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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군 여행] 10일동안 24번의 주인이 바뀐 “白馬高地[백마고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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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군 여행] 10일동안 24번의 주인이 바뀐 “白馬高地[백마고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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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馬高地[백마고지]! 전적비
유랑자는 군 시절을 대한민국 최전방 열쇠부대 수색대에서 근무를 하였다. 통문 안에서 매복을 하고 낮엔 매일 사
격연습을 하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낸 군 시절의 일상이었다. 그 곳이 백마고지와 야월선 사이에 있는 낙동강이란
곳이다. 물론 지금은 십 수 년의 시간이 흐른 유랑자 인생의 뒤안길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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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군 시절 말로만 들었던 그 白馬高地[백마고지]를 보기위해 빗속을 뚫고 달려 백마고지 전적비와 기념전
시관이 있는 공원에 발길을 내 디딛는다. 당시 백마고지는 우리 5사단의 營域[영역]이긴 했었지만 관할 지역이 아
니라 올라보지 못했었던 백마고지! 여전히 비는 세차게 내리고 갈 길을 잃은 하나의 영혼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왼지 모를 가슴 또한 뜨거워지는 것은 무순 연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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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馬高地戰勝碑[백마고지전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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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에 두 여름을 보낸 곳. 오랜 시간이 흘러 반백이 되어서 한 여름에 찾아온 백마고지! 이 우중에도 불구하
고 근처 부대에서 사격 훈련 중인지, 총소리가 요란했다. 역시 최전방다운 분위기랄까. 비가 오나 눈이오나 전쟁
은 쉼이 없다는 것처럼 국토방위를 위해 열심히 훈련하는 장병들의 노고에 아낌없는 찬사와 박수를 보내며 유랑
자는 차에서 기다리지 못하고 우산을 받쳐 들고 내려 기념비를 둘러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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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전투에서 희생한 이름 모를 호국 영령들의 넋을 위로 하려는 마음일까 비는 하염없이 계속 내린다. 먼저
유랑자를 반기는 것은 백말이 咆哮[포효]하듯이 허공을 향해 힘찬 발을 내 뻗고 있었다. 연천 전곡, 대광리, 신망리
그리고 대마리, 보병 제 5사단! 열쇠 마크를 보는 순간 왼지 정겨워 지는 마음은 옛 친정을 찾은 마음이어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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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馬高地戰蹟地[백마고지 전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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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당시 군 제대를 할 때엔 연천 쪽을 바라보고 오줌도 안 싼다고 다짐했었던 생각은 까마득하게 지워져 버린
지 오래고 빛바랜 사연처럼 지금은 열쇠부대 백마고지 전적 비 앞에 이렇게 서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白馬高地
[백마고지] 전적 비는 백마고지 전투에서 희생된 호국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1990년 조성됐으며, 높이는 22.5m
에 달한다. 이 때 전적비의 높이 '22.5'는 각각의 숫자를 더하면 9가 되는데, 이는 白馬高地[백마고지] 전투에 참여
한 국군 9사단을 나타내기 위해 뜻이요 설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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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적 비 뒤로는 白馬高地[백마고지]가 보인다. 군사시설이 있어 촬영이 제한돼 눈으로만 담아야 했지만, 지금
으로부터 70여 년 전 한국전쟁 최대의 격전으로 꼽히는 '백마고지 전투'가 일어났던 곳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주변은 너무나도 평온 하면서도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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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가 좌우로 길게 정렬된 언덕 너머로 하늘을 향해 높게 솟은 전적비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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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 진이 이곳을 지키는 제5보병사단 신병교육대 조교를 했었던 그 부대다.
