좌측 2대에 잔을 올리고 다음에 우측 3대, 다음에 좌측 4대 순으로 점주하여 잔을 올립니다.
㉣ 서상법은 모실 신위가 10 분 이상으로 잔을 좌우로 나누어 올린필요 없이 왼쪽부터 올리고 대수가 분명한 신위보다 형제간 신위(대수가 동일함)를 모실 경우 추천하는 신위 모시는 법입니다.
④ 묘역 안내판
모강공 묘역안내판을 이렇게 2m70cm높이로 해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모강공묘의 둘레석값 천 만원으로 바꾸어지고 아직도 모강공 묘 둘레석 공사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남재공종중에서 포천 모성사 안내판처럼 모강공묘역 안내석을 설치하고 싶은데 영암종중에서 제가 발언권이 없지만, 모강공후손들의 안내판 설치 공감대가 생기기를 기원합니다.
⑤ 모산 낙향조 대승공 19세 모강공 아들 5분 중에 판서공 둘째아들 사교당 집안은 남재공묘에 대하여 일절 말이 없고 모강공의 한분 아들 후손 일부가 시비를 합니다.
⑥ 휘 경창 선조는 3종숙되시는 약재공(숙종조 영의정)선조가 이목동에 자주 오셔서(족보 기록) 후손들에게 이목동 선택한 것을 지지했다는데 휘 경창 선조의 첫째 부인광산김씨는 자식이 없고, 둘째부인진주정씨는 2남, 세째부인 김해김씨는 5남2녀를 두었는데 현재 이목동 거주 자손 보다 모산에 거주하는 자손이 더 많은데 이목동 류가라고 합니다(남재공 종손은 모산에 계속 살았고 저의 큰집은 모산에 있음).
5. 영암군 신북면 이천리 이목동 집에서 바라본 모산 곰봉(熊峰)
※ 영암에 왔으니 이목동 집과 조부모,부모님 묘역을 돌아보고 왔습니다.
① 할아버지 때도 이목동 것 들이라 비하를 받았지만 지금처럼 심하지 않았는데 할아버지께서 당신 8대조 (휘 경창)가 모산에 사셨는데 모산은 농토가 비좁아 후손들 경제 활동에 문제가 있다면서 3번째 부인(김해김씨할머니)과 자식들을 이목동으로 보내 살게 했는데 그당시 숙종때 할머니의 친정에서 가지고 시집온 논 400평을 지금도 후손들이 보존하고 있으며 할아버지는 모산 큰집을 향하여 마을 동각(현 구회관)을 짓어 문중사를 동각에서 모산을 바라보면서 결정했고 살기는 통산(桶山, 이목동 회관마을)에 사셨고 아버지 때는 간은정에서 사셨습니다.
(이목동 집에서 보면 건너편에 모산 곰봉이 보임)
② 저는 6.25때 아버지 따라 간은정에 살았기에 남재공 후손이지만 모산과 이목동 남재공 후손들로 부터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재공 묘역 정비(비석이나 잔디 석축 등)나 영수사(永修祠) 승격문제, 전자 족보 발행 등 위선사업에서 의견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2017년 서울과 영암 남재공종중 임원직에서 모두 물려났는데 2020년이 되니 남재공영암종중에서 서류상 대표직은 하지 않겠다고하고 또 다른 종원들은 법률적 책임 없고 돈만 만지는 회장 총무는 하겠다고 하여 할 수 없이 종사(서류상 대표직)에 꺼어 들게 되었습니다.
③ 제가 남재공영암종중에서 7년간 총무를 하면서 1946년부터 한자로 기록된 회의록을 번역하여 여비규정, 시제 방법등을 정리하여 그대로 또 이사회 결의로 집행했는데 저를 비난하는 분들은 10-15년전에 서울 대전에 다니면서 여비를 10만원 받은 분들이 제가 총무를 하면서 KTX가 생겨 10만원은 부족하여 서울 12만원으로 이사회 결의로 집행했는데 자기들은 여비 한푼 받지 않고 서울 다녔다면서 저를 비난하고 서울과 영암에 회장과 총무를 욕심내기에 저는 3년전 서울 영암종중 모든 직에서 물러났는데 종중에 어려운 사안 처리는 하지 못 하면서 회장을 욕심내고 총무는 자기 조카를 시키려 했습니다.
6. 조부모님, 부모님, 형제들 묘역
① 위치 : 靈巖郡 新北面 梨川里 梨木洞 大可峙(영암군 신북면 이천리 이목동 대가치)
② 묘역에서 바라본 마산(馬山),모산 앞산으로 柳文이 등용되어 타고갈 말이란 설이 있음)
7. 논어(論語) 술이(述而)편에 나오는 말
飯蔬食飮水(반소식음수) : 나물 먹고 물 마시고
曲肱而枕之(곡굉이침지) : 팔을 베고 누웠으니
樂亦在其中矣(낙역재기중의) : 즐거움이 그 안에 있고
不義而富且貴(불의이부차귀) : 의롭지 않게 부귀를 누림은
於我如浮雲(어아여부운) : 나에게는 뜬 구름과 같다.
나물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어도 불의와 부귀에 흔들리지 않는 대장부처럼, 쌀 다섯 말에 지조를 굽힐 수 없었던 도연명처럼, 비록 어렵고 힘들어도 제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야겠다.