*5 사단은 최근에 BTS 진이 신 교대 조교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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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해발 395m의 백마고지는 군인들 사이에서는 그냥 395산이라고 통했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무명의 야산이
었지만, 6.25전쟁 이후 한국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장소가 되어 버렸다. 당시 백마고지 전투는 1952
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백마고지를 쟁탈하기 위해 국군과 중공군이 벌인 혈전으로, 세계 역사에서 유래가 없
을 만큼 치열한 포격전, 수류탄전, 피비린내 나는 백병전 등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처절하게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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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백마고지에 발사된 포탄의 숫자만 해도 국군 25여만 발, 중공군 5만발 등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화력이 쏟아
졌다. 白馬高地[백마고지]란 이름 역시 이 기간 중 극심한 공중 폭격과 포격으로 민둥산이 되어버린 이름도 없었
던 산 능선이 온통 하얗게 변해 미국의 종군기자가 헬기에서 찍은 사진이 마치 흰 말이 누워있는 형상의 모습으로
변해 있어 白馬高地[백마고지]라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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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馬高地慰靈碑[백마고지 위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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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통신 역시 1952년 10월 9일 자 기사를 통해 백마고지 전투를 '屍山血河[시산혈하: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
물처럼 흐른다.]라고 표현하며 "한국군과 중공군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전략고지 백마고지를 탈취하기 위해 피
비린내 나는 전투를 전개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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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0월 6일부터 10일 동안 人海戰術[인해전술]로 덤벼드는 중공군과 24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면서 피
터지게 싸운 결과 국군 장병들은 고지를 어렵게 재탈환하며 대승으로 끝났다. 당시 한국군과 미군은 3.422여 명,
중공군은 1만4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백마고지 전투는 치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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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자유와 평화통일을 위하여 이 격전지에서 장렬히 산화하신 용사들의 숭고한 애국 충정은 명예롭고 백마
혼은 무궁 하리라. 장하다 님이시여 고히 잠드소서 이 고지에서 희생된 국군 844위의 영혼을 진혼키 위해 5사단
전 장병과 대마리 주민 백마고지 참전 전우회 회원의 뜻을모아 세우다.
서기 1985년 6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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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의 얼 [모윤숙]
풀섭에 누워 그날을 본다.
하늘이 울리고 땅이 갈라지듯 적들이 몰려오는 저 산과 강에서
우리는 끓는 피로 용솟음치며 넘어지려는 조국을 감쌌다.
이 한 몸 초개같이 바치려 숨찬 목소리로 다-같이
강물을 헤치고 산을 부수며 달려오는 적들을 막았노라
수많은 적을 따라 소탕하고 조국의 얼로 내 달려
떡갈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원수의 고함을 눌러 버렸나니
쓰러지며 죽으면서도 다시 일어나 숨결을 돌리고
숨지려는 조국을 살리었노라
나의 조국 영원한 땅이여 만세를 가도록 그 얼은 살았느니
지금도 그때처럼 귀를 기울이고 저 몰려오는 적을 막고 있노라
푸르러 푸르러 영원한 젊음 우리는 그 품에 안겨 안식 하리라
어머니 조국에 이 혼을 맡기며 후회 없이 더 강하게
앞으로 앞으로 달려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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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가 오늘날 많은 인명이 희생된 참혹한 전투로 白馬高地[백마고지]라는 이름으로 오늘날 까지 역사에 남게
되었으며 당시 백마고지 사수를 위해 용감하게 싸워 승리한 9사단을 “백마사단”이라 불렀으며 오늘날 당시 산화
한 9사단의 장병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 백마고지 전적비가 건립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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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에 나온 북측의 이야기 이지만 당시 북한 김일성 은 일명 ‘김일성 고지’라 부르는 고암산[780m]에서 백마고지
전투 패배 소식을 접하고는 사흘간 식음을 전폐했다고 한다.[사흘간 울었다는 설도 있다]. 백마고지 전투로 철원
평야를 되찾지 못했다는 상실감이 그만큼 컸다는 후일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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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비는 전투에서 산화한 영령들을 두 손모아 추모하는 형상으로 만들었다. 백마고지전적지에는 전적비, 전승
비, 위령비 등 여러 비석이 서있어 그 의미가 무척 남다르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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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상황을 전시하고 있는 기념관: 백마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사건은 슈류탄을 들고 적 기관총 진지에 돌입
해 자폭하며 파괴한 '육탄3용사'가 있었기 때문에 승리를 하였다고 한다. 이들의 희생 덕분에 백마고지를 다시 탈
환할수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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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자기들이 승리한 전투라고 강조했었던 중공도 백마고지 전투만큼은 철저히 패배한 것을 인정할 정도로 국
군이 힘들고 처절하게 싸워서 얻어낸 고지였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백마고지가 왜 이렇게 양쪽 다 사활을 걸고 얻
으려 했는지는 군사 지리적으로 중요도가 매우 높은 고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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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馬高地[백마고지:395m],또는 화살머리고지는 모두 철원읍, 철원평야 중부의 북서쪽에 위치해 철원평야를 감제
한다. 두 고지의 오른쪽으로는 서울과 원산을 연결하는 3번국도[경원선 및 추가령구조곡]이 남북으로 달리고 있
고 두 고지의 바로 아래에는 철원읍에서 안협[북한 철원군 철원읍]을 거쳐 토산 시변 리로 가는 도로인 6번국도[현
463번 지방도]가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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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10.5 백마고지 전투를 앞두고 "김종오" 장군 훈시
"전투에 임하는 장병들에게"
장병 여러분!