8. 문화류씨 宗史(잘 모르지만)를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고, 나물먹고 물 마시고 생긴 여유(物心모두)를 종원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은데 ~~~~~~ 뜬 구름과 같은 꿈이란 것을 알았습니다(특히 영암에서).
문화류씨 종사를 수 많은 문화류씨 종원들에게 어느정도 알렸다고 생각되기에 제가 개설한 불로그와 페북에 “류씨명문가”를 폐쇄하려고 했는데 아직도 문화류씨를 공격하는 모 성씨와 교묘하게 문화류씨 역사를 비하하는 세력이 있어 폐쇄를 미루고 있지만 소문중에 임원은 정말 하기 싫은 것입니다.
저는 움직이는 중소기업이라 생활하는데 부족함이 없는데 도와주면서 욕 먹고 비난 받는 종중일을 하기 싫은데 이번 경우처럼 종사일에 간여하게 되어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오늘도 종중토지와 농협 예금통장관계로 영암에 갈 필요가 없는데 갔다 왔지만 총무가 내 조언을 듣는 것도 아닌데 일을 처리하지 못하면 도와달라고 합니다.
9. 영암 남재공종중(태리동 종문) 현대사에서(4월11일 7대조이하 대반 시제때 참석후손 교육용)
① 일제 강점기에 대승공 29세 남파공 휘 병하선조(1851-1929. 영암군 참사, 명열 재열 경오 상훈 증조, 댁호 : 이동양반)께서 서당동 영모재(永慕齋)를 중수하셨고 휘 병래(1857-1939, 휘 도삼조부,휘강열 증조, 댁호 : 계정양반) 선조와 함께 모산 큰집에서 이목동 비하풍조를 시정하셨으며
② 대승공 31세 휘 인성(1880-1954,댁호 : 바레미양반, 재장 조부, 일제때 목포법원앞에서 법무사)께서 1946년 태리동 문계 창계에 주도적 역할을 하셨으며
③ 대승공 31세 휘 인형(1897-1976, 댁호 : 분토양반, 종필조부) 대승공32세 휘 무열(1918-1978,댁호 : 학암양반, 재균 父)선조들은 1954년 선전관문계 창계를 하셨으며 태리동 영수재 건립과 고양시 사리현동에 남재공 위토답 1,000평을 매입하는데 역할을 하셨습니다,
④ 위 다섯분이 전부 문중일을 했다기 보다는 일제강점기에 모산에서 남재공후손 서울에서 대학을 보낼 정도로 자녀교육이 종사 발전에 기본이라는 모산선조의 가르침을 따라 대학생[휘 복열(1924-?,대학졸업후 일본군에 징집되어 전사, 웅아저씨 제종형님) 휘 계열(1923-1976)휘 배열(오열형님,윤숙부) 휘홍열 보열(1925년생) 형제(화수할아버지 인완 아들,정동할아버지 인행 형님 동진백부)]을 이목동에서배출했고, 해방후 보리고개시절 굶고 살던 때 벼(나락)을 1-2근, 5근 등을 모아 문계를 만들고 당시 벼 이자가 100%이며 벼를 집에 가져다 좋으면 수분이 증발하여 근량이 줄어들고 또 쥐가 먹어 줄어 들어도 문중에서 인정해 주지 않아 그져 고리대금 업자처럼 종중 재산을 늘리고 수많은 종원들이 동원되어 벼를 지게로 옮기는 수고를 해서 지금 종중 재산으로 키워졌습니다.
※ 저의 숙부 휘 계열님은 1945년 4월 대학졸업(당시는 전문대)후 일본군 만주 관동군에 배속되어 만주로 기차로 일본군 만주로 가는 도중에 백부 휘 을열께서 당시 만주에서 토목회사를 하셨기에 만주 기차길을 잘 알고 계셨기에 기차에 동승하여 탈출시켜 모산으로 오셨고 1945년 8월 해방되었습니다.
※ 재량형님 증언 : 일제 강점기인 7살 때 어머니와 함께 만주에 아버지를 만나고 오면서 마포나루에서 하숙하고 있는 숙부를 찾아 갔는데 이목동 이영노(나산양반,이기채님아버지)와 복열님을 만나고 오셨다고 합니다. 이목동에서 일제 감점기에 6명의 대학생을 배출한 교육열을 보였습니다.
⑤ 태리동종중 현대사에서 위 다섯분이 문중을 이끌었지만 이분들이 존경스런 것은 비문이나 재각중수기에 본인 이름 석자를 세기지 않고 종손이름으로 했기에 종중회의록책을 읽어 보지 않으면 이들 공적을 알 수 없다는 것이며 수많은 종원들이 협조하여 6.25 이후 1954년 고양시 사리현동에 남재공 묘역에 문관(인)석이 포격에 머리 부분(약 150kg무게)이 산아래 있는 것을 재풍형님이 주도하여 지게에 지고 서로 교대하여 산위 묘역까지 올려 복원하였고(현재는 서당동 남재공 묘역으로 옮김) 장암 문씨들 재각을 매입하여 태리동까지 지게로 옮겨 영수재를 건축하신 당시 어른들의 덕분으로 지금 남재공영암종중이 존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