본관은 사단장 김종오 소장이다.
상승의 사단, 무적의 사단, 제9사단의 지휘를 맡고 있는데 대해 본관은 자랑과 긍지를 느낀다.
불굴의 감투정신, 타오르는 애국심을 누가 끄려한단 말인가!
이번 전투의 승패는 오로지 강철같은 의지력과 인내심의 결과 여하에 달려 있다.
이 일전은 또한 우리 한국군의 명예와 전투능력에 대한 평가가 달려 있다.
이제 우리는 승리의 순간만 기다리고 있을뿐 여기서 뭘 두려워 하랴!
수양제의 백만대군을 살수에 장사지낸 을지문덕, 당 태종의 삼십만 대군을 섬멸하여 조국을 지킨 연개소문 장군
이 구천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누가 중공의 호적을 두려워하랴.
나를 비롯하여 사단의 모든 전우들이여,
여기에 우리의 뼈를 묻자!
그리하여 우리 9사단의 빛나는 명예를 지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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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馬高地戰蹟碑[백마고지 전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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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바로 위로는 안협에서 평강으로 가는 좁은 계곡길[구룡강을 따라 형성]이 자리하고 있다. 즉 이 두 고지를
먹느냐 뺏기냐는 고지 주변을 지나는 여러 통로들을 감제하고 지키느냐의 여부와 직결되기 때문에 중요도가 매
우 높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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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백마고지 전투에서 열흘 동안 고지의 주인이 무려 24번이나 바뀌었을 정도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결국
국군은 중공군의 공세를 힘들게 물리치고 최종적으로 고지를 차지해 대한민국 영토로 확정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 군이 백마고지와 화살머리고지를 사수하게 됨으로서 얻는 이익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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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 國家有功者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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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원평야 중부를 안전히 방어할 수 있다.
*2. 철원-김화 간 동서 통로를 안전히 이용하고 지킬 수 있다
*3. 토산[시변리]-안협-철원 간 동서 통로를 북한이 이용하지 못하게 차단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북한이 평양원산
선 이남에서 황해도와 강원도 간 동서 연결을 하기가 많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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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안협-평강 간 통로를 북한이 방어하고 유지하지만 전선에 가깝고 두 고지에서 움직임을 감시하므로 북한이 이
통로를 군사적으로 이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5. 또한 철원평야는 3번국도 옛길과 경원선이 지나는 병참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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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0월 6일부터 열흘 동안 24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면서 한국군과 미군은 약 3.500여 명, 중공군은 1
만4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백마고지 전투는 치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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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당시 서울 면적[268㎢]의 두 배가 훨씬 넘는 약 650㎢에 달하는 거대한 옥토가 있다. 905년 궁예가 大東方
國[대동방국]을 내세우며 도읍지로 삼은 곳. ‘한반도의 배꼽’이라는 표현도 쓴다. 비무장지대에서 나오는 철원 오
대 쌀은 씨알 굵고 찰기가 좋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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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결과 적으로 피로 지킨 낸 기름진 땅인 것이다. 또 군사 적으로는 백마고지를 빼앗기게 되면 철원평야 중부
전체가 북한에게 다 감제 당하게 되어 방어가 불가능 하게 된다. 즉 고지를 하나 먹느냐 뺏기냐의 문제는 고지 딱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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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유해 발굴 감식 단에 따르면, 백마고지에서는 총 67구가 발굴돼 고 편 귀만 하사 등 4명의 신원이 확인되
어 다행이도. 70년 지나서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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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가 감제하는 해당 반경의 영토를 방어하고 유지하느냐 그렇지 않고 방어가 불가능해 버리고 수km~수십km
나 뒤로 밀려나는 것을 좌우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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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고 하니 백마고지를 빼앗겼다면 우리는 백마고지 딱 하나만 상실하는 게 아닌 철원평야 중부를 다 포기하고
고대산-금학 산까지 밀려나야 했는데 무려 10km를 남쪽으로 후퇴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백마고지를 사수함으
로서 철원평야 중부 전체가 우리 영토가 되고 철원과 김화 간 동서 연결이 원활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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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지 언덕 끝에 백마고지를 바라볼수 있는 곳에 세운 常勝閣[상승각]평화의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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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는 원래 해발 395m 높이의 야산이라 395고지로 불렸는데 한국전쟁 도중 고지 정상의 모양이 마치 하얀
말[백마]이 누워있는 것처럼 보여 붙은 별명이자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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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황해도와 강원도 간 통로인 토산-안협-철원 축선을 차단하여 북한이 강원도에서 평양으로 가기가 전쟁 이
전에 비해 훨씬 어려워졌다. 북한은 백마고지 바로 위 효성 산을 가져 안협-평강 통로를 방어할 수 있으나 화살머
리고지와 백마고지에 의해 바로 움직임이 감시되므로 군사적으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점. 그나마 고암산과 평강
고원을 사수하여 신계-지하리-이천-평강 축을 온전히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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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참으로 가슴 떨리고 다리가 저려오는 참혹한 참상을 전후 세대인 이 유랑자가 어찌 알겠는가. 마는 그럼에
도 불구하고 유랑자는 전적 비 앞에서 묵념하며 전투 ‘위령 비’에 이어 다시 한 번 호국영령을 위로하고 한민족의
평화를 기원하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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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지상전의 꽃이라 하는 백마고지 전투의 모습을 그린 박용수, 이덕근, 선우재덕이 출현했었던 드라마 2부작
86.06.24. ~ 06.25[완결]KBS1 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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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전쟁의 참상을 되풀이 하지 않으려면 남과 북이 사이좋게 지내야 하지만 한 때 한반도 데탕트의 기운
이 한반도를 지배하는가 싶더니 다시 긴장이 찾아오고 적대감이 고조되는 현실에 대한 답답함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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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비 때문이기도 하고 더는 전진 할 수 없어 백마고지 화살머리 까지는 오르지 못했지만 그러나 6·25 전쟁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장소로, 백마고지 전투를 소개하는 전적비와 기념 전시관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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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잃고 사흘간 울었다는 그곳, 백마고지가 눈앞에 보인다. 그리고 북 쪽으로 펼처지는 철원평야가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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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6ㆍ25 전사자 13만 3.192명 중 약 90%가 이름 모를 산야에 묻혀 있다. 하루라도 빨리 유가족의 품으로 모
실 수 있도록 국군의 사업 관계자들은 열심히 유해 발굴 작업을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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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白馬高地[백마고지] 전망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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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은 2000년부터 시작해 매년 10만여 명의 국군장병들이 6·25전쟁 주요격전지에서 구
슬땀을 흘려 지금까지 국군전사자 1만1394명의 유해를 발굴했다. 이 중 248명의 호국영웅 신원을 확인해 가족
품으로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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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馬高地[백마고지] 전적 비 찾아가기
*주소: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산명리 18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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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전망대 찾아가기(사전 허가 받아야 함)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산명리 16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